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말하길 그녀는 악마라고 했다. 악마.. 남자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그 어감이 그녀에게 더욱 호기심을 갖게 했다. 악독한 여자를 칭하는 말들은 참으로 많다. 여우, 악녀, 마녀 등등.. 하지만 난 그녀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악마라 불리운 여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더욱이 그녀처럼 나이가 어린 경우는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녀는 고작 해야 18살에 악마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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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도카메론.
죽음의 도시 도카메론. 족장 시대였던 1400년대는 핏줄을 중요시 여겨 근친간의 결혼이 당연시되던 때였다. 그런 족장사회에서 가장 혹독한 벌은 추방. 바로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무리에서 떨구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추방된 자들이 누구의 시기에 의한 모함에 의해서건 아니면 반드시 지켜져야 했던 피의 존귀성을 무너뜨린 즉 쉽게 말해 친족들을 살해한 자라든지 아니면 병에 걸려 더 이상 친족들과 함께 살수 없든지 간에 모여드는 곳이 바로 이 죽음의 도시 도카메론이었다. 그런 자들이 모여들었다 해서 그곳이 악의 소굴이니 무법천지 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그곳은 철저한 법치체제의 도시 국가였으며 다시 한번 인간으로써의 삶을 부여해 준 도카메론트에 대해 절대적 충성을 강요받는 곳이기도 했다.
도카메론의 지형은 높고 험한 산들이 많았다. 때문에 대체적으로 기압이 낮았는데 그 때문인지 이 지역 사람들은 심장이 여느 지역의 사람들보다 크고 강하였다. 또한 16세 이상이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보트 제도가 있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그 중에는 여자도 상당수였다. 사보트 제도 외에도 도카메론을 대표하는 제도는 많았다. 재산과 지위의 평등을 보장하는 키친우엔 제도, 남녀의 차별적 힘, 예를 들면 남자의 힘과 기술, 여자의 지혜와 사랑을 존중하는 파우치아 제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마우첸 제도, 범죄에 대한 예방과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재정해 놓은 파피스 제도 등이 그러했다. 이러한 제도가 모두 왕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도카메론트 제도]의 전제 하에 세워진 체제들이었다.
도카메론트 제도는 참으로 독특했다. 왕의 신분이 핏줄을 중요시 여기는 주변 국가들과는 달리 전승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여자도 남자도 심지어 능력만 갖추어 졌다면 어린애라도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능력이란 것이 몇 백가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힘!!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마뉴], 혼자서도 자신의 몸과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는 [타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아무리 절박하고 참담한 상황에서도 자제력과 침착성을 잃지 않는 힘, [지뉴]만 갖추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까운 젊음을 희생해야만 했다. 한 왕이 죽고 그 자리가 다른 왕으로 교체되는 시기.. 이곳에서 죽어나가는 시체만도 백 여명에 이르렀다. 가끔은 너무 많은 수인지라 시체가 미쳐 매장 되지도 못한 체 까마귀밥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토록 처참한 죽음의 결말을 알고서도 왕이 되겠다며 왕의 시험에 자진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져만 갔다. 그 만큼 왕의 권력은 매력적이었고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1489년 10월 초가을, 또다시 도카메론에는 새로운 왕의 탄생을 예고하는 피의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웃 국가인 라바스에서 페스트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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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오신다. 왕께서 오신다."
궁 안의 신하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서편 문의 양 기둥을 기준으로 양편으로 갈라섰다. 모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러지자 그들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왕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붉은 망토가 황금을 입힌 대리석 바닥에 펼쳐졌다. 드디어 왕께서 라버스와의 동맹체결을 끝맺고 돌아온 것이다.
왕이 문의 입구에 당도하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두 시종이 자신의 시종들에게서 붉은 망토를 받아 들어 왕의 어깨에 걸쳤다. 왕의 붉은 망토가 엎드러진 신하들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 갈 때마다 조금이라도 왕의 성은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그의 망토에 입을 맞추며 "왕이시여, 그 지혜가 영원하소서"하고 말하였다.
왕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내심 흡족해 했으나 그것을 겉으로 내비치지는 않았다. 왕이란 자고로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은 계획과는 다르게 너무 지체되었다. 곧바로 밀렸던 일들을 처리할 터이니 모두 내 방으로 가져오도록 하여라."
왕의 명령에 왕의 심복 중 하나인 마르고가 그 뜻을 이행하겠노라 대답한 후 조용히 왕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잘 돌아오셨다는 환영과 왕께 대한 복종의 뜻이었다. 그가 집정실로 물러가자 왕 또한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감람석으로 장식된 몇 개의 기둥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마르고는 몇 안 되는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복이었던 것이다. 왕이 모습을 감추자 그와 동시에 엎드러졌던 왕의 신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 수가 무려 975명이었다.
"하나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미그스엘님과 가르도를 왕의 방으로 모셔라. 이 일이 누설되면 너와 너의 가족의 머리를 치겠다"
집정실 앞에서 마르고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시종 하나세는 흠칫 놀라며 잔뜩 서류를 짊어지고 나온 마르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주인의 의도를 알아챈 듯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고는 동 궁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르고 역시 멀어져 가는 하나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자신의 입술에 남아있는 열에 가깝던 왕의 온기를 떨쳐내며 왕의 방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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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궁전은 왕이 있는 궁전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127개의 방마다 그 앞에 금세공 사슬이 가로질러 있었고, 금으로 입혀져 있었으며 모든 벽은 돌아가며 순종을 상징하는 야자나무 무늬의 조각과 번영을 상징하는 활짝 핀 꽃의 조각물이 안쪽과 바깥쪽에 새겨져 있었다. 바닥도 안쪽과 바닥 쪽이 금으로 입혀져 있었으며 기름나무로 커다랗게 짜여진 방의 문들에는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 조각마다 두들겨진 금이 얹혀 있었다.
누가 봐도 그 화려함이 요염할 정도인 이 궁전은 선대 도카메론트(왕)였던 아사식스가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이르아고를 위해 왕의 궁전 바로 옆에 지었던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왕의 심복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이런 동 궁전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미그스엘의 방에 하나세가 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비밀통로를 통해서 미그스엘의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미그스엘 역시 종종 이런 일이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고 하나세를 맞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왕께서 병이라도 나신 건가?”
"미천한 저는 알 턱이 없는 일입니다. 다만 마르고님으로부터 미그스엘님과 가르도님을 비밀리에 왕의 방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가르도도? 알았네.."
이미 백발이 성성한 미그스엘은 선대 왕으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아 계속해서 왕의 건강을 담당해 왔던 의사였다. 그가 벽난로 옆의 오른쪽 휘장에 달린 여러 색의 줄 중 금색 줄을 가벼이 잡아당기자 몇 분이 채 되기도 전에 약초상자를 짊어진 젊은 청년이 벽난로를 재끼며 나타났다. 벽난로는 가르고의 방으로 통하는 은밀한 또 하나의 비밀 통로였던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미그스엘은 그에게 가벼이 인사하고 나서 하나세에게 이 청년을 소개했다. 하나세가 이 청년을 처음 보았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인사하지. 이쪽은 약초 관리장 가르도일세. 그는 나의 충실한 시종이기도 하지."
미그스엘의 소개가 끝나자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미그스엘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마치 처음 만난 사이처럼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미그스엘의 뒤를 따라 하나세가 들어온 비밀 문을 통해 왕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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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10월 2일, 라버스 변방.
“애야. 얼굴이 왜 그러니?”
“돌아오는 길에 넘어졌어요. 별거 아니니 걱정마세요.”
라울은 뜨게 감을 접어두고 놀라 달려 나온 어머니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그는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에는 피가 흐르고, 강한 이마가 땅의 흙과 심하게 맞물려 피부가 한 꺼풀 벗겨져 있었던 것이다. 라울의 어미는 그가 평소 넘어지는 실수따위는 하지 않을 만큼 운동신경이 잘 발달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라울의 피를 자신의 치맛단으로 닦아낼 때 그의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도..
“아무래도 안되겠다. 아버지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오늘은 그만 가서 쉬거라.”
피 묻은 어미니의 치맛단을 보며 미안함에 겸연쩍해진 라울은 다시 괜찮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라울의 가족 가운데 그의 몸을 만졌던 다른 사람들도 곧 그와 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유감스럽게도 이 병은 상태가 완화되기는커녕 악화되는 병이었다. 라울은 발병 24시간 후 피를 토하였으며 불과 이틀 만에 코와 귀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피를 뿜어대다 사망하였다. 10월 6일 경에는 라울의 어머니와 여섯 명의 형제 중 두 명을 포함하여, 가까운 친족 12명이 사망하였으며 10월 10일 경에는 그 지역의 다른 두개의 읍의 사람들이 라울 및 그의 가족과 비슷한 방법으로 병에 걸려 죽기 시작하였다. 그 병은 신속히 확산되었다. 10월 23일, 라버스는 이 병을 페스트라 밝혔다.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인해 무려 1,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페스트의 초기 증상은 단지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거나 열이 나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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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불과 한 뼘 위로 박혀있는 붉은 벽돌들. 발을 옮길 때마다 약간의 진동임에도 불구하고 벽돌 틈새 사이로 흙먼지가 일었다. 자신의 방을 나선 후 어깨에 10여분 동안 쌓인 흙더미를 미그스엘은 귀찮다는 듯이 떨구어 내며 이 거지같은 비밀통로를 자신이 죽기 전에 기필코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의 명이란 것이 아무리 길어야 90세가 아니었던가. 내일이면 87세가 되는 그로써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위안거리였다. 의사와 왕의 방에 연결된 비밀통로를 없애는 것. 그것은 절대적이다시피 존재하고 있는 타뉴라는 왕의 법을 그 뿌리 자체부터 흔드는 대 변혁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르도, 난 죽기 전에 반드시 저 비밀통로를 없앨 걸세. 이보게, 들었나? 저 거지같은 비밀통로를 없애고야 말꺼라고. 하하하.. 아! 왕께는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지? 음.. 그래, 먼저 말씀을 드려야지. 그런데 말일세... 만약 왕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신다 해도 난 저걸 무너뜨릴 작정일세. 비밀통로가 무너지면 아마 키요미네가 방방 뜨겠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허허허."
몇 달전 술에 만취해 입밖에 내버린 자신의 소망. 개인의 소망치고는 이 나라에게 너무 많은 변혁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자신의 말을 분명 그때의 가르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입밖에 내서는 아니 될 것을 말한 꼴이 된 미그스엘은 "어제 저녁 내가 무슨 실수나 실언은 하지 않던가?"하고 은근히 가르도를 떠보았으나 가르도는 태연히 웃으며 "안심하십시오. 술을 드시다가 잠이 드신 것뿐이었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미그스엘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금새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고, 오히려 미그스엘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결코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무너질 듯 하면서도 300여년은 족히 버텨왔을 이 미로 식의 비밀통로를 15분간 순회했을 때 비밀 통로는 서서히 붉은 벽돌이 아닌 황금을 입힌 대리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왕의 방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리는 이 황금 빛의 통로는 외경감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 사람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단정케 해야겠다는 결심을 서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자신의 옷의 먼지를 털고 준비를 마친 미그스엘은 걸어오는 동안 흐트러졌을지도 모르는 약초들을 정리하는 가르도를 부드럽게 바라보다 가르도에게 다가가 그의 양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르도, 나는 눈을 감고도 이 복잡하고도 복잡한 미로에서 바른 길을 찾아낼 수 있다네. 이게 다 이 비밀통로를 내 집 드나들 듯 10여 년 이상 다녔기 때문이야. 이런 쓸모도 없는 재주를 나는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다네. 물론 자네에게도 말야."
미그스엘의 말에 가르도는 여전히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하나세의 반응은 무척이나 분명한 듯했다. 그는 몹시 흥분해서 미그스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물론 세간에는 비밀시 되어 왔으나 미그스엘님께서는 전대의 왕이셨던 비테크
지누스님(1395~1490; 45세에 왕의 시험에 통과하여 96세까지 통치함)의 악성 천식을 단 두 달만에 고치셨고 또한 좀처럼 기가 약하셔서 자주 병이 나시는 이오리스 왕(1465~ ; 1490년 25세의 어린 나이에 왕의 시험을 통과하여 지혜의 왕이라 불리고 있음)의 건강을 별탈 없이 지켜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다 이 비밀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없었으면 어찌 미그스엘님께서 왕의 방으로 드실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제는 아예 울상이 되어버린 하나세를 보며 미그스엘은 어이쿠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하고 뜨끔해 하며 하나세의 옆으로 와 그의 등을 토닥이고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보게, 늙은이의 망령된 말을 그리 가슴에 담아두지 말게.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그간 한 일이 참 많구먼.. 그래. 이게 다 이 비밀 통로 덕분이니 내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 허허허"
그의 너털웃음에 하나세와 가르도는 함께 미소지었지만 그 미소는 서로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고지식한 하나세로서는 안심의 의미였지만, 가르도로서는 하나세와 미그스엘의 속마음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자리가 된 것이었다. 하나세를 중간에 두고 가르도와 미그스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내는 우리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미그스엘 님!! 어디 계십니까? 미그스엘 님!!"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가 비밀통로를 타고 울려 퍼졌다.
"마르고 아닌가? 대체 왜 그러나? 이제 거의 다 갔네"
"빨리 오십시오. 왕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뜻밖의 그의 말에 미그스엘과 가르도 그리고 하나세는 눈이 휘둥그레져 왕의 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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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나무를 더욱 고풍스럽게 하기 위해 다갈색으로 염색한 오십 인치 너비의 책상은 왕이 자신들의 측근들에게 책봉식 후 하사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것이 궁전 관리들 사이에선 권력을 상징하는 척도가 되었는데 이것을 자랑하기 위해 은근히 자신들의 집으로 궁전 관리들을 초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왕으로써도 골칫거리가 된 물건들 중 하나였다.
은은한 나무 향과 향색조의 조화가 머리를 맑게 해주는 이 다갈색 책상에서 키요미네는 왕의 인장이 찍혀 붉은 촛농으로 봉해져 있었을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당혹하기 그지없는 이 편지는 그에게 커다란 수치심을 안겨주었으며 아들같이 여기던 왕에게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편지의 끝자락에 매끄럽게 쓰여진 사인이 왕의 친필이 맞는 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 키요미네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말을 준비해라. 지금 당장 궁으로 가겠다."
일그러진 키요미네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전달한 왕의 편지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감지한 집사는 곤란함에 급히 대답하며 마부를 부르기 위해 서재를 뛰쳐나갔다.
'왕이시여, 당신은 어찌 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마가리타에게 맹세했던 사랑이 거짓이었습니까? 정녕 그러셨다면..'
키요미네는 세로로 늘어선 네 개의 책상 서랍 중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는 가장 위쪽의 서랍을 열어 젖혔다. 키요미네는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파란 공단으로 싸여있는 기다란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끝내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5년 전 데카메론이 엄청난 전투력과 예상치 못할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주변 소국가들의 잦은 분쟁을 모두 정리했을 당시 적들조차도 감탄해 마지않았던 전략은 바로 이 키요미네의 작품이었다. 단 이틀만에 주변 국가들의 주권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왕에게서 직접 하사 받은 상이 이 그라디우스(Gladius)검과 보관함이었다.
우아한 파란 빛이 도는 보관함을 열자 안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정성 들여 세공한듯한 사파이어들이 빛을 발하였다. 하지만 그 빛이 아무리 아름답고 차다 하여도 이 그라디우스의 검날에 비하면 실로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사파이어에는 생명이 없다해도 이 검날은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생명력과 살기로 충만해 보였다. 이 검 앞에서는 사람의 고귀한 생명도 밟으면 금새 짓부숴지는 개미처럼 느껴질 만큼.. 오만한 빛의 생명체. 키요미네는 그 검을 집어들고는 머리에 감고 있던 흰 터번을 끌어내려 조심스레 감아 자신의 가슴팍에 숨기고는 문밖에 준비되어 있는 말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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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언제 쓰러지셨나?"
"바로 몇 분전이었습니다."
왕이 누워있는 침대 우편에 서 있는 마르고는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왕에게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미그스엘은 그런 마르고를 바라보며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미그스엘 역시 신음에 가까운 탄식을 하며 뜨거운 왕의 손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마르고, 난 사실 내가 늙어서 망령이 난 거였으면 좋겠네.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이 병명이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고 있지 않던가.."
미그스엘의 말에 흠칫 놀란 마르고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왕의 손을 더욱 꼭 붙잡으며 물었다.
"시.. 심각한 겁니까?"
"이보시게.. 그 전에 뭐 하나만 묻세. 혹여 왕과 접촉한 후 누구를 만진 적이 있는가?"
"예?"
"중요한 것이니 꼭 대답해 주길 바라네.."
미그스엘의 말에 카르야의 얼굴이 마르고의 뇌리에서 스쳐지나갔다. 자신에게 맞아 불겋게 부어 오른 왼뺨을 매만지며 되려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간 골칫덩이 아들, 카르야.. 그리고 그가 생각남과 동시에 왜 미그스엘이 이런 질문을 하는지 어느 정도 그 심중을 알아챈 마르고의 얼굴표정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경례령을 발포해야 합니까?"
"지금 당장 이곳 역시 폐쇄해야 할걸세."
마르고의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 그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이 병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안 미그스엘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가 곧바로 비밀통로가 이어져 있는 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르도, 들리나? 지금부터 이 곳을 죽음의 방으로 지정하네. 하나세에게 알려 이 방에 아무도 들지 못하게 해야해. 그리고 경계령을 내려서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네. 알았나?"
비밀통로 밖에서 미그스엘이 부르기만을 기다리던 가르도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죽음의 방이라니요? 미그스엘님.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안 돼. 알만한 사람이 대체 왜 그러나? 지금 당장 왕의 방문 앞에 서있는 하나세를 찾아가. 어서. 시간이 없어."
"싫습니다. 설령 전염병이라도 전 가지 않겠습니다. 제가 어찌 미그스엘님을 버려두고 간단 말입니까. 어서 통로를 여세요.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도 제가 가지고 있는 약초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시잖아요. 어서 문을 열어주세요."
가르도가 밀어부치는 바람에 들썩이는 비밀통로를 부여잡으며 미그스엘은 가르도의 깊은 충성에 감사했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 때문에 감동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르도 잘 듣게. 자네는 자네 자신을 시종이라고 낮추었지만 난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어. 자네는 내 아들이야. 그것도 아주 훌륭한 아들일세. 내가 만약 자네의 청을 들어 이 문을 연다면 그건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짓인 게야. 자네에게 다음 왕을 맡기겠네. 그리고 그 비밀통로도 어떻게 좀 해봐. 자네는 내가 그것을 없애겠다는 뜻을 잘 알고 있겠지? 허허.. 힘든 일이 될 게야. 그것이 없어져도 사람들은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지도 몰라. 하지만 자네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걸세 알았지? 이 병은 자네의 약초로도 고칠 수 없는 걸세. 자 어서 하나세를 찾아 경계령을 발포해. 안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야."
"병명이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말씀이십니까? 미그스엘님!!"
"아아.. 이것이 제발 페스트가 아니길 난 바라고 있네. 자 어서 서두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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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안나오는 거야? 나원 휴가를 나와서 까지 도르카야에게 얽매여야 하다니.."
"이봐 말조심해. 비록 나이는 같다 해도 그는 우리의 상사야.."
칼센은 궁의 화단 앞에 길게 늘어선 십여 개의 분수대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손수건을 적시며 말했다.
"미안. 칼센, 나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 하지만 솔직히 그의 인간성은 직급을 떠나서 절대 존경할 만하지 못해. 아니 오히려 인간이하라고 할 수 있지. 봐. 휴가를 받자마자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윤락가에 갈 돈을 요구하러 오다니.. 분명 그의 아버지는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황금더미를 안겨줄 꺼야. 안 그래?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니까. 난 대체 너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대체 왜 그의 뒤를 봐주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쉿. 도르카야님이 오신다. 그리고 그는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칼센은 마타니에게 조그맣게 속삭이고는 마타니를 뒤로 물렸다. 도르카야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원했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도르카야님."
안타까운 듯 도르카야에게 손수건을 내민 칼센 앞에 도르카야는 우뚝 멈추어 섰다.
"흥. 마치 내가 맞을 걸 예상이나 한 듯 준비해 두었군."
도르카야는 칼센이 건넨 손수건을 땅에 집어던진 후 구둣발로 천천히 그것을 짓 이겼다. 칼센을 도발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칼센은 하나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눈으로 도르카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 재수 없어. 마치 모든 걸 알고있다는 듯한 그 눈 말이야.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도르카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군에 입대하고 얼마 안돼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고, 가장 우수하다는 기마병의 백부장이 되었다. 일부 시기하는 자들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계급이 올랐네 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지만 그는 떳떳하게도 자신의 실력만을 가지고 백부장이 된 것이니 그 소문들에 별로 자극될 것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소문을 퍼트렸던 자들은 자신에게 찾아와 갖은 아양을 떨었다. 그것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들이 결국 자신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이번에야말로 그 철저하다 못해 냉정한 아버지가 자신을 돌아봐 주리라 생각했던 도르카야는 휴가를 받으면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깨엔 기병대의 백부장이라는 표식인 동색계급장을 달았고, 왕의 군대의 일원인 것을 표시하는 정식 토파즈(금속을 얇게 펴서 만든 특수 갑옷)도 차려입었다. 그는 당당하게 아버지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보호자격인 칼센과 그의 동료 마타니가 따라붙은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아버지께 유흥비나 얻으러 간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에 여러 복잡한 절차를 밟고 궁에 들어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왕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도르카야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 것이다. 여전히 아버지의 눈에 자신은 쓸모 없는 존재였다. 울컥 화가 난 도르카야는 아버지의 뒤통수를 향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러는데 화끈하게 놀게 돈이나 주시죠, 고랏(고급창녀촌)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거든요."라고 외쳤다. 도르카야를 향해 돌아선 키요미네의 눈에는 살기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날아든 그의 주먹!! 경멸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피붙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은 전혀 담겨있지 않은 듯했다. 비릿한 것이 입안에 고이자 도르카야는 그것을 뱉어내며 키요미네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칼센.. 만약 내가 칼센이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까지 차갑게 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그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르카야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내 차가워지며 대답했다.
"칼센이었다면 나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고랏 얘기는 하지 않았을 거다. 방금 그 얘긴 듣지 않은 것으로 하지."
마르고가 자신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것을 보며 도르카야는 분한 듯, 슬픈 듯 주먹을 보았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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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미네의 말이 궁정입구에 다다르자 칼과 창으로 무장한 문지기 셋이 그의 말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비켜라"
"죄송합니다만 지금 궁은 폐쇄되었습니다."
문지기들을 내려다보며 키요미네가 말에서 내리자 궁 뒤쪽의 파수대로부터 뿔나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번.. 일곱 번?
저건 경계령이 아니던가..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키요미네님이라 할 지라도 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붉은 말고삐를 잡고 뿔나팔 소리에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키요미네 앞으로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나가며 문지기들에게 소리쳤다.
"이보시게들.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네? 우리들도 말입니까?"
문지기들이 놀라 달려나가는 그에게 묻자, 그는 "그래. 당신들도 말야. 이 궁에는 아무도 남아서는 안돼"
하며 파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의아해 하며 창과 칼을 자리에 남겨두고 떠날 준비를 하는 문지기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뛰어가는 젊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키요미네는 다시 말에 올라타 젊은 남자를 쫒았다.
"이보게, 대체 어떻게 된건가?"
"죄송합니다만 키요미네님,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왕께서 베푸신 배려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뭐라고? 대체 자넨 누군가?"
분명 내가 온 목적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본 적이 없던 남자다. 왕께서 근처에 두시던 심복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키요미네가 의아해 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리던 것을 멈추고 키요미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가르도, 미그스엘님의 시종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아아. 이런 말을 할 틈이 없습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곧 군인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놀라워 하는 키요미네를 뒤로 남겨둔 채 가르도는 다시금 파수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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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군에 입대한 후 처음 맡는 휴가인지라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뿔나팔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 한번 뿔나팔이 울릴때마다 설마 여섯 번 이상은 울리지 않겠지 하며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뿔나팔은 일곱 번째 신호까지 발하고 있었다. 모든 군인들은 궁으로 집결되어야 했고, 백성들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면 않되었다. 여섯달에 한번씩 시행되는 국가적 훈련은 고작해야 뿔나팔이 네 번 울리는데 일곱 번이나 울리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시장에서 왁자지껄 장사하던 장사치도 물건을 사던 사람들도 모두 곧장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구었고, 거리에서 뛰노는 어린 아이들을 찾아 나온 부모들이 서로 자기 자식의 이름을 부르느라 거리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과연 이 곳이 사람 사는 곳인가 할 만큼 정적이 흐르기까지 고작 시간은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로써 도카메론트의 백성들이 얼마만큼 철저히 훈련되었는지 하는 가를 잘 지적한 오늘의 사건은 훗날 역사가 마르카제에 의해 세 번째로 빨리 움직인 백성들이라는 기록까지 남겨지는 일이었다.
아무튼 거리에서는 이제 군인들의 붉은 망토만이 보일 뿐이었다. 전쟁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적으로 존속위기에 처해질 만큼 다급할 때만 울리는 일곱 번의 뿔나팔 소리가 군인들을 다소 긴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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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너른 앞마당에 모인 군사는 좌우로 두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좌는 기마병과 궁수들이 서있고, 우는 창과 칼을 지닌 자들이 열을 맞추었다. 좌를 다시 전 후로 나누어 보면 전자가 궁수들이요 후자가 기마병이었다. 우의 전자가 칼을 지닌 자들이고 후자가 창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또 한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금빛 전차를 탄 전차병들이었다. 그 수가 무려 이만 팔천이었다.
이 많은 무리를 수용하는 마당의 크기도 대단했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말이며 무기를 통제하는 병사들의 기술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도카메론의 정예부대 마란토였다.
"모두 들으라.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신속하고도 조용히 적을 타진하기 위해서다. 이 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왔던 그 어떤 적보다 무섭고 빠르며 경멸스럽기 그지없다. 이들은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고, 서서히 목을 조여온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만들며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적은 아직 멀리까지 그 손을 펼치지 못하였다. 오늘 기필코 적을 섬멸하리라. 그 적의 이름은 바로 페스트이다."
싸한 긴장감마저 돌던 이 곳의 공기가 순식간에 불안감으로 변하고 있었다. 페스트.. 아직 도카메론에서는 발병한 적이 없는 질병이었다. 그 병은 그저 국외에서 조심해야 할 병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 외국인 거주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고 들어왔다.
으깨는 자! 부수는 자!! 피를 삼키는 자!!
"지금부터 병의 증세와 주의사항을 알려주겠다.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병은 직접적인 피부접촉에 의해서만 감염이 된다. 감염자와 옷이 스치거나 한 것 따위로는 걸리지 않는다. 알겠나? 우선 이병에 걸리면 머리가 아프거나 기침이 나거나 열이 날 뿐이다. 자!! 현재 그런 증상이 있는 자가 있는가?"
"여깁니다."
기마병부대 중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자 갑자기 그 사람의 주위에 작은 공간이 생겼다. 모두 그를 두려워해서 뒤로 물러선 것이다. 그는 바로 칼센이었다.
"지위와 이름을 대고 앞으로 나오라.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자도 나오길 바란다."
"저의 이름은 칼센. 기마병부대 오십부장입니다. 저와 함께 있던 자는 저의 부하중 한명인 마타니, 저의 직속 상관이신 도르카야님이십니다."
도르카야의 이름이 언급되자 앞에서 지위하던 총사령관도 기마병들도 모두 놀라는 듯 했다. 그는 이나라 궁정관리인 마르고의 외아들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이런 일이.. "
자진해 나선 칼센을 선두로 도르카야와 마타니가 쭈뼛쭈뼛하며 앞으로 나오자 총사령관은 안타까운 듯 도르카야에게 시선을 옮기다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칼센에게 호통을 쳤다.
"네 덕분에 유능한 장군감을 잃게 생겼구나. 가자기에서 왔다 할 때부터 내 그렇게 너를 맡지 말라고 마르고님께 당부드렸건만.. 기어이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어."
가자기. 바알신을 섬긴다고 알려진 곳. 그 국가의 이름이 언급되자 또 한번 무리들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곳은 부도덕과 폭력으로도 유명한 곳이 아니었던가. 칼센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지만 수근거림과 질타의 눈빛들은 이미 그에게 모두 쏠리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마타니로써는 무척 가슴이 아픈 일이었는데 그의 과거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
누군가의 외침에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외침을 발한 것은 뜻밖에도 도르카야였다. 그는 칼센을 무섭게 노려보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흥! 이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어차피 네가 이 병에 걸렸다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더냐."
도르카야의 말에 모두 놀랐으나 더욱 놀란 것은 칼센이었다. 도르카야는 자신이 이와 같이 행동한 것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아!!
"죄송합니다."
칼센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순순한 동기에 의해 도르카야를 지켜주려했던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 남자는 결코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버지의 사랑을 모두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의 보호라면 더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됐어. 어차피 너는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에게도 이 나라에게도.. 훗. 잘 들어. 난 너의 그 마음씀씀이를 증오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이 딱 두명이지. 그건 바로 아버지와 너야."
어느새 칼샌의 멱살의 쥐고 있는 그의 눈엔 미움과 증오만이 가득했다. 도르카야는 여전히 칼센의 멱살을 쥔 상태로 총 사령관에게 말했다.
"죽음의 방으로 보내주십시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더욱 두려운 것은 제가 뱉은 공기를 내 적들이 마시고 그들이 뱉은 공기를 다시 제가 들이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포와 굴욕감을 전 지금까지 십여년 이상 지니고 살아왔으니 저는 죽음따윈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의 방에 가는 것은 저와 이 가자기의 더러운 종자뿐입니다.
이 자는 지금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으나 누군가를 보호해야한다는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죽음을 맡이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