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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 / 빌립보서 1:20~24
I. 늙음 미학 자꾸 먹으면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꾸 먹는 게 있답니다. 나이라지요. 우리가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 가는 게 인생입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35세쯤 됩니다. 해방 직후에는 45세, 1960년대 이르러서야 평균 수명이 50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평균 기대수명이 여자분들은 86세, 남자들은 81세쯤 됩니다. 국민 100세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제1차 베이비 부머 세대가 시니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10년 동안 806만명이 시니어가 됩니다. 바로 그때 2026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20%가 넘어서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입니다.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교회 에서도 앞으로 목회의 과제가 있습니다. MZ세대 청년세대를 어떻게 희망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교회 안에서 시니어 목회를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입니다. 옛 성현들이 노인을 표현한 글들을 보면 참 위트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지만 밤에는 잠이 오질 않는다. 울 때는 눈물이 흐르지 않고 웃을 때는 눈물이 난다.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대머리가 되어 빛이 필요 없고, 이가 없으니 치통 사라지고, 귀가 안 들려 세상 시끄러운 소리 안 들어 좋다. 희었던 얼굴은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희어진다. 고기를 먹으면 배 속에는 없고 죄다 이빨 사이에 낀다. 실감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은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 있습니까? 두렵다면 노인입니다. 그러나 여러 분에게 설레임이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젊은이입니다.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가 있나요? 도종환 시인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어디 있던가요?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아름답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던가요?
김형석 교수는 「100년을 살고보니」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황금기는 75-6 세 정도가 제일 좋더랍니다. 우리 교회 와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살아온 여정 가운데 언제가 가장 아름다웠습니까? 라고 물을 때마다 항상 “지금”이었답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 이게 인생입니다. 웰리빙, 웰다잉 잘 살다가 잘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 때도 잘 살아야 하고 죽을 때도 멋지게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시니어가 되면 7up 톡 쏘는 사이다처럼 상큼하게 살라고 교훈했던 적이 있습니 다.
① Clean up –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세요.
② Dress up –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하고 옷 매무새를 깨끗이 하십시오.
③ Shut up – 나이가 들면 머리와 입 사이에 고속도로가 난대요. 필터 과정이 없 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 식당에 모여앉아 식사하는 것 보면 각자 자기 말을 합니 다. 앞 사람 말 안 듣고 계속 자기 말만 이어져갑니다. 머리에 지나간다고 입을 열지 마세요. 말을 혼자 많이 하지 말고 듣기를 더 많이 하십시오.
④ Show up – 집 안에 혼자 있지말고 예배나 모임의 자리에 셀모임 꼭 다니라는 겁니다.
⑤ Cheep up –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얼굴은 밝고 유쾌한 말을 하십시오.
⑥ Pay up – 돈이 들 때는 작은 몫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하라. 자식들에게 생활비 받아 쓰더라도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용돈도 모아 두어야 합니다.
⑦ Give up –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자녀들에게조차 하고 싶은 말 다하 고 살 수 없습니다. 성질 다 부리지 말고 내려놓으세요.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도 내가 바꿀 수 있는 세상도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는 겁니다. 내가 변해야 행복하더라는 겁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 7up 상큼하게 살다가 웰다잉 잘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 반드시 한번은 죽습니다. 죽으면 천국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가 죽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가 보다. 느낄 때가 있을 겁니다. 편안히 우리 함께 가십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 중에서) 태양은 동쪽에서 뜰 때도 아름답지만은 서쪽에 지는 석양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죽을 때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가는 겁니다. 옛 성인들처럼 살아온 여정을 다 담아서 남기는 게 축복입니다. 연세가 든 가장 멋진 게 축복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달려갈 길 다 달렸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살아왔던 여정을 자손들에게 남기고 축복 남기고 가는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헨리 나우웬은 말했습니다. 태어나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다. 죽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다.
II. 사도 바울의 인생관(본문) 천지창조 이후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전한 사람은 본문의 저자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시작하는 20절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 니다”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얼마나 분명한 인생관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 인생관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 다.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는 겁니다. 예수 위하여 살다가 예수 위하여 죽는 겁니 다. 살아도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면 무슨 일을 해도 기쁜 것입니다. 죽어도 그것이 예수님께 영광이라면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 중심 인생관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20절 “아무 일에든지”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를 위하여 하는 겁니다. 정치를 해도 예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기업을 해도 예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목회를 해도 큰 교회를 섬기든, 작은 교회를 섬기든 예수 위하여 하면 행복입니다. 부끄러울 것 없습니다. 20절 “살든지 죽든지” 예수를 위한 것입니다. 살면 축복이고 죽으면 저주가 아닙니다. 살아도 부끄러운 삶이 있고 죽어도 우리 주님 앞에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죽음이 있는 겁니다. 성공을 해도 부끄러운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실패를 해도 자랑스러운 실패가 있는 겁니다. 판단은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27절 “가 보나 떠나 있으나”입니다.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교회에 있으나 직장에 있으나, 높은 곳에 있으나 낮은 곳에 있으 나, 내 인생의 목적이 달라질 수가 없는 겁니다. 28절 “무슨 일에든지” 시작이 예수였으면 끝나는 것도 예수와 함께 끝내는 겁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은 3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0절 안에 그리스도란 말이 18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예수라는 단어 빼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대명사 빼고, 오직 그리스도란 말이 18번씩이나 등장합니다. 밥을 먹어 도 예수 잘 전하기 위해서 먹습니다. 굶어도 매를 맞아도 옥에 갇혀도 예수를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요? 보좌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말 성경에 꽤 멋있게 잘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는 것 그리스도. 죽는 것 유익”입니다. 간단 명료합니다. 어떻게 사도바울은 이처럼 단순하고 명쾌한 인생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죄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고 할지라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예수와 함께 눈을 뜨고 천국에서 함께 사는 겁니다. 지금 살아도 영생이요 지금 죽어도 영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이후가 더 기다려진다고 말합니다. 죄 문제와 함께 죽음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겁니다. 이 세상 이후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갈등이 없습니다. 너무나 선명하기만 한 것입니다. 23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합니다. 여기 떠난다는 말은 “천막을 걷는다”“배의 닻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와서 천막을 치고 살다가 주님 부르시면 천막을 걷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육신의 천막, 장막을 벗어던지고 내 영혼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 이게 죽음이라는 것입니 다. 주님으로부터 허락받은 것 만큼 이 땅에 항해를 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닻을 내리고 돌아왔던 고향 항구, 천국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 이게 죽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금실 좋은 가정의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말기암이랍니다. 아내가 치료 할 길도 없고 의사도 손을 들었습니다. 슬피 웁니다.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더랍니다.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마. 당신도 곧 날 따라 올 거야.”
III. 내려가자 하시면 내려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인생 집착, 죄의 유혹, 세상 근심 걱정 모두 끝이 납니다. 병든 것도 없고 늙음도 없고 이별도 없는 것 그곳에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던 세계 아닙니까? 내 어머니 평상시 유언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콧줄 끼워 놓고 내 생명 연장 시켜지 마라. 주님이 부르면 나는 깨끗이 간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병원에 입원해 계셨어요. 이제 마지막 시간 이 다가오니깐 의사가 나를 부릅니다. 중환자실로 옮겨야 된답니다. 거기서 격한 치료를 하셔야 된답니다. “No No 아니요. 당신은 의사요 나는 목사요. 당신만큼 내가 죽는 사람 많이 봤을 거요. 내 어머니 그렇게 시간이 길게 남지 않았습니다. 어떤 치료를 받든지 간에 내가 지켜볼 것입니다. 내 앞에서 치료하세요.” 그리고 엄마를 안고 “엄마, 엄마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님 곁으로 가. 그만큼 기도 남겼으 면 우리 잘 살 거야.” 내 어머니 그러고 하나님 곁으로 가셨지요. ‘나’라는 사람 내 어머니에게 있어서 자식이지만 애인이었고 남편이었고 친구였습니다. 어머 니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까? 막막하기만 했지만 잘 살더라고요. 총회장까지 되지 않았습니 까? 이게 인생입니다. 짤막한 인생 살다가 세상 다 가질 것처럼 바둥 될 것 없습니다. 대학 떨어지면 인생 끝나는 줄 알지만 대학 다 떨어져 보지 않았습니까? 끝나던가요? 더 멋진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업 망하고 나면 모든 인생 끝나는 것 같지만 인생 끝나던가요? 또 다음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제게 한소망교회 ! 생명보다 이 교회가 소중합니다. 제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교회입니다. 저라고 더 오래 섬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년 후에는 이 자리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일하라 그러면 일하면 되는 것이고, 내려오라 그러면 내려오면 그만인 것을. 저는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 대학교 1학년 때 꿈을 꾸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이 모두다 저 친구는 총회장 할 거야. 친구들도 다 알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짤막하게 1년 봉사하고 내려오는 겁니 다. 그걸 봉사를 하겠다고 양심 꺾고 부정부패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가득 쌓아 놓고 그 길 갈 것 아니더라고요. 하나님이 시키지 않으면 떨어지라고 그러면 떨어지는 것도 자랑인 것입니다. 총회장 되고 부끄러운 목사로 남을 수도 있는 겁니다. 대통령 되고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부끄러운 이름 남기고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실패가 있었어도 고생과 고난이 있었어 도 그것이 당당한 길이라고 한다면 신앙 양심대로 섬기라고 한다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었 음을 믿으셔야 됩니다.
이번 총회에 목사가 자꾸 나이가 더 많아지는데 70세 은퇴하는 건 너무 아쉽다. 70쯤 되어 야 목회도 설교도 무르익더라. 73세까지만 하자. 헌의하신 분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다. 75세까지 하고 은퇴하자. 교회를 개척한 사람들은 은퇴 없도록 하자.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하자. 농촌교회 장로님들은 장로 새로 세울 사람들이 없다. 종신직으로 하자. 그걸 통과시켜 달라는 헌의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그래요. “사는 것과 죽는 것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아. 조용히 해! 현역에 있으나 은퇴 후에 있으나 우리는 다 주의 종이야! 강단에 있어도 주의 종이고 내려앉아 있어도 주의 종이면 그만인 게야.” 그랬더니 발언하는 사람이 머쓱해서 그냥 앉더라구요. 끝이 아름다워야 되는 겁니다. 내려올 때가 아름다워야 되는 겁니다. 죽을 때 멋져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총회장 이임식이 끝나고 총회 참석하는데 사흘내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원섭섭하시겠습니다” “이제는 가벼우시지요”“너무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데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한 번도 무겁다고 여기 본 적이 없습니다. 짊어 진 게 없으니 내려놓을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시원할 것도 없고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후회도 없고 아쉬움도 없습니다. 욕심도 없고 더할 마음도 없습니다. 어제 지나고 나면은 오늘이고 오늘 지나고 나면 내일인 것을. 여러분 그 자리가 어떠냐가 뭐가 중요합니까? 어떻게 사느냐 왜 사느냐?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 다. 자리가 달라졌다고 인생관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위치가 달라졌다고 인생의 목적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까?
웨슬리에게 “오늘 밤이 당신 인생에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겠습니 까?”물었더니 웨슬리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냥 어제처럼 살다가 가는 거야.”이게 인생입니 다. 어제처럼 오늘처럼 살다가 내일 하나님 앞에 서는 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V. 웰다잉 사랑하는 여러분! 웰리빙 웰다잉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것,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세계 아닙니까?
크게 세상사에 성공하고 하루 48시간이 모자랄 만큼 분주하게 살던 젊은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낯선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사업에 세상 일에만 몰두 하지 말고 어릴 때 주일 학교 다니지 않았습니까? 주일 날이 되면 교회 가서 하나님 께 예배하세요. 그리고 세상일 분주한 것 못지않게 죽을 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죽음 이후도 좀 생각하면서 사세요.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이 길손을 쫓아버립니다. 몇 번이고 찾아왔는데 똑같이 쫓아버렸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사람이 다시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길을 떠나셔야 되겠습니다. 그 말에 등골이 오싹해 집니다. 그렇게 찾아왔던 분이 죽음 사자, 하늘에 천사였던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1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빕니다. 그러면 당신 말처럼 교회도 가고 멋진 일도 남기고 죽음 이후도 준비해 보고 죽고 싶습니다. 소용없는 일이지요. 한 달만 더 살게 해달라고, 일주일만! 하루 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습니다. 당장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죽음이 두려운 사람도 생각하지 않습니 다. 너무 분주하고 잘 나가는 사람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구약 66권 어느 성경이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성경이 있습니까? 찬송가 불러 보세요. 항상 마지막 절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꿈이요 비전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게 뭘까요? 바로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오직 믿음으 로 살다가 믿음으로 가는 새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마지막 날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된지라. Living Soul.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육체와 흙과 영혼, 생기가 분리되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온 인생 흙으로 가는 겁니다. 먼지가 뭉쳐져 사람이 되었으니 먼지로 돌아가는 것입 니다. 그리고 영혼은 나를 보낸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우리의 영혼은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낙원은 연옥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먼저 가 보았습니다. 삼층천에 가 본 것입니다. 갔다 오기로 했는데 너무 황홀해서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표현이 안 됩니다. 왜? 이 세상에 없는 것이거늘. 글로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글로 안 되는 것을. 이걸 영어에서는 beyond description. 필설로 쓸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나는 훨씬 더 좋다. 가 봤으니 까. 오늘이 내 인생에 마지막 날이라도 내가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게 훨씬 더 좋다. 가 본 곳이니까.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3절입니다. “너희가 죽음에 대해서 근심하나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 처소를 준비하러 가노니 이 처소 준비를 마치면 내가 너를 데리러 올 거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거할 곳 “맨션”입니다. 어쩌면 비유적, 장소적인 의미로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맨션을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섰을 때에 천국문이 활짝 열립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내 집 대문에 이르렀더니 그 대문이 12 진주로 만들어진 대문입니다. 대문을 열었더니 생전 처음 보는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탔더니 여기서부터 너희 집까지 4km 그 길이 황금 길입니다. 도착했더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한 내 집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 다.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할 곳, 맨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서 사도바울은 그 곳에서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집에 들어갔을 때 먼저 가 계신 내 어머니가 달려 나오지 않겠습니까? 내 손 잡고 예수님 앞으로 가서 예수님 이 아이가 내가 낳은 우리 아들입니다. 내 어머니 앞에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어머니 손 잡고 내 어머니 소개하면서 착하신 내 어머니 피 타고 태어나서 이 땅에 살아왔 던 것 자랑스러워서 예수님 제 어머니입니다. 소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먼저 천국에 가 있을 때에 여러분이 천국에 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예수님 아무개 집사가 왔어요. 예수님 아무개 권사가 왔어요. 한소 망교회 교인입니다. 자랑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천국에 가 있을 때 제가 천국문에 들어가면 여러분이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우리 목사님이 왔어요. 우리 목사님이예요. 제가 자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얘기입니다. 그게 인생인 것을... 제가 오늘 새벽에 이 설교를 마치고 오늘이 내 인생에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내 비문에 우리교인들이 뭐라고 새겨줄까? 제가 미리 적어 놓았습니다. 비문 : 한국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한소망교회, 한국교회, 한민족을 그토록 사랑하던 한 사람 류영모, 그 비전 가슴에 품고 기도로 섬기고자 주님 곁으로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