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이 1981년 91세로 숨을 거둔 지 어언 40년이 넘게 흘러갔다.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석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는 박영호, 임락경(1945~ ) 두 사람뿐이다. 임 목사는 열일곱 살에 광주 동광원에 들어가 1년에 두 차례씩 동광원에 와서 강연을 하던 다석을 만났다. 서울 구기동에 살던 다석은 계명산 자락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도 자주 와서 말씀을 전했다. 임 목사는 양주 장흥의 동광원 남자 수도원에 있을 때 계명산을 넘어가 다석의 동광원 강의를 들었다. 임 목사는 다석의 구기동 집에도 박영호 선생과 함께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갔다.
순창은 행정구역으로는 전북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광주에 가깝다. 임 목사가 순창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찾아간 곳이 동광원이었다. 그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고 화폐개혁(1962)을 한 해라고 말했다. 임락경 소년은 동광원에서 최흥종 목사(1880~1966)를 만났다. 최 목사는 광주 YMCA 초대 회장을 지냈고 평생을 나환자 돌봄과 빈민구제,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한 광주의 별이다. 그는 최 목사와 이현필 선생 그리고 다석을 인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을 겪고 나서 먹을 것이 모자라 대부분 가정에서 1일1식을 했고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1일2식을 하던 때였다. 임 목사는 춘궁기에 2일1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석을 알기 전부터 1일1식을 실천한 셈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으로서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가르침을 얻고자 찾아간 곳이 광주 동광원이다.
“남원에 셋이서 공동경영하는 삼일 목공소가 있었습니다. 순창 고향교회의 오북환 장로, 서재선, 배영진 집사, 세 분이 목공소를 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남원을 찾아오면서 크게 감화를 받은 오국환, 서지선 집사가 이 선생을 따라가는 바람에 목공소가 해체되다시피 했습니다. 서 집사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배영진 집사는 고향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이현필 류영모 함석헌 선생과 현동완 YMCA 총무님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조금만 더 크면 이분들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동광원에 들어갔는데, 군 생활을 마치고 갔더라면 이현필 최흥종 선생은 못 뵐 뻔했지요.
다석은 해방 이후부터 매년 광주 동광원에 강사로 왔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잤지요. 새벽 2시에 함께 일어나 같이 요가를 했죠. 가난해서 강사 숙소가 없었던 게 어쩌면 행운이었어요.”
젊은 시절 다석을 댁으로 찾아뵌 임 목사.
다석은 전주 근교에 있던 절 용흥사를 매입해 동광원에 기증했다. 다석이 지은 ‘진달네’라는 시 제목에서 따 진달네 교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석의 붓글씨를 새겨 현판을 걸었다. 무등산 결핵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전주 진달네 교회로 옮겨와 닭을 기르고 산양 젖을 짜 콜라병에 담아 팔며 자급자족했다. 임 목사도 1969년 군에서 제대한 후 진달네 교회에서 3년 동안 살았다. 다석이 광주 동광원에 강의를 오면 임 목사가 전주로 모시고 가서 진달네 교회에서 하룻밤 묵고 서울로 올라갔다. 다석은 30만원에 절을, 20만원에 인근 산 13 정보를 사서 결핵이 나은 수도자들이 밭을 일구고 살도록 했는데 다석이 세상을 뜬 후 동광원 운영자가 가톨릭 전주교구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