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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3년 정묘(1747) 10월 18일(을해) 맑음
23-10-18[20] 지중추부사 원경하 등이 입시하여 호남 고을을 양전한 결과 등을 보고하고, 호남의 인재를 등용하는 일, 정유년에 순절한 임박을 포장하는 일, 호남에 도과를 설행하는 일, 신이진의 상소에 대한 처분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고, 유신이 입시하여 《자치통감》을 강하였다
미시(未時)에 상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갔다. 지중추부사 원경하(元景夏)와 유신(儒臣)이 책자를 가지고 입시한 자리이다. 좌부승지 홍봉한(洪鳳漢), 시독관 오언유(吳彦儒), 검토관 이규채(李奎采), 가주서 김광위(金光緯), 기주관 정석천(丁錫天)ㆍ남운로(南雲老)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중추부사는 앞으로 나아오라.”
하니, 원경하가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의당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의 처신하는 의리가 너무 지나치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은 지극히 비통하고 괴로운 심정을 금할 수 없어 죽을죄를 범하기까지 하였으니 더 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의 일은 어떠한가? 아뢰도록 하라.”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호남에 내려갔을 때는, 다섯 고을을 다시 양전(量田)하는 것은 작년 봄에 일을 시작하였기에 측량하는 일은 모두 마쳤고 문서도 이미 수정(修正)하였으므로, 무작위로 추출하여 적간(摘奸)해 보니 모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새로 개간한 전답을 얻은 것이 600여 결이었는데, 각가지 백징(白徵)의 수량을 보충하고도 남은 새로 개간한 전답이 아직 100여 결이나 되었습니다. 신은 우리 성상께서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는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애(仁愛)를 민간에 선양(宣揚)하였고, 전주(全州)를 다시 양전하는 것은 연석에서 결정한 대로 도신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인구는 어떠한가? 호남에는 정자가 많고 화려하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차례대로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신이 내려갔을 때 호남은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고 들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소문과 크게 달랐습니다. 호남과 호서는 모두 흉년을 면치 못하였고, 경기 지역은 참혹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해일(海溢)의 재해를 입은 곳의 경우에는 신이 격포(格浦)에 가는 길에 두루 살펴보았는데, 해일이 미친 곳은 모두 백모(白茅 흰 띠)밭이 되었고, 비록 지척이라도 해일의 피해를 면한 곳은 화곡(禾穀)의 모양이 그대로였으니 참으로 괴이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해일이 아니라 바닷물에 씻긴 듯합니다. 여산(礪山)에서 광양(光陽), 순천(順天)에 이르기까지 좌우 연해(沿海)의 25개 고을에 일시에 해일이 있었다고 하면, 거리의 이수(里數)로 말하자면 거의 6, 7백 리나 되니, 이는 실로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일입니다. 흉년이 비록 근심스럽지만 그래도 재이(災異)의 근심만은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도 바닷물에 씻긴 것이라고 여겼다.”
하였다. 원경하가 아뢰기를,
“우역(牛疫)이 크게 돌아 농우(農牛)가 다 죽어 나가 내년 봄에는 경작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작은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계절의 기후가 정상에서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였다.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듣건대, 해일을 당한 고을 백성의 신역(身役)을 특별히 감면해 주라고 명하셨다고 하니, 재결(災結)을 도신이 잘 분배해서 나누어 준다면 백성들이 안도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근심스러운 것은 재이입니다. 신이 이번에 가서 살펴보니, 격포는 과연 삼남(三南) 수로의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으니 조정에서 결코 등한시하여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일찍이 격포를 말한 적이 있는데, 과연 어떠하였는가?”
하자,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아뢰겠습니다. 신은 부안(扶安)에서 자고 20여 리를 가서 변산(邊山)을 끼고 바닷가를 따라 30여 리를 갔고, 변산 솔밭 안으로 들어가 또다시 20여 리를 가서 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변산 한 산기슭이 바다를 막고 항구를 이루었는데 봉수대(烽燧臺)에 올라 바라보니, 가없는 대양(大洋)이 펼쳐져 있는데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멀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오나라와 월나라가 멀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도신으로 하직 인사를 할 때 행궁(行宮)을 보수하겠다는 뜻으로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행궁의 제도는 과연 어떠한가?”
하자, 원경하가 아뢰기를,
“좌우로 방이 있으니 제도는 북한산성의 행궁과 같습니다. 수호(守護)하는 사람은 없고 두 승려만이 익랑(翼廊)에서 수직(守直)합니다. 포항(浦港)에 감사의 대변선(待變船)이라고 명명한 전선(戰船)을 매어 두었는데, 몸체가 커서 움직이기 어려워 조수가 차야 비로소 떠오릅니다. 혹 사변(事變)이라도 생기면 적을 방어하는 데는 도리어 병선(兵船)이나 방선(防船)만도 못하고, 늘 항구에 매여 있으니 쓸모없는 물건과 같습니다. 수상(水上) 습조(習操) 때 4개 진(鎭)의 전선이 수영(水營)으로 가면서 칠산(七山) 해로(海路)의 험지를 지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없는 해가 없습니다. 올가을 수상 습조 때 고군산(古群山)의 전선도 칠산에서 침몰하여 물에 빠져 죽은 수졸(水卒)이 처음에는 3, 4십 명이라고 들었는데, 그 뒤에 자세히 들으니 20여 인이었습니다. 검모포(黔毛浦)의 전선도 침몰하였는데, 사람 목숨은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지만 싣고 있던 병기는 대부분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검영(檢營)의 곡식을 격포(格浦)에 저치(儲置)해 둔 것이 100여 섬에 불과하니, 당초 곡식을 저치해 둔 것은 심모원려에서 나온 조치인데 지금은 모두 축이 나서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신은 경진년(1700, 숙종26)의 옛 제도를 복구하여 매년 수상 습조를 감사가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격포를 감영에 소속시킨다면 한 도(道) 안에 세 명의 수군 대장이 있게 될 터인데, 구애되는 바가 없겠는가?”
하자, 원경하가 아뢰기를,
“감사는 수륙(水陸)의 대장인데 어찌 구애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당초 검영을 설치했을 때도 감사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격포의 형편을 알고자 해서 이처럼 하문한 것이다.”
하자, 원경하가 아뢰기를,
“격포의 전선(戰船)으로 말하더라도 몸체가 커서 움직이기 어렵고 조금이라도 풍랑이 있으면 감히 배를 출발시키지도 못하니, 위급한 상황에 쓰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장신(將臣) 장붕익(張鵬翼)이 전선의 제도를 그려 올렸는데 그 상층이 괴이하였으니, 풍랑을 만나면 모두 그 장수와 함께 물에 잠길 염려가 있었다.”
하자, 원경하가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신년(1728, 영조4)에 ‘변산(邊山)의 적도(賊徒)’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경이 참으로 두루 살펴보니 또한 과연 깊숙하였는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비록 보기에 편리하지는 않았지만 깊숙하여 알기 어려운 곳은 없었으니, 적도가 숨을 만한 곳은 아닙니다. 무신년의 적도가 평교(平橋)에 주둔하였는데 변산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렇게 운운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신(筵臣)이 격포가 선경(仙境)과 같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이는 이종적(李宗迪)이 아뢴 말인데, 선경과 같다는 말은 비록 과장된 표현입니다만 빼어난 풍경은 그림 속에 있는 듯합니다. 변산의 소나무는 다른 산의 소나무와 전혀 달라서 화살처럼 곧고 울퉁불퉁하거나 구불구불한 것이 없으니 참으로 기이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해송(海松)은 모두 곧다고 하는데, 이번에 옛 궁궐의 소나무를 보니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것이 중일 습사를 행하는 곳에 있는 소나무의 곧음만 못하였다. 자전께서 머무시는 곳 근처의 소나무도 모두 구부러졌으니, 해송의 종류라도 또한 곡직(曲直)의 차이가 있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소나무의 곡직은 해송이라서가 아니라 각기 종류에 달려 있습니다. 애석한 점은 변산의 소나무는 선재(船材)로 삼기 위해 해마다 벌목하기에 기를 수가 없다는 것이니, 주관해서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중에 큰 것은 거의 아름드리나무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아름드리나 되는 재목은 없고 행각(行閣) 기둥과 같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안면도(安眠島)의 나무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안면도의 나무가 큽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곁가지에 불과하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검모포(黔毛浦)와 격포 2개 진(鎭)에서 변산을 주관하는데 호령하는 이가 없어서 몰래 베어 가는 것을 금할 수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천거한 사람이 매우 많은데, 호남에 인재가 많아서 그런 것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호남의 크기에서 겨우 18인을 얻었는데 어찌 많다고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속담에 ‘수상(首相) 자리가 비면 부(部)의 참봉도 모두 바란다.’라고 하였는데, 경이 천거한 18인을 어찌 다 쓸 수 있겠는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도 아뢴 바가 있습니다만, 호남은 예로부터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많았는데 지금은 과거에 급제해서 승문원에 분관(分館)된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 정시(庭試)에서 방목(榜目)에 든 사람으로 말해 보더라도 또한 성균관에 분관되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누구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장봉의(張鳳儀)입니다. 향리(鄕吏)의 자식이라고 하니 공생(貢生)의 부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공생은 통인(通引)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향리의 자식으로 공생이 되었으니 과연 통인의 부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향공생(鄕貢生)이라면 과중하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향공생이라는 것은 당(唐)나라의 세공(歲貢 세공 유생(歲貢儒生))이나 효렴(孝廉)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공생과는 다릅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한 이들 가운데 진주(晉州)와 일신(一新 남원(南原))을 성대하게 일컫는데, 진주의 삼장사(三壯士)는 모두 호남 사람이고 일신의 칠충신(七忠臣)도 호남 사람이 많습니다.
壬辰殉節, 盛稱晉州·一新, 而晉州三壯士, 皆湖南人也, 一新七忠臣, 亦多湖南人
그런데 근년 이래로 흉황(凶荒)이 거듭 혹심하여 인물이 적게 나고 누각(樓閣)과 원림(園林)도 더 이상 옛날만큼 많고 화려하지 않습니다. 신이 비록 형편없는 몸이지만 경재(卿宰)의 반열에 있다가 마침 명을 받들고 나가 지방에 있게 되었으니 어사나 도신과는 일의 체모가 자별하므로 도내의 인망(人望)을 가려 뽑아서 소장을 올려 진달하였습니다. 신이 상소에서 ‘선발하여 등용하신다면’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뜻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이미 천망(薦望)에 들어서 직임에 제수된 자가 대부분입니다. 이이정(李頤正)과 이의경(李毅敬)은 직임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임대(林薱), 정민하(鄭敏河), 유광현(柳光顯), 이익렬(李益烈)도 천망으로 여러 차례 의망되었습니다. 최필흥(崔弼興)은 고(故)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족손(族孫)으로 도내에서 훌륭한 선비라고 일컫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최 봉조하가 호남 사람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그의 선조(先祖)인 고 평사(評事) 최경창(崔慶昌)이 일찍이 영암(靈巖)에 거주하였습니다. 김괴(金烠)는 고 참판 김상옥(金相玉)의 족자(族子)이고, 이중익(李重益)은 전 참판 이중경(李重庚)의 족제(族弟)인데, 이 두 사람은 영광 군수(靈光郡守) 유최기(兪㝡基)도 훌륭한 선비라고 일컬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중경도 호남 사람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이만석(李萬錫)은 높은 문벌 출신은 아니지만, 나이가 이미 일흔이 되었는데도 글을 잘 짓고 제자가 많아서 그 숫자가 백여 인이나 되는데, 진사에 급제한 사람이 그 가운데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벼슬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최익수(崔益秀)의 경우 제자가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서 많이 나온 것으로 상소하였는데, 내가 ‘어찌하여 이제야 상소하였는가.’라고 하교하였다. 제자 가운데 진사에 급제한 이가 많다면 어찌하여 상소하지 않은 것인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이만석은 무장(茂長)에 살고 있는데 서울과의 거리가 6, 7백 리나 되니, 그의 제자가 올라와 상소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고석(高晳)은 고(故) 충신(忠臣) 고경명(高敬命)의 봉사손(奉祀孫)인데, 고경명 삼부자(三父子)는 일시에 순절하여 세상 사람들이 진(晉)나라 변곤(卞壼)에 견주곤 합니다. 그의 후손인 고한원(高漢元)은 신이 어사로 있을 때 일찍이 천거하여 특교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습니다만, 교지가 내렸을 때 고한원은 이미 죽었습니다. 고석은 나이도 많지 않고 또한 탁월한 행실도 없지만, 충신의 봉사손이니 조정에서 거두어 쓴다면 참으로 한 도(道)를 고무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이익렬은 이기경(李基敬)의 아버지인데, 여러 차례 별천(別薦)에 들었고, 성품 또한 청렴결백하여 그 아들이 다스리는 고을에 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정사협(鄭斯鋏)은 전주(全州) 사람인데, 낮에는 땔나무를 지고 쌀을 사서 어버이를 봉양하고 밤에는 관솔에 불을 붙여 고서(古書)를 읽으며 깊은 산골짜기에 은거하고 있으니, 행의(行誼)가 탁월하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있습니다. 안황(安煌)은 영암(靈巖) 사람인데, 고 참판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으로 두문불출한 채 글을 읽고 있으며 행의 또한 칭찬할 만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신이 비록 18인을 열거하며 아뢰었지만 조정에서 감별하여 녹용(錄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한창 상하가 신칙하고 면려하고 있지만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또한 형식적인 겉치레인 듯하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항상 호남에 좌도(左道)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근심하셨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문학이나 행의로 이름난 선비를 거두어 써서 조정에서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음을 보이신다면 한 도의 풍속이 크게 변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뢴 말을 들으니 내가 느끼는 바가 있다. 호남에 좌도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참으로 근심스러우니, 만약 학문으로 신칙하고 면려한다면 좌도에 종사하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지술(地術)을 일컬은 자는 더욱 많으니, 정우량(鄭羽良)도 지술을 믿었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정우량은 지술에 꽤 밝았기에 이를 믿었지만 신은 지술을 믿지 않았으니,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의 족속을 같은 산(山)에 장사 지낸다는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근래에는 호남에 지술을 믿는 이가 많을 뿐만 아니라 관서(關西)에도 지술을 믿는 이가 많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서울의 사대부들도 모두 호남의 지술에 미혹되었지만,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틀림없이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그러한 까닭에 신이 인재를 채택할 때 재예(才藝)가 있다고 일컫거나 역학(易學)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들은 모두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경이 담장을 쌓거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 중에서 인재를 얻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경이 천거한 자들은 모두 서울에 사는 공경(公卿)의 일족이니, 개탄스럽다.”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김괴(金烠)와 이중익(李重益)이 비록 김상옥(金相玉)과 이중경(李重庚)의 족속이지만 어찌 재상가나 높은 문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안황과 정사협의 경우는 모두 의지할 데 없는 한미한 족속이니, 행의가 더욱 칭찬할 만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교한 뜻에는 억양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