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바람이 만만치 않지만 우리는 인사동 삼청동 골목길 투어에 나섰다.
C는 점심자리가 길어져 못온다하여, K, L 과 종각역서 만나 인사동으로 걸어 올랐다.
와이엠씨에이 뒤편 으로 해서 인사동 사거리로 들어왔다.
이 거리에 처음 발디뎠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 한미은행건물에서 근무하던 K와 가끔씩 만난 곳이
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팔십사년도다. 나는 당시 형집에서 얹혀지네며 괴롭게 학교다니던 때다.
공항근처 신월동에서 버스타고 종각에서 내려 또 갈아타야했다.
거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인사동사거리가 나온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한적하였다.
차만드는 다기구를 팔거나, 한지, 또는 골동품 및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가
드문드문 있었으나 요즘같이 많은 사람들이 구경오는 곳은 아니었다.
특이한 다방이름이 기억난다. '오 자네왔는가 !' '박씨물고온 제비' 등이 있었다.
어느 곳이던가 확실치 않지만, 다방으로 들어가면 그를 보자마자
얼굴이 홍조를 띠며 반기던 이뿌장한 매담이 있었다.
"저 마담이 나만 보면 좋아서 뺑긋이 웃는다"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그를 좋아하는 듯했다.
뭐 보러가면 도화살이 끼었다고 한다더니 그럴수 있겠다 싶엇다.
인사동사거리에 이르자 과거와 달리 지진때문에 일본관광객들이 훨씬 줄어든걸 느낀다.
거의 30% 이상이 일본관광객들이었으리라, 문열지도 않은가게도 있었다.
우리는 사거리 해정병원앞을 지났다. 이곳은 내과전문 검사병원이다. 지금까지 위내시경은
여기서만 서너번 받았다. 아직도 그때 친절했던 여의사가 있는지 모리겠다.
그녀가 말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요"
이런 말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 있을까?
"힉 고맙습니당, 오늘 또 신나게 퍼도 되겠네요 히히"
신이 나서 말했더니 그녀는 깜작놀라 정색을 하며 말렸었다.
그때가 아마 구십육년도 였을꺼다.
좀 더 올라가면 쌈지길 빌딩이 나온다. 그 맞은편 7층 전시장으로가 한층씩 구경했다.
일층은 사진인데 큰 확대사진이 필름이 아니라 디카로 찍었단다. 이제 증말 필카는 사라질까.
아쉬움이 남는다. C가 대구에서 갖고온 일제 케머러, 춘부장께서 일본서 구입하여,
삼십년가까이 장롱속에만 있었다던 그 카메라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라질 운명이겠다.
사실 나는 이런 전시회나 연극, 음악회 등 수준높은 곳에 다니는게 취향인데, 불행히도
Mako 등을 비롯한 질낮은 칭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상당히 저질로 변해버린게 안타깝기만 하다.
--이 글 보는 나뿐칭구들은 모두 반성 좀하거라---
지금부터라도 나뿐 칭구들과는 교제를 끊고 착하고 교양있는 칭구들과 교유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예전과 달리 커피숍하고 옷, 모자, 구두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