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한 金毅漢 (1900 ~ 1964)】
"임시정부 비서, 한국독립당 상무위원,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
「 부친은 동농 김가진(金嘉鎭)이며, 아내는 임시정부 살림꾼 정정화」
1900년 1월 8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성엄(省俺)이다. 이명으로 재한(載漢·)의환(毅煥) 등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동농 김가진(金嘉鎭)이며, 아내는 정정화이다.
1914년 매동공립보통학교, 1917년 중동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大同團) 조직에 참여하여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의친왕 이강(李堈)의 중국 망명을 추진하다가 부친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 상하이 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지지 정당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폭탄의거 직후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요인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 등을 도왔다.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1934년 김구계열의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내 한인특별반과 의열단(義烈團)계열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도 관여하는 등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의 전원공서(專員公署)라는 중국관청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 장시성 우닝(武寧)을 떠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류하였다.
1939년 10월부터 임시정부 비서처의 비서와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 안착한 이후에는 충칭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국내외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반일 선전 방송을 내보냈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등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립하자, 감찰위원회 위원과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 후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되었다.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 선전과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물론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좌파 정당과 무정부주의 단체의 대표를 받아들여 통일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3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 1944년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국내로 돌아온 후에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고, 1964년 10월 9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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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감찰위원 기념촬영(1940. 5. 16) [판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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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4회 의원 기념 사진(1942. 10. 25)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