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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水落山 興國寺)를 찾아서 ①
- 일주문에서 대방, 대웅보전, 시왕전까지 -
부처님 오신 날을 앞 둔 지난 4월 30일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남양주의 사찰 두 곳을 순례 했습니다. 수락산 흥국사(水落山 興國寺)와 천점산 봉영사(泉岾山 奉永寺)가 그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찰순례는 갑작스레 이루어졌습니다.
지난 4월 27일 금요일 새벽 아침예불을 하려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왼쪽 대퇴골 부분이 아파 서 일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더군요. 손으로 지압 을 하고 파스를 붙이고 겨우겨우 예불을 하고 글을 올린 다음 비니초님의 도움을 받아 조금 나아져 출장도 무난하게 다녀왔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기가 또 어렵더군요.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일은 또 다 해냈습니다. 그날은 서울 연등회가 있는 날이 었습니다. 올해는 모처럼 비니초님과 함께 연등회를 참관하고자 마음을 냈는데 이대로라면 걷는 것이 무리라 판단하여 그만 두기로 하고 tv시청으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하였습니다.
그날 염화님께서 미소님과 오후에 연등회에 나가는데 함께 참관하지 않겠느냐고 전화가 왔 는데 아쉽게도 갈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이대로라면 일요일 외출도 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아예 생각을 접었습니다.
토요일 밤, 비니초님이 지압을 가하고 아픈 부분에 T침을 잔뜩 붙이고 그 위에 파스를 붙여 주어 그대로 잤는데 일요일 아침 일어나는데 거뜬해졌더군요. 갑자기 아프던 다리가 갑자기 난 기분입니다. 다리가 괜찮아지니 비니초님이 이대로 집안에 가만히 보낼 것이냐고 하기에 어디가 좋을까 하고 생각해 낸 것이 남양주쪽 안 가 본 절에 가 보자고 제안하여 이루어진 것 입니다. 약사도량 흥국사로 이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수락산 흥국사에 대해서는 5년 전쯤 서울 정릉의 약사도량 봉국사를 순례했을 때 봉 국사의 약사부처님과 관련하여 영험하고 기이한 전설이 있는데 흥국사 약사여래와 기연을 맺고 있어 한번 가 보고 싶었던 절인데 이제야 그 뜻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기이한 이야기 는 약사전을 소개할 때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집에서 수락산 흥국사까지는 21.2km정도의 가까운 거리라 9시 반경쯤 느긋하게 나갔습니 다. 흥국사를 처음 가는 것이라 길안내기에 의지해서 가는데 날씨도 좋고 기분도 상쾌하였 습니다. 오전 11시경에 흥국사 일주문을 통과하였습니다. 주차장은 일주문을 통과하여 조금 오르면 나오는데 아직 순례객들이 한산하였습니다.
흥국사 일주문
처음 와 보는 흥국사입니다. 우선 일주문이 반기는데 무척 빛이 바랜 느낌입니다. 이제 흥국사에 왔으니 흥국사는 어떤 사찰인가 살펴볼 일입니다.
흥국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2331번지(남양주시 덕릉로 1071번길 58) 수락산의 큰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입니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21년(599) 원광법사(圓光法師)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처음에 는 절 이름을 수락사(水落寺)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의 역사는 한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선조(宣祖) 1년(1568)에 이르러 선조가 그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 (願堂)을 이곳에 지으면서 흥덕사(興德寺)라는 편액을 하사했으며, 인조(仁祖) 4년(1626) 다시 절 이름을 지금의 흥국사(興國寺)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흥국사 일주문 편액
정조(正祖) 17년(1793), 왕실에서 기허(騎虛) 스님에게 내탕금을 주어 사찰 전체를 중수하게 했으며, 순조(純祖) 18년(1818)에는 만월전(滿月殿)과 양로실(養老室)을 제외한 절 전체가 소실되었는데, 그 4년 뒤인 순조 22년(1822) 다시 왕실에서 내탕금을 내려 기허 스님으로 하여금 대웅전ㆍ시왕전ㆍ대방(大房) 등의 건물을 중수케 하고, 연화경 7축으로 경회(經會) 를 열게 했습니다.
또, 철종(哲宗) 7년(1856)에는 은봉 대덕(隱峰大德)이 신도 양씨의 도움을 받아 만월전을 고쳐지었으며, 고종(高宗) 7년(1870)에도 시왕전을 중수하였습니다. 또한 고종 15년(1878) 과 고종 25년(1888)에 각각 용암(庸庵)ㆍ제암(濟庵) 두 스님이 시왕전과 법당ㆍ요사를 중건 했습니다. 그리고 1917년에는 범화(梵華) 스님이 여러 당우를 고쳐지었다고 합니다.
흥국사는 조선 중기 이후 왕실의 원당으로서 발전할 수 있었는데, 한편 정조 14년(1790)에 는 봉은사ㆍ봉선사ㆍ용주사ㆍ백련사 등과 함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사찰로 선정 되면서 사격(寺格)이 더욱 높아지기도 하였습니다. 오규정소(五糾正所)는 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머물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동시에 관할 사찰을 관리하던 곳입니다.
비전(碑田)
일주문에서 100m 남짓 올라가면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 바로 위 언덕에 비전(碑田)이 있 습니다. 이름 모를 부도도 한 기(基) 있습니다.
수락산 흥국사 기적비(水落山 興國寺 記蹟碑)
이름 모를 부도 한 기(基)
흥국사 전주지 월영당 대선사 공덕비 興國寺 前住持 月迎堂 大禪師 功德碑
흥국사 전주지 한월선사 공적비(興國寺 前住持 漢月禪師 功績碑)
청신녀 신씨 혜월 공덕비(淸信女 申氏 慧月 功德碑)
법당으로 가는 길에
흥국사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찰(願刹)입니다. 인근에 덕흥대원군의 묘(墓)가 있 는데 이곳에서는 이 묘를 덕릉(德陵)으로 부르고 흥국사를 '덕절'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흥국사로 갈 때 당고개역에서 덕릉터널 앞 그 옆으로 난 길로 올라가 덕릉고개를 넘어갔는 데 그러고 보니 '덕릉'이란 이름이 많이 등장하더군요. '덕릉교ㆍ덕릉터널ㆍ덕릉마을ㆍ덕 릉로' 등등... 그런데 덕흥대원군의 묘가 덕릉으로 불리게 된 것은 선조의 효심에서 비롯되 었다고 합니다.
대원군(大院君)이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嫡子孫)이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왕족 가문 중 에서 임금을 세우는데,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봉하던 작위를 말합니다.
대원군하면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유명하지만 조선 역사상 네 명의 대원 군이 있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덕흥대원군을 시작으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光海君)이 폐출되어 보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그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추존하고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한 바 있고, 조선 후기 헌종(憲宗)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덕완군(德完君)이 보위에 올라 철종(哲宗)이 되자 생부인 전계군을 전 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하였고, 또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이 보위에 올라 고종(高宗)이 되었습니다. 본래 흥선군은 영조의 현손(玄孫) 남연군 (南延君)의 넷째 아들인데 둘째 아들이 보위에 오르자 고종은 생부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으로 봉했습니다.
조선 중기 명종(明宗)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붕어(崩御)하자 대를 이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때 정비(正妃) 소생의 왕족이 한 사람도 없어, 중종(中宗)의 후궁인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인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의 제3왕자인 하성군 (河城君)으로 하여금 명종의 뒤를 잇게 하였습니다. 이 왕이 바로 선조(宣祖)입니다.
연등과 황매화
선조가 즉위하자 이미 사세(辭世)하여 수락산 자락에 묻힌 아버지인 덕흥군을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으로 추존(推尊)하였습니다. 그리고 흥국사에 덕흥대원군의 원당이 지었던 것 입니다. 덕흥대원군이 선조의 아버지지만 왕이 아니기 때문에 대원군의 무덤을 묘(墓)라고 부르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왕을 지낸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무덤도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되었기에 묘(墓)라고 하지 능(陵)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대원군이겠습니까? 능(陵)은 오직 왕과 왕비(추존왕 포함)에게만 붙여지게 됩니다.
요즘 황매화가 한창입니다.
그런데 선조는 자신의 선친의 무덤이 '능'이라 불리지 못하고 '묘'라고 불리는 것이 안타까워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궁중의 땔감을 동대문 밖에서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것을 구입하는 궁중 사람에게 시키기를 덕릉(德陵), 곧 덕흥군의 능에서 가져왔다고 하 면 값을 후하게 쳐주고 사들이지만 덕흥군의 묘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자 금새 효과가 나서 민간에서는 모두 덕흥대원군의 무덤을 덕릉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덕흥대원군의 묘는 '덕릉'으로 불리고, 흥국사는 '덕절'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조금 오르면 나타나는 전경
대방 앞의 향나무
대방 앞의 향나무들
대방 앞에는 좌우에 건물을 훌적 넘는 나무가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향나무라고 합니다.
이 건물은 대방이라 합니다.
대방(大房)의 모습
흥국사(興國寺) 편액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글씨-
남양주 흥국사 대방(南楊州 興國寺 大房)
-등록문화재 제471호. 1878년 무렵 건립-
「이 건물은 염불 수행 공간과 누ㆍ승방ㆍ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함께 가춘 독특한 형식의 복합 법당이다.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근대기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벗어나 사찰의 여러 기능들을 통합 수용하여 경제성과 합리성을 추구 하였다. 이 대방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특한 건축 양식과 공간 구성 및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옆에서 바라본 대방 모습
대작불사 안내판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대방 뒤에 대웅보전이 있어 우선 법당에 들어 예불하고자 대웅전으로 가고 있습니다. 왼쪽은 종무소이고 정면의 작은 집은 응향각(凝香閣)으로 불교용품 판매점입니다.
우선 비니초님이 공양미를 사고 난 후 기왕에 왔으니 기와불사를 하자고 해서, 기와 두 장에 장인ㆍ장모님 건강발원과 손윗 처남 가족의 안녕을 담아 불연을 맺어 주고자 했습니다. ^^
법당으로 향하니 영산전이 나오고 바로 옆에 대웅보전이 있습니다. 대웅보전 앞은 연등줄이 쳐져 있어서 부처님 오신 날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대웅보전은 대방 바로 뒤에 위치에 있는데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왼쪽엔 지장전(地藏殿), 오른쪽엔 영산전(靈山殿)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장전 뒷편으로 만월보전(滿月寶殿)이 있고, 만월보전 왼쪽 윗쪽엔 단하각(丹霞閣)이 있습니다. 만월보전에서 왼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영산전과 대웅보전 뒷편에는 독성각(獨聖閣)이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모습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순조 18년(1818)에 큰 화재로 소실되었다 가 3년 뒤인 순조 21년(1821)에 중건되었습니다.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로 제56호로 지정되 어 있습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虛空境界豈思量 허공경계기사량 허공의 경계를 어찌 사량할 수 있겠는가? 大道淸幽理更長 대도청유리갱장 대도는 맑고 깊어 이치 또한 기나니 但得五湖風月在 단득오호풍월재 다만 다섯 호수에 풍월 있음 안다면
이 게송은 《금강경오가해》에서 야보(冶父) 스님이 읊은 게송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대웅보전 앞에는 오색연등이 걸려 있습니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대웅보전의 모습
목조석가삼존불(木造釋迦三尊佛)
본존 석가모니불(本尊 釋迦牟尼佛)
좌보처 문수보살(左補處 文殊菩薩)
우보처 보현보살(右補處 普賢菩薩)
법당에 기도하시는 분이 있어 신중탱화는 어떤 담지 못했습니다.
칠성탱화(七星幀畵)
감로탱화(甘露幀畵)
시왕전(十王殿)
시왕전은 대웅보전 좌측 바로 옆에 있습니다. 전각이 백등에 가려져 본모습이 잘 안 보이지 만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순조(純祖) 21년(1821) 중건 때의 건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시왕전(十王殿)은 대개 지장전(地藏殿) 또는 명부전(冥府殿)이라 합니다. 지장전은 지장보살 이 주존(主尊)으로 계신 법당이란 뜻이고, 명부전은 지장보살님께서 명부(冥府)에서 중생 구 제를 위해 애쓰시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시왕전은 명부에서 시왕(十王)들이 망령(亡靈)의 심 판을 담당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명부(冥府)는 죽어서 다음 생에 어디로 갈지 심판을 받는 곳입니다.
우보처 무독귀왕 대원본전 지장보살 좌보처 도명존자
왼쪽의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녹사(錄仕) 사자(使者)들
왼쪽에는 시왕 중 홀수에 해당하는 제1 진광대왕(秦廣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7 태산대왕(泰山大王), 제9 도시대왕(都市大王)이 열좌(列坐)하고 있 습니다. 또한 판관(判官) 녹사(錄仕) 사자(使者)는 서 있는 모습입니다. 생전에 지은 선악의 업을 비춰 주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도 보입니다.
오른쪽의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녹사(錄仕) 인왕역사(仁王力士) 등
오른쪽에는 시왕 중 짝수에 해당하는 제2 초강대왕(初江大王), 제4 오관대왕(五官大王), 제6 변성대왕(變成大王), 제8 평등대왕(平等大王), 제10 오도전륜대왕 (五道轉輪大王)이 열 좌(列坐)하고 있습니다. 판관(判官), 녹사(錄仕), 인왕역사(仁王力士) 등은 서 있는 모습입니 다.
시왕전을 참배하고 뒤에 있는 만월보전으로 향합니다. 만월보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에는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다음 2탄에서 소개하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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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일요일 아침 거뜬히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다행으로 여겼습니다.국사에 대한 대충적인 이야기는 들으며 갔습니다. _()_
약사도량으로 안내하려고 거뜬해진 것 같습니다.
약사도량을 찾아서 그런지 그 이후로 가벼워졌습니다. 이번 순례로국사를 새롭게 알았습니다. 백우거를 모느라 수고하셨습니다. _()_ _(())_
시
경기도 남양주 흥국사의 지장전까지의 순례길 잘 보았습니다.
제 2탄으로 저도 발길을 옮깁니다...^^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국사가 많은데 제가 가 본 국사는 이제 세 군데가 되었네요.국사, 경기 고양 국사와 남양주 국사... 제2탄도 감해 보세요. _()_ _(())_
전남 여수
남양주국사 대방은 정릉의 천사와 모양새와 규모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국사 순례기 잘 봤습니다. _()_
그 무렵에 대방이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천사의 대방도 선대원군의 글씨였지요. _()_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