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0월 15일(화) 이사야 42:18-25 찬송 538장
18.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19.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21.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22.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23.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을 삼가 듣겠느냐
24.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기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개역 개정)
- 우매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 -
어제 말씀(10-17절)에서 이사야는 세계 만민을 향하여
구원자 여호와께 대한 찬양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선민으로서 수많은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20, 23, 25절)
깨닫지 못하고 청종하지 아니하다가 결국 불붙듯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급박한 상황에 처한
이사야 당시의 우매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을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세계 만민에 대한 구원을 예언하다가 여기서 갑자기
선민 이스라엘의 우매함을 책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이스라엘의 우매함 자체보다 그 우매함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종’과 ‘여호와의 사자’(19절)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세계 만민에게 전파하지 못하는 직무 유기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1-9절에서 언급한 메시야이신 ‘여호와의 종’이
이방의 빛(6절)이 되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자를 해방시키시는 구원 사역을 펼치신 것과 달리
오히려 자신들이 영적 맹인과 청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즉 과거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세계와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만민의 구원자 되신 사실을
증거하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들을 접하고도 이를 만방에 전파하기는커녕
자신들 조차 불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사야는 남유다 백성들이 속히 돌이켜 자신들의 책무를 깨닫고
이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23절) 본문과 같은 책망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를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은총의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눈이 항상 열려 있는가?
언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6:8; 삼상3:10)하고
순종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갈 준비는 되어 있는가?
우리는 용사같은 여호와의 열심과 해산하는 여인 같은 애타는 기도로 무장하여
주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고 더욱 매진해 나아가야 한다.(딤전1:18; 딤후2:3-4)
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25절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앨의 영적 무감각을 지적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를 징계하신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은
모두 3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하였다.
이 중 제1차 침공은 B.C.605년에 있었다.
이때 바벨론은 유다가 바벨론을 섬기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여호야김 왕과 귀족의 자제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여호야김은 후에 유다로 돌아와 통치를 계속하게 되는데
그의 귀환은 아마도 바벨론에 충성할 것을 맹세함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제2차 침공은 B.C.597년에 있었다.
이때 바벨론은 여호야긴 왕과 왕실 사람들을 비롯하여
유다의 전문 기술직에 있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제3차 침공은 B.C.588년에 있었는데
이때 바벨론은 2년 6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하층민을 제외한 유다의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로써 왕국으로서의 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중 바벨론의 제1,2차 유다 침공은
유다로서는 극심한 시련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은 그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나름대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시련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 줄 깨닫고
회개하였다면 그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징계를 받고도 자신들의 죄를 회개할 줄 몰랐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었다.
그들에게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었다면
제1차 바벨론 침공 때는 몰라도 제2차 침공 때는 회개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었기에 그 위기에서 탈출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자들이었다.
오죽하면 이사야가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한다’고 하였겠는가?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질병,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질병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나병(한센씨)이다.
그들은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고 자기 지체가 썩어 문드러져도 고통을 모른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본래 모습을 다 잃어버린 채 죽음에 이르고 만다.
나병을 가장 큰 저주를 받은 것, 가장 무시무시한 질병으로 여기는 것은
다름 아닌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회개의 기회로 주어진 징계를 당하면서도 무감각한
화인맞은 양심을 지닌 자들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끝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를 모르고
징계를 당하면서도 돌이킬 줄 모르는 자가 어디에 이르겠는가?
분명 그들은 더 큰 죄,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의 심판에 떨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도 이와 같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고질적으로 거역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이를 죄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돌이켜야 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고 때로 징계를 가하기도 하지만
돌이키지 않는 이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이들은 자기들이 짓는 죄를 고집하고 합리화하면서 온갖 핑계들을 내세운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죄악을 즐겨 행하며
온갖 핑계를 대고 그 집착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자신들이 범하는 죄악을 합리화시키고
온갖 핑계를 다 든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달라짐이 없다.
죄는 죄이며 악은 악이며 거짓은 거짓일 뿐이다.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나병에 들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처럼 점점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 징계를 징계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실상 회개의 기회도, 내일의 어떤 희망도 없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결국 심판을 당하며 파멸에 이르고 만다.
이 사실을 각성하고 죄된 것, 악한 것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
패망을 자초하는 패역한 범죄에 감염되지 않도록 늘 깨어 근신하여야 한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