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대신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달게 잤는지 모른다. "굿모닝. 안녕히 주무셨어요." 미사코는 화사하게 웃었다. 단정한 차림새로 화장기가 있었다. 어색하지만 우리말로 인사를 하는 게 귀여웠다. 미사코가 내민 메모지는 병규 녀석이 남긴 것이었다. 내 일정에 관한 시간표를 미리 적어서 내가 불편 없이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아마 녀석은 아직도 자고 있을 것 같았다. 메모는 엊저녁에 만들어 두었거나 미리 마사코에게 전해 주고 잠든 것인지도 모른다. 창문을 열었다. 퍽 고즈넉한 아침이었다. 야구놀이를 하고 있었고 오피스 건물 같아 보이는 사무실 창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사코는 수건과 칫솔을 챙겨들고 생긋 웃었다. "잘 잤냐?" 알아들었는지 그냥 그러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욕탕을 가리켰다. 아마 세수 겸 샤워를 하라는 것 같았다. 미사코가 따라 들어오려고 하기에 손으로 가볍게 어깨를 밀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또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놈의 보조개가 더럽게도 예뻤다. 아침 세수하는 데까지 따라 들어와 발가벗은 채 비누칠해 주는 건 싫었다. 창피하다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을 보고 나자 갑자기 상쾌한 기분이 되고 싶었다. 끈끈한 육체의 냄새를 이 상쾌한 파리의 아침에 얽힌 다혜의 편지 얘기가 떠올랐다. 을씨년스럽지만 혹독한 추위도 아니고 맑지도 어둡지도 않으면서 겨울 냄새가 나는 파리의 아침이 되면 다혜는 괜히 서글퍼진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파리, 낯설기만 한 도시, 그 한가운데서 을씨년스럽게 코트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으로 걸어다니고 있을 다혜 생각이 어째서 갑자기 난 것일까? 병규 자식을 깨워서 이 미사코란 탤런트 계집애를 내가 아주 데리고 가도 되는 거냐고 물어볼까? 나는 샤워를 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일본 제일의 미녀라고 소개되는 미사코를 데리고 다혜 앞에 만약 나타나게 되면 어찌 될까? 아마 난 그 자리에서 기절하도록 당할 사실만 알아도 그런 지경이 될 게 빤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비밀을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다혜 앞에 나선다는 것조차 부끄러워 해야 될 그런 사내이면서 언제나 가장 떳떳하고 정숙한 사내인 척, 또는 가장 정의로운 일에만 매달려 그런 잡스런욕망엔 외눈 깜짝 않는 사내처럼 행세해 오기만 했었다. 다행인지 다혜는 믿어 주었다. 그러나 염라대왕 시리즈의 공업용 미싱사건에 걸려들기로 말하자면 나 같은 사내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쪼가리 같은 신세를 면키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떤 기막히게 머리 좋은 하나님 비슷하게 머리가 좋은 컴퓨터 과학자가 있었답니다. 저주하는 버릇이 있는 노총각인 이 과학자 선생께서 하루는 사람 놀라게 하는 컴퓨터를 만들었답니다. 처녀감별 컴퓨터와 총각감별 컴퓨터였답니다. 갑자기 그 거리는 적막해졌거나 정신 없이 꼬마 계집애들이 몰려 들거나 그랬겠죠 머. 어느날 정숙하고 예쁜, 소문이 짜하게 난 어떤 자매가 사람들이 뜸한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답니다. "우리 저기 지나가 볼까?" 언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답니다. "뭘 그까짓 걸 믿어? 난 별루야." 동생이 괜히 꼬리를 감추었답니다. 그러니까 언니가 더 자신만만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쩌지? 에이, 그럼 관두자 머. 네가 켕기는 게 있나부지." 그리고 깔깔, 까르르, 끼륵끼륵 웃어댔답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동생이 갑자기 언니를 떠다밀었답니다. 컴퓨터가 찌르릉거리며 울었겠죠. 그리고 그 처녀감별 컴퓨터에 커다란 자막과 함께 크고 우렁찬 소리가 튀어나왔답니다. "넌 걸레다!" 언니는 노발대발 컴퓨터가 망녕이 든 거고 장난꾸러기의 장난이고 뭐 그렇게 횡설수설, 잘난 사람보다 그 비서가 더 설치듯 떠들었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언니는 자신만만하게 동생을 끌고 그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답니다. 언니는 목돈을 들여 이름난 병원에 가서 이쁜이 수술인지 처녀재생 수술인지 뭐 그런 걸 기막히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자신만만했던 거랍니다. 컴퓨터가 찌르릉거리고 울고 우렁찬 소리가 튀어나왔답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올시다!" 어쨋든 과학이 지나치게 발전하고 컴퓨터가 그 지경까지 발전하면 이 세상은 불행해질 것 같다. 과학자들이여 과학을 제발 퇴보시켜라. 과학을 맹신하는 무리 때문에 지구는 자꾸자꾸 멸망의 길로 접근하니까. 사람은 애초 대충, 엉거주춤, 두리뭉실 그마게 사는 샤워를 끝내고 나서 대충 머리를 빗었다. 미사코는 계속 옆에 붙어 잔시중을 들어 주었다. 메모지를 살펴보니 점심때는 이시하라보다 높은 대화단 본부의 실력자와 만나게 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흥정이나 타협점을 찾는 실마리가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나면 점심 때까지 아무 계획도 없었다. 아마 그 시간에 충분히 잠을 자두거나 거리 구경을 하거나 편한 대로 하라는 시간일 것 같았다. 아침 밥은 미사코와 둘이 내려가 호텔 지하식당에서 하거나 병규 녀석을 깨워 데리고 나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낯선 땅에 와서 성질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정말 벧이 뒤틀렸다. 편하게 의사소통 같은 걸 하고 살아야지 좀 크고 돈 좀 있다는 녀석들이 사는 나라에선 제 나라 말만 제일로 알고 그 말로 지껄이는 걸 콧대로 알고 지내는 꼴을 보면 가소로운 일이었다. 빌어먹을 밸이 그만 뒤틀리려면 빨리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아침 밥을 먹고 나는 미사코만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나오면 번화가와 연결되는 거리였다. 미사코는 가볍게 팔짱을 끼고 생글거리며 따라다녔다. 한겨울인데도 춥지 않은 기온이었다. 약간 서늘한 가을 날씨 같기도 했고 이른 봄 기운이 도는 날씨 같기도 했다. 거리에 서 있는 가로수의 남국정취가 이곳 기온이 어떤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한문자가 많아 그렇게 낮설지만은 않은 거리 사람들이 미사코를 알아보고 손짓을 보내거나 인사를 했다. 남학생처럼 보이는 녀석들이 수첩과 볼펜을 들고 졸졸 따라오기도 했다. 미사코는 싫다는 기색 한마디 없이 사인을 해 주기도 했고 악수를 하거나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병규 녀석이 하던 말이 거짓은 아니라는 게 드러난 셈이었다. 미사코가 인기 텔런트라는 걸 거리에 나오니 쉽게 알 수 있었다. 소문 나도 괜찮으냐, 팔짱을 푸는 게 어떠냐, 네가 그렇게 유명한 텔런트라면 금방 신문의 기삿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불편하면 들어가도 좋다는 얘기를 손짓 발짓과 한자와 영어 몇 마디와 표정으로 안간힘을 써서 얘길 해 보았다. 제대로 의사소통은 안 되었겠지만 뜻은 통했다. 아무 상관 없다는 것 같았다. 한참 거리를 되짚어 올라가자 현란한 간판과 시끄러운 구슬소리와 담배연기 가득한 오락실이 겹겹으로 늘어서 있었다. 미사코는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빠찡고 비슷한 기계라는 걸 알았다. 회가 동했다. 당기고 조르고 뒤집고 치고 패는 노름 종류라면 무엇이든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들부들 떨릴 만큼 신기가 솟아나는 사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여기는 일본 땅이다. 내가 돈을 잃든 따든 그건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뿐더러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내 기술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들어가자." 나는 문을 열고 썩 들어섰다. 아침 나절인데도 젊은 애들과 늙은이들이 기계 눈깔사탕만한 쇠구슬을 넣고 조종간을 조심스럽게 맞추고 있었다. 나는 한 바퀴 돌며 어떤 형태의 빠찡꼬인지를 살펴보고 사람들의 노름 실력이 어떤지 훑어보았다. 달랑거리는 밑천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실력자인 듯한 사람들은 의자 밑에 다섯 상자쯤 구슬을 따서 밀어넣고 여유만만하게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나는 일만 엔짜리 지폐를 교환기에 넣어 일천 엔짜리로 바꾼 뒤에 이천 엔을 구슬교환대에 넣었다. 중량감 있게 플라스틱 바구니에 쇠구슬이 쏟아졌다. 감촉이 서늘했다. 나는 한 상자를 미사코에게 내밀었다. 미사코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우리는 빈 자리가 나란히 나 있는 곳으로 갔다. 미사코는 벌써 쇠구슬을 쏟아넣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 인기인이라는 멍에 때문에 이런 에 나다닐 수 없고 길거리를 자유스럽게 돌아다니지 못한 스트레스가 풀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쇠구슬을 만졌다. 섬뜩하게 감촉이 가슴을 건드렸다. 조종간을 쥐었다. 조종간에서도 나를 흥분시킬 만큼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우르르 쏟아넣었다. 그리고 힘차게 조종간을 돌렸다가 늦추었다. 쇠구슬이 튀었다. 정확하게 쇠구슬이 튀기만 하면 쇠구슬 삼키는 구멍이 비행기 날개처럼 벌어졌고 그 위로 콩 튀듯 쏟아져 들어간 구슬이 토하듯 다른 쇠구슬을 물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기계를 서너 번 때렸다. 쏟아라. 수없이, 네가 할 수 있는 한 정신없이 토해내라. 넌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나하고 대결하는 놈이다. 정당하게 한판 붙어보자. 조종간을 힘 주어 밀었다가 늦추어 주고 늦추었다가 밀어 주는 섬세한 동작으로 늘어 붙었다. 쇠구슬이 와그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정신 없이 토하거라.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임무는 토해 내지 않는 일이겠지만 나한테, 장총찬이란 놈에게 걸렸다. 넌 오늘 굴욕의 날이다. 미사코도 제법 열심히 조종간을 쥐고 있었지만 쇠구슬이 한 주먹 거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미사코와 자리를 바꾸어 앉아 당겼다. 와그르르 와그르르. 기계는 정신 없이 두 개가 가득했다. "가서 바구니 가져와." 미사코는 신바람이 났는지 바구니를 한아름 들고 나왔다.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조종간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쇠구슬은 정신 없이 튀었고 틈틈이 정조준이 되어 쏟아지는 구멍으로 몰려 들어갔다. 와그르르 툭탁거리며 쇠구슬은 정신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쇠구슬이 떨어질 만하면 미사코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내 자리에 앉은 채 미사코의 빠징꼬 작동기를 당겨 주었다. 와그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미사코의 얼굴이 기쁨으로 들끓었다. 주인인 듯한 사내가 내 자리에 와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웬만큼 쇠구슬을 했다 백여 대가 넘는 기계에 모조리 도전할 수는 없었다. 일본 땅에 와서 굶진 않겠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어 시간씩만 빠찡고 앞에 앉아 있으면 호텔 비용과 밥먹을 것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와그르르 와그르르 와그르르. 내가 앉는 자리마다 쇠구슬은 정신 못 차리고 쏟아졌다.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에 쇠구슬이 가득 담겼다. 내가 상자를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쌓여만 갔다. 미사코는 번번이 쇠구슬을 잃었지만 내가 마음 놓고 당기도록 대 주었다. 조정간 손잡이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쇠구슬이 쏟아지는 손장난이었다. 나는 손 끝에 감촉을 느끼며 조정간을 잡고 좌우로 당겨 주었다. 건드렸다. "뭐야?" 나는 고개를 들어 녀석들의 표정을 살폈다. 쉽게 건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본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잠깐 나가자는 거냐?" 미사코가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지껄이는 뜻을 대충 짐작한 것은 밖을 가리키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잠깐 나가자는 얘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내 엄청난 솜씨를 보고 갔으니까 건달들을 데려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너저나 말이 통해야 말뜻을 알아 대꾸를 하든 할 텐데. 나는 어깨를 짚는 녀석들에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녀석들 표정이 험악해졌다. 자꾸 "무슨 뜻인가 알겠는데 너희들 잘 사니까 의료보험은 있겠지. 그래 나가보자. 무슨 춤을 추는지 봐 주지." 나는 플라스틱 상자를 밀고 나가 환전소로 갔다. 쇠구슬과 현금을 바꾸어 주는 여자가 혀를 내둘렀다. 가죽점퍼의 사내 녀석들이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미사코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사내들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내 실력을 알고 있겠지만 불안을 감추지는 못했다. 일만 엔짜리 몇 장과 일천 엔짜리 몇 장을 받아넣고 녀석들을 따라나섰다. 시끄러워서 아무도 우리들 행동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주인인 듯한 사내만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골목길로 데리고 가더니 한 녀석이 웃기만 했다. 미사코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주먹이 휙 날아왔다. 나는 가볍게 피하며 녀석의 엉치를 걷어찼다. 나머지 두 녀석이 잽싸게 칼을 꺼냈다. 잭나이프였다. 사긴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녀석을 차례로 걷어찼다. 세 녀석이 아스팔트 바닥에 길게 누웠다. 손을 털고 골목길을 나섰다. 미사코가 환하게 웃었다. 팔짱을 꼭 끼고 따라오며 뭐라고 지껄였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오락실로 갔다. 주인인 듯한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환전소에서 쇠구슬 몇 개를 집어들고 그 앞으로 갔다.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쇠구슬 열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쇠구슬 열 개는 환전소 옆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주인은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미사코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대화단 본부에서 나왔다는 간부를 만날 시간이 거의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어갔다. 할인판매를 한다고 써붙인 자동차들이 즐비한 공터를 지나치자 가전제품들을 길거리에 쌓아 놓고 큼지막하게 할인판매라고 써붙인 게 많았다. 병규 말로는 일본도 불경기가 심해 온갖 상품들이 싸구려로 팔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작은 식당 이층 방엔 이시하라와 병규, 미사코와 대화단 본부에서 나왔다는 대화단의 실질적 두목이라고 했다. 나이 든 두목은 일선에서 물러났고 후루가와가 실질적인 대화단의 실력자로 행세한다는 것이었다. 사십대 중반의 후루가와는 짧은 머리와 단정한 신사복 차림이었다. 눈빛이 매서웠지만 통 크게 생긴 표정과 강직해 보이는 자태가 첫인상에 드러났다. 삭사가 다 끝나고 술잔이 두어 순배 돌 때까지 후루가와는 의례적인 얘기만 했다. 어떻게 보면 인자한 중년 신사 같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승려의 표정이기도 했다. 세상 일에 달관한 사람 같았다. 일본 야쿠자의 두목 노릇을 할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것 같았다. "진짜 정담을 하시겠답니다." 병규가 단정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후루가와의 입에서 어떤 흥정이 나올지 궁금했다. "먼저 하카다로 모시게 된 점을 사과 드린답니다. 도쿄로 모시고 싶었지만 다른 단체에서 눈치 채고 있는 형편이고 귀한 손님을 야쿠자의 암투에 끌어넣을 수가 없어서 이곳으로 모셨답니다. 지금 야쿠자 그룹들은 심한 진통을 겪고 있답니다. 일본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지자 표면화된 것인데 서로 영역을 침범하거나 이권이 있으면 격렬한 투쟁을 일삼는 형편이랍니다. 한국에서 여자들을 사들여 오는 행위도 사실은 순수한 목적에서 시작된 것인데 최근에 변태업종이 생겼으며, 야쿠자 그룹의 공동사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 대화단도 어쩔 수 없이 소규모이긴 하지만 병규는 메모를 해 가며 통역을 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해라. 나하고 상관 없는 문제 아니냐? 나는 여자장사꾼들의 조직을 훑으러 왔지 그런 사정을 들으려고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라." "바로 그것 때문에 초청한 거랍니다. 대화단이 처음에 한국 여자들의 취업을 알선한 것은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겠다는 순수한 생각에서였는데 다른 단체가 변태영업으로 전환시켰고 대화단의 일부 단체에서도 그런 짓을 따라 한 걸 시인한답니다." "지금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대화단은 그런 짓을 포기하겠답니다. 정당한 보수를 받고 정당한 문화교류가 일을 눈치챈 다른 집단에서 우리 대화단을 배반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집단이 공동조약을 맺어 우리 대화단을 공격하게 된다면 큰 희생이 따를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병규는 후루가와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며 말했다. "그래서 나를 초청했다는 거냐?" "그렇답니다. 한국에서의 대화단 조직이 드러난 마당에 더 이상 그런 거래를 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 대화단의 두목께선 그런 일을 포기하라고 하셨답니다. 답답해서 사정 말씀이나 드리고 싶어서 모신 거랍니다." "나는 사정 얘기를 들으려고 온 건 아니다. 뿌리를 뽑으려고 왔다." 야쿠자 조직과 심한 투쟁이나 결정적으로 사업 전환이 될 만한 다른 사업이 나서기 전엔 어려운 일이랍니다. 결국 형님이 그들과 대결하거나 아니면 점조직을 분쇄하는 소극적 방법밖에 없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 "그래서 형님과 손을 잡고 싶다는 겁니다." "어떻게?" "형님 조직과 한국에서 다른 사업을 할 수만 있다면 형님이 얘기하는 여자장사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여자장사와 대치될 수 있는 사업이라면 빤하다 싶었다. "어떤 사업이냐고 물어라." 병규와 이시하라가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다. 후루가와도 가끔 말을 거드는 것 "현재 한국과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형님네 조직의 이익이 최대한 보장되고 이쪽 후루가와 두목이 다른 조직과 마찰을 피하며 할 수 있는 사업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대화단은 재력도 있고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규의 설명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 말하기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후루가와와 이시하라의 표정도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미사코는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눈치도 아니었다. "일본 애들이 원하는 게 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말 만들어 내지 말고. 나는 차 치고 포 치는 꼴 싫은 놈이다. 내 말 병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씀 드리죠. 배경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 같아서 그럽니다. 말하자면 야쿠자 조직끼리의 복잡한 사정과 불황으로 서로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형님네 조직 같은 딴딴한 조직과 터놓고 얘길하고 굳게 손을 잡아 서로 상부상조해야 할 딱한 입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다. 본론을 말해라." 얼핏얼핏 스쳐 지나가는 말투와 나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이면에 이만한 흥정과 흉계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남는 일이었다. "그럼 이해하시리라 믿고 단도직입적으로 병규 녀석은 마치 어려운 상대와 마주 앉아 은밀한 얘기를 하듯 자세를 고쳤다. "이 새끼야, 뜸 들이지 마!" "예. 이건 대화단과 형님네 조직간에 흥정입니다.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마약 판매권의 분할이라든지 밀수 협상이 있습니다. 서로 신의를 보이기 위해 위장이긴 하지만 서로 지사를 설치하여 정당한 무역업무처럼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답니다. 그런 모든 것의 자금은 우리 대화단이 제공하며 만약 사고가 생기거나 도피 루트가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 제공하겠다는 게 우리 대화단의 제안입니다." 병규나 이시하라 일당은 내게 엄청난 조직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베나 사사키의 보고서에 내 조직이 얼마나 생각이 들었다. 아베 일당을 잡아들일 때 보여 주었던 애들의 민첩한 행동과 차량 동원이나 신속한 연락망을 생각하면 그런 보고서를 작성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쪽같이 나를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 발목을 잡히자 내 조직이 어마어마하게 커보였던 모양이었다. 춘삼이 형의 조직이나 나를 위해 뛰는 애들의 숫자나 내 기만한 움직임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나더러 밀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마약 운반책이나 하란 얘기냐?" "그게 아니라 정당하게 무역회사를 차리자는 겁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형님은 이해하실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병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황일수록 밀수나 마약 따위는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고, 사고가 잦은 여자장사보다 큰 장사보다 큰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경제 수준이 안정세인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이 쾌락의 공통분모를 찾고 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었다. 공창제도만 없을 뿐 온갖 섹스산업이 성행중인 일본에서 사람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값싼 외국여자를 불러들여 쾌락의 도구로 장식하려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내가 말하마. 난 너희들이 알고 있듯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밀수나 마약 밀매로 먹고 살아야 할 만큼 비겁한 놈도 아니다. 또 그럴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현대판 흥정하러 온 것은 아니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명랑해 보이려고 생글거리고 있던 미사코까지 긴장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 목소리와 표정이 일그러졌던 건 당연했다. "형님!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긴 일본이고 우린 거대한 조직입니다. 뒤처리를 할 만한 힘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형님과 형님의 부하들을 숨겨 주고 책임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안전한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형님이 얘기하는 여자 정신대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병규도 억양을 높였다. 병규는 통역이었지만 대화단의 야쿠자였다. 이번 일을 성사시켜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나를 피로하게 하지 마라. 그리고 나를 겁 주지 마." "형님, 우린 서로 좋자고 하는 것이지 형님을 이용하자는 게 아닙니다. 조직을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잖습니까. 더구나 형님처럼 많은 부하를 거느리려면 말입니다." "전해라.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후루가와의 숨통을 한방에 끊어 놓겠다고." "형님!" 병규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병규, 이 새끼. 네 모가지가 성한 건 네가 한국인이기 때문인 줄 알아라. 난 네 놈이 알 듯 조직을 가진 깡패도 아니고 목구멍 때문에 흥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베풀어 준 후의는 다른 걸로 갚는다고 전해라. 그리고 대화단 아니라 대화단 할애비라도 내가 목을 게 있다. 난 그냥 돌아가진 않는다.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기 남아 있겠다. 나를 방해하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간다." "형님! 후루가와상은 대화단 두목입니다. 우리 두목에게 손 대면 우리 전 대화단이 그냥 있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고 나머지 얘기는 그래도 전하겠습니다." 병규는 제대로 야쿠자 밥을 먹은 녀석 같았다. 얼버무리거나 위기를 넘기려는 수작 같은 건 않는 성미 같았다. "병규야, 난 한국 사람이다. 내 피를 속일 수 없는 한국인의 피다. 내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내 뜻을 굽하지 않을 거다. 전해라." 잡았다. 병규도 재빨리 내 손을 잡았다. "형님.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면 붙잡진 않겠습니다. 아직 형님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다 전하고 서로 깨끗하게 일어서는게 좋잖습니까?" 나는 병규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이내 자리에 앉았다. 깨끗하게 일어서자는 말이 싫지 않았다. 사내로 태어나서 더럽게 보이기는 싫었다. "좋다. 내 뜻을 그대로 전하고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고 해라. 분명히 전해라." 병규는 후루가와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내 얘기를 전하는 것 같았다. 후루가와와 이시하라의 표정은 침착했다. 미사코의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설명하는 게 분명했다. 주고받는 말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진지한 표정 속에서 나는 거물다운 야쿠자 두목의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한참만에 병규가 나를 향해 돌아앉았다. 병규의 표정은 밝았다. "후루가와 두목께서 형님 말씀 듣고 기분이 좋으시답니다.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하자고 하십니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도와 드리겠답니다." "고맙다고 전해라. 긴 말 않겠다. 일본에도 이런 사내가 있다는 게 기쁘다." "형님, 하실 부탁이 있으면 지금 하세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방해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없다." 후루가와는 명함에다 몇 자 적어서 내밀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연락하시고 어려울 땐 내밀면 도움이 될 거랍니다." "됐다. 가자." 내가 일어섰다. 후루가와와 이시하라가 힘 있게 내 손을 쥐었다. 말이 안 통하는 게 답답했다. "미사코 데리고 가시겠어요?" 병규가 물었다. 나는 미사코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계집애, 더럽게 예뻤다. 미사코의 빛나는 눈동자와 밤을 새우며 서툴지만 정열적인 희생을 보이던 육체를 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력적인 계집애였다. 일본 제일의 미인이라고 해도 탤런트라는 게 드러난 마당에 새삼 그녀의 조화 있는 몸매와 사근사근한 자태가 마음에 남았다. "이애를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말입니다. 이건 강제가 아니라 미사코도 원하는 일입니다." "처음엔?" "물론 강제였겠죠. 그러나 이젠 아닙니다. 형님과 계속 교제하고 싶답니다." 하룻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녀의 가슴 속 얘기는 알 수가 없었다. "연락처를 주고 일단 돌려보내라. 한창 커나가야 할 여자에게 상처를 남기긴 싫다." "상처요? 형님도...... 여긴 안 병규와 미사코가 한참 두런거렸다. "좋답니다. 그리고 연락처는 제가 상세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됐다." 우리는 또 한번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후루가와와 이시하라가 차 문을 열어 주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병규가 앞자리에 앉았고 미사코는 뒷자리 안쪽에 앉았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후루가와의 표정은 밝았다. "미사코는 보내기로 했잖아?" "짐이 호텔에 있습니다." "넌?" "후루가와 두목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형님이 무슨 짓을 하든 간섭 말고 도와 주라고요. 갈 때까지." "후루가와 그 친구 멋쟁이구나." 아니라는 걸."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다." "필요하다면 형님의 체류경비를 대겠답니다." 병규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임마, 굶어서 쓰러져 봐라. 내가 그냥 죽을 놈이라고 생각되지 않냐?" "그래서 아까 말씀 못 드렸죠." 이시하라가 내준 차를 타고 호텔 쪽으로 달렸다. 미사코는 가볍게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짧은 치마는 아니었지만 무릎을 살짝 올린 허벅지가 새삼 매력적이었다. 어젯밤에 이 계집애가 어떠했더라? 뜨거워지려고 몸부림 치던 생각이 나자, 그냥 보내기가 웬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이라도 더 데리고 있고 싶었다. 그러나 법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돌려보내는 게 내가 일본에 와서 보여 줄 일이었다. 결코 여체에 매달려 있는 별 수 없는 사내이기는 싫었다. 호텔 정문 앞에 차가 서자, 이시하라가 배치한 두 녀석이 쏜살같이 달려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애들도 돌려보내고 차도 보내라." "알았어요." 병규가 애들에게 뭐라고 얘기하자, 내게 허리를 꺽어 인사를 하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코 보내야지?" "비행기표 예약하길 했으니까 연락이 올 겁니다." 애들이 탄 차가 떠나고 우리는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미사코는 돌앗서 옷을 갈아입었다. . 새하얀 원피스였다. 가슴 끝에 보드라운 새털 같은 깃이 달린 옷이었다. 눈부시게 흰 옷이었다. 미사코는 무대에 선 여인 같았다. 같은 계통의 깃털이 수북하게 달린 하얀모자를 쓰고 똑같은 색깔의 장갑을 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보드라운 치맛결이 바람따라 일어섰다. 그녀의 자태가 한결 돋보였다.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생글거리며 웃는 미사코의 아랫도리가 살포시 드러나 보였다. 욕망이 지끈거리며 나를 물어뜯었다. 덮치고 싶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그녀의 아름다운 속살을 보았다. 그리고 온통 하얀색의 속옷과 보드라운 살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치곤 욕망이 물씬 묻어나는 자태였다. 그녀는 이 장면이 마지막 장면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젊고 예쁜, 더구나 누구든지 욕심을 낼 만한 인기 탤런트를 거부하는 사내에게 그녀는 또 다른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밤에는 스스로 옷을 벗었지만, 낮엔 정장을 한 채 나를 끌어당겼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눈빛과 육체와 가쁜 호흡과, 그리고 체온으로 말이 통했다. 아마 이런 것이 육체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상대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육체였다. 미사코는 모자를 가리켰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모자를 벗겨 침대 아래로 또르르르 굴렸다. 미사코는 예쁜 얼굴에 미사코는 두 손을 내밀었다. 보드랍고 새하얀 장갑을 벗겼다. 미사코는 뒹굴듯이 엎드렸다. 새하얀 원피스의 뒷자락엔 긴 지퍼가 달려 있었다. 나는 가볍게 지퍼를 열었다. 속살이 여리게 비치는 시미즈도 새하어다. 위에서부터 가볍게 끌어내렸다. 미사코는 춤 추듯 율동했다. 원피스가 벗겨지도록 몸을 들어 주었다. 마지막 옷 한 자락뿐이었다. 앙증맞았다. 미사코는 웃었다. 스스로 벗지 않고 벗겨달라는 그녀의 의사를 알 듯도 싶었다. 몸매에 자신이 있는 여자는 스스로 벗는 것보다는 누구든 벗겨 주기를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사코는 내 무술 솜씨를 병규에게 꼬치꼬치 캐어물으며, 생전 처음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고 얘기한 모양이었다. 얘길 잘해 주겠다고 했더니, 한국 말을 배울 수 있게 주선해 달라더라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마지막 옷을 벗겼다. 엉덩이를 가볍게 들었다.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미사코는 깃털처럼 일어났다. 내 옷을 한 자락씩 벗겨 나갔다. 뚫어지게 내 육체를 바라보며 손을 놀렸다. "아이 러브 유." 미사코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우며 한 말이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미사코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켜튼을 젖혔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사코는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나는 다른 일을 생각하기 싫었다. 오직 이 보드라운 흐느끼듯 호흡을 끊었다. 밀려드는 육신과 당기는 육신뿐이었다. 침대도 따라서 율동했다. 그녀는 마법의 상자에서 육망이라는 마술을 하나씩 꺼내듯 나를 빨아들였다. "아이 러브 유." 미사코의 가쁜 숨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랑할 수 없는 여자였다. 두 사람은 열락의 늪 속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가기만 했다. 열기였다. 뜨거운 바람이었다. 수분이었다. 그리고 목말랐다. 햇살은 비켜가지 않았다. 땀투성이의 미사코가 입술을 오므려 내 가슴의 땀을 땀방울이 수없이 맺혀 있었다. 귀여웠다. 그녀의 수줍은 정열이 내 가슴에 잔잔하게 남았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병규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이별식 하십쇼. 미사코 비행기표 예약됐답니다." "바꿔 줄게."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됩니까?" "그래라." 우리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병규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미사코와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다. "얘기했습니다. 곧 떠나야 합니다. 아마 요 아래 차가 와 있을 겁니다." "공항으로 가고 싶지만 돌아올 때 쓸쓸하고 "형님도 별 수 없네요." "여자한테 별 수 있는 놈 있냐?" "형님은 행복하십니다. 미사코가 사랑해도 좋으냐고 묻습니다." 나는 미사코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생글거리며 웃었다. "사랑하는 건 상관 없지만 내가 자신이 없다. 나도 되게 좋아한다고 해라." 병규가 몇 마디 던졌다. 미사코가 나긋나긋하게 대꾸하였다. "꼭 연락 달랍니다. 재회를 기다린다고요. 형님한테 되게 반한 모양입니다." "나도 꼭 만나러 가겠다. 도쿄까지 가게 될지 모르지만." "형님, 그러다가 따라가는 거 아닙니까? 질투 나서 못 보겠네요." 순진해서 열이 난 거다." "아무튼 대단합니다. 하룻밤에 사로잡으니 말입니다." "내려가야지?" "예." 미사코는 병규가 있어도 괘념치 않고 내게 매달렸다. 달콤하고 상큼한 입맞춤이었다. 병규 녀석이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쳐다보았다. 나도 뜨겁게 그녀를 받아들였다. 아래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들이 나를 보자 얼른 담뱃불을 끄고 고개를 숙였다. 미사코가 돌아섰다. 차문을 열어 준 녀석이 멍청하게 서 있었다. 미사코는 또 내게 다가와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미사코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아는지 천천히 사라져 갔다. 차가 모퉁이를 돌아 큰길로 나가자 병규가 내 팔을 잡았다. "들어가서 쉬시겠어요? 아니면 시내 구경이나 하실래요?" "한숨 자 두자. 뭣 좀 보려면 밤에 싸다녀야 할 테니까." "이별식이 길다 싶었는데...... ." "잔소리 말고 올라가자." 나는 성큼성큼 앞장 서서 걸었다. "형님, 뭐 마실 거나 먹을 만한 것 좀 사가지고 올라갈까요?" "냉장고에 가득 들었다. 그냥 올라가자." "밥 양이 적지 않았어요? 우리 나라 사람들 여기 오면 양이 적다고 투덜대던데요." "괜찮아. 담부턴 먹을 만한 곳으로 가면 되잖아." "신사더라. 일본 놈이지만 그만한 놈들만 있다면 미워하는 거 포기해도 되겠더라만...... ." "괜찮은 사람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시하라보다 몇 배 낫더라. 내 느낌이지만, 흥정도 안 됐는데 순순히 물러가고 돕겠다고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모르지, 더 큰 고기를 물기 위해서 그러는 걸지는...... ." 사실 내 머릿속은 좀 복잡했다. 하카다와 두목도 쩔쩔매는 대화단의 실질적 두목이라는 후루가와가 내 단호한 거절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게어쩐지 뒷일을 꾸민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한국 안의 점조직도 붕괴되었고, 말도 없이 돌아선다는 게 어쩐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우리 대화단이 언젠가는 일본을 쥐게 될 겁니다. 후루가와 두목은 충분히 그럴 만한 분입니다." "일본 암흑가가 어떤지 난 모른다. 그러나 그만한 배포라면 모르지...... ." "차차 아시게 됩니다. 결코 뒤돌아서서 다른 생각하는두목은 아닙니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동남아를 휘저으며 여자 긁어보으는 게 야쿠자의 주력사업이고, 마약 밀매와 밀수 루트로 치부하는 게 대화단의 사업이라면 알쪼 아니냐?" "그건 잘 모릅니다만...... 좋은 일도 많이 합니다. 장학금도 주고 불우한 애들을 위해 학교도 지어 주고, 가난한 애들이나 불구자를 말입니다. 야쿠자도 기업 아니겠습니까? 그 많은 식구들과 감옥살이하는 애들 뒷바라지를 뭘루 합니까. 그건 세계 공통 아닙니까? 형님네는 어때요?" 녀석이 슬쩍 유도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조직도 없고 맨몸이다." "믿을 수 없어요. 형님 같은 실력자라면 그냥 있을 리도 없고. 더구나 그만한 실력이면 천하를 쥘 수 있잖아요? 형님이 일본에 있다면 총두목감인데." "총두목?" "그래요." "진짜 실력자는 안 끼여드는 법이다." "형님 같은 고수라면 안 끼고 못 배길 거 아닙니까?"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 튕겨 버릴 고수가 많으니까." "그럴 리가?" 병규 녀석은 믿지 않았다. 믿으려 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안 믿어도 좋다. 강원도 산골에서 숨어 지내는 선승 한 분이면 일본을 통째로 먹을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분 앞에 나서면 기합소리에 나자빠지니까." "책에서 봤지만...... 믿어지지 않아요." "외가권법 따위로 대들다간 숨도 못 쉬는 내가권법을 넌 아냐?" "아뇨." "내공이라고 흔히 말하지. 손만 들어도 바위가 부서지는...... ." "글쎄요. 말은 들었지만...... ." 정도면 이류에 속한다. 아니, 어쩌면 삼류일지도 모른다." "놀라운 얘깁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형님이면 여기선 당할 자가 한사람도 없을 정도인데." "아니지. 여기도 나 정도는 두어 명 있다고 들었다. 내 선배가 손가락 자르고 여기 와서 수련하다갔는데, 여기도 고수가 몇 명 있다더라." "누굽니까?" "고수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야쿠자로 굴러먹진 않는다." "그렇겠네요. 그런 사람이 야쿠자라면 대번에 판도가 달라질 텐데." "그건 그렇지 않다. 싸움을 잘한다거나 권법에 뛰어나다고 끝내주는 건 아니다. 뛰어난 실력자라도 가는 거다. 실력자라면 칼쯤에 당하진 않겠지만." "형님이 얘기하는 스님 같은 분이라면 충분하잖아요?" "임마, 진짜 고수는 나서는 법이 없어. 아무도 몰라. 그게 고수야. 까부는 놈치고 실력 있는 놈 봤냐?" "그건 그렇지만요." 우리는 두런거리며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병규 녀석은 정리할 게 있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 두 개를 빌려 쓰는 것보다는 조그맣고 조용한 여관 같은 데를 골라 병규 녀석과 같이 쓸 생각을 했다. 일본의 여관은 퍽 정갈해서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옷을 벗고 침대에 길게 누웠다. 지금쯤 누워 있던 밤과 낮의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아직도 미사코의 체취가 남아 있는 방이었다. 그녀가 빼 주고 간 목걸이를 가방 속에 넣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암담했지만, 병규 녀석이 있으니까 수월할 것도 같았다. 녀석은 아무리 일본의 야쿠자였지만 한국인의 피를 속일 수 없는 녀석이었다. 어느 정도 내 생각에 동조하는 걸로 미루어 믿어도 좋을 듯싶었다. 하나님. 해치우고 갈 겁니다. 억울한 일본 생활로 찌들어 있는 한국 여인들의 실상을 하나님도 똑똑히 보십쇼. 한국 여인을 못 살게 구는 일본 놈들은 치도곤을 낼 겁니다. 이 더러운 눈으로 확인할 겁니다. 하나님. 당신은 부자 나라편이죠? 여유 있다고 남의 나라 못 살게 굴고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켜 선량한 당신의 백성을 살해한 무리들이 경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의 묵인입니다. 또 그들이 쾌락을 위해 여자를 사들여 오고 핍박하는 건 누구의 승낙입니까? 당신 짓이죠? 오늘 밤부터 구석구석 쑤시고 다닐 참입니다. 후쿠오카의 밤거리가 어떻다는 걸, 아니 일본 전역의 밤거리가 어떤 꼬락서니인지 당신은 알 겁니다. 그 안에 어째서 선량한 한국 여인이 살점을 뜯어먹히고 있어야 하며, 동남아의 여인들이 피를 빨리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인류 전체가 당신의 백성이라면 당신은 잔인한 하나님입니다. 잔인한 양반아, 정신 좀 차리쇼.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잠을 청해 보았다. 쉽사리 잠들 것 같지도 않았다. 미사코의 체취도 그랬고, 파리의 고독한 여인 다혜의 냄새도 그리웠다. 커튼을 내린 방은 어두었다. 근육을 이완시키고 온갖 상상력을 지워 나갔다. 자기 최면으로 잠들어야 할 만큼 어지러운 일본의 대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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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인간시장(5권) 55. 벼락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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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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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안당
08.05.15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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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록 후련한소설 총찬이 멋져라~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미혜
08.05.20 18:41
감사히 잘읽었 읍니다~!
새처럼
12.09.04 15:16
좋은글 김사헤요 ^^^
그리운남촌
14.08.27 16:23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0 21:31
감사
박성규
21.07.1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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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을 수록 후련한소설 총찬이 멋져라~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읽었 읍니다~!
좋은글 김사헤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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