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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十二 / 卿宰 / 徐居正 碑銘[魚世謙]
士有立德、立功、立言之懿, 兼之者雖鮮, 要皆爲不朽之盛事。 況如達城徐公言爲文範, 功在官常, 德孚人望者哉? 其爲不朽, 孰加焉?
公諱居正, 字剛中, 號四佳亭, 大丘府人也。 曾祖諱益進, 判典客寺事、贈戶曹參判; 祖諱義, 戶曹典書、贈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考諱彌性, 安州牧使、贈純忠補祚功臣・輔國崇祿大夫・達川府院君。 妣安東權氏, 陽村文忠公近之女, 贈貞敬夫人。 兩族碩茂, 世濟其美。
以永樂庚子十二月戊申生公。
세종 | 2 | 1420 | 경자 | 永樂 | 18 | 1 | 12월, 태어나다. |
公英敏夙成, 年纔六歲, 始知讀書屬句, 一族歎其妙, 謂之神童。 幼丁內憂。 至
正統戊午,
세종 | 20 | 1438 | 무오 | 正統 | 3 | 19 |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다. |
連中進士、生員試。 及校藝學宮, 每居前列, 時謂陽村之文其必傳之外甥乎。
甲子,
세종 | 26 | 1444 | 갑자 | 正統 | 9 | 25 | 문과에 합격하여, 司宰監直長을 거쳐 集賢殿博士 經筵司經이 되다. |
中文科第三名, 初授司宰直長, 選入集賢殿, 爲博士、經筵司經。
丁卯,
세종 | 29 | 1447 | 정묘 | 正統 | 12 | 28 | 副修撰 知製敎 兼世子右正字가 되다. |
陞宣務、副修撰、知製敎、兼世子右正字。
景泰庚午秋,
세종 | 32 | 1450 | 경오 | 景泰 | 1 | 31 | 가을, 중국사신 倪謙ㆍ司馬恂을 맞아 述作하여 稱賞 받다. |
翰林學士倪謙、給事中司馬恂奉命來使, 見公述作, 稱賞不置。
辛未,
문종 | 1 | 1451 | 신미 | 景泰 | 2 | 32 | 사가독서하다. ○ 부교리가 되다. |
再轉爲奉訓、副校理。 壬申冬,
문종 | 2 | 1452 | 임신 | 景泰 | 3 | 33 | 겨울, 謝恩使 首陽大君의 從事官으로 중국에 가던 도중, 모친상을 당하여 되돌아오다. |
丁外艱。 時世祖以首陽大君如京師, 謝賜冠服、誥命, 其侍從之士皆極一時之選, 公亦爲從事。 旣渡鴨綠江, 宿婆娑堡, 夕諭書至, 世祖秘其書, 勿令知之, 以待明朝。 至夜, 公有怪夢, 卽驚起, 不覺流涕。 同宿者問其故, 公曰: “予夢月怪。 夫月, 母象也。 吾有老母在堂, 夢徵不祥, 是以悲耳。” 有以公夢告者, 世祖歎曰: “某之孝誠, 足以動天耳。” 仍召公, 語曰: “今有旨, 君母病亟, 君可還矣。” 公號哭就路, 還渡鴨綠江, 始知訃音。 世祖卽位, 每稱鴨江之夢曰: “吾之取子, 非獨才爾。”
服闋,
단종 | 2 | 1454 | 갑술 | 景泰 | 5 | 35 | 상을 마치고 集賢殿應敎 經筵檢討官이 되다. |
授集賢殿應敎、知製敎、經筵檢討官。
乙亥六月,
세조 | 1 | 1455 | 을해 | 景泰 | 6 | 36 | 6월, 세조 즉위 후 당시 辭命의 대부분을 찬술하다. |
世祖受禪, 一時辭命多出其手。
丙子六月,
세조 | 2 | 1456 | 병자 | 景泰 | 7 | 37 | 6월, 集賢殿이 폐지되어 成均司藝 藝文應敎가 되다. ○ 世子左弼善 兼左中護藝文應敎가 되다. |
革集賢殿, 移成均司藝、藝文應敎。 時德宗在東宮, 世祖妙選官屬, 以公爲世子左弼善、兼左中護、藝文應敎、知製敎。
天順丁丑春,
세조 | 3 | 1457 | 정축 | 天順 | 1 | 38 | 봄, 重試에 합격하고 司諫院右司諫이 되다. ○ 여름, 迎接都監을 겸하여 영종의 복위 詔書를 반포하러 온 중국사신 陳鑑ㆍ高閏을 맞아 酬答하다. |
擢重試, 超授司諫院右司諫大夫、知製敎, 遇事輒諫, 辭甚切直, 上或不能堪。 時宰有侍坐者賀曰: “君明, 臣直。” 上意乃解。 夏, 翰林侍講陳鑑、太常博士高閏奉使來, 竝才高, 喜著述。 以公兼迎接都監使, 以備酬答。
戊寅冬,
세조 | 4 | 1458 | 무인 | 天順 | 2 | 39 | 겨울, 文臣庭試에서 優等하여 공조참의가 되었다가 곧 예조참의가 되다. |
會文臣試才。 以優等陞拜通政、工曹參議, 俄遷禮曹。
세조 | 5 | 1459 | 기묘 | 天順 | 3 | 40 | 왕명으로 鄭麟趾ㆍ申叔舟ㆍ丘從直 등과 함께 四書五經의 口訣을 정하다. |
庚辰春,
세조 | 6 | 1460 | 경진 | 天順 | 4 | 41 | 봄, 이조참의가 되다. ○ 여름, 謝恩使(副使)로 중국에 가서 文名을 얻다. 〈北征錄〉을 짓다. ○ 겨울, 형조참판이 되다. |
移吏曹。 夏, 以謝恩使赴京, 中朝文士見公行藁, 莫不驚歎。 冬, 進拜嘉善、刑曹參判。 時有一巨猾, 假造文印, 盜占公私賤。 前後官吏不能決, 自公視事, 其奸立現, 巨猾卽逃。
癸未秋,
세조 | 8 | 1462 | 임오 | 天順 | 6 | 43 | 2월, 申叔舟ㆍ崔恒ㆍ李承召 등과 함께 왕이 親製한 「兵將說」의 選註를 내다. |
세조 | 9 | 1463 | 계미 | 天順 | 7 | 44 | 4월, 왕명으로 太祖ㆍ太宗ㆍ世宗ㆍ文宗의 御製詩文을 수집하다. ○ 가을, 대사헌이 되다. |
拜司憲府大司憲, 中外爲之肅然。
甲申秋,
세조 | 10 | 1464 | 갑신 | 天順 | 8 | 45 | 4월, 일로서 좌천되다. ○ 中樞院副使가 되다. ○ 가을, 京畿道觀察黜陟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다. |
授京畿都觀察黜陟使、兼兵馬節度使、開城府留守, 以病辭, 改中樞院副使。
成化乙酉,
세조 | 11 | 1465 | 을유 | 成化 | 1 | 46 | 藝文館提學 中樞府同知事가 되다. |
歷藝文館提學、中樞府同知事。
丙戌夏,
세조 | 12 | 1466 | 병술 | 成化 | 2 | 47 | 3월, 文科 讀券官이 되다. ○ 4월, 왕명으로 「馬醫書」를 撰次하다. ○ 拔英試에 합격하다. ○ 7월, 예조참판이 되다. ○ 8월, 登俊試에 합격하다. 「經國大典」 수찬에 참여하다. |
中拔英試。 秋, 爲禮曹參判。 又中登俊試第三名, 上奇其對, 特超加資憲, 寵侍甚隆。
丁亥春,
세조 | 13 | 1467 | 정해 | 成化 | 3 | 48 | 2월, 형조판서 겸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다. ○ 9월, 成均館知事 藝文館大提學을 겸하다. 이후로 常兼하여 國家典策ㆍ詞命 일체를 주관하다. ○ 12월, 공조판서를 거쳐 中樞府知事가 되다. ○ 왕명으로 「五行摠括」을 編하고 序를 짓다. |
拜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秋, 兼成均館知事、藝文館大提學, 蓋典文衡也。 自是常兼館職, 國家典冊詞命, 一皆主之。 冬, 移工曹, 俄遷中樞府知事。
戊子秋,
세조 | 14 | 1468 | 무자 | 成化 | 4 | 49 | 7월, 아들 徐福慶이 태어나다. ○ 가을, 世子左副賓客을 겸하다. ○ 겨울, 漢城府尹 同知經筵事가 되다. |
사가시집 제14권 / 시류(詩類) / 복경(福慶)을 낳고 기뻐서 쓰다. 무자년 7월 19일이다. 사십 년의 세월하고도 구 년이란 세월을 / 四十光陰又九霜 세상일에 무심하여 마른 창자 외로웠는데 / 無心世事兀枯腸 지난해에 장원한 것은 참으로 요행이요 / 去年登甲眞僥倖 오늘날에 아들 얻음은 절로 길상이로다 / 今日添丁自吉祥 두보 노인의 서경시가 정말 좋기도 해라 / 杜老徐卿詩正好 공구와 석씨가 응당 보내준 아이고말고 / 孔丘釋氏送應當 설산의 해과를 그 누가 기억하고 있을꼬 / 雪山海果知誰記 나는 죽은 뒤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리 / 身後吾猶有不亡 [주-D001] 지난해에 …… 요행이요 : 1466년(세조 12) 병술년에 저자가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것을 이른 말이고 보면, 여기서 지난해라고 한 것은 곧 작년이 아닌 재작년에 해당한다.[주-D002] 두보(杜甫) …… 아이고말고 : 서경시(徐卿詩)는 두보(杜甫)가 일찍이 서경(徐卿)의 두 아들을 칭찬하여 지은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를 말한 것이다. 서경이자가의 대략에 “그대는 못 보았나 서경의 두 아들 뛰어나게 잘난 것을, 길한 꿈에 감응하여 연이어 태어났다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아다 주었다니, 두 아이는 모두가 천상의 기린아일세.〔君不見徐卿二子生絶奇 感應吉夢相追隨 孔子釋氏親抱送 竝是天上麒麟兒〕”라고 하였다.[주-D003] 설산(雪山)의 해과(海果) : 설산은 사철 눈이 녹지 않는다는 서역(西域)의 산명이고, 해과는 동해(東海)의 신산(神山)에서 난다는 반도(蟠桃)를 가리킨 것으로, 원(元) 나라 때 문인 심린(沈麟)이 일찍이 남의 득남을 축하한 운경낭중방운운(雲卿郞中方云云) 시에 “죽죽 뻗은 난초 싹은 뿌리가 애당초 다르거니와, 늦게 나오는 바다 과일은 열매가 절로 보배롭지. 나는 늙은 몸으로 기꺼이 탕병객이 되었는데, 한 잔 술의 광채가 죽정의 봄을 가져오누나.〔蘭芽秀茁根初異 海果生遲實自珍 我老喜爲湯餠客 一杯光動竹亭春〕”라는 시구는 볼 수 있으나, 그 밖의 설산 해과에 대한 설은 자세하지 않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5 |
兼世子左副賓客。 冬, 轉漢城府尹、同知經筵事。
己丑,
예종 | 1 | 1469 | 기축 | 成化 | 5 | 50 | 8월, 호조판서가 되다. ○ 「經國大典」을 완성하고 序를 짓다. ○ 가을, 우참판이 되다. |
加正憲, 拜戶曹判書。 是年, 《經國大典》成, 賜綵段表裏。 秋, 轉議政府右參贊。
辛卯,
성종 | 2 | 1471 | 신묘 | 成化 | 7 | 52 | 3월, 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達城君에 봉해지다. ○ 가을, 판의금부사를 겸하다. ○ 겨울,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의 文柄과 詞命을 맡을 사람이 없다는 大臣들의 반대로 還職되다. |
今上卽位, 加純誠明亮佐理功臣之號, 封達城君, 階崇政, 仍賜鐵券、土田、藏獲。 秋, 兼判義禁府事。 冬, 出拜平安道觀察使。 時大臣等啓曰: “觀察之任, 人得爲之, 至如朝廷文柄詞命重事, 非某莫可爲者, 乞留還職。” 上從之。 改封達城君。
壬辰冬,
성종 | 3 | 1472 | 임진 | 成化 | 8 | 53 | 12월, 다시 대사헌이 되다. |
復拜大司憲。
甲午春,
성종 | 5 | 1474 | 갑오 | 成化 | 10 | 55 | 가을, 다시 우참찬이 되다. |
以病辭。 御書不允曰: “如卿欲避此任, 誰復可者?” 再三固辭, 還封君。 秋, 復拜議政府右參贊。
丙申春,
성종 | 6 | 1475 | 을미 | 成化 | 11 | 56 | 좌참찬이 되다. ○ 「東人詩話」를 저술ㆍ간행하다. |
성종 | 7 | 1476 | 병신 | 成化 | 12 | 57 | 봄, 遠接使 兼館伴이 되어 중국사신 祁順ㆍ張瑾을 맞아 酬唱하다. ○ 「皇華集」의 序를 짓다. ○ 가을, 우찬성이 되다. ○ 왕명으로 「三國史節要」(14권)를 찬진하고 序를 짓다. |
戶部郞中祈順、行人司左司副張瑾來, 使公爲遠接使、兼館伴。 每與酬唱, 兩使輒歎曰: “眞奇才也。 如吾輩, 終夜構思, 僅得一二篇。 公於立談之間, 落筆皆成珠玉, 況筆法大有吳興遺妙乎? 如公者, 可橫行天下矣。” 秋, 陞右贊成, 編《三國節要》以進。
丁酉秋,
성종 | 8 | 1477 | 정유 | 成化 | 13 | 58 | 「滑稽傳」을 짓다. ○ 겨울, 都摠管을 겸하다. |
還封君。 冬, 兼都摠管。
戊戌夏,
성종 | 9 | 1478 | 무술 | 成化 | 14 | 59 | 여름,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다. ○ 「東文選」(130권)을 찬진하고 序를 짓다. ○ 漢城府判尹이 되다. ○ 9월, 中宮胎室證考使로 경상도 예천에 내려가다. 이어 軍容巡察使가 되어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다. 당시 병조에서 「銃筒鑄成放炮式」을 간행하여 沿海 각 고을에 반포하려던 일을 중단시키다. ○ 「歷代年表」를 찬진하고 序를 짓다. |
兼弘文館大提學。 上幸成均館, 行養老禮, 語侍講官曰: “古昔治天下之大經大法, 蔡沈《書》序盡之。 卿等宜更演繹。” 公進對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聖狂之機, 在於此心之存亡。 是以蔡沈之言曰: ‘二帝三王, 存此心者也; 夏桀、商紂, 亡此心者也。’ 願殿下終始一心耳。” 進新撰《東文選》一百三十卷。 吾東方文籍散逸, 間有撰集者, 皆失於疎略。 是編裒集諸家, 包羅廣博, 衆體皆備, 而採擇之精非前人之所及也。 俄授漢城府判尹, 以胎室證考使出使忠淸、慶尙兩道, 仍命爲軍容巡察使。 時兵曹請刊銃筒鑄成放炮式, 令巡察使頒給沿海, 各官常行肄習。 公以爲不可, 還啓曰: “火藥出於倭地, 我境與彼密邇。 況三浦之倭與國人雜處, 國家雖令秘密, 恐或奸細之民潛通漏洩, 流入彼土, 非國家之深計也。” 上曰: “當初不復深惟其弊, 卿慮之甚當, 予實嘉之。”
己亥秋,
성종 | 10 | 1479 | 기해 | 成化 | 15 | 60 | 가을, 이조판서가 되다. |
拜吏曹判書, 屢辭不允。
至庚子秋,
~ | ~ | ~ | ~ | ~ | ~ | ~ | 왕명으로 「鄕藥集成方」을 언해하다. |
성종 | 11 | 1480 | 경자 | 成化 | 16 | 61 | 「吳子」를 註解하다. |
還封君。 嘗註《吳子》, 又撰《歷代年表》以進。 上嘗思懷簡王侍講之臣, 從容謂公曰: “卿久在經幄, 於先王亦有甘盤之舊, 予不忘也。” 辛丑夏,
성종 | 12 | 1481 | 신축 | 成化 | 17 | 62 | 4월, 盧思愼 등과 함께 「東國輿地勝覽」(50권)을 찬진하고 序를 짓다. ○ 겨울, 병조판서가 되다. |
進新撰《東國輿地勝覽》五十卷。 冬, 轉兵曹判書, 公連上箚苦辭, 皆御札不允。 公辭不已。
至壬寅,
還封君。
癸卯,
성종 | 14 | 1483 | 계묘 | 成化 | 19 | 64 | 3월, 좌찬성이 되다. ○ 왕명으로 姜希孟의 유고를 編次하여 올리다. ○ 11월, 왕명으로 自編詩藁(30권)를 올리다. ○ 12월, 〈匪躬堂記〉를 지어 올리다. 상이 이를 朝堂에 걸게 하다. |
授議政府左贊成。 嘗承命撰進《匪躬堂記》, 用規公卿大夫士甚悉, 上嘉之, 命有司揭板朝堂之壁。 上遣中使賜內饌、藥材, 仍命曰: “愛卿筆法, 爲我書《聯珠詩格》, 且跋以進。”
성종 | 15 | 1484 | 갑진 | 成化 | 20 | 65 | 6월, 왕명으로 「聯珠詩格」을 필사하여 올리다. |
昌慶新宮成, 凡殿堂亭閣、諸門, 皆命公名而記之。 上嘗遣藝文館官盡取公平生所著詩文于其第, 公倉黃只獻本藁三十帙。 上賜覽數月, 還其藁曰: “卿今未老, 藁亦必添刊行, 當有日矣。” 乙巳夏, 兼世子貳師。 秋, 以早辭職, 不允。 又上疏懇辭者再, 還封君。 初, 世祖命文局撰《東國通鑑》, 未就緖, 世廟上賓, 中廢日久。 公啓陳續撰, 至是書成, 凡五十七卷。 上賜覽, 嘉之, 賜表裏, 其後又賜御衣毛物, 傳曰: “寡人深倚卿, 卿□自愛。” 又傳曰: “卿所進《東國通鑑》甚好, 所著論百六十餘篇, 亦可有未盡論議處, 宜加著論。” 公更著五十餘首以進。 丙午, 著《筆苑雜記》, 以備史官之缺。 丁未春, 王世子入學, 以公爲博士, 講《論語》, 行師弟之禮。 翌日賜宴, 又賜御衣一襲。
弘治戊申春,
성종 | 19 | 1488 | 무신 | 弘治 | 1 | 69 | 봄, 館長이 되어 중국사신 董越ㆍ王敞을 접빈하다. ○ 12월, 병으로 卒하다. ‘文忠’의 시호를 받다. ○ 왕명으로 文集이 간행되다.(任元濬ㆍ任士洪의 序) |
翰林侍講董越、工科給事中王敞來頒詔, 謁聖于成均館。 以公爲館官之長, 兩使尊禮待之。 及游漢江, 翰林云: “曾見倪學士《遼海編》, 又見祁戶部《皇華集》, 欽慕高風久矣。 今何幸得相見也?” 至望遠亭, 兩使就公言曰: “斯文老先生, 今日勤勞, 明當相別矣。” 其所以尊慕而遲依者如此, 朝中士大夫亦莫不尊敬, 公以望其爲輔相也, 而上亦注意焉。 至十有二月, 有疾, 遂引年上疏, 乞骸骨, 上不允, 命藝文館官往賜批答。 越翌日壬子, 卒于正寢, 享年六十九。
上震悼, 減膳, 輟朝, 傳于政院曰: “某才高一代, 聲動中華, 常賻之外當致別賻, 事有乏缺, 政院具啓。” 卽命收其藁入內, 賜諡文忠公。
娶祥原郡事金如晦之女, 封貞敬夫人, 無後, 先公卒。 副室李氏, 陵直寧根之女, 生一男曰福慶, 果毅校尉副司直。 福慶娶將仕郞安有文之女, 生一男二女: 男曰得禎, 皆幼。 越己酉三月初二日庚申, 葬于廣州治之西芳桋洞兌坐艮向之原, 與夫人同兆異穴。
성종 | 20 | 1489 | 기유 | 弘治 | 2 | - | 3월, 廣州 서쪽 芳桋洞에 묻히다. |
公以陽村外孫, 早承家訓, 四登賢科, 歷事五朝。 侍經幄者四十五年, 典文衡者二十三年, 掌試取士者二十三榜。 由其門而躋上台者, 亦且十數。 歷判六曹, 再長憲府, 五入黃扉, 判京兆、按畿甸、觀兵外郡, 其揚歷之勤, 經濟之略, 有如是者。 華使之來, 宣慰遠接館伴之任, 未嘗不與。 而進退言語, 雍容諧洽, 必使王人傾輸欽服, 鮮有過事, 其禮儀之度, 辭命之善, 有如是者。 凡國家高文大冊, 皆出其手。 人或有求碑誌、記序、詩賦、雜文, 酬答如流, 波瀾汎濫, 潰而爲奇文異話, 傳誦於世。 公之遺藁總七十餘卷, 其學問文章之得於天資者有如此。 大夫人之逝也, 徵現於夢寐。 常慟伯氏先亡, 撫其二孤彭召、彭呂, 如己出, 皆敎養成立。 彭召則捷文科爲顯官, 其孝慈仁愛之本乎天性者有如此。 其待友也以信, 接物也以和, 溫良淸簡, 中心樂易, 略不以才美加人。 嘗搆別宇數間于隙地, 鑿池種蓮, 自號亭亭亭, 左右圖書湛如也。 客至, 必置酒觴詠。 其一飮一談皆不出文字間。 公之所學甚博, 自天文、地理、醫藥、卜筮、星命之術, 靡不貫通。 世祖嘗謂曰: “祿命之書, 儒者窮理之事, 卿知之乎?” 對曰: “臣粗嘗涉獵。” 上曰: “爲我作假令一書。” 於是著《五行總括》以進。 上曰: “祿命之書, 卿意若何?” 對曰: “臣以謂不足信。” 仍剖析其故甚詳。 上曰: “卿言是矣。” 時有議者云: “英陵非吉地, 當遷。” 上召問, 公對曰: “《洪範》一篇, 聖人傳道之書, 而雨、暘、燠、寒、風爲肅、睿、哲、謀、聖之應, 聖人之論至理如此耳。 若以山川方位, 配而合之, 爲子孫禍福, 則臣未知其可也。 且世之遷葬, 求獲福也, 王者更有何望哉?” 上曰: “吾復無意於遷陵也。”
嗚呼! 公之明辨自信而不流於異說, 其正如此, 眞可謂博雅多能篤道君子也。 予以無狀, 幸添丙子科, 出公門下, 得侍杖屨。 今又承乏繼公之後, 濫叨文局。 公之孤福慶持家牒, 徵文甚勤, 仿想典刑, 忍不敢辭。 銘曰:
山嶽儲精, 奎璧委照。 轇輵絪縕, 生英産妙。 手執神鋩, 爰鑿大竅。 黼藻斯煥, 于光有耀。 陽村之甥, 克承克肖。 茫茫今古, 窮搜遐眺。 馳騁亨衢, 厥鞅是掉。 旣肅憲綱, 爰提樞要。 經綸六卿, 贊襄廊廟。 聖眷載隆, 載色載笑。 未窮餘慶, 天不可料。 恨塡三泉, 光收七曜。 顯顯令緖, 千載誰紹? 不朽者存, 久而彌邵。
~ | ~ | ~ | ~ | ~ | ~ | - | 大邱 鄕賢祠(龜巖書院)에 享祀되다. |
숙종 | 31 | 1705 | 을유 | 康熙 | 44 | - | 후손 徐文裕가 문집을 중간하다. |
- | - | 1929 | 기사 | - | - | - | 방후손 徐光前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
[주-D001] 傳 : 底本에는 “傅”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2] 臣 : 底本에는 “匡”으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3] 藝 : 底本에는 “爇”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4] □ : 釜山大本에는 “亦”으로 되어 있다.[주-D005] 敞 : 底本에는 “敝”로 되어 있다.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6] 大 : 底本에는 “夫”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7] 兌 :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는 “坤”으로 되어 있다.[주-D008] 暘 : 底本에는 “賜”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咸從世稿・西川先生文集・左贊成達城君徐文忠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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