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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53
#.1 씬. 강석의 집 전경.(밤)
#.2 씬. 천갑의 방.(밤)
천갑, 영자, 걱정스럽게 앉아있는.
영자 : (시계 보면서) 오늘도 벌써 열 시 넘었는데, 못 오는 건가.
천갑 : 얘는 아직도 밖에 있나?
영자 : 어제도 12시 넘을 때까지 밖에 있더니, 저러다 쟤가 먼저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몰라.
강석이 조사 받으러 간 다음부턴 거의 먹지도 못하는데.
천갑 : 나가서 들어오라고 좀 해봐라.
영자 : 소용없어, 조금만이요, 조금만이요, 하면서 꼼짝도 안하는데 뭐.
우리 강석이 이대로 구속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천갑 : (걱정스럽고)
#.3 씬. 강석의 집 앞.(밤)
단아, 기다리고 서있는. 혜주, 나오는.
혜주 : 언니?
단아 : (보고, 미소 짓는)
혜주 : 아줌마가 죽 끓여놨다고 들어와서 드시래요.
단아 : 제가 무슨 병이 났다고 죽까지. 아니에요.
혜주 : 들어가요, 언니. 어제 오늘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
단아 : 어른들께 의연한 모습 보여드려야하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네요.
혜주 : (안타깝게 보는)
단아 : (쓸쓸하게 미소 짓는)
#.4 씬. 검찰 조사실.(밤)
강석, 초췌한 모습으로 검사 앞에서 조사 받고 있는.
검사 : (자료 넘기면서) 김선태씨에게 인수한 명성 주식이 한꺼번에 매도 물량으로 장에 쏟아져 나와서
주가 폭락의 원인이 된 거 아닙니까?
강석 : 제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습니다.
검사 : 이강석씨가 명성 주식을 쏟아놓던 날, 개인 펀드 매니저인 정인호, 박주성씨가
명성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 주문을 냈는데, 서로간 합의가 이루어진 거 아닙니까?
강석 : 그 시점에 이미 명성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주식시장에 퍼져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래서 더 이상 보유하고 있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거구요.
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검사 : 소문 때문에 전날 거래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쏟아냈다 그거군요?
강석 : 팔자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5 씬. 강석의 집 식당.(밤)
영자, 단아를 끌고 들어오는.
영자 : 안돼, 안돼, 못 먹겠어도 먹어야 해. 아줌마?
아줌마 : 네, 사모님. (하면서 죽 그릇 식탁에 올려놓는)
영자 : (단아 앉히고, 수저 손에 쥐어주는) 조금이라도 먹어봐.
단아 : (수저 들고, 울먹한)
영자 : (눈가가 붉어지면서, 단아 어깨 다독이는) 먹자, 아가, 조금이라도 먹자, 응?
단아 : 죄송해요, 어머님. 저까지 걱정 시켜드리면 안되는데...
(울리는 핸드폰, 얼른 번호를 보고, 약간 실망한 느낌으로 전화 받는) 네, 큰 오빠?
#.6 씬. 종가 마루.(밤)
수영, 핸드폰 들고 있고, 그 옆에 서있는 태영.
수영 : 이서방 아직이냐?
단아E : 네.
수영 : (착잡하고) 넌 어떠니?
단아E : 잘 있어요, 어른들께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 올려주세요.
수영 : 그래, 알았다. 단아야?
단아E : 네.
수영 : 잘 견딜 거라고 믿는다. 들어가라. (전화 끊고)
태영 : 아직이라지?
수영 : 그렇다는 구나.
#.7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석호, 영인, 주정 걱정스럽게 앉아있는.
수영, 태영 들어오는.
수영 : 아직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할아버님.
주정 : 그래, 돌아왔으면 바로 연락 했었겠지.
오빠, 내일은 돌아올 거예요.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구속이라는 얘긴데.....
만기 : (보고)
주정 : 내일은 돌아올 거라는 말이에요.
만기 : 다들 그만들 나가서 쉬거라.
#.8 씬. 강석의 방.(밤)
단아, 책상 앞에 앉아있는.
단아 : (책상을 만져보고, 싸대기를 만져보는) 우리 살면서 헤어져 있는 날, 이번이 마지막 일거예요, 그렇죠?
#.9 씬. 강석의 집 전경.(낮)
#.10 씬. 천갑의 방.(낮)
단아, 이불 호청을 뜯고 있는, 영자 들어오는.
영자 : 그건 왜?
단아 : 빨려구요.
영자 : 얘 그만 둬, 가뜩이나 기운도 없는데 무슨 이불 빨래야.
단아 : (미소 짓는)
#.11 씬. 세탁실.(낮)
단아, 빨래하고 있는.
#.12 씬. 강석의 집 식당.(낮)
단아, 그릇 잔뜩 쌓아놓고, 행주로 닦고 있는.
아줌마, 안타깝게 보고 있는.
#.13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천갑, 영자 앉아있으면, 아줌마 나와서.
아줌마 : 사모님 좀 말려보세요. 하루 종일 빨래며, 청소며, 앉지도 않고, 일만 하더니
지금은 또 식당에 있는 그릇 다 꺼내놓고 저러네요.
천갑 : 들어가서 그만하고 쉬라고 해라.
영자 : 소용없다니까, 내가 안 말린 줄 알아. 일이라도 하면서 지 마음 다독여 보려고 하는 거야.
#.14 씬. 강석의 집 앞.(밤)
단아,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 그 위로.
길에서 팔로 하트를 그리며 사랑한다, 하단아 하고 외치던 강석의 모습이 떠오르는.
단아 : (미소 지으며 길을 바라보고 있는)
#.15 씬. 검찰 조사실.(밤)
검사, 강석 앞에 커피 종이컵 놓아주는.
강석 : 감사합니다.
검사 : (앉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커피 마시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상속법이 한 대기업의 상속과정에 의해서 발전해왔다는 거.
강석 : ......
검사 : 검사로 일하면서 제일 자괴감에 빠질 때가 언제인 줄 압니까?
강석 : .....
검사 :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교묘하게 법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을 땝니다.
그래서 매번 내 자신한테 일깨워주곤 하죠.
법이라는 건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거니까.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만든 거니까.
내 방 책상 앞에 써서 붙인 글이 하나 있습니다.
강석 : .....
검사 : 유전 무죄, 무전 유죄. 저런 말을 외치는 사람이 없게 만드는 게
검사로 살아가야 하는 내가 할 일이다. 이강석씨?
강석 : 네.
검사 :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압니까?
강석 : ....압니다.
검사 : 이강석씨 같은 사람들을 조사 할 때마다,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허탈해지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법을 너무 잘 알고,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조차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법이 만들어지고, 그걸 집행하는 게 내 사명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구.
강석 : 법으론 처벌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가 어떤 죄를 졌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검사 : (보는)
강석 : 법을 두려워하고, 그걸 지키려 애쓰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검사 : 처음이군요.
강석 : ......
검사 : 당신 같은 사람들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니들은 절대 안돼 하는 얼굴로 사람 질리게 하는데. 이강석씨?
강석 : 네.
검사 : 다시는 이런 일로 마주 앉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강석 : .....
검사 : (일어서며) 귀가하셔도 됩니다.
강석 : .....
#.16 씬. 강석의 집 앞.(밤)
강석의 차 다가오는.
강석 : (기다리고 있는 단아를 바라보는)
강석의 차 멈추면, 단아 다가서는.
강석 : (차에서 내리는)
단아 : (앞으로 다가서고)
강석 : .....
단아 : (강석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는, 몹시 초췌한 얼굴의 강석)
강석 :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단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단아 : (미소 지으며, 끄덕이는)
강석 : 검찰청을 나서면서, 나 자신한테 물었어요. 이강석, 너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거냐?
단아 : .....
강석 : 네가 더럽히고, 유린하며 산 세상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냐?
단아 : (끌어안는) 다시는.....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잖아요?
많이 부끄러우니까,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강석 : 당신이 없었으면, 죽는 그날까지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부끄럽다는 게 뭔지. 부끄러워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게 어떤 건지.....
단아 : (눈물을 흘리면서 강석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17 씬. 강석의 집 거실.(밤)
강석, 단아, 들어오는, 천갑, 영자, 혜주 다가서는.
영자 : (울면서 다가들며) 강석아? (강석을 껴안는)
강석 : 죄송해요.
천갑 : (강석 어깨 다독이며) 고생했다.
영자 : (강석 얼굴 어루만지면서) 얼굴 좀 봐. 사흘 동안 얘 얼굴 못쓰게 된 거 봐.
천갑 : 너도 너지만, 쟤도 사흘 동안 밥도 못 넘기고 말이 아니었다.
강석 : (단아를 보는)
단아 : .....
천갑 : 어쨌든 돌아왔으니 됐다.
#.18 씬. 강석의 방.(밤)
강석, 핸드폰 들고 있는. 그 옆에 단아 서있고.
강석 :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19 씬. 종가 마루. (밤)
석호, 전화 중, 그 옆에 서있는 영인, 수영, 태영.
석호 : 재판은? 그래, 다행이구만. 많이 힘들었을 텐데, 쉬게나. (전화 끊는)
#.20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앉아있으면, 석호, 영인 들어오는.
석호 : 이서방 돌아왔답니다.
만기 : (안심하는 표정으로 끄덕이는)
석호 : 재판은 없을 거 같답니다.
만기 : ...
석호 : 이젠 마음 놓으세요, 아버님.
만기 : 그래, 그동안 너희들도 마음고생 많았다.
#.21 씬. 강석의 방.(밤)
강석, 잠이 들어 있는,
단아, 그 옆에 앉아 강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강석 : (눈 감은 채) 왜 안자고 그러고 있어요?
단아 : (미소 지으며) 나 당신 잠든 얼굴 좋아하잖아요.
강석 : (눈 뜨고)
단아 : 그냥 자요. 좋아하는 얼굴 좀 더 보게.
강석 : 그땐 몰랐어요.
단아 : .....
강석 : 제주도 공항에서 당신이 비행기표 좀 양보해달라고 했을 때.
1억이면 어떻겠냐고, 비아냥거리는 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이 여자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땐 몰랐어요.
단아 : 나도 몰랐어요. 세미나 장 앞에서 노교수님께 족보를 팔라고 조르는 당신의 팔을 잡았을 때,
돈으로 안 되는 일 뭐 알고 있는데요 하면서 뻔뻔한 얼굴로 바라보던 이 남자가 내 인생에 어떻게 뛰어들지.
박물관에서 모르는 거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하고 당신이 물었을 때도.
이 남자가 없는 시간을 살 수 없게 될 거란 거.
강석 : (단아의 허리를 안고 얼굴을 묻는)
단아 : (강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말 몰랐어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누굴 만나야 해서 태어났는지....
#.22 씬. 강석의 집 식당.(낮)
단아, 아줌마, 상을 차리고 있는.
천갑, 영자, 순진 들어오는.
천갑 : 강석인 아직도 자는 거냐?
단아 : 네, 아버님.
영자 : 점심은 먹여 재워야 하는 거 아니니? 아침도 안 먹고 잤는데?
단아 : 그냥 두려구요.
천갑 : 그래, 저도 맥이 빠져서 자는 걸테니 그냥 둬라.
#.23 씬. 강석의 방.(낮)
강석, 잠들어 있는. 단아, 이불을 여며주는데.
강석 : (눈 뜨고) 몇 시예요?
단아 : 세 시 넘었어요.
강석 : (일어나 앉으며) 깨우지 그랬어요?
단아 : 뭐하러요?
강석 : 뭐 잘한 일 있다고 퍼질러 자냐, 두들겨 패서라도 깨웠어야죠.
단아 :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그냥 자게 뒀어요.
강석 : 실감 난다, 말발 좋은 우리 마누라 곁으로 돌아왔다는 게.
단아 : 뭐 먹고 싶어요?
강석 : 떡 하나 더 주려구요?
단아 : 네. 미워죽겠으니까 맛있는 거 배 터지게 먹여 보려구요.
강석 : (웃는)
#.24 씬. 커피숍.(낮)
혜주, 머리 헤집고 있는 성수.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현규.
성수 : 난 네가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혜주 : (현규를 의식해서 주춤하는) 하지 마세요.
성수 : (웃으며, 장난스럽게 더 머리 헤집으면서)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더 하고 싶은 거 있지.
왜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은 거 있잖냐?
혜주 : (톤 높여서) 하지 마시라구요.
성수 : (순간 당황해서 보는)
현규 : (그런 혜주를 보고)
혜주 : (강경하게) 왜 하지 말라는데 자꾸 이러세요.
성수 : 혜주야? 너 세게 나오니까 더 귀엽다.
(무안한 거 억지로 참으면서 오버하는 느낌으로 손을 올려 혜주의 머리를 만지려는데)
혜주 : (매섭게 성수의 손을 탁 치는)
성수 : (놀라고) 혜주야?
혜주 : 하지 말라구 했잖아요? 왜 남의 말을 무시해요?
성수 : 야, 우리 혜주, 진짜 무섭다.
혜주 : 장난 하지 마세요. 저 이 오빠 앞에서 선배가 이러는 거 정말 싫어요.
성수 : (현규와 혜주를 번갈아보면서) 혜주야?
혜주 : 저 이 오빠 좋아해요.
현규 : .....
혜주 : 그런데 선배가 자꾸 이러면 이 오빠가 저 앤 속도 없구나 하면서 저 싫어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성수 : (현규를 보는)
현규 : (강경한 혜주를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는)
성수 : 왜.....그럼 말 안했니?
혜주 : 지금 말 하고 있잖아요.
성수 : (자기 머리 긁적이며) 자식, 사람 참 무안하게 만드네.
혜주 : 만약, 또 오늘처럼 제 머리 쓰다듬고 그러면 앞으론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성수 : 어떻게 할 건데?
혜주 : 선배 손 물어뜯어버릴 거예요.
성수 : (보다가 미소 지으며) 저 친구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우리 혜주가 진짜 무섭게 나오는 거 보니.
혜주 : 제발 그 우리 혜주라고도 부르지 마세요. 제가 왜 선배한테 우리 혜주예요?
저한테 우리는 저 오빠라구요.
성수 : (보다가 돌아서는, 현규를 보고) 이럴 줄 알았으면 군대 안가는 거였는데.
난 혜주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거기 있을 줄 알았거든.
(현규, 어깨 툭 치고) 너같은 복병이 있을 줄 몰랐다. (나가는)
현규 : ......
혜주 : (떨려서 두 손을 부비며 어쩔 줄 모르는)
현규 : (다가서며) 괜찮니?
혜주 : 떨려 죽겠어요. 태어나서 누구한테 하지 말라고 소리 질러본 거 처음이에요. 심장이 터져버릴 거 같아요.
(현규 보면서) 나 너무 크게 소리 친 거 아니에요? 그 선배 너무 무안해 하는 거 같죠?
조금 살살 말했어야 하는데.....
현규 : (혜주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는)
혜주 : (눈 커지는)
현규 : ......
혜주 : (눈 커진 채 멍하니 있는)
현규 : (얼굴을 떼어내고 혜주를 보는)
혜주 : (멍한 표정으로 보는)
현규 : 이럴 땐 눈 좀 감아줄 수 없냐?
혜주 : (의자에 푹 주저앉는)
현규 : (당황해서 혜주 앞에 무릎 꺾고 앉으면서) 왜 그래? 혜주야? 괜찮아?
혜주 : .....
현규 : (혜주 어깨 잡으면서) 괜찮냐구? 괜찮아?
혜주 : 나.....기절 한 거 아니죠?
현규 : (보다가 미소 짓는) 말하는 거 보니까 기절한 거 아니야.
혜주 : 근데 왜 이렇게 세상이 빙빙 도는 거 같죠?
현규 : (미소 짓는)
#.25 씬. 만기의 방.(밤)
만기, 강석, 단아, 석호, 영인 앉아있는.
강석 :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만기 :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네만,
검찰에서 조사를 받아야 할만한 문제를 만들며 살아온 건 사실이지 않은가?
강석 :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만기 :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 됐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살게나.
강석 : 네, 할아버님. 제가 얼마나 잘못하고 살았는지 절실히 깨달았으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만기 : (끄덕이는)
#.26 씬. 마루.(밤)
석호, 영인, 강석, 단아, 방에서 나오는.
수영, 태영, 주정, 동동 서있는.
태영 : 여보, 두부 좀 가지고 와라. 이서방 좀 먹이게.
모두, 싸한 분위기로 태영을 보는.
주정 : 너도 참 유머 살벌하게 날린다.
태영 : 농담인데 이렇게 싸하게들 보시면 곤란하죠.
영인 : 작은 아들? 제발 부탁인데, 그 싸한 농담 좀 자제하시면서 살면 안 되시겠어요?
동동 : 고모부 두부 싫어하세요? 두부 먹으라고 하는 거 나쁜 말인 거예요? 할머니?
모두 웃는.
#.27 씬. 수영의 방.(밤)
수영, 태영,진아, 말순, 강석, 단아, 주정,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태영 : 어떡하냐? 며칠 떨어져 있어서 새색시 옆에 꼭 붙어있고 싶을 텐데.
내일 리조트 내려가서 하루 자고 와야 하니.
주정 : 왜 출장이야?
수영 : 네. 일본 관광단 입국 때문에 저희 셋 다 리조트 내려가 봐야 하거든요.
강석 : 전 이 사람하고 같이 내려갈 겁니다.
단아 : (강석 보고)
강석 : 이 사람이 이틀이나 떨어져 잤으니 꼭 따라가야 한다네요.
단아 : 내가 언제....
강석 : 에이, 뭘 부끄러워하고 그러나?
괜찮아, 괜찮아. 새색시가 신랑 옆에 붙어 있고 싶어 하는 거야 당연한 건데 뭐.
태영 : 말순아, 아니 여보야?
말순 : 왜?
태영 : 내일 월차 낼 수 있지? 나도 내 새색시 독수공방 못시키겠다.
주정 : 하여간 따라하는 건 널 당할 사람이 없을 거다.
수영 : 그럼, 우리 색시만 놔두고 갈 수 없잖냐?
진아 : 여보.
수영 : 어머님께 가서 말씀 드려요. 내일 월차 내겠다구.
주정 : 수영아, 내가 너까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수영 : (웃으며) 해보니까 따라하는 게 은근히 재미있드라구요.
#.28 씬. 강석의 집 앞.(밤)
혜주의 차에서 내리는 혜주, 현규.
현규가 운전석에서 내리는.
혜주 :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현규 : 아직도 빙빙 돌아?
혜주 : .....
현규 : 청심환도 먹었는데, 아직도 그래?
혜주 : ....
현규 : 진짜 큰일이다, 매번 청심환 먹고 그럴 수도 없고.
혜주 : 저기요.
현규 : 응?
혜주 : 다음에는요.
현규 : 응.
혜주 : 꼭 물어보고 하면 안돼요?
현규 : 뭐?
혜주 : 너무 갑작스러워서 더 놀란 거 같거든요.
현규 : (기가 막혀서 보고)
혜주 : 그럼 마음에 준비도 할 수 있고.
현규 : 야, 그걸 어떻게 매번, 해도 되겠냐고 묻고 하냐?
혜주 : 안되는 거예요?
현규 : (귀엽게 보다가, 혜주의 어깨를 잡는) 지금 나 물어본다.
혜주 : 오늘 또 해야 해요?
현규 : (웃는데)
강석의 차 다가오는.
강석 : (운전하면서 혜주의 어깨를 잡고 서있는 현규를 보는) 어, 저 자식들, 분위기가 왜 저래.
단아 : (미소 짓는데)
현규, 차 헤드라이트 때문에 돌아보고, 얼른 혜주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는.
강석, 단아, 차에서 내리는.
현규 : (인사하는)
강석 : 지금 니들 뭐하려고 그랬냐?
단아 : (강석의 팔을 꼬집는)
강석 : 오빠가 그런 것도 못 물어요?
혜주 :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단아 : 왜 그렇게 짓궂어요?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강석 : (현규를 보는) 네 마음 다 들여다본 거냐?
현규 : 그런 거 같습니다.
강석 : (손을 내미는)
현규 : (악수하는)
#.29 씬. 길.(낮)
달리는 강석의 차. 강석 운전하고, 옆에 단아. 뒤에 태영, 말순 앉아있는.
강석 : 아니, 형님은 형님 차 놔두시고 왜 제 차엔 타십니까? 우리끼리 오붓하게 가고 싶은데.
태영 : 얘, 얘 물정 모르는 소리 하는 거 봐라. 경기도 어려운데 차 세 대로 내려가야겠냐?
강석 : 그럼, 큰 형님 차를 타시던가요?
태영 : 그게 다 니들 생각해서 아니냐?
강석 : 이게 방해하시는 거지, 무슨 생각해주시는 겁니까?
태영 : 너 운전하다가 단아한테 뽀뽀하고 그러면 사고 나잖냐?
단아 : 오빠?
강석 :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차에 몰래 카메라 같은 거 설치하신 겁니까?
단아 : (강석의 어깨를 툭 치는) 왜 그래요?
강석 : 이렇게 건드리면 뽀뽀하는 수가 있습니다.
태영 : 차 좀 세워라.
강석 : 왜요?
태영 : 나 좀 토해야 할 거 같다.
강석 : 입덧 어지간하게 하시네요.
태영 : (말순에게) 나 얘들 차 괜히 탄 거지?
말순 : 그러니까 아주버님 차 타자니까.
태영 : (버럭) 형 차타면 졸립잖아?
#.30 씬. 길 (낮)
달리는 수영의 차, 수영, 운전하고 그 옆에 진아.
진아 : 저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었는데, 조만씨가 힘들 거예요.
수영 : 삼월 할머니 요즘은 괜찮으시잖아요.
걱정하지 말고, 이참에 좀 쉰다고 생각해요. 우리 색시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는데.
진아 : 종부가 이렇게 함부로 집을 비워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수영 : (웃는) 우리 색시 정말 종부 노릇에 너무 재미 붙인 거 같다.
진아 : 하늘이 내린 종부라고 할까나.
수영 : (웃는데, 앞에 보면, 강석의 차 멈추고. 태영 차에서 뛰어내려 왝왝거리며 주저앉는)
어, 왜 저러지? (차, 멈추는)
수영, 진아 차에서 내리는.
태영, 쪼그리고 앉아 토하고 있고, 말순, 태영의 등을 두드리는.
강석, 단아 옆에 서있고.
수영 : 왜 그러냐?
태영 : (손 내저으면서 왝왝거리는)
강석 : 저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신 거 같은데요.
수영 : 왜? 어쨌길래?
강석 : 제 색시가 줄리아 로버츠보다 예쁘다는 말 밖에 안했는데.
태영 : (벌떡 일어나 강석 발로 차면서) 네가 그 말만 했냐? (수영에게) 형, 이 자식 심장병으로 죽을 거래.
수영 : 심장병?
태영 : 절대 딴 병으로 안 죽고 꼭 심장병으로 죽을 거래. 평생 마누라 보면서 심장이 벌렁거렸으니까.
(다시 주저앉으며 왝왝거리는)
말순 : (태영의 등 두들겨주면서) 그냥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그래? 하루 이틀도 아닌데.
수영 : 이서방, 자네도 그런 생각 했구나. 나도 그런데.
태영 : (왝)
#.31 씬. 리조트 골프장.(낮)
수영, 태영, 강석, 직원들과 같이 돌아보면서 얘기하고 있는.
리조트 돌아보는 몽타쥬.
#.32 씬. 리조트 야외 일각.(낮)
말순, 진아, 단아, 커피 종이컵 들고 얘기하고 있는.
말순 : 진짜 이런 팔자가 없네요. 남편들은 일하는데, 이렇게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면서 얘기나 하고.
진아 : 우리 정말 시집 잘 왔죠?
말순 : 네. 그나저나 우리 하태영, 왝왝거리고 와서 피곤할 텐데. 일이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단아 : 작은 오빠, 새언니랑 결혼하더니 어리광이 더 는 거 같아요.
말순 : 그게 우리 하태영 매력 아니겠어요?
전요, 그것도 이해해요. 우리 하태영이 결혼 전에 사고 좀 치고 산거요.
뭐 연애할 때도 그랬지만, 같이 살아보니까 더 그렇다구요.
진아 : 뭐가요?
말순 : 우리 하태영, 여자들이 가만 두고 볼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자긴 가만있고 싶어도, 워낙 타고나길 매력 덩어리로 태어났으니 자긴들 어쩌겠어요.
단아 : 새언니, 저 속 울렁거리려고 해요.
말순 : 아니, 탁 까놓고 솔직히 말해서요, 아가씨.
아주버님이랑, 이실장님이랑 우리 하태영 중에서 제일 섹시한 건 우리 신랑 맞잖아요?
진아 : 동서, 그건 아니지.
말순 : 우리 솔직해지자니까요. 솔직히 아주버님은 섹시한 스타일은 절대 아니시잖아요?
진아 : 동서 그렇게 말하면 나 섭하지. 우리 그이 웃을 때, 눈 반달처럼 되는 거 난 너무 이쁘고 섹시한데.
말순 : 그건 너무 주관적이신 거구요. 객관적으론 절대 아니거든요. 그리고 아가씨, 이실장님이요.
단아 : 우리 그이가 왜요?
말순 : 고모할머님은 이실장님이 인물이 좋다고,
처음 봤을 때 저런 놈하고 연애 한번 하고 죽으면 여한이 없다 하셨다지만.
솔직히 전 이실장님 처음 봤을 때, 기생 오래비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단아 : (살짝, 그건 아니죠, 하는 표정)
말순 : 제가 족제비 같다고도 했거든요.
남자 셋 중에 인물은 우리 하태영이 제일 남자답고 매력적인 건 사실이잖아요?
단아 : 우리 그이가 족제비 같아요?
말순 : (박수까지 치면서 웃는) 어머, 어머, 아가씨 모르셨구나. 이실장님 좀 그렇게 보이는 거 있어요.
단아 : 그건 아닌데.
말순 :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남자는 뭐니뭐니 해도 유머 감각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유머 감각 하면 우리 하태영 따라 올 남자 어디 있겠어요?
단아 : 우리 그이도 많이 웃겨요.
진아 : 우리 그이는 어떻구요?
말순 :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라고들 하는 거죠.
길 가는 사람 백이면 백 붙잡고 물어보세요. 세 남자 중에 누가 제일 남자답냐구.
진아 : (발끈해서) 정말 물어볼래요?
말순 : 정말 이 말은 형님 자존심 상할까봐 안하려고 했는데,
쌍둥이면서도 아주버님하고 우리 하태영은 나이차가 좀 나 보이는 거 사실이잖아요?
진아 : 동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그이 어디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거야? 그래요? 아가씨?
단아 : .....
진아 : 어머, 아가씨 왜 대답 안하세요?
말순 : (깔깔거리며) 아가씨도 같은 생각이신 거죠 뭐.
단아 : 그런 게 아니라, 오빠들 나이 차이 나보이는지 아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말순 : 그리고 나이는 밑이지만, 피부 상태도 이실장님보다는 우리 하태영이 훨씬 좋잖아요?
단아 : 우리 그이도 피부 좋은데.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기할 정돈데.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잡티 하나 없나 해서.
수영, 태영, 강석 걸어오는.
태영 :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해?
말순 : (얼른 일어나서 태영 끌어당기고) 보세요.
(얼굴 만지면서) 백옥 같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라니까요.
태영 : (뒤로 물러서며) 왜 이러냐? 징그럽게.
진아 : (수영의 팔을 잡으며) 이실장님?
강석 : 네?
진아 : 우리 이이하고 서방님, 나이 차이 나 보여요?
강석 : 네?
진아 : 아니죠?
수영 : 왜 그래요?
진아 : 동서가 쌍둥인데도 나이차가 나보인다고 하잖아요?
태영 : 그건 사실 아닌가?
말순 : 그지? 그지? 내가 그랬어. 남자 셋 중에 자기가 제일 남자다워 보인다구.
태영 : 그것도 사실이구.
강석 : 그렇진 않죠? (단아에게) 그지?
태영 : 야, 넌 기생 오래비 스타일이잖냐?
말순 : (손뼉 치면서) 나도 그 말 했어.
단아 : 왜 자꾸 우리 이이가 기생 오래비 같다고 하세요?
태영 : 족제비 같기도 하지.
말순 : 그 말도 내가 했는데.
강석 : 좋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남자다운지 한번 겨뤄보죠.
#.33 씬. 리조트 내 회의실 정도의 장소.(낮)
태영, 강석, 팔씨름하고 있는.
둘러서있는 수영, 진아, 말순, 단아.
말순 : (태영 어깨 주무르며) 이 악물고 하는 거야?
태영 : 알았다, 알았어.
단아 : (강석 어깨 잡고) 지면 국물도 없는 거 알죠?
강석 : 믿어보라니까요.
수영 : 자 그럼 시작.
태영, 강석 이 악물고 팔씨름하는. 말순, 단아 응원하고.
팽팽하게 힘을 겨루다가, 결국 강석이 힘겹게 이기는.
말순 : (울상이 되서 태영 어깨 쥐어박으며) 그걸 지냐? 그걸? 저렇게 깡마른 양반한테?
태영 : 야, 다시 한번 해, 다시 한번. 내가 순간 방심해서 그런 거야.
강석 :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하는 법입니다. (단아에게) 나, 이쁘죠?
단아 : (웃으며) 네.
진아 : 그럼, 결승전 해야죠.
수영 : (의자에 앉는)
진아 : (수영 어깨 잡으며) 남자다운 게 뭔지 보여줘요.
수영 : 그럴게요.
강석 : (수영의 손 잡으려고 하면)
단아 : 타임.
모두 단아를 보는.
단아 : 우리 이이는 바로 경기 끝냈으니까 불리해요. 잠깐 타임 했다가 시작해야 한다구요.
강석 : 옳소.
단아, 강석, 한쪽에 서있고, 단아, 강석에게 물을 건네는.
강석 : (물을 마시는)
단아 : (강석의 팔 주물러주며) 족제비니 기생 오래비니 하는 소리 다시는 못나오게 해야 해요.
강석 : 당신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할게요.
한 켠, 서있는 수영과 진아.
진아 : (주먹 불끈 쥐고) 진정한 승자가 누군지 보여주는 거예요.
수영 : 당신을 위해서 목숨 걸고 해볼게요.
두 팀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태영과 말순.
태영 : 그깟 팔씨름으로 남자다운 걸 겨룬다는 게 말이냐 되냐?
말순 : 입 다물고 있어라.
태영 : 야, 내가 형하고 엄마 젖을 나눠먹는 바람에 힘쓰는 일에 좀 약한 거거든.
말순 : 아주버님이 이기시면 뭐라고 할 건데?
태영 : 강석이 저 자식, 팔 힘 무지 세다. 내가 웬만해선 절대 안 졌거든.
수영, 강석, 팔씨름하고 있고, 단아, 진아 옆에서 응원하고 있고.
태영, 말순 강석, 응원하는.
진아 : 왜 이실장님을 응원하세요?
태영 : 그래야, 제가 덜 쪽팔리잖아요?
하는데, 수영, 강석 안간힘을 다해 힘을 겨루는. 결국 수영이 이기는.
진아 : (좋아서 수영을 끌어안고 팔짝 팔짝 뛰는)
강석 : (단아 눈치 보는)
단아 : (흘겨보는) 오늘 밥 먹지 말아요. 밥 먹어봐야 힘도 못쓰는데 뭐하러 먹어요.
말순 : (태영에게) 댁도 오늘 굶어.
#.34 씬. 종가 앞.(낮)
장기, 조만 쓰레기봉투 들고 서있는.
장기 : 잠깐도 못 나와요?
조만 : 네.
장기 : 진짜 다들 너무 이기적이시다. 연약한 조만씨한테 집안일이랑 할머니까지 다 맡겨놓고
어떻게 여행들을 가시냐구요?
조만 : 제가 참아야지 어쩌겠어요.
장기 : (조만의 손을 잡으며) 조만씨는 그게 문제예요. 자기 생각은 눈꼽 만치도 않고, 남 생각만 하는 거.
이렇게 착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조만 : 제 운명인 걸요.
#.35 씬. 부엌.(낮)
삼월, 음식하고 있는데, 조만 쪽마루에 걸터앉아 울고 있는.
삼월 : 언제까지 울 거야?
조만 : 제 운명이 서러워서 그래요.
삼월 : 저 놈의 운명 타령은.
조만 : 할머니 옆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데, 그럼 서럽지 않겠어요?
삼월 : 누가 내 옆에서 외롭게 살라고 목이라도 조르디?
조만 : 그럼 아프신 할머니 놔두고 제가 어떻게 떠나요?
삼월 : 내 걱정 말고 시집가라니까.
조만 : 제가 그렇게 이기적이면, 윤조만이가 아니죠.
영인, 들어오는.
영인 : 조만씨 왜 그래?
조만 : (일어나서) 아무도 모르실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떠날 수 없는 제 운명의 비극성을. (울면서 뛰쳐나가는)
영인 : 조만씨 지금 뭐라는 거예요?
삼월 : (웃으며) 저 운명의 비극성을 어찌 말로 다하겠어요.
#.36 씬. 만기의 방.(낮)
만기, 석호, 영인 앉아있는.
영인 : 제가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둬야 할 거 같습니다.
석호 : (놀라서 영인을 보는)
만기 : (영인을 보는)
영인 : 조만씨도 결혼을 해야 할 거 같고, 삼월 할머님도 예전 같지 않으신데.
큰 애한테만 살림을 맡겨 놓는 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아이도 태어날 텐데, 그 방법이 최선이란 생각이 듭니다.
만기 : 일을 좋아하지 않냐?
영인 : 그렇긴 하지만,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어쩌겠습니까?
만기 : (석호에게) 네 안사람이 일을 그만두면 회사 일에 지장이 있지 않겠냐?
석호 : 네, 이 사람만한 홍보 담당자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 성격상 일을 그만 두고 집에서 살림만 한다는 게 어떨지 모르겠구요.
영인 : 하면 하지 못할 거 뭐 있어요?
석호 : 산후 우울증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당신 적지도 않은 나이에 좋아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만 키우다 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라 그렇지.
만기 :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37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영자, 혜주, 현규 찻잔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천갑 : 우리 저녁도 먹었는데 소화도 시킬 겸 고스톱이나 한판 칠까?
현규 : 저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갑 : 그래? 해봐.
현규 : 저, 혜주와 정식으로 교제를 하고 싶습니다.
영자 : (화들짝) 어머, 정말이야?
혜주 : (현규를 보는)
현규 : 어른들께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천갑 : 허락하고 말고 할 게 뭐 있나? 난 애초부터 자네가 내 사윗감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자에게) 뭐하냐?
영자 : 응?
천갑 : 이런 날 술 한잔 안하면 되겠냐?
시간 경과.
천갑, 현규, 술을 마시고 있고, 영자, 혜주, 순진 앉아있는.
천갑 : (거나하게 취해서 현규의 잔에 술 따라주면)
현규 : (얼굴 돌리고 술 마시는)
천갑 : 젊은 친구가 술이 세구만. 주량이 얼마나 되나?
현규 :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좀 마시는 편입니다.
천갑 : 야, 그것도 마음에 든다. 천상 자네는 내 사윌세.
순진 : 이모부, 너무 오버하시는 거예요.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진 모르는 거거든요. 연애한다고 다 결혼하나요?
천갑 : 넌 왜 나와 있냐? 네 방에 티브이까지 사서 넣어놔 줬는데.
영자 : 그래, 넌 좀 들어가라.
순진 : 제가 뭐 군식구예요, 맨날 방에만 처박혀 있게.
천갑 : 너 군식구 맞거든. 야, 기분도 좋은데 노래 한번 뽑아야겠다.
영자 : 당신 정말 기분 좋은가보다.
천갑, T.V에 연결한 노래방 마이크 들고 서서 노래 부르고 있는.
영자, 혜주, 현규, 순진 박수 치고 있는.
영자 : 저 영반 웬만큼 기분 좋아선 집에서 노래 안 부르는데, 오늘은 진짜 기분이 좋으신가봐.
현규 : (미소 지으면)
천갑 : (간주 나오는 사이에) 현규야?
현규 : 네. (대답하면서 일어서는)
천갑 : 그냥 현규야 하고 불러도 되지?
현규 : 그럼요.
천갑 : 이리 와라.
현규 : (천갑 옆으로 가는)
천갑 : (현규 어깨 감싸 안고) 나, 정말 오늘 기분 너무 좋다, 현규야.
현규 : 네.
천갑 : 혜주 저 자식... (울먹해지면서) 나한테는 정말 아픈 자식이다.
(현규 어깨 꽉 잡으면서) 너만 믿는다, 현규야. 알지, 내 마음?
현규 : 네.
영자, 혜주 울먹해서 보는.
천갑 : (울먹하지만, 기분이 좋은 상태로 현규의 어깨 감싸고 노래를 부르는)
#.38 씬. 술집 룸 정도의 장소.(밤)
수영, 태영, 말순, 강석, 단아, 둘러 앉아 맥주 마시고 있는.
태영 : (술에 취해서) 내 마누라보다 더 터프한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거 왜들 이래. 내가 팔씨름에서 꼴찌 했다고 무시하지 말라 이거야.
수영 : 우리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왜 꼴찌 꼴찌하면서 네 스스로 자학을 하냐?
강석 : 그러게 말입니다. 꼴찌하신 게 자랑도 아니고.
말순 : (역시 술에 취해서) 비웃지들 마시라구요. 우리 하태영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렇지,
컨디션만 좋았으면 오늘 같은 수모는 안 당했을 거라구요.
태영 : 야, 야, 그러지 말고, 여자들끼리 한판 붙자. 누구 마누라가 제일 힘센지 겨뤄보자 이거야.
강석 : 이거 왜 이러십니까? 우리 색시는 핸드볼 주전도 했던 몸이십니다.
태영 : 그래, 좋다구요, 그러니까 붙어 보자구요. 자신 있지? 말순아?
말순 : 그럼, 그럼.
단아 : 근데 왜 이 밤에 여자들끼리 팔씨름을 해야 하는 건데? 작은 오빠 꼴찌한 수모 만회하자구?
태영 : 너 자꾸 꼴찌 꼴찌 그럴래?
단아 : 작은 오빠가 그 소리 제일 많이 했거든?
진아, 핸드폰 들고 들어오는.
수영 : 어머님께 전화 드렸어요?
진아 : 네. 잘 도착해서 재밌게 지내고 있다고 말씀 드렸어요. (수영 옆에 앉는데)
태영 : (진아가 들고 있는 핸드폰 확 뺏으면서) 그래, 그 일도 있었다.
우리 말순이가 얼마나 팔 힘이 좋냐 하면, 휴대폰을 던졌는데 창문 밖으로 기냥 날아가는 거야.
보통 여자면 그렇게 못하지.
말순 : (태영이 들고 있는 핸드폰 뺏으면서) 그때 백미터도 넘게 날아갔을 걸.
태영 : 백 미터가 뭐냐? 그 물웅덩이 창에서 몇 백 미터는 떨어져 있었을 거다.
말순 : 내가 이렇게 확 던지니까 (핸드폰 던지면서) 자기가 가서 쏜살같이 달려가서 주워왔잖아?
태영 : 맞아, 맞아, 나 진짜 무지 빨랐지?
그렇게 둘이 웃고 떠드는 사이,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핸드폰.
모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보는.
진아 : (일어나서 핸드폰 주우며) 동서, 왜 남의 휴대폰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는 태영과 말순.
#.39 씬. 만기의 방.(밤)
만기, 간난 아기 크기의 인형을 앞에 놓고, 기저귀 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동동,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동동 : (슬그머니 일어서는)
만기 : (기저귀 가는 일에 열심인)
#.40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이불을 깔고 있고, 영인 손에 로션을 바르고 있는데.
동동E : 할아버지?
석호 : 어, 그래.
동동 : (문 열고 들어오는)
석호 : 왜 그러냐? 동동아?
동동 : 할아버지? (울먹해서)
영인 : 왜 그래? 동동아?
동동 : 증조할아버지도 치매신가 봐요.
영인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석호 : 치매라니?
동동 : 할머니처럼 할아버지도 아프신 거 같아요.
석호 : 왜 이상한 말씀 하시디?
동동 : 그게 아니구요. 인형 놀이를 하세요.
#.41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인형한테 기저귀를 채워주면서.
만기 : 이만하면 된 거 같은데.
석호, 영인, 동동 들어오는.
석호 : 아버님?
만기 : 응? 왜들 안자고?
석호 : 뭐하시는 거세요?
만기 : 아, 이거.
영인 : 아버님? 편찮으세요?
만기 : 아니다, 그런 거.
석호, 영인, 동동 앉는.
석호 : (걱정스럽게) 어디가 안 좋으신 거 같으셨으면 말씀을 하셨어야죠.
만기 : 그런 거 아니라니까.
석호 : 그럼 왜?
만기 : 연습하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안사람이 회사를 그만두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고 해서.
내가 한번 맡아서 키워볼까 싶구나.
영인 : 아버님.
만기 : (석호 보면서) 네 기저귀 한번 갈아준 적이 없어서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이렇게 연습을 하다보면 자신도 붙지 않겠냐?
#.42 씬. 마루.(밤)
석호, 영인 방에서 나오는. 영인 울먹한.
석호 : (영인의 어깨를 다독이는)
영인 : 어떻게 저런 생각까지 하셨을까?
석호 : 그만큼 당신을 위하시는 거 아니겠어?
부엌에서 나오는 삼월.
삼월 : (울먹한 영인을 보고) 아니, 왜 그래요?
석호 : 감격해서 그럽니다. 아버님이 인형까지 사가지고 오셔서 기저귀 가는 연습을 하시네요.
이 사람 아이 낳으면 맡아 키워 보겠다구.
#.43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앉아있으면, 동동 그 앞에 앉아 인형을 안고 있는.
삼월, 자리끼를 들고 들어오는.
동동 : 저두요, 할아버지, 학교 갔다 와서 애기 봐줄게요.
만기 : 그냥 애기라고 부르면 안 된다.
동동 : 네? 왜요?
만기 : 태어날 애기가 너한테는 고모나, 삼촌이 되는 거거든.
동동 : 애기한테 고모나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만기 : 그렇단다.
동동 : 제가 더 나이가 많은데두요?
만기 : 네 할아버지가 고모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고모님이라고 부르잖냐?
동동 : 좀 억울해요.
만기 : 억울해도 할 수없다.
동동 : (일어나는)
만기 : 왜 억울해서 가출하게?
동동 : 아니요, 쉬 하러요. (나가는)
삼월 : 면구스럽습니다, 회장님.
만기 : 무슨 말이요?
삼월 : 제가 온전한 정신이면, 회장님께서 인형까지 사들고 오셔서 그러진 않으셨을 텐데.
만기 : 이봐요.
삼월 : 네, 회장님.
만기 : 댁네가 아프지 않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겠지만, 그런 일은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소?
어찌 보면 이것도 무슨 뜻이 있는 일이 아닌가 싶소.
댁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손주 기저귀 가는 일이 내 차례까지 오기야 했겠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구려.
#.44 씬. 리조트 내 높은 장소. (밤)
강석, 단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앉아있는.
단아 :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정말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강석 : .....
단아 : 당신이 그랬잖아요? 우리는 어느 별에서 와서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걸까.
강석 :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니체가 한 말인데.
단아 : (강석 보고 미소 지으며) 저 넓디넓은 우주에서 그 많고 많은 별 중에,
지구라는 이 별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고, 알아보고
이렇게 같이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래서 사람 사이의 모든 인연은 기적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석 : (단아의 손을 잡는)
단아 : 당신이 천문학자가 됐어도 좋았을 텐데. 그럼 별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 옆에서
우리가 얼마나 기적같은 인연인지 매일 깨달으면서 살았을 거 같은데.
강석 : 근데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짚어줄 게 있는데.
단아 : (보는)
강석 : 지구는 별이 아니에요. 행성이지.
단아 : (의아하게) 네?
강석 :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니까.
단아 : 그런 거예요?
강석 : 나 더 잘난 척 해도 되요?
단아 : (웃는)
강석 : 노을이 왜 지는지 알아요?
단아 : .....
강석 : 그건 먼지 때문이에요. 그래서 달에선 노을이 지지 않아요. 먼지가 없으니까.
태양이 빛나다가 갑자기 캄캄한 밤이 되죠. 밤하늘이 왜 저렇게 어두운지 알아요?
단아 : .....
강석 : 그건 우주가 팽창하면서 별들이 더 멀어지기 때문이에요.
단아 : 정말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나 봐요? 그런 걸 다 아는 거 보면?
강석 : (히죽 웃는) 나 공부 많이 했거든요.
#.45 씬. 리조트 내 식당.(아침)
수영, 태영, 진아, 말순, 강석, 단아 식사하고 있는.
단아 : 밤하늘이 왜 어두운지 몰랐지? 작은 오빠?
태영 : 그래서?
단아 : 우리 신랑은 그런 것도 다 안다구.
수영 : (웃는)
태영 : 너 지금 나 공부 못했다고 깔보는 거냐?
단아 : 그렇게 들렸어?
말순 : 가만 가만....그 얘기 어디서 다 들었는데.
단아 : 언니도 천문학에 관심 있으셨나 봐요?
말순 : 맞다, 미술관 옆 동물원. 심은하하고, 이성재 나왔던 그 영화 있잖아요? 거기 나오는 얘긴데.
단아 : (강석을 보는)
강석 : (눈만 멀뚱거리는)
태영 : 뭐야? 영화 한편 보고 그 잘난 척을 한 거야?
강석이 넌 좋겠다. 속아 넘아가 주는 순진한 색시가 있어서.
(말순 어깨 잡으며) 우리 마누라 대단하다. 아, 이 놀라운 기억력.
말순 : 나 머리 좋지?
태영 : 응. 내가 공부 좀 못했으면 어떠냐? 이렇게 똑똑한 마누라가 있는데.
수영 : 머리로 따지면 우리 색시가 제일인 거 같은데. 살림 금방 배우는 거 보면.
말순 : 아주버님, 저 살짝 심정 상하려고 하거든요. 살림 안 는다고 비웃으시는 거 같아서요.
수영 : 아, 죄송합니다, 제수씨,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태영 : 참, 이상한 집안이야. 자기 짝 자랑하려고 남의 짝 기를 쓰고 끌어내리는 커플 셋이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형?
수영 : 왜?
태영 : 우리 집안 분위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 같아?
수영 : (웃으며) 글쎄.
태영 : 난 다 강석이 쟤 때문이라고 생각해.
강석 : 왜 또 절 걸고 넘어지세요, 작은 형님은.
태영 : 너 나타나기 전까진 우리 정말 화기애애한 집안이었거든. 싸움꾼 기질인 네가 문제인 거야.
단아 : 오빠? 팔씨름 하자고 한 거 분명히 작은 오빠였어.
태영 : 봐, 봐, 단아 쟤가 오빠한테 절대 시비 거는 애가 아니었거든.
강석 : (단아 어깨 잡으며) 시비 걸어, 걸어. 내가 뒤에서 다 막아줄 테니까.
#.46 씬. 길.(낮)
달리는 수영의 차. 수영, 운전하고 그 옆에 진아. 뒤에 태영, 말순 앉아있는.
수영 : 오늘은 어째 이서방 차 안타고 내 차를 탔냐? 우리 차 타면 심심하다면서?
태영 : 또 토하면서 갈 일 있어?
수영 : (웃는)
태영 : 그래도 형, 참 보기 좋지? 우리 단아 말이야.
우리 단아 저 자식, 저렇게 실없는 소리하면서 웃길 줄 모르는 놈이었잖아?
수영 : 그래, 그래서 이서방한테 늘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단아 저렇게 웃으면서 살 수 있게 해줘서.
#.47 씬. 길.(낮)
달리는 강석의 차. 단아 옆에 앉아서 자기 무릎을 꼬집고 있는.
강석 : 왜 그래요?
단아 : (보는)
강석 : 왜 자꾸 무릎을 꼬집어요?
단아 : 졸음이 와서.....
강석 : 졸리면 자면 되지, 왜 무릎까지 꼬집고 그래요?
단아 : 운전하는데 옆에서 자면 얄밉잖아요?
강석 : 얄미워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자요.
단아 : 안돼요. 난 천성이 의리파거든요.
강석 : (웃으며) 언제는 잘만 자드라. 연애할 때 내 차에서 자다가 깬 적 있는 거 잊었어요?
단아 : 그때 우리 연애한 거 아니었거든요. 연애하는 척 한 거지.
강석 : 연애하는 척 할 때는 넌 운전해라, 난 실컷 잔다, 그거였군.
단아 : 내가 원래 공과 사 구분이 분명한 성격이잖아요?
강석 : 야, 정말 걱정된다. 엄마 말발 닮으면 우리 애기들 말발도 장난 아닐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면서 살지.
단아 : 뭐가 걱정이에요? 영화 한편 보고 잘난 척으로 밀고 나가면 될 텐데.
강석 : 항복, 항복.
#.48 씬. 강석의 집 거실.(낮)
강석, 단아, 들어오는. 영자 기다리고 있는.
단아 : 다녀왔습니다.
영자 : 그래, 잘 쉬고 왔어?
단아 : 네.
강석 : 아버지는 외출 하셨어요?
영자 : 외출은... 주무신다.
강석 : 아직까지요?
영자 : 들어가 봐라, 누구랑 주무시는지.
강석 : .....
#.49 씬. 천갑의 방.(낮)
천갑, 현규, 잠이 들어 있는.
강석, 문 열어보고 놀라는.
#.50 씬. 강석의 집 거실.(낮)
강석, 천갑의 방 문 닫으면서 돌아서는.
강석 : 현규가 왜 저 방에 있어요?
영자 : 오늘 새벽까지 술 마셨거든.
단아 : (영자를 보는)
영자 : 날이 훤하게 밝은 때까지 기분 좋다고 데리고 앉아서 술 드셨어.
강석 :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데요?
영자 : 현규가 우리 혜주랑 정식으로 교제하겠다고 허락 받으러 왔거든.
강석 : .....
단아 : .....
#.51 씬. 강석의 집 2층 거실.(낮)
강석, 단아 올라오는. 방에서 나오는 혜주. (손에 약병 들고)
강석 : 축하한다.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많이 빠른 걸.
혜주 : .....
단아 : (혜주 손 잡으며) 잘 됐어요, 아가씨. 이건 뭐예요?
혜주 : 술 깨는 약이요. 일어나면 주려구요.
강석 : 아, 나도 어제 술 많이 마셨는데, 오빠부터 먹자.
혜주 : 안돼. (내려가는)
강석 : 뭐야? 저 자식. 오빠보다 현규 자식이 먼저라는 거 아니야?
단아 : 왜요? 또 삐치려고 해요?
강석 : 그럼 안 삐치게 생겼어요?
20년 넘게 같이 산 오빠보다 얼마 만나지도 않은 현규 자식이 먼저라는데?
단아 : 가슴에 손 좀 올려 봐요.
강석 : (가슴에 손 올리면서) 이렇게요?
단아 : 난 30년 넘게 같이 산 오빠들한테까지 시비 걸면서 당신 편들었거든요.
강석 : (웃는)
#.52 씬. 강석의 집 거실.(낮)
강석, 2층에서 내려오는데,
천갑, 영자, 현규, 혜주, 단아 서있는.
단아 : (작은 비닐 가방 천갑에게 건네면서) 갈아입으실 속옷이에요.
천갑 : 그래, 고맙다.
강석 : 어디 가세요?
영자 : 현규 데리고 사우나 가시겠단다.
강석 :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천갑 : 아들아, 오늘은 우리 둘만 갔으면 좋겠는데.
강석 : 왜요?
천갑 : 우리 둘이 오붓하게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그러려구.
아가? 저녁 좀 맛있게 준비해둬라. 현규도 같이 와서 먹을 거니까.
단아 : 네, 아버님.
영자 : 너무 붙잡아두는 거 아냐? 당신? 혜주하고 데이트 하는 것도 아니고,
늙은 당신하고 놀아주는 게 뭐가 그리 재미있을 거라구?
천갑 : 재미없냐? 현규야?
현규 : 아닙니다, 재미있습니다.
천갑 : 재미 있다잖냐? 가자, 현규야. (현규 어깨 감싸 안고 나가는)
영자 : 앞으로 현규 걱정 된다. 네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하고 불러들이실 거 같으니.
강석 : 여보?
단아 : (보고) 네?
강석 : 오늘 저녁 맛있는 거 하지마. 그냥 자장면 시켜.
영자 : 너 왜 그러니?
강석 : 현규 자식 귀빈 대접받는 거 약 올라서요.
영자 : 어머, 얘는. 없어보이게 왜 그러니?
강석 : 저 없어 보이는 거 하루 이틀이에요?
단아 : (웃는)
#.53 씬. 부엌.(낮)
삼월, 진아, 말순, 저녁 준비하고 있는.
주정 물 마시면서.
주정 : 조만이 얜 또 옷 바꾸러 갔어?
삼월 : 제발 시집이나 가줬으면 좋겠는데, 맨날 운명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면서 밤마다 울기만 한다.
말순 : (킥 웃으며) 진짜 이경장하고 천생연분이에요.
누가 결혼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천사니 뭐니 하면서 울고 짜고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다니까요.
태영, 들어오는.
태영 : 형수님? (핸드폰 내밀면서) 이거요.
진아 : 서방님.
태영 : 우리 말순, 아니 우리 마누라가 망가뜨렸으니 당연히 제가 사드려야죠.
진아 :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태영 : 새로 나온 기종이라는데 마음에 드세요?
진아 : (앞뒤로 뒤집어 보며) 네, 너무 이뻐요.
주정 : 아니, 왜 손위 동서 핸드폰을 망가뜨려?
태영 : 터프한 게 죄죠 뭐.
수영, 들여다보면서.
수영 : 여보?
진아 : 네?
수영 : 잠깐 나와 볼래요?
#.54 씬. 마루.(낮)
수영, 핸드폰을 내미는.
진아 : 와, 진짜 신기하다.
수영 : 왜요?
진아 : (앞치마에서 핸드폰 꺼내 보여주는)
수영 : 이게 웬 거예요?
태영, 주정 부엌에서 나오는.
태영 : 뭐야? 형도 핸드폰 사온 거야? 내가 어련히 사다드릴까 봐.
진아 : 근데, 두 개가 똑같아요.
주정 : 야, 쌍둥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잘됐다, 나 핸드폰 박살내는 거 취미 생활인데, 예비로 하나 장만해두자.
태영 : (수영이 들고 있는 거 얼른 뺏어서 주정 쥐어주며) 이걸로 하세요, 할머니.
형수님은 제가 사드린 걸로 하시는 거예요.
진아 : (웃으며) 네.
#.55 씬. 회사 전경.(낮)
#.56 씬. 석호의 사무실.(낮)
석호, 영인, 수영, 태영, 강석 앉아있는.
석호 : (강석에게) 우리 회사 해직 대상자들을 사돈어른께서 새로 건립하시려는 실버타운에
우선적으로 채용하겠다는 건가?
강석 : 네. 능력이 없어서 해직되시는 게 아니고, 경비 절감의 차원에서 그만 두셔야 하는 분들이니
그렇게라도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석호 : 자네와 사돈어른께는 고마운 일이지만, 그건 너무 부담을 드리는 거 아니겠나?
강석 : 아닙니다. 한솥밥을 먹던 식구로 가능한 기회는 만들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인 : 이실장 뜻이 그러니 받아줘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셨던 분들한테
그런 기회를 드리면 고마워서라도 더 열심히 일하실 거고,
그러면 사돈어른께도 크게 누가 되는 일은 아닐 거 같아요.
태영 : 남자는 역시 여자 하기에 달렸나보다.
강석이 쟤 입에서 한솥밥 먹던 식구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아버지.
저와 같이 가시려면 좀 더 냉정해 주십쇼 하고 싸가지 없이 나오던 인물이잖아요, 쟤가.
수영 : 또 또 얘 쟤 한다.
태영 : 내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니까 형은.
강석 : 괜찮습니다, 큰 형님. 작은 형님의 애정 표현에 이젠 완전히 길이 들었는데요 뭐.
#.57 씬. 강석의 방.(낮)
단아, 핸드폰 중.
단아 : 아드님은 좀 어떠세요? 네, 다행이네요. 이번 달 입원비 오늘 송금 했어요. 네? (듣는)
#.58 씬. 강석의 2층 거실.(낮)
강석, 퇴근해서 올라오다가 놀라고.
단아, 테이블 위에 있던 티브이를 번쩍 들어서 내려놓고 있는.
강석 : 아니, 이 여자가. (다가와서) 지금 뭐하는 겁니까?
단아 : 청소하고 있잖아요.
강석 : 그러다 허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이 무거운 걸 겁도 없이 번쩍 번쩍 듭니까?
단아 : 안 무거워요.
강석 : 이 큰 게 안 무거우면? 대체 정체가 뭡니까?
단아 : (웃으며) 고등학교 때요. 역도부에 잠시 있었거든요.
강석 : (기가 막혀서 웃는) 고등학교 때 참 바빴겠어요? 핸드볼 하랴, 역기 들랴?
단아 : 뻥이에요.
강석 : 아니 이 여자가. 진짜 믿을 뻔 했잖아.
단아 : (웃으며 티브이 내려놓은 자리 걸레질 하면서) 오늘은 퇴근이 10분 정도 빨랐네요.
얼른 닦고 올 시간에 내려가 있으려고 했는데.
강석 : 마누라 보고 싶어서 신호 무시하고 달려왔습니다, 됐습니까?
단아 : (흘겨보면서) 그러다 사고 나면 사고 때문에 입원하게 되는 게 아니라.
마누라 주먹에 맞아 입원하게 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강석 : 설마 내가 그런 겁 없은 짓 했겠어요. 오늘은 길이 잘 뚫렸어요.
단아 : (다시 티브이를 드는데)
강석 : 아니, 이 여자가 정말 왜 이러지. 멀쩡한 남편 옆에 두고. 대체 겁이 없어, 겁이.
(하면서 티브이 드는데, 너무 가볍다) 어, 뭐가 이래.
단아 : 속고만 살았어요? 안 무겁다니까.
#.59 씬. 강석의 방.(낮)
강석, 단아 들어오는.
단아 : (강석을 끌어안는)
강석 : 아니, 이렇게 내가 보고 싶었단 말인가?
단아 : 이경호씨한테 오늘 입원비 송금하려고 전화 했다가 알았어요.
병원에 갔었다면서요? 입원비하고 생활비까지 다 마련해줬다고.
강석 : (떼어내 단아의 어깨를 잡고) 잘못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
단아 : (두 손으로 강석 얼굴 감싸 쥐고) 결혼식 날 마음속으로 빌었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의 여자이게 해달라고. 수 없이 다시 태어나도 늘 이 사람의 여자이게 해달라고.
그런데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석 : ......
단아 : 이번 생으로 충분하니까. 이보다 더 좋은 생은 없을 거 같으니까. (f.o)
#.60 씬. 산파 할머니 집 마당.(낮)
할머니, 상준 실랑이하고 있는.
들어오는 주정, 병도.
상준 : 할머니 작자 나섰을 때 팔아야 한다니까.
할머니 : 제발 정신 좀 차려, 이놈아. 할미 임종할 집칸은 있어야 할 거 아니여?
상준 : 내가 이보다 더 큰 집 사준다니까 그래.
진짜 그 당구장 자리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한번만 더 밀어주라, 할머니.
할머니 : 어째 하고 싶은 게 맨날 그런 거여? 오락실 하다가 망해 먹은 게 얼마나 됐다구.
상준 : 할머니, 진짜 이번 한번만 더 믿어주라.
#.61 씬. 산파 할머니 집 방.(밤)
할머니, 주정, 병도 술 마시고 있는.
할머니 : 하나밖에 없는 손주 놈이 저 지경이니 내가 죽을 때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을 런지 모르겠어.
주정 : 아직 젊어서 철이 없어 그렇겠죠.
할머니 : 부모 일찍 여인 게 불쌍해서 오냐 오냐 하며 받들어만 키웠더니... 다 내 죄지 뭐.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이라고 너무 싸고만 키웠어.
누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망한 종가까지 일으켜 세우는데.
주정 : 무,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62 씬. 산파 할머니 집 마당.(밤)
상준, 술에 취해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는.
할머니E : 그 댁 말이요. 장생 하씨 댁.
#.63 씬. 산파 할머니 방.(밤)
할머니 : 지금 그 큰 회사 회장님으로 계신 그 어른 선친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어른이었다우.
주정 : (굳어지는)
병도 : (놀라고)
할머니 : 일제 때 징용에 끌려 나가서 몸이 망가져 돌아오신 거지.
주정 : .....
할머니 :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 댁 종부가 임신을 했지 뭐유. 외놈 순사한테 욕을 당하신 게야.
주정 : ....
할머니 : 망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문 종가의 종부가 그 지경이 됐으니 왜 죽고 싶지 않았겠수.
몇 번이나 자결을 하려는 걸, 그 댁 종손이 살려내셨지.
그렇게 어렵게 태어난 양반이 지금 그 댁 종손이신거구.
주정 : .....
할머니 : 그 양반을 우리 어머니가 받으셨지. 그 핏덩어리를 남겨놓고 끝내는, 그 댁 종부가 목을 매고 말았다우.
그 기구한 사연을 유서 한 장으로 남겨놓고. 가문을 더럽힌 죄를 목숨으로 대신하겠다면서.....
그렇게 기구한 운을 가지고 태어난 핏덩이를 그 댁 종손이 젖동냥으로 키우셨지.
주정 : .....
#.64 씬. 산파 할머니 집 마당.(밤)
주정, 병도 방에서 나오면. 방문이 열리는 것 보고, 얼른 몸을 숨기는 상준.
주정 : (신발을 신으려다가 비틀 하면서 주저앉는)
병도 : 선배?
주정 : (넋이 나가 있는)
병도 : 나 죽을 때까지 비밀 지킬게. 선배도 그러면 되는 거야. 그냥 우리끼리만 알면 되는 거잖아?
주정 : 우리...우리....오빠가....
병도 : 회장님 모르시게 하면 되는 거야.
회장님 아시면, 충격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절대 알게 해드리면 안되잖아?
주정 : .....
병도 : 그 사실을 알면 문중도 발칵 뒤집힐 텐데.....
숨어서 듣고 있는 상준.
병도 : 그냥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로 덮어두면 아무 문제없어, 선배.
주정 : 우리 오빠 인생은 뭘까? 병도야?
병도 : .....
주정 : 하씨 집안 종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우리 오빠.....가여워서 어쩌니?
병도 : .....(주정의 어깨를 잡는)
주정 :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안 일으켜 세우자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거잖아.
눈물을 흘리는데.
벽 뒤에서 숨어서 듣고 있는 상준과 한 화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