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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하나님 ‘엘로이’
창세기 16:7-16 2021/6/20 성령강림 후 제4주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16: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6: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주인공은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
아내(사라)의 여종(하갈)으로부터 얻은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꼭 살펴보아야할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후반부터 시작해서 25장 중반까지, 꽤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인생이 평탄치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고향, 어디입니까?
갈대아인이 사는 땅, 바벨론의 ‘우르’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벨론 남동쪽 유브라데 강 하부지역입니다.
현재 이라크 남부에 있는 ‘석수장의 도시’ 텔엘무카야로 추정이 됩니다.
고향 우르에서 이복 누이동생인 사라를 아내로 맞이한 아브라함은
그의 형제 하란의 죽음을 뒤로 하고, 아버지 데라를 따라 이주하게 되는데,
죽은 형제와 이름이 동일한 도시 ‘하란’에 정착하게 됩니다.
‘우르’와 ‘하란’
'우르'는 수메르에 있는 고대 도시 국가였고, '하란'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대 상업도시였습니다.
두 지역 모두 달신(Sin, Nanna)을 주신으로 섬겼던 고대 도시로,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였던 그만큼 살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란에서 또 다른 불행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끌었던,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게 됩니다.
창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 때 아버지를 잃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입니까?
여호와입니다.
그 여호와로부터 아브라함은 명령과 함께,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첫째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새)12:1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그러면 둘째, 이런 복을 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12: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 어떻게 했을까요?
12: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그런데, 그 지시한 땅에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축복이 아니라 아주 극심한 기근이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주 극심한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하는 수 없이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물이 넉넉한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그곳 사람들과 바로를 속여,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소개하지요. 더부살이로 빌어먹어야 했기에 한 선택이었지만 비굴했습니다.
인생 ‘세옹지마’입니다.
기근이 사라져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아브라함은 사라 덕으로 한밑천을 단단히 챙깁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참으로 구차하면서도 비루한 복을 얻게 됩니다.
다시 약속의 땅으로 아브라함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초지를 두고 조카 롯과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정작 자신은 거친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거친 땅에, 누가 찾아오셨는지 아십니까?
여호와가 다시 찾아오십니다.
조카 롯이 떠난 그 빈자리를 하나님이 채우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앞서 하신 약속을 반복하시는데,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십니다.
(새)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13:15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13: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13:17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이 약속,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대로 됩니다.
문제는 이 땅을 상속할 만할 자식이 아브라함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쪽 축복이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따지듯이 항변합니다.
(새)15: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이처럼 자식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마음은 항상 어두웠습니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장막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는 밤하늘을 보이시면서 자손에 대한 세 번째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새)15: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15: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반복된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녀를 기대할 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늙은 아내 사라가 현실적인 제안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16장 1-2절입니다.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풍습에 따라,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따릅니다.
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Nuzi) 문헌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소실로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했고, 아이를 낳은 여종은 유모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이 풍습에 아브라함이 동의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선택과 행동이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들 다하는 풍습이었고, 그리고 법이 보증하는 합법적인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합법적인 일이 또 다른 분란을 야기하게 됩니다.
몸종 하갈이 임신하자, 자기의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
그러자 상처 입은 사라가 하갈에 대해 불평을 터뜨립니다.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까요?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브라함은 당시 관습법에 따라, 몸종 하갈에 대한 처분권을 사라에게 모두 맡깁니다.
(새)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
학대 받는 하갈
그 연약한 몸종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자신과 아기의 장래를 위해 도망을 치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도망을 칩니다.
이런 하갈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실까요?
종교적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오직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갈이 술(수르)로 가는 길 가에 있던 샘물에 당도했을 때입니다.
그 때 누가 찾아왔는지 아십니까?
주님(여호와)의 천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만 여호와가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그 여호와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건냅니다.
(새)16:7 주님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수르로 가는 길 옆에 있다.
16:8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아주 단순한 문답이었습니다.
하지만 하갈은 ‘어디서 와서?'라는 질문에는 답하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 길이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갈도 갈 바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한 것처럼 하갈에게도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줍니다.
어디입니까?
(새)16:9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사실 말도 안 되는 해답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라니’
이처럼 난감한 해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곳으로 다시 가야하는지
하갈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주님의 천사가 알려줍니다.
그것이 10절에 나옵니다.
16:10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어디서 많이 본 말씀이지요.
이 약속, 누구에게 했었던 약속입니까?
창세기 12장과 13장 그리고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으로,
그 약속과 동일한 약속을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도 주십니다.
대반전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 무엇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스마엘’ 그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 밑에 있는 각주 2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들으심’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려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경계가 없이 ‘모든 이들에게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특히 고통 받는 이들, 그들의 신음소리까지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따라서 16장 12절에 대한 논쟁을 우리가 종식해야합니다.
16:12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떻습니까?
축복의 말씀입니까, 저주의 예언으로 여겨지십니까?
분명한 것은 문맥상, 저주의 예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이름을 주신, 그 자비하신 하나님이 앞과 뒤가 다르게 말씀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의 주장처럼 ‘테러리스트나 전쟁광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자기 생명에 위협을 가하거나, 위축시키려 하는 온갖 힘들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전사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축복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듣자마자, 하갈은 어마어마한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때 하갈의 입술로부터 터져 나온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엘 로이’입니다.
16:13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로이) 하나님(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이 뿐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장소, 그 샘의 이름을 이렇게 바꾸어 부릅니다.
16: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브엘라해로이’
성경 밑에 나오는 각주 1번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차별 없이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그 아픔을 두루 살피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살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엘 로이’
나의 고통을 세심하게 ‘살펴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브엘라해로이’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장정교회)이 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있어야할 자리
그 섬김의 자리로 온전히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