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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열쇠고리-곁에 있는 작은 토템
배낭여행의 설렘이란 여행을 떠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친한 친구들에게도 있다. 허물없는 사이라면 그가 출국하며 가벼운 말로 약속했던 여행 선물이 은연 중 기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어떤 반짝이는 것들을 보고 그중에 내 앞에 어떤 작은 풍경을 옮겨다 줄까.
반면 출국 때 설레던 내 마음은 입국 때가 되면 가볍게 초조해진다. 마땅한 아이템을 아직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쇠고리는 그때 적절하다. 우선은 ‘가성비’ 최고니까. 그러나 선물에 우선순위가 비용 문제 때문일 수만은 없다. 열쇠고리가 ‘선물’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은 아닐까.
열쇠는 그 자체로 완전한 사물이다. 다른 사물의 보조가 필요 없이 기능적으로 자족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떠한 종류의 열쇠든 생기면 열쇠 ‘곁에’ ‘더불어’ 있을 적절한 열쇠고리를 자동적으로 생각한다. 다른 열쇠를 더 달 ‘고리’가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가장 간단히 생각하면 예쁜 것을 달고 다니고 싶다는 ‘디자인적’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무의식은 ‘토템(totem)’에 닿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토템은 원래 부족 신앙이다. 가족과 가계를 지키는 신성한 동물을 모시는 것이다. 열쇠의 기본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 열쇠이며, 옛날에는 음식과 재물을 보관하는 곳간 열쇠가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요즘에는 자동차 열쇠가 중요한 열쇠로 추가되었지만, 그것 역시 집 안에 귀한 재물 ‘안으로’ ‘열고 들어가는’ 열쇠인 것은 마찬가지다.
(후략)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5년 2월 13일)
열쇠. *51가지 사물체험
(중략)
쭉 뻗은 몸체는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이다. 물론 금속으로 되어 있다. 말랑말랑하거나 금세 부서지는 열쇠란 있을 수 없다. 독특하게 단단하고, 그만큼 고독해 보인다.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면서도 안으로 응집한 침묵이 느껴진다.
열쇠는 권력의 대표적인 특성을 모두 갖췄다. 속을 알 수 없고, 고독하고, 단절된 자신의 상태에 무감각하다. 열쇠 자신은 감각도 없고, 모든 효율성도 배제되었다. 잃어버린 열쇠, 쓸모없어진 열쇠를 떠올려보라. 죽은 물고기처럼 처량해 보인다. 무용성의 세계에 던져진 쇳덩어리, 부동의 중력 자체다.
(중략)
재질이 놋쇠든, 강철이든, 알루미늄이든 모든 열쇠에는 개방과 폐쇄를 결정하는 강력하고 집약된 힘이 있다. 열쇠는 문에 대해 힘을 행사한다. 그 문에 맞는 바로 그 열쇠가 없다면 열거나 닫을 수 없다.
자동차,모터사이클, 스쿠터의 열쇠도 이처럼 정점에 달한 힘을 갖추고 있다. 열쇠는 연동시키고, 작동시키고, 출발하게 한다. 엔진과 주행과 속도의 모든 가능성을 한꺼번에 집약하고 있다. 열쇠가 없는 자동차는 자물쇠 없는 열쇠보다 더 쓸모없다. 이 하찮은 쇳조각 하나가 메커니즘 전체를 무력하고, 무용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문득, 이전에 내가 주거나 받았던 열쇠들이 떠오른다. 열쇠는 신뢰의 상징이며 비록 그 용도가 사라져도 여전히 사랑의 징표다. 누군가에게 열쇠를 주거나 받는다는 것, 혹은 빌려주거나 되돌려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닐까?
서로사랑하는사람들은 상대방의 열쇠다. 사랑은 정확하게 들어맞고 완벽하게 짝을 이루는 것이 관건이다. 사실 사랑은 상호 보완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 열쇠가 자물쇠를 완성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쇠는 열고 움직이게 하고, 그에 적합한 힘을 부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충만함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고유한 강인함, 수수께끼 같은 단단함이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진 순간 문이 닫힌다. 혹은 다시 닫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잊지 말자. 우리 사랑은 각각의 열쇠가 차례차례 열거나 닫는 열쇠 꾸러미와 같은 것일 뿐, 총체적인 우리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존재의 총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단지, 존재의 어떠어떠한 부분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