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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의 사슬(묵주알)
이승우 역
내가 결혼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째 되던 해로서, 대학 조수로 있으면서 월급 40원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만주사변 무렵이었으므로 물가는 쌌지만, 그래도 40 원을 가지고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란 고생스러웠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내가 불평하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내에게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했고, 음식점에 함께 들어간 일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나들이라고는 겨우 일년에 단 하루 동안 바다에 가는 정도였다. 나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파묻혀 있었고, 아내는 가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40원짜리 생활은 7년간 계속되었다.
식구들의 의복도 모두 아내가 손수 만들었다. 내 양말에서부터 와이셔츠, 외투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내가 만든 것이었다. 연구실의 소녀가 ‘선생님은 낮에도 사모님에게 안겨 있네요.’ 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내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파리의 루주나 이탈리아의 향수를 손쉽게 살 수 있을 때였다. 그리고 거리에는 유한마담이라 칭하는 계급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식량도 썩어나도록 풍부했다. 그러나 아내는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름통을 메고 밭에 나가 일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에서 바느질과 뜨개질을 하며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라카미 18개 동의 부인회 반장이라는 바쁜 일까지 맡아보고 있었고 거기에다 나의 아내라는 일, 즉 반미치광이의 시중까지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새로운 연구에만 착수하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즉 연구 주제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며칠이고 도서관에 파묻혀 선배들의 업적을 조사하고, 카드를 만든다. 그것을 일단 정리한 다음, 이번에는 자신의 새로운 기축을 고안하여 실험장치를 만든다. 그 다음에 마침내 실험에 착수하여 몇 달이 지나서야 그 결과가 나온다. 그러면 그것을 모두 정리하며 논문을 쓰고, 교정을 보고, 대충 이러한 과정을 밟는 것이다. 이 기간에는 연구 이외의 일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말을 걸어오면 대답을 하고 밥상을 가져오면 먹는다. 아이가 울면 노려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마주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나중에 아내한테서 듣고 ‘허, 그래?’ 할 정도였다. 그런 때의 나는 완전히 반 미친 사람이어서 나의 눈은 허공을 바라본 채 무엇인가를 혼자서 입 속으로 중얼중얼대곤 하기때문에 어쩐지 무섭다는 것이다. ‘마치 몽유병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아내는 말했다.
꼭 의논해야 할 집안일이 생겨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또 남편의 정신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머리를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자칫하면 넥타이도 매지 않고 집을 뛰어 나가기 때문에 옷차림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며, 방바닥에 늘어놓은 조사카드, 노트, 참고서, 사진, 종이조각들도 치워도 되는 건지, 그대로 놔둬야 되는 건지 분간할 수 없고, 밤에 들어오는 시간도 일정치 않고- 이런 남편의 시중을 아내는 그 가냘픈 손으로 잘도 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아내의 노고에 대한 나의 보답은 잡지에 게재된 나의 논문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남들 같으면 소파에 편안히 기대고 파이프를 피우면서, 혹은 방바닥에 엎드린 채 대충대충 읽는 시늉이나 하는 잡지를, 아내는 두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고쳐 앉아 정중히 받들고 난 다음에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었다.
잉크냄새가 나는 활자가 내 이름을 찍어놓은 그 페이지, 그것은 전문 용어로 가득 차 읽어도 이해 못하는 문장이다. 그것은 몇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것이지만 그 속에 남편의 생명이 마치 가다랭이포처럼 깎여 들어 차 있는 것을 아는 아내는 눈시울까지 적시면서 읽어 가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아내 대신 어린 것을 안고 어르면서 잠시 가슴속에 온천물이 솟아난는 것 같은 생각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우리 집의 행복한 시간, 그것은 일요일 아침 모두 함께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는 때 였다. 나는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아내는 작은 아이를 업고, 우리는 밭둑길로 언덕 위 빨간 벽돌로 지은 성당으로 향한다. 종각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종소리가 맑고 평화롭게 울려 퍼진다. 저 집에서도 이 집에서도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나와서 같은 길에 합류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드는 아침 햇살의 물결 속에 앉아서 내 목소리도, 아내의 목소리도, 더듬거리는 어린 것 목소리도 옆 자리에 앉은 늙은 농부의 탁한 목소리도, 모두 하나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송한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날은 이제 나에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나의 교우는 매우 적었다. 모두가 서로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학자들이었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내가 안마당 돌 위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으려니까 해부학과의 나카무라 조교수가 한 손에 부채를 들고 훌쩍 찾아왔다. 그는 내 앞의 돌 위에 걸터앉자마자 도롱뇽 알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것이 우리 집 평상에서의 화제꺼리였다. 그는 처녀 생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참개구리의 알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개구리 알의 어느 극(極)을 백금침으로 가볍게 콕콕 찔러 주면 그것이 정충의 진입과 같은 자극이 되어서인지 알은 정상적으로 분할을 시작하고, 차츰 성장하여 정상적인 개구리가 되었다. 올해는 도롱뇽의 알로 그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도 성공하면 어떻게 해서든 표유류를 가지고 실험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내가 동이에 우물물을 길어왔다. 통에는 오이와 토마토가 떠 있었다. 나카무라는 왼손에 토마토를 올려놓고 오른손에 오이를 쥐고, 그것을 난자와 정자로 비유하면서 서로 댔다 뗐다 하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으나, 설명하면서 뭉텅뭉텅 베어 먹었기 때문에 어느 틈에 난자도 정자도 위장속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여느 때와 같이 좁은 뜰을 향해 나 있는 안방에서 셔츠에 다리미질을 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카무라가 안방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사모님, 머지않아 아이를 낳는데는 아마 주인 양반이 필요없게 될지도 몰라요.’ 그랬더니 아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까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부부의 목적은 아이를 낳는 것만은 아니지 않아요.’ 나카무라는 이 대답을 듣고는 싱끗 웃었다.
나는 조교수가 되어 월급이 100원으로 올랐다. 아내는 그것으로 겨우 한시름 놓게 되었다. 머지 않아 큰 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므로 40원을 가지고서는 형편이 어려울 처지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극 구경 같은 걸 갈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그후 다시 5년이 흘렀다. 나는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몰두하고 있던 방사선의 장해를 받아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던 날 나는 내가 신뢰하고 있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선후책을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때 아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아내가 침착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 기뻤다. 이런 운명이 되리라는 것을 아내도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내라면 내가 죽은 후에도 어린 것들을 훌륭히 키워 나처럼 방사선의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로 만들어 주겠지. 나는 뒷일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연구의 마지막 마무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더욱 깊은 애정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병세가 차츰 진행하여 공습경보가 울릴 때는 무거운 철모를 쓰거나 하면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아내에게 업혀서 학교에 출근한 일도 있었다.
8월8일 아침, 아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조금 가다가 나는 도시락을 잊고 나온 것을 깨닫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뜻하지 않게도 현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그것이 이별이었다. 그날 밤은 방공 당번이어서 연구실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9일, 원자 폭탄은 내 위에서 폭발했다. 나는 부상을 입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자들의 구호에 바빳던 다섯 시간 뒤 나는 출혈로 인하여 밭 가운데 쓰러졌다. 그때 아내의 죽음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대학까지는 1킬로 밖에 안되므로 기어서 오더라도 5시간이면 충분히 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설사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아내에게 생명이 있는 한은 기어서라도 반드시 나의 안위를 알고자 와 주었을 아내다.
사흘째 되던 날, 학생들의 사상자 처리도 일단락되었으므로 저녁 무렵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알아봤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던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대로 타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앗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저녁 노을이 비치는 잿더미 위에 검은 뼈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내 뼈를 머지않아 아내가 안고 갈 예정이었는데-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슴에 안긴 아내가 덜그럭거리며 인산석회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미안해요, 미안해요’라는 소리로 들렸다.
* ロザリオ((포르투갈어) rosario 로사리오; (천주교에서) 묵주((默珠)); 또, 묵주의 기도.(=동의어ロザリヨ)
* 역자 이승우 : 조선대 문창과 교수이다. 작품으로 《지상의 노래》, 《미궁에 대한 추측》,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오래된 일기》, 《목련공원》, 《칼》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 《가시나무 그늘》,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사랑의 전설》 등이 있다.
私が結婚したのは大学を出て三年目で、当時助手として月給四十円であった。満州事変のころで物価は安かったが、それにしても四十円で一家のやりくりをつけることは苦しかったであろう。しかし私は一度も妻から苦情を聞かなかった。着物一枚新しく買ってやらなかった。劇場へ行ったこともない。料理屋へ二人で食いに行ったこともない。遊楽といえば一年に一日海に行ったくらいのことだろう。私は毎日夜に入るまで研究室にこもっていたし、妻は家事にいそしんでいた。月四十円の生活は七年つづいた。
家族の衣類はみな妻の手製だった。私のくつしたからワイシャツ、オーバーに至るまで妻がこつこつ丹念に仕立てたものだった。それを見て研究室の女の子が「先生は昼間も奥さまから抱かれているのね」と言った。
妻は白粉をつけなかった。パリーの口紅でもイタリーの香水でも手がるに買えるころであった。そして町には有閑夫人と称する階級がのさばっている時代であった。食糧だって腐って捨てるほどあった。妻は晴れた日には肥おけを担って畑に働き、雨の日には縫い物や編物に手を休めなかった。そして浦上十八ヶ町の婦人会連合班長の忙しい役も果たしていた。その上、私の妻という仕事、半狂人の世話もせね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
一つの新しい研究にとりかかると、私の人間が変わる。研究主題に全心を奪われてしまうのである。幾日も図書室にこもって先人の業績を調べる。カードをつくる。それをひと通りまとめて、さてわが新機軸を考案する。実験装置をつくる。いよいよ実験にかかる。何か月かで成績が出る。それをまとめて、論文を書く、校正をする、という経過なのだが、その間は研究以外のことが頭にはいらないのである。話しかけられれば答えはする。めしを出されれば食う。子供が泣けばにらむ。しかし、何を言ったのか、何を食ったのか、何をしたのか私は覚えない。大学から帰る道で妻と行き会いながら、知らずに通り過ぎたことが二回あったそうである。あとで妻から聞いて、ほうと私は言った。そんな時には私の眼は宙を見すえていて、口の中で何かぶつぶつ言っているので、気味悪いそうである。「まるで夢遊病者の看護をしているようですわ」と妻が言ったことがある。
ぜひ相談せねばならぬ家事の問題が起こっても、耳には入れられず、夫の気をちらせてはならず、頭を使うから特別の料理を作らねばならず、うっかりしているとネクタイなど忘れて飛び出すので身のまわりの世話も手がぬかれず、畳にまでいちめんに広げられた調査カード、ノート、参考書、写真、紙くずなど、片づけていいものやら悪いものやらわからず、夜の帰宅時間は定まらないし──こんな夫の世話をよくも妻はあの細腕でなしとげたものであった。
この妻の労苦に対して私の報いたのは、ただ雑誌に載った私と論文を見せること、それだけであった。ほかの人々ならソファーに身をうずめてパイプをふかしながら、あるいは畳にねそべって拾い読みする雑誌を、妻はきちんと座り直し、おしいただいてからページを繰るのであった。インキのにおう活字が私の名を記しているそのページ、それは専門術語の並んだ、読んでも理解できぬ文章である。それは幾ページかの短いものであっても、その中に夫の生命が、ちょうど、かつおぶしのように削りこんであるのを知っている妻は、涙さえ浮かべて読んでゆくのであった。そのそばで私は妻の代わりに幼な子を抱いてあやしながら、しばらく胸の中に温泉のわくような思いにひたっていた。
私の一家の幸福な時間、それは日曜日の朝みんなそろって天主堂へミサ拝聴に参る時であった。私は大きな子の手をひき、妻は小さい子をおんぶして畑道を丘の上の赤い天主堂へゆく。鐘楼から寄せ鐘がやさしく清く鳴り渡る。あの家からもこの家からも晴れ着にかえた人々が明るい顔をして出てきて同じ道に加わる。ステンドグラス越しに射す朝日の色の波の中に座って、私の声も妻の声も、たどたどしい幼な子の声も、隣に座っている老農夫のだみ声も、ひとつの声となって、天にまします我らの父を賛美し奉った。あんな幸福な日はもう私には来ない。
私の交友は少なかった。みんな似たような貧乏な学究たちだった。ある夏の夜だった。私が小庭の石に座って月を浴びていると、解剖学の中村助教授がうちわ片手にふらりと入ってきた。彼は私の前の石に腰をおろすなり、さんしょううおの卵について話し出した。こんなのがいつも私のうちの涼み台の話題であった。彼は処女生殖の実験をしているのだった。前の年に、とのさまがえるの卵では成功していた。卵のある極を白金針で突くと、それが精虫進入と同じ刺激になるらしく、卵は正常どおり分割を始め、次第に成長して正常のかえるになった。今年はそれをさんしょううおの卵でやっているのだった。それに成功したらなんとかして哺乳類でやってみたいのである。
妻が手おけに井戸水をくんで来た。中にきゅうりと、トマトが浮かんでいた。
中村君は左手にトマトをのせ、右手にきゅうりをにぎり、それを卵と精虫とになぞらえて、くっつけたり離したり、しきりに説明していたが、説明しながらパクリパクリとかじるので、いつしか卵も精虫も胃袋の中へ消えてしまっていた。
妻はいつものように小庭にのぞんだ座敷でシャツに火のしをかけながら、二人の話に耳を傾けていた。不意に中村君が座敷へ声をかけた。
「奥さん、どうやら子供を産むためにはご主人はいらぬらしいですよ」
すると妻は笑いながら答えた。
「そうでしょうかね?──それはそうとしても、夫婦の目的は子供を産むことばかりではございますまい」
中村君はこの答えを聞いてにんまりした。
私は助教授になって月給が百円に上がった。妻はそれでほっとした。やがて子供が小学校へ通うので、四十円では困るところだった。私らにはまだ芝居見物などにゆく余裕は出てこなかった。
それから五年たった。私は研究室で長年取り組んでいた放射線の障害を受けて白血病にかかってしまった。余命あと幾年もないと診断された日、私は信頼している妻にすべてを打ち明けて、善後策を考えようと言った。そのとき妻は、ぎくりともせず聞いていた。
私の予期していたとおり妻がしっかりしているのでうれしかった。そんな運命はかねて妻も覚悟をしていたのである。この妻ならわが亡きあと、子供をりっぱに養育して、私と同じく放射線の研究に従う学究にしてくれるであろう。私は後顧の憂いなく研究の最後の仕上げに没頭することができた。妻はいよいよ深い愛情をもって私をいたわってくれた。病勢が自然に進行し、空襲警報が出て鉄かぶとの重いのをかむったりすると、足がよろめくほどであった。一度は妻におぶさって大学へ出勤したこともあった。
八月八日の朝、妻はいつものように、にこにこ笑いながら私の出勤を見送った。少し歩いてから私はお弁当を忘れたのに気がついて家へ引き返した。そして思いがけなくも、玄関に泣き伏している妻を見たのであった。
それが別れだった。その夜は防空当番で教室に泊まった。あくる日、九日。原子爆弾は私たちの上で破裂した。私は傷ついた。ちらっと妻の顔がちらついた。私らは患者の救護に忙しかった。五時間ののち、私は出血のため畑にたおれた。そのとき妻の死を直覚した。というのは妻がついに私の前に現われなかったからである。私の家から大学まで一キロだから、這って来ても五時間かかれば来れる。たとい深傷を負うていても、生命のある限りは這ってでも必ず私の安否をたずねて来る女であった。
三日目。学生の死傷者の処置も一応ついたので、夕方私は家へ帰った。ただ一面の焼灰だった。私はすぐに見つけた。台所のあとに黒い塊を。──それは焼け尽くして焼け残った骨盤と腰椎であった。そばに十字架のついたロザリオの鎖が残っていた。
焼けバケツに妻を拾って入れた。まだぬくかった。私はそれを胸に抱いて墓へ行った。あたりの人はみな死に絶えて、夕陽の照らす灰の上に同じような黒い骨が点々と見えていた。私の骨を近いうちに妻が抱いてゆく予定であったのに──運命はわからぬものだ。私の腕の中で妻がかさかさと燐酸石灰の音を立てていた。私はそれを「ごめんね、ごめんね」と言っているのだと聞いた。
http://www.aozora.gr.jp/cards/000924/files/54870_48035.html
나가이 다카시 | 永井隆(영정륭) a( 1908 ~ 1951 ) | |
일본의 작가이며 천주교 신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킨 소설 《나가사키(長崎)의 종》의 저자이다. 《원자병 개론》, 《로사리오의 쇠사슬》, 《만리무영》, 《이 자식을 남겨 놓고》 등 인간애 넘치는 작품들을 남겼다. | |
일본의 작가이며 천주교 신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킨 소설 《나가사키[長崎]의 종》의 저자이다. 1908년 주고쿠 지방 시마네현[島根縣] 이이시 마을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무사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치밀한 사고력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나,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혼자 독서를 하거나 조용한 담화를 즐겼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여 방사선학을 전공하였는데, 의대에 들어가서 시체를 해부하는 등 인체를 다루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빠졌던 유물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
* 참 잘 쓴 수필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명수필이지만 전쟁을 생각하거나 보는 관점을 전혀
피력하지 않아 원폭피해의 참상만을 나타내서 일말의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다만 카톨릭 종교관에 입각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고 젊은 나이에 생명을 다할 때 까지 꾸준한 연구와 글을 발표한 것을 보면 감동적입니다.
참고로 노정숙 선생님의 수필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http://cafe.daum.net/KWA-CANADA/5Sc6/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