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떠난 피안의 세계 속리산 법주사 [문화를 품은 사찰기행]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捌相殿)·명부전(冥府殿)·원통보전(圓通寶殿)·약사전(藥師殿)·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능인전(能仁殿)·진영각(眞影閣)·사리각(舍利閣)·염화실(拈華室)·삼성각(三聖閣)·응향각(凝香閣)·진해당(振海堂)·궁현당(窮玄堂)·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① 대웅보전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한 것으로, 총 120칸에 건평이 170평, 높이가 61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물이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포식(多包式) 중층건물로서 무량사(無量寺)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벽암이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좌측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盧舍那佛), 우측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만도 3.9m에 이른다. ② 팔상전국보 제55호인 팔상전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나라 목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 의신이 세웠고, 776년에 병진(秉眞)이 중창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재건하였다.내부에는 8폭의 팔상탱화(八相幀怜) 앞쪽으로 나한상(羅漢像)을 3열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본존불을 봉안하였다. ③ 능인전능인전은 사리탑의 계단을 오르는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전각으로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500나한을 안치하였다. 이 전각은 1624년에 벽암이 중창한 건물로서 건평이 16평이다. ④ 원통보전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의신(義信)이 창건하고 진표가 중창하였으며, 벽암이 1624년에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높이 2.8m, 허리둘레 1.9m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수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담고 있는 거대한 목상(木像)이다. 원통보전은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다 ⑤ 일주문과 금강문일주문은 정면 1칸의 건물로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다.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⑥ 진영각과 사리각진영각은 이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서, 일명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이라고도 한다.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까닭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映嬪李氏)가 사용하던 원당(願堂)이었기 때문이다.내부 중앙에 개산시조(開山始祖) 의신과 전법초조(傳法初祖)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이름을 알 수 없는 2인의 영정을 비롯하여 세홍(世弘)·함월(函月)·명찰(明察)·정준(靜俊)·장신(莊信)·도홍(道弘)·홍민(弘玟)·지영(智榮)·영린(玲璘)·진하(震河)·탄응(坦應)·석상(石霜)·금오(金烏)·명일(冥一)·보흔(普欣)·충은(衝恩)·법영(法英) 등 모두 24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사리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緣起)를 적은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한 세존사리비에는 이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공민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을 때 왕은 사신을 통도사로 보내 석존사리 1립(粒)을 옮겨오게 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⑦ 염화실과 응향각염화실과 응향각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모두 선원(禪院)에 부속된 것이다. 예전에는 대향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총지선원(總持禪院)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선원 위에 있는 염화실은 조실(祖室)이 기거하는 곳이며, 응향각은 노전(爐殿)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⑧ 용화보전이 절에 있었던 유지(遺址)로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다. 이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었다. 용화보전은 산호전이라 불리었고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산호전이라는 명칭은 이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보전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丈六像)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을 압수하라는 명을 내려 불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다.현재에도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삼존불의 좌대 3기가 있다. 이 용화보전 터에는 1964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으며, 1986년 이를 헐고 청동 160t을 들여서 1989년 사월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점안(點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