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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바다(死海)에서
발굴(發掘)된 미라(mirra), 모두 백인(白人)일까? 그런 일은 없다.
○ 고전(古典)의 원전(原典) 번역(飜譯)과 해설(解說), 유물유적(遺物遺蹟)의 발굴(發掘), 연구(硏究), 해설(解說)등은, 우리들의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오해(誤解)의 소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現實)은 전혀 다르다.
역사적(歷史的)으로, 사회적(社會的)으로 언제든지 정치적(政治的)인 역학관계(力學關係)에 휩쓸리게 되며, 경제적(經濟的) 요인(要因) 또한 무시(無視)할 수 없는 중요(重要)요소(要素)로 작용(作用)된다.
㉮ 세계적(世界的)인 석학(碩學) 또는 대학(大學)이나 연구단체(硏究團體)등 또한 위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입장(立場)일 수밖에 없는데, 특히 강대국(强大國)들인 미국(美國)·중국(中國)·러시아·일본(日本)·독일(獨逸)·영국(英國)·불란서(佛蘭西)등등 일 경우(境遇)에는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서구(西歐)인들의 우월감(優越感)도 작용(作用)한다.
서구(西歐)는 : 16, 17세기 이후(以後)에나 역사(歷史)를 말할 수 있을 뿐, 그 이전(以前)의 역사(歷史)란 만이(蠻夷)일 뿐이며, 서술(敍述:記錄)된 매체(媒體)는 희귀(稀貴)할 정도다. 19세기(世紀)엔 도처(到處)에서 발견(發見)된 유물(遺物)들을 자국(自國)으로 빼돌리기에 바빴고, 이를 근거(根據)로 지들 중심(中心)의 역사(歷史)를 만들어 버렸다. 서구(西歐)의 유명 박물관(博物館)엔 이때 약탈(掠奪)한 문화재(文化財) 곧 유물유적(遺物遺蹟)으로 꽉차있으며, 여기에는 열도(列島)의 왜(倭)도 한 몫을 했다.
최근(最近)에는 특히 중국(中國)이, 자국(自國)의 정치적(政治的)인 여건(與件)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갖고 있어, 발굴(發掘)된 유물유적(遺物遺蹟)의 해설(解說)이나, 발견(發見)된 고전(古典)의 번역(飜譯)과 해설(解說)등에 막강(莫强)한 입김을 불어 넣는다. 특히 신강성(新疆省)이나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지방에 대한 것들은 유별(有別)나게 통제(統制)될 수 있다. 그래서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될 수 있는 것이다.
㉯ 또 하나는 경제적(經濟的)인 문제(問題)다. 막대(莫大)하게 소모(消耗)되는 발굴비(發掘費)와 연구비(硏究費)와 운영비(運營費)등의 조달(調達)은, 가장 중요(重要)한 조건(條件)일 수 있다. 먹고 사는 문제(問題)이기도 하다. 이런 탓에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될 수 있는 것이다.
◇ 예(例)를 들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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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클라마칸사막(沙漠)「죽음의 바다」에서, 발굴(發掘)된 미라(mirra)는, 모두 백인(白人)일까? 〈출처 : http://me2.do/xi0MoOXZ〉
… 타클라마칸사막지대(沙漠地帶)의 모래언덕
〈출처 : http://me2.do/xi0MoOXZ〉에서 ‘사진(寫眞)과 글 내용(內容)’등을 보면, “죽음의 바다”란 「타클라마칸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칭(指稱)하는 것이고, 이곳을 가리켜 “죽음의 바다”라고 하는데,「타클라마칸사막(沙漠)에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는데서 유래(由來)한다고 전한다.
1,980년대에 ‘타클라마칸사막(沙漠)’의 신비한 소금 호수인 「롭 누르(Lop Nur)」【필자(筆者) 주(注) : 나포박(羅布泊)=포창호(蒲昌湖)=유택(泑澤)=보일해(輔日海)=염택(鹽澤)=뇌란해(牢蘭海)=라포뇨미(羅布淖彌)등으로 불렸는데, “롭 누르(Lop Nur)”란 말은 투르크어(語)이며, 서방(西方)중심(中心)의 이름이다. 한자(漢字)로는 포창해(蒲昌海)이다.】 근처의 고대도시(古代都市) 「로우란(Loulan=누란樓蘭)」에서, 여러 미라들이 발견(發見)되었는데, 「로우란의 아름다움 또는 로우란의 미녀(美女)」라는 별명(別名)을 가진 그녀는, 2천년 또는 4천 년 전(前)의 여인(女人)이라고 하는데, 「유럽사람 특징인 높은 브릿지 코, 긴 적갈색 머리카락, 좁은 턱을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중국학자들은 죽은 지 4,000년 된 미라(mirra)의 보존(保存) 상태(狀態)에 매우 놀랐다.」고 말한다.
… 신강성(新疆省)지방
※ 일부(一部)과학자(科學者)들은 1000년 ∼ 1,800 여 년 전(前)의 것이라고 하며, 4000년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한다.
이어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빅터 메이어(Victor Mair) 교수와 유전학자인 파올로 프란카라치(Paolo Francalacci)는, 이러한 미라(mirra)는 ‘중국이나 위구르인’의 것이 아니며, 1,993년 유전자 샘플을 검토한 결과 실제로 ‘유럽인’이다.」라고 했다.
이어 또 말하기를 : 「그녀의 몸은 평범한 모직 천으로 감쌌고, 매우 건조한 기온과 소금기가 많은 흙 때문에 잘 보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따르면, 그녀의 속눈썹, 머리카락, 그리고 피부의 선들은 여전히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들 구라파(歐羅巴) 또는 미국(美國)학자(學者)들은, 〈현재(現在)의 신강성(新疆省)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의 동(東)쪽에 있는, 신비(神祕)한 소금 호수(湖水)인 “롭 누르(Lop Nur : 포창해(蒲昌海)=羅布泊=羅布淖彌) 지방(地方)의 고대도시(古代都市)였던 로우란(Loulan : 누란樓蘭)”까지, 어떻게 백인(白人)들이 진출(進出)했으며, 얼마나 많은 백인(白人)들이 살았을까?〉하면서, 호기심(好奇心)을 힘껏 불어 넣는다.
● 질문(質問) … 그렇다면 정말 그 미라(mirra)의 여인(女人)과 여러 미라(mirra)들이 “유럽계 백인(白人)”이란 말을 믿을 수 있을까?
● 답변(答辯) … 여기서 여러 학자(學者)들은, 이의(利義)를 제기하며, 반론(反論)을 한다. ‘신장의 역사’를 저술(著述)한 「제임스 A, 밀워드」같은 학자(學者)는 말하기를, 《타클라마칸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대규모(大規模) ‘미라’가 발견(發見)되었는데, 구라파(歐羅巴) 학자(學者)들은 말하기를, 이들이 “유럽계”라고 하면서, 저명(著名)한 유전학자(遺傳學者)들까지 합세(合勢)하여, 이 ‘미라’들이 “금발(金髮)에 파란 눈”이라고 발표(發表)를 했다. 이것을 의심(疑心)하는 학자(學者)들은 이런 말로 대신(代身)한다.
〈‘미라(mirra)’들이 여전히 안구(眼球)를 가지고 있던가?〉
라고 말이다. 이들이 ‘유럽계’라고 하는 것은, 「연구기금(硏究基金)을 조성(造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理解)할 수 있다.」고 하나, 실제 ‘미라’들이 ‘유럽계’라는 말은 ‘조작(造作)’ 또는 ‘과장(誇張)’된 것이며. 이들은 결코 「유럽계가 아니다」라고 하는 학자(學者)들도 있다.》고 하였다.
○ 위의 이야기는 한편의 희극(戲劇)과 같은 이야기다. 역사(歷史)연구(硏究)는 정치적(政治的), 경제적(經濟的)인 이유(理由)등으로, 진실(眞實)과는 다르게 변질(變質)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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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現) 신강성(新疆省) 또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는 기원전(紀元前) 2세기에 월지(月支)가 등장(登場)하는데 이들은 ‘토하라인’과 동일시(同一視)한다고 한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월지(月支)는 마한(馬韓)의 54개국 중 한 나라였으며,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이곳 월지(月支)에서 여러 제후국(諸侯國)들을 다스렸다.」 고 하였다.
※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월지(月支)는 목지(目支)의 잘못으로 목지(目支)는 충청도(忠淸道) 직산(稷山)주변에 있었으며, 당시의 나라들 중에서 가장 번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증거(證據)하는 기록(記錄)이나 유물유적(遺物遺蹟)은 있는가? 그 징후(徵候)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이들 「월지(月支)」는 그 후(後), 서진(西進) 또는 서북진(西北進)하여,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江)까지 진출(進出)한다. 한 때는 흥성(興盛)하여 주변(周邊)의 여러 나라들을 복속(服屬)시켰다. 이들을 엽달(擫噠) 또는 읍달(挹怛)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에프탈족(Ephthalites)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페르시아와 인도(印度)’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참고 : 통전(通典) 서융(西戎) : 嚈噠 挹怛 同 :《엽달(嚈噠 : Ephthal) : 挹怛(읍달)同 및 「제임스 A, 밀워드」의 ‘신장의 역사’ 인용(引用)〉
여기서 현 대륙학자(大陸學者)들의 연구(硏究)대로, 월지(月支)가 토하라(Tokhāra:吐火羅:都貨邏)를 복속(服屬)시키고, 에프탈(Ephthalites:Hephthalites)이며, 엽달(擫噠) 또는 읍달(挹怛)이라고 했을 때, 이들은 또한 뒤에 을불적(乙弗敵)이라고 하였으니, 북위(北魏)에 “을불(乙弗)씨”가 있고, 또 고구려(高句驪) 태왕(太王)이 되었다고 한다면, 탁발씨(拓拔氏)의 ‘북위(北魏)=후위(後魏)’는 고구려(高句驪)의 다른 이름(異名)이거나 별칭(別稱)일 수 있으며, 또는 속국(屬國)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하여 고구려(高句驪)는 중원(中原) 땅과 그 서(西)쪽으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랄(Aral) 해(解)의 서(西)쪽까지도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事)했다고 해설(解說)할 수 있다.
대륙(大陸)학자(學者)들의 목적(目的)은, 고구려(高句驪)를 지들의 역사(歷史)로 편입(編入)시키려 하였지만, 역설적(逆說的)이게도 「고구려(高句驪)가 이 모두를 복속(服屬)시켰다.」는 결과(結果)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북위(北魏)는 겨우 148년간 존속(存續)한 왕조(王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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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가리아분지로부터 서(西)쪽으로 우랄산맥(山脈)과 볼가 강(江)을 보자.
(3) 또한 천산산맥(天山山脈) 북(北)쪽의「준갈이(準噶爾)=중가리아」에서는 :
《17세기에도 준갈이(準噶爾)는 오이라트(Oyrat 또는 Oirat : 와랄(瓦剌)이다.)의 거점지(據點地)였다. 이슬람측 사료(史料)에 의하면, 이들은 ‘칼미크 또는 칼무크’로 불렀다.》고 전한다. 이건 서양학자(西洋學者)의 주장(主張)이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116권, 세종 29년 윤4월 27일 戊子 (1,447년 명(明) 정통(正統) 12년) :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국경 방위를 유시하다.
《戊子 / 諭咸吉道都節制使:通事崔倫啓:中國人言:深處達達瓦剌也,先將兵億萬,幾殲三衛達子.又於夏秋間,謀襲海西野人,野人畏懾,挈家登山. :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유시하기를 : 통사(通事) 최윤(崔倫)이 아뢰는데 : 중국 사람의 말에 : 깊은 곳의 달달(達達) 와라야(瓦剌也)가, 먼저 억만(億萬)의 군사를 거느리고, 삼위(三衛) 달자(達子)를 거의 섬멸(殲滅)하고, 또 여름이나 가을쯤에, 해서(海西)의 야인(野人)을 습격하려고 모의하므로, 야인(野人)이 두려워 떨면서, 가족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하니, 其界若有深處野人往來者,密令聞見以啓:防禦諸事,益(動)〔勤〕布置,以備不虞. : 그 지경(地境)에 만일 깊은 곳의 야인(野人)이 왕래하는 일이 있거든, 비밀히 듣 보아서 아뢰고 : 방어하는 모든 일을, 더욱 부지런히 조처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하였다.》고 하였다.
…위 왕조실록(王朝實錄)에 등장(登場)하는 달달(達達) 와라야(瓦剌也)는 오이라트 (Oyrat 또는 Oira) 곧 와랄(瓦剌)을 말하는 것이다. 오이라트(와랄)는 17세기(世紀)에도 「볼가(Volga) 강과 우랄(Ural)강 하류(下流)지방에서 살던 종족(種族)」들이다. 21세기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이들은 신강성(新疆省) 북부지방(北部地方)의 준갈이(準噶爾)와 러시아(Russia) 땅에서 살던 자(者)들로, 일부(一部)가 서(西)쪽으로 이주(移住), 볼가(Volga) 강과 우랄(Ural) 강 하류(下流)지방에서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과연(果然) 그럴까?
…「오이라트(와랄)」의 본거지(本據地)는, 본래(本來) ‘우랄(Ural)산맥(山脈)’이다. 왜냐하면 「오이라트는, 숲의 사람들」이란 의미(意味)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볼가(Volga)강과 우랄(Ural)산맥(山脈) 남(南)쪽 주변에서 살던 종족(種族)」이다. 이들이 현재(現在)의 신강성(新疆省) 준갈이(準噶爾) 또는 그 북부지방(北部地方)에서 서(西)쪽으로 이주(移住)했다는 말은 역사왜곡(歷史歪曲)이다.
이러한「오이라트(와랄)」에 대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함길도(咸吉道) 북부지방(北部地方)에서 활동(活動)했던 종족(種族)이라고 하였고, 또 “해서야인(海西野人)들이 공포(恐怖)에 떨었다.”고 하였으니…해서(海西)가 어딘가? 볼가(Volga)강이 있는 곳이 카스피해(Caspian Sea)이며, 당시(當時)의 서해(西海)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함길도(咸吉道) 땅이 어디까지였는가?
한반도(韓半島)로부터 중국대륙(中國大陸)을 건너고,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건너, 우랄산맥(山脈)까지였다고 할 텐가? 「Yes!」 그렇다.
다만 다른 것은, 반도(半島) 땅에 조선(朝鮮)의 「‘신주(神州)=서울=황성(皇城)=황궁(皇宮)’이 없었다.」는 것일 뿐, 반도(半島)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동(東)쪽 변방(邊方) 땅에 속해 있었을 뿐이다. 또한 그 서(西)쪽 영토(領土)의 한계(限界)는, 「동구라파(東歐羅巴)와 흑해(黑海)연안(沿岸)까지였다.」는 거다.
역사(歷史)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은 정치적(政治的)인 이유(理由), 국가(國家)간의 이해관계(利害關係), 경제적(經濟的)인 요인(要因)등으로 인해, 진실(眞實)을 외면(外面)한 채, 목적(目的)을 위한 방향(方向)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밝혀내는가? 하는 것이 또한 중요(重要)한 것이다.
반도인(半島人)들은 정말로 순진(純眞)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순진(純眞)한 척, 숨 죽이고 있는 걸까?
○ 위의 글은 특정단체(特定團體) 또는 특정개인(特定個人)을 비난(非難) 또는 비하(卑下)하고자 쓰여진 글이 아님을 먼저 첨언(添言)합니다. 오직 조선사(朝鮮史)를 위한 진실(眞實)규명(糾明)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2017년 12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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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아직은 그다지 추운 날씨는 아니나, 어느 덧 계절은 한겨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평안 하신지요.
한국 사학계의 현재 모습은, 약칭 재야 사학을 포함하여 역사라는 말을 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 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역사서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고지도라는 것을 맹신 하고 있는데,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해 할수 없는 일들 입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한가지 역사의 사실을 말씀 드린다면, 오늘날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청나라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의 사찰들과 유적들이 꼬리를 물고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지역을 병탄 하면서 불교의 사찰들과 역사의 유적들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불교의 사찰과 역사의 유적들이 모두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러한 역사의 사실들을 보고 겪은 현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 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건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있는 자이산호의 서쪽 지역에서는, 청나라 말에 20만에서 3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자취를 감추듯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 선조들의 무덤만이 옛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때 뇌성벽력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겼었는데, 지금도 생생 합니다.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가 오늘날 이러한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은, 불과 백년사이에 벌어진 일들 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알고 있는 것과, 현지의 다른 나라에서 그들이 겪은 역사의 사실들을 들어 보면, 한국에서 배우고 익혀 알고 있는 내용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너무나 다르고, 우물안 개구리도[井中之蛙] 이러한 우물안 개구리는 없을 것 입니다.
말씀 하시는 바와 같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은, 오늘날 알타이산맥과 오늘날의 천산 지역 이었으니, 그 서쪽 강역의 영향력은, 오늘날의 흑해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것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고구려 당시에는, 반도의 경주에서부터 흑해의 지역과 서로 오고가는 교류가 빈번히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적과 유물이 있는데도, 이를 모르고 있을 뿐 입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겨울이니, 추워야 하는 것은 이치인데.....불편하죠.
아! 러시아가 중앙아세아 북부지방에 진출하면서 옛 문명을 대거 파괴했다는 말씀에 놀랍습니다. 한 편으로는 이해도 됩니다. 공산주의 사상엔 이러한 것들은 장애가 되기 때문이겠죠. 현지인들의 증언이라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봄니다.
그런데 자이산호 서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레 20-3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깜쪽같이 증발했을까요?
님의 말씀대로 19세기 말경부터 20세기는 겨우 일백년 이란 시간임에도 수백, 수천년의 생활을 바꿔 놓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옛 역사서 곧 고전을 연구하면서 어떤 것들은 몇 번씩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조선왕조사"를 빼 놓고는 역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도사학과 식민사학은 이제 각성을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일제와 서구인들의 하수인이 되어 총대를 메고 있을 건가?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봄니다. 유튜브같은 곳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떠 돕니다. 이러한 것들을 진실인 냥 하는 사람들도 문제지요.
우리도 이제는 무엇이 진ㄴ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반문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이 필요할 때라고 보아집니다.
식민사관을 깨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의 사학계는, 외국의 무슨 학자가 이러한 주장을 했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이러 이러 할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 외국의 저명하다는 학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
현지의 토인들만도 못한 자들 입니다. 하물며 자기 나라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사서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서의 기록들을 따르고 살피지 않는 자들, 참으로 어이없고 이해 할 수 없는 곳이 한국 사학계의 오늘날 모습 입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환국고려'님의 게재 글은 놀라움의 연속이어서, 많은 것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원전을 보면서 다시 또 보고, 또 보고 하곤 합니다.
현지를 답사한다는 것은 꿈에도 어려운 일임에도 이런 일을 실행하신 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추운 날씨에 '환국고려'님의 가정에 따스한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