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7일(월) 욥기 39:13-30 찬송 460장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개역 개정)
지난 말씀(1-12절)에 이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동물의 습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오늘 말씀은 구체적으로 타조, 말, 매, 독수리 등을 들어
그것들의 특성을 언급함과 동시에
그 특성의 조성자의 능력과 지혜에 대해 질문하다.
즉 여기에서 하나님은 ① 알을 품지 않고 새끼를 보호하지도 않는
타조의 무정(無情)함을 언급하며 그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타조에게는 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과,
그러한 타조에게도 탁월한 특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빠르게 잘 달린다는 사실을 밝히신다.(13-18절)
② 또한 말의 힘과 용맹함을 시적으로 묘사하며
그러한 특성의 조성자에 대해 질문한다.(19-25절)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와 독수리의 신비하고 지혜로운 습성을 언급하며
그러한 습성의 근원에 대해 질문한다.(26-30절)
이는 미물(微物)인 짐승조차도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능력에 의해 각기 특유한 습성을
갖추고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이 역시 피조물에 대해 세밀하신 섭리와 철저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를 역설한다.
그리하여 전지 전능(全知全能)하신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무지 무능(無知無能)한 피조물인 인간의 철저한 복종과 경배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한갓 미물에게 조차 특별한 재능과 습성을 갖도록
섭리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본문의 강조는,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와 계획에 따라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암시함으로써
어떤 비참한 상황속에서도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와
계획을 믿고 의지하며 소망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비참한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며 자신의 처지와 존재에 대해 한탄하던
욥의 신앙적 한계를(10장; 14:1-12)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는 특히 다음 장에 소개되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속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드러난다.(40:1-9)
한편 본문을 통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능력으로
창조된 자들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부여하신 존재 의미와 재능들을 바르게 깨달아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각자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계획과 섭리가 분명히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결국 지금까지 진행된 하나님의 1차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적 섭리와 능력,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지극히 무지하고 무능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 어떤 문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와 능력에 자신을 의뢰하며 복종하고 소망함으로써
하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27-28절)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지을 장소를 선정하고
거처를 정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독수리는 일반 새들과는 달리 보금자리 짓는 장소가 독특하다.
일반 새들은 바위 밑이나 땅 속 움푹 패인 곳,
혹은 나무 등걸, 가지 높은 곳 등에 짓는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러한 곳에 보금자리를 정하지 않는다.
독특하게도 낭떠러지나 뾰족한 바위 끝
혹은 그와 유사한 험준한 곳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집을 짓는다.
왜 이렇게 할까? 안전을 위해서 그렇다.
다른 새들이 짓는 곳은 짓기도 쉽고,
자리를 물색하기도 좋지만 안전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다른 짐승이랄지, 사람의 손을 탈 위험이 상존한다.
하지만 바위 끝 뾰족한 곳은 뱀 등 여타 짐승은 물론이요
사람이라도 쉽게 손을 대기 어렵다.
그래서 일단 집을 지어놓으면 안전하다.
우리가 독수리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집이란 다 장막에 불과하다.
욥의 자녀들이 터가 약한 곳에 집을 지어서
집 네 모퉁이가 무너지고 자녀들이 몰사하였을까? 아니다.
동방의 큰 부자의 아들이 집을 그렇게 허술하게 지었을 리 만무하다.
당시 그 어떤 집보다도 안전하게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너졌고 그 형제들이 모두 몰사했다.(1:19)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 땅의 집이란 다 이러함을 말해 준다.
든든히 선 때도 허사뿐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시39:5)
그러면 우리는 집을 어디에 지어야 할까?
하늘에 지어야 한다. 높은 곳, 안전한 곳에 지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의롭고, 정직하며,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삶을 높은 곳에 거하고
견고한 바위에 사는 것으로 묘사했다.(사33:15-16)
왜냐하면 이러한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피난처와 요새와 그늘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시91:1-2)
아울러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하늘나라에 안전한 좋은 집을 짓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에 따라서, 말씀에 따라서 경건하게 사는 삶이
독수리보다 더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삶이요,
그 자체가 이미 하늘 높은 곳에 집을 짓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외로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의 터는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