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베드로. 장대원. 황 바오로
1812년의 공주 순교자들
원 베드로 : ?~1812. 세례명 베드로. 공주에서 옥사
장대원 : ?〜1812, 세례명 마티아, 공주에서 참수
황 바오로 : ?-1812. 세례명 바오로. 공주에서 참수
1812년 10월 공주에서는 세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결성 덕머리(지금의 충남 홍성군 은하면 덕실리) 출신의 원 베드로와 장대원(마티아). 그리고 청양 제운 출신의 황 바오로가 그들이다.
으실의 옹기점에서 체포되다.
원 베드로는 결성 덕머리 출신으로. 고향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활하다가 형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들 형제는 입교 후 좀더 안심하고 천주교를 믿으려는 생각에 홍주 황새울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의 옹기점에서 일하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해져 배교한 뒤 풀려 났다.
얼마 후 원 베드로 형제는 연산의 으실로 피신하여 이번에는 신자가 운영하는 옹기가마에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12년에 박해가 일어나 그곳 신자들이 밀고를 당하자, 이들 형제는 진천 질마로(지금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결국 질마로에서 체포되어 연산으로 압송되었고, 이곳에서 첫 번째 신문을 당한 뒤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원 베드로의 형은 마음이 약해져 배교한 뒤에 유배형을 받았다. 그러나 원 베드로는 감사 앞에 끌려 나가 세 차례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모두 이겨내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는 굳건한 순교의 뜻을 가지고 조금도 마음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원 베드로는 1812년 10월 초순 마지막 문초를 당한 날 밤에 동료 장대원과 황 바오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어둔남’(於屯男)이라고도 불렸던 장대원 역시 덕머리 출신이었다. 그는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부모를 여왼 뒤에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였다. 그러다가 곤궁함을 견디다 못해 광대 패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가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접하게 되자 그는 스스로 방탕한 생활과 못된 습관을 버렸고. 금산 솔티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지켰다.
그러나 얼마 동안 냉담하며 첩까지 얻은 장대원은 이후 본처가 죽자 첩과 정식으로 혼인을 하였고. 전날의 허물을 기워 갚기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면서 보속 행위를 자주 하였다. 그러다가 1812년 8월경 피신해 있던 연산 으실의 옹기점에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혹독한 형벌을 용감하게 참아 냈지만.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한때 배교의 뜻을 비치기도 하였다. 이때 그의 나약한 마음을 잡아 준 사람이 함께 옥살이를 하던 황 바오로였다.
이에 장대원은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전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제 그는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어려운 옥살이도 잘 참을 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형장으로 갈 때 모여든 사람들이 조소와 욕설을 퍼붓자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 렇게 말해 주었다. “당신들은 웃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어야 할 것입니다. 불쌍한 건 우리 처지가 아니고 당신들의 처지이니까요.” 장대원이 망나니의 칼날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2년 10월 15일 이전이었다.
집 안팎에서 박해받은 순교자
황 바오로는 충청도 청양 땅의 제운 태생으로, 1794년에 한 번 체포된 적이 있었다. 당시 청양 현감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욕을 한다면 석방해 주겠다"고 하자, 그는 “하느님께 욕을 하다니요? 그런 일은 짐승들조차 하지 못할 것인데, 신령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으로 인해 그는 많은 매를 맞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석 달 후에 플려 났다.
그 후 황 바오로는 집안에서도 많은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천주교 신자라는 명칭을 더할 수 없이 미워하던 그의 아버지는 황 바오로의 손가락 사이와 몸에서 가장 감각이 예민한 부분에 시뻘건 숯불 덩어리를 대기까지 하였으나, 배교 시키지는 못하였다.
황 바오로는 1812년 4월 15일 보령에서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는데, 같은 시기에 여러 신자듬이 그와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영장이 황 바오로에게 "몹쓸 종교를 가르쳐 준 선생과 공범자를 자백하라"고 하자, 그는 "제게 이 참된 교리를 가르쳐 준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관장님이 공범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영장은 세 차례나 주리를 틀도록 하였지반,황 바오로는 끗꿋이 이를 견디어 내며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해미 옥에서 여러 달 동안 고생하다가 8월에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황 바오로는, 공주 감옥에서 장대원을 만나 함께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녀,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서로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812년 10월 15일 이 전에 쉰아홉 살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황새바위 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