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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동행* 원문보기 글쓴이: 자기이해
그냥 많이 고생했다는 내용밖에 없습니다. 제 책 속에 어떤 치유동인이 있었는지 조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원하니 이 글을 그냥 올려 놓겠습니다.
뒤돌아보면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2003년 모 신문사 논픽션 투병기 응모작 수정 발췌문
나는 지금 2003년으로 45세가 된, 한 아내와 6살 된 딸 하나를 둔 한 가족의 가장이다. 나는 과거에 십 년 간 정신병원에 열 번이 넘는 입원을 한 적이 있는 정신분열병 환자였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입원이 열 두 번 정도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 왔는가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생각나는 대로 한 실례를 들어보자.
한 7년 전엔가 아침에 아내가 직장에 나간 뒤 빨리 죽자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은 어느 아침이 있었다. 그 고통스런 느낌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 푹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애태웠던 갈망이 일 년 이상 계속된 상태에서, 계속 그 갈망이 누적되어 더 강해져 온 상태에서, 그리고 한 번도 그 갈망을 채워 보지 못한 채, 그 날도 밤새 잠들지 못한 채 지새운 상태에서(그런 밤샘이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어떻게든 죽어 버리자 …’ ‘죽으면 이 고통은 없어질 것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낮에도 잠을 자 본 적 있었는가? 한 번도 잠을 맛있게 자 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일 년 이상이 되었다. 애타게 그 맛있는 수면을 갈구한 그 상태가… 사실 밤낮 차이도 없었다. 병원에서 주는 수면제를 아무리 먹어도 똑같았다. 내가 잠을 왜 그렇게 자려고 했는가는 정신병 환자가 아니면 상상해볼 수가 없다고 본다. 영원히 출구가 없을 듯한 마음의 갈등과 낙망감으로 몇 년을 지내보면 잠만이 그 출구가 될 뿐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편하게 죽는 것이 잠과 동일하게 느껴지는 때인 것이다.
죽으려니 어떻게 죽나… 죽는 약이 옆에 있었으면 정말 그 때 내 삶은 끝났을 지도 모른다. 머리로 벽을 쳐 박을까. 아니면… 아무리 해도 죽기가 힘들었다. 아파트에서 뛰어 내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용기는 없었다. 무조건 넥타이를 찾아 꺼냈다. 의자 위에 올라가 갈고리 설치를 해보다가 문득 아내에게 한 마디는 남기고 죽어야겠다고 의자를 내려왔다. ‘미안해, 나 먼저 갈께, 사랑했어.’ 이런 글이었을 것이다. 물론 자살시도는 도중에 다시 침대를 찾아 아내가 오기를 버둥거리며 하루를 참아낸 것으로 끝났지만 나에겐 지옥이 이보다 더할까를 생각하게 만든 한 경험이었다. 한 경험이었을 뿐이다.
이런 고통보다 더한 것도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나의 고통만큼 당하면 누구나 도움을 바라게 되어 있고, 그런 고통을 이겨 낸, 아니 견뎌낸, 행복한 현재의 나를 보면 이만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과연 나의 그 긴 과거 10여 년에 걸친 세월의 고통을, 그리고 지금의 행복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까? 내 글쓰기 표현 능력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글은 논픽션인 것이다. 그리고 픽션이라면 오히려 온갖 미사여구로 만들어 볼 수도 있겠는데… 이 글의 현실성은 절대로 문학적 예술적 심미안으로 느낄 수 있는 그 이상의, 주관적 표현이 게재된, 즉 읽는 사람이 다르면 절대로 나의 그런 체험들을 체험할 수 없는 글이라는 나의 주장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만큼 말로 표현할 길 없는 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름대로 내 힘대로 표현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를 그 동토의 지옥에서 깨우고 일으켜 세워준 정신치료의 깨달음을 필설로 얼마만큼 표현하고 전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 자신은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정신치료의 깨달음을 재차 느끼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은 모두 다른 안경을 끼고 이 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안경에 따라 이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깨달음의 내용들은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권해보고 싶다. 내 글은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평범한 글이 될 수가 있다. 정신치료를 꼭 해보라는 당부의 말만 힘주어 전하고 싶다. 정신치료가 무엇인지부터가 사람들에겐 주관적으로 온갖 오해와 폄하가 뒤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신치료는 정신을 치료시키는 의사가 있고 치료받는 환자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신치료는 같이 하는 것이다. 선생님과 둘이 같이 시작하다가 궁극에는 세상살이와 같이 하게 되는 과정이 정신치료의 과정이다. 환자나 소위 정상적이라 하는 사람들도 모두 직접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정신치료에 대한 나의 이해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정신치료 과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은 고통을 표현하고, 그 고통에서 행복으로 이어진 진정한 동기, 즉 깨달음을 전하는 것인데,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의 한 표현으로 들어가 보자.
앞의 장(場)에서 나의 행복감의 일부가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행복감을 하나만 더 전달해보자. 오늘은 토요일이라 아침 8시에 일어나니 몸이 그렇게 개운하지 않고 지뿌둥했다. 어제, 일을 너무 적게 한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았다. 침대에 다시 누워 볼까도 생각해 보고, 이대로 개운찮은 몸을 이끌고 등산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아내와 딸애도 곤히 자고 있 었다.
힘이 들었지만 등산을 선택했다. 등산을 나서면서 등산 코스를 어디로 할까도 망설여졌다. 가장 힘든 코스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등산화를 매고 나서니 역시 힘들었다. 그렇다고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환자들이 아마 이렇게 별 뾰족한 수 없이 고통을 받고 있을 거란 생각도 해봤다.
내겐 힘이 있었다. 산을 숨 가쁘게 오르고 땀을 흘리면서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행복을 누리는 뾰족한 수란 게 이런 거구나. 바로 고된 삶을 자기가 주도하고 난 뒤 얻는 행복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왔다. 지금 등산을 마치고 글을 쓰고 있으니 나의 몸과 마음이 너무 만족해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포기’의 의미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포기’란 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욕망을 정당화시키는,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고통을 포기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포기는 자기가 당면한 고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욕심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제껏 나는 이 ‘포기’를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욕심을 포기하고 꿋꿋이 자기 할 일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병이 심했을 때 나는 이런 신선한 진리를 몰랐던 것이었다. 거저 내가 공짜로 원하는 것만 챙기려 하니 그 욕심이 채워질 수가 없고, 나의 갈망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갈망은 그 갈망을 포기하려는 용기가 없이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행하기 어렵지만 행해야 하는 운동이나 일을 시작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등산 후의 행복은 이런 공짜로 찾아오는 행복이란 게 없다는 것과 행복은 역시 고통과 벗이 되어 살아갈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예전의 이야기로 다시 들어가자.
얼마 전에 히트한 ‘뷰티풀 마인드’에서 나오는, 결국 종국에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정신분열병 환자의 환각의 상태를 말하는, 그런 스토리는 사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나 같은 경우 환각은 치료행위와 치료수준에 따라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뒤돌아보자.
1993년 8월인가 9월인가 그 어느 날 나는 정신병이 발발한 것이다. 논문을 쓰고 있는 도중에 내 배속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슈(프랑스어로 미스터라는 뜻) 리, 무슈 리, 그리고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출신인, 내가 전공한 철학자 데리다(Derrida)가 내 마음 속에서 말을 걸어 온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대구 조야동 산 밑에서 자취를 하며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데리다는 기이하고 두려운 신비한 종을 치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신비한 현상이 너무 두려워 밤 9시 캄캄한 산 속에 뛰어 들어가 천지신명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나를 지켜 달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환청과 환시를 중심으로 정신분열병의 환각이 시작되었다. 잊어버린 것도 많지만 그 환각들 중에 생각에 남는 건 내가 자정 쯤의 시각에 온 하늘 별들의 어떤 기운이 나에게 엄청난 황홀로 엄습하였다. 그러면서 어떤 성스런 종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성모 마리아의 은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나는 데리다의 텍스트에 나오는 내용인 ‘의미의 이중성’을 떠올렸다. 이건 축복이자 저주라고… 그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성스러웠던 것 같은 축복을 한 순간 저주라고 생각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엄청난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 순간에 그런 망할 생각이 떠오를 줄이야.
부처들도 나오고 여호와도 나오고 성모님의 목소리도 나왔다. 처음에는 모두 다에게 축복과 은총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데리다는 유대인이고 기독교 신이 세상에 보낸 비밀스런 사자(使者)였다. 나는 그와 밤새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했다. 그의 이론에 내가 얼마나 정통한 지를 뽐내다가 숨어있는 숨겨있는 코드들(세상의 종말같은 것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무서운 죄의식과 함께 스스로 난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야’하며 힘을 내어 “고맙습니다 성모 마리아님…”하고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미 나는 죄를 진 저주받은 사람이었다. 난 나를 지켜줄 듯한 부처님에게 기대었다. 환청으로 나타난 부처는 나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같아선 “부처야 너 혼자 많이 시켜봐라 나는 내 할 일이나 한다”라고… 그런 한마디 대꾸조차도 아낄 것이다. 그리곤 내 약을 한 알 더 먹을 것이다. 부처님을 왜 그런 존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한심하다.
그 때로 다시 돌아가자. 나는 내가 아는 불교의 교리들로 데리다와 신들의 단죄를 무력화시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항상 역부족이었다. 부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굉장한 ‘종’을 울려 줬다. 나는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이상한 가장 비밀스러운, 세상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런 어떤 암호였다.
그 환청 속의 암호는 나만 알고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여호와와 부처님은 不二의 관계라는)으로 그 관계를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
항상 그 두 분은 싸우며 서로 단죄하고 단죄 받고 그리고 서로 지는 편을 따른 나를 함께 단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궁극의 두 분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한편으로는 데리다 이론의 산(?) 공부를 하느라 온 대구를 미쳐 헤매 다니기 시작했다. 발이 부르트고 며칠 씩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미쳐도 이렇게 미친놈은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 사는 막내 누나가 식구들에게 연락하여 완전히 미쳐간 나를 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이 첫 번째 정신병에서 비롯된 환각 속에서 나는 신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사탄으로부터 어떤 단죄를 받는다. 이 우주에서 가장 견뎌내지 못할 지옥 속에 처넣는다는 그런 것들이다. 나는 그 때조차도 ‘이건 단지 정신병이다. 정신만 차리면 된다. 병원에 가서 치료만 받으면 된다’하면서 정신 차리려 애쓰던 나 자신에게 지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난 그 때 까닥 잘못했으면 죽었을 것이다. 데리다의 저서 ‘조종glas’은 ‘우주의 최후 심판 날 울리는 종’이 었다.
입원 때 나를 진단하던 의사의 치료실 정면에 ‘여호와는 나의 치료자’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난 그가 나를 구해줄 예수의 현신으로 여겨졌다. 또 그렇게 나는 구원된다고 되어 있었다. 두 해 가량 약을 줄여가며 먹어 가면서 또 온갖 잡다한 불교 서적과 데리다 이론서적들을 읽어 댔다. 그러다 약을 결국 끊었다. 주치의의 동의 하에서였다. 두 번째 정신병이 재발한 것이었다.
두 번째 그 정신병 환각의 스토리는 나를 그 오랜 2년이란 긴 치유의 기간을 무력화시키고 첫 번째 발병의 그 스토리를 이어가게 되어 버린 것이다. 현실의 2년은 없어지고 바로 환각 속의 그 상황은 바로 어제의 상황으로 여겨지고 다시 오늘 계속되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환각상황의 실감은 현실을 잡아먹고 그 현실보다 더 큰 실감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 때 나는 안동 모 여고에 임시교원으로 정식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병의 재발로 교장으로부터 냉정한 어떤 말을 듣고 발령이 취소된다.
그리고 그 재발은 나의 첫 번째 자살시도로 이어지게끔 했다. 나는 붕 떠서, 흥분해서, 어떤 부처가 된다고, 뭔가를 해내야 된다는 생각으로 옷을 벗고, 눈을 감고, 어둠 속의 도로 위를 뛰었다. 정말 뛰었는데… 아니 안 뛰었는가? 틀림없이 조금은 뛰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리고 상황이 역전되어 부처가 무력화되어 무조건 신의 명령에 따라 온갖 행동을 하게 된다. 땅에 스스로 엎어져 앞니가 하나 부러져 덜렁거리는 것을 부처가 곧 붙여 줄 것을 믿은 적도 있다. 두 번째 자살시도는 우리 집안 모두가 신의 철천지 원수이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고통만 더해가는 심판의 말을 듣는다. 나는 지금 당장 죽으면 그 벌을 용서해준다는 지시에 먼저 바로 앞에 보이는 술병을 깨어 배를 그을려고 하였다. 그 술병은 이상하게 깨어지지 않았다. 그런 행위로 죽으면 너무 편한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려오는 화물차에 뛰어 든다. 그러나 차량충돌사고만 났었지 내가 죽었을 그 들이박기를 못하고 살짝 일찍 엎어져 버렸다. 그 얼마나 야비한 행위로 다시 단죄를 받음을 두려워했다. 부처님이 미친 태양이 되어 나를 살리려고 온 공간을 헤매고 다녔다.
지금 같으면 어떻게 할까. 너희들끼리 많이 싸워라하고 나는 너희들에게 심판받지도 도움을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차분히 진정될 때까지 그냥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무조건 그런 환각의 세계에 말리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약 한 봉지 더 먹고 일단 병원에 입원을 결정할 것 이다.
그 때로 돌아가자. 나는 또 그 기독교 병원인 동산 병원에 입원되어 있었다. 왜 식구들은, 자꾸 그 신들이 명하는 대로 이루어지듯,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 병원에 자꾸 넣는가? 이상했다. 나를 노려보고 나를 위협하는 데리다의 분신으로 보이는(어떤 거대한 몸집을 한) 환자를 보고 놀라 소스라치고, 입원실에서 환청에 따라 이리저리 절하고 기도하는 모습들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쨌든 다시 한 달도 안 되어 또 퇴원하게 된다. 환청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 20일 가량의 입원 후에 퇴원한다.
그 이후 열 번 정도의 입원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환각의 사건들과 그 느낌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세 번 째 입원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너는 영원히 이 곳(동산병원)이야. 잠시 놀게끔 놔두다가 여기에 들어와 벌을 받는 게 너의 궁극적 운명이야. 단지 조금 용서해준 것뿐이야. 이 곳이 네가 조금 쉬면서 벌을 받게 되는 그런 곳이야”라는 심판을 받게 된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러나 한편으론 정말 부처님(비로자나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멋지게 구해주고 다 처단해줄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그런 환상들이 멋지게 성취되곤 했다. 나는 그 땐 부처님의 수제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환각 속에서 ‘부처님 끝, 부처님 끝’하면서 뇌까리면서 더 이상 이 종국적 현상이 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얼마나 컸었던가.
지금 같으면, 간호원에게 이야기해서 무조건 잠을 자게 잠자는 주사부터 놓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내 생각을 할 것이다. 곧 문병을 올 아내를 가장 안심시킬 말을 생각하고 행동을 할 것이다. 앞으로 이대로 돈 많이 벌어 최고 속도, 최고 화질의 컴퓨터를 내가 직접 조립해서 홈시어터 장치를 해놓고 우리 공부방에서 영화를 보며 영어 회화 공부를 시킬 수 있는 DVD 플레이어를 살 궁리를 할 것이다.
그 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내가 정신병 상태에서 잠시 외출 나갔을 때 만나, 연애를 근 2년 동안 하면서, 1995년 봄에 내가 환자인 줄 알면서 결혼해 주었다. 겁도 없는 멋모르는 행동이었다. 하여간 아내는 내 병에 대해 둔감했다. 병원에 들락날락하면서도 절망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니 자기 집안에 인사 같은 것을 소홀히 한다고 오히려 나에게 짜증내는 것이 아닌가? 이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뭐가 중요한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데, 여하간 환각 속에서 우리 아내는 그 모든 부처들과 신들도 다 인정해주는 나의 구사일생의 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비통하게 헤어지는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고뇌가 된 적도 있다. 사람이 고통을 정말 이만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네 번째 재발은 환각도 이런 환각이 다 있나 할 정도로 현실을 완전히 잡아먹었다. 그 무서운 휴거의 환각도 보았다. 이제 환각 이야긴 잠시 접어두자. 이 정도면 나의 환각에 의한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독자들은 잘 알 것이다.
그 땐 또 왜 우리 학과 교수님들이 한 분 씩 죽어갔는가? 두 분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죽어갔다. 이상한 일로 생각하면 꼭 나의 환각과 연관이 된 것 같이 느껴지는 것으로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다섯 번째인가 입원한 그즈음에 정말 기이한 삼풍백화점 매몰사건도 발생했다. 그 사고가 나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치를 떨기도 했다. 거기에 매몰되었다가 살아 나온 애들과 환청 속에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이 다섯 번째 입원이 있은 후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젠 정말 세상이 바뀐 것이었다. 그전엔 그토록 내가 육체적으로나마 건강했었나… 힘은 항상 살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때부터는 달랐다. 힘이 쭉 빠졌다. 완전히 탈진되었다고나 할까. 편하게 쉬고 계속 자고 싶어졌다. 그 때 내 마음은 사실 세상의 모든 일에 재미를 모르게 되기 시작한 것 같다.
계속된 환각상태 속에 나는 조그마한 세상일이 아무 의미도 없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뭐 굉장한 거창한 무엇이 와서 나를 구원해주지나 않는지를 생각한 것 같다. 자꾸 누워 있으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이 나서 젖 먹던 힘을 내어 학교 테니스장엘 가서 벽치기를 해봤다.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 때 장모님은 내가 무슨 병이 있다하면서 병원에 가보라고 돈 8만원을 주고 갔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이 아내가 내가 입원한 사실을 살살 거짓말로 꾸며내면서 힘들게 지내가다가 장모님은 서울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이제껏 아내가 36세가 되도록 자기 어머님을 모시고 산 것이었다. 처남이 때맞추어 서울 힐튼 호텔에 취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정말 내 삶에 진짜 신이 도와주는 것인가…
정말 편했다. 아내와 나만이 있게 되어서. 아내는 나를 참 편하게 해주었다. 한 번 씩 차를 타고 팔공산으로 드라이브할 때면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러나 그 때 이미 나는 입이 굳어갔다. 말이 잘 되질 않았다. 조음도 발음도 잘 되질 않았다. 전화도 받기 힘들 었다.
제발 장모님의 전화나 우리 처가에서 대령 생활 15 년 이상을 한 아주 사랑을 독차지하는 큰 동서의 전화나 연락 같은 것이 안 왔으면 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비교되는 내가 말도 안되게 초라해 보인 것이었다. 말도 잘 못하고 벌벌 떨면서 그러다가 정신병 들통나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들, 아내는 한 번 씩 정신병 들통나면 자기는 이혼한다는 말을 하고 했다. 아내는 그 와중에도 이혼의 이유가 자기가 동정을 받는 것이 싫어서라고 했다. 정말 말문이 막혔다. 그런 자존심 때문에 이혼을 한다니.
한 번은 아내와 말다툼하다가 입이 와락 굳어짐을 느끼고 두려움에 싸여 병원 응급실로 차를 돌린 적도 있다. 그 병원 응급실 의사가 말하길 약 부작용이라고 말했다. 의사들은 정말 아무 일 없이 실속을 차리며 재미있게 잘 사는 것이었다. 의사들 정말 뭣하나하는 생각들도 들었다. 정말 환자들에 대해서 뭘 몰랐다.
진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나의 첫 주치의 선생님과 면담하는 동안, 나는 왠지 그 분 앞에 꽁꽁 얼어붙었다.
박 모 레지던트 의사가 마음에 들어서 친하게 이야기하다가 제발 외래진료 때 당신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의사는 힘이 드는 표정으로 그래보겠다고 했다.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제안은 다행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 분이 나에게 맞았던 이유는 나의 정신병을 항상 순수한 의학적 해결을 위해 접근하는 면이 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나는 점점 침대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침대조차도 최종 선택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세상이 불편했다. 편한 게 어디에도 없었다. 희망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단지 아내와의 이혼을 막기 위해 거짓말로 꾸며내는 우격다짐이고 항상 “이만큼 좋아지고 있잖아”하는 그런 가면들이었다. 그러면 아내는 속아가기도 했다. 나의 병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점점 사는데 자신이 없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지내다가 오쇼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와 같은 작자들의 책들을 보고 부처를 찬미하는 그런 명상서적을 보면 힘이 조금 나서 밤새 책을 읽는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 땐 그런 때가 제일 행복했다. 왜냐면 정말 견뎌내지 못할 침대 위의 불면의 밤샘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또 입원했다.
또 눈치를 보며 찾아 대는 침대생활… 어떻게 하면 잠을 맛있게 잘 수 있을까.
한 치 앞의 희망도 품어 보지 못했다. 항상 면피하며 둘러대는 생활이었다. 아내는 한 번씩 장모님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아내는 점점 자주 폭발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내가 그러면 이혼하자 정말 이혼하자고 했다. 아내는 우리 본가 큰 집 형님에게 전화해서 거기로 가라고 했다. 전화통화 속에 그 거친 큰 누나는 “이 자식아 거기서 죽어”라고 큰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은 지금 데리러 갈테니 집에 오면 절대 마누라 찾고 전화질하지 말라고 했다. 동생은 자기 사업을 한다고, 바빠서 나에게 전화 한 번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식구들에게 의지할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식구들은 그런 IMF 와중에서 나를 이해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참 한심했다. 나 자신이 이렇게 되다니. 그래도 학교 다닐 땐 후배 여학생들이 최고의 문학도라고 인정받았던 나인데 말이야.
그 와중에도 내가 어떻게 학위를 받았는지… 그건 아직 인사를 하지 못한 주심 선생님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미쳐 날뛸 때 그 힘으로 병원에서 아내가 사준 노트북으로 논문을 다 쓴 것이다.
갑자기 논문 지도교수가 돌아가셔서 내 논문이 한 학기 미뤄지고, 다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여교수에게서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데리다의 저서들을 처음에는 불교식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가, 완전히 거꾸로 유대인적 사상과 기독교적 기도를 결론으로 하여 논문을 마감했다. 그래도 그 분과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다.
논문을 다 통과해놓고 학위 포기하겠다고 나의 논문 주심에게 엉뚱한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주심 선생님이 어떻게 그 사태를 잘 수습해서 나를 통과시켜 주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지금 생각하면…
이런 혼돈의 와중에서도 박사학위를 마쳤다는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그 지도교수님에게도 정말 감사드린다.
1995년 8월 말 학위 수여식 때 찍은 학위복 입은 독사진을 보면 그 당시 내 상황과 내 모습이 얼마나 비참하고 기이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큰 사진은 우리 집에 어디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면피하며 눈치 보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하루는 우리 집 아파트에 우리 처가댁 무리 전체가 다 모인 적이 있었다. 장모님, 이모님, 숙모님, 큰 삼촌 등 거실을 가득 채운 손님들과 함께 나는 두 시간 정도를 보내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두 시간 정도이지 … 나는 계속 화장실만 들락날락했다. 옳게 한 마디 말도 못해 봤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내가 과묵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듬직하다는 말을 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모님은 ‘이 서방이 빨리 취직을 해야 되는데’ 하는 말에 나는 정말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 입이 굳어 말도 옳게 나오지도 못하는 나에게 처가댁 사람들은 아니 아내마저 내가 교수가 되기를 원했다. 나에게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는지.
그러다가 나에게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다가 온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갓바위 등산을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아내와 나는 하얀 눈덮힌 산을 조금 오르면서 그 온누리의 하얀 풍경에 경탄을 했다. 기분이 참 좋았다. 이 정도만 되면 살 맛 난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우리 일주일에 한 번 씩은 등산 오자’고 제의했다. 나도 등산이 자신은 없었지만 쾌히 승낙을 했다. 그 날 우리는 정상까지 등산을 못하고 삼분의 일도 못되는 지점인 관암사라는 절에서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참 좋다 그지?”라고 연발하면서 내려왔다.
그리고 아내가 목욕탕에 사우나 하러 가자고 했다. 아내는 지금도 목욕탕 사우나를 제일 좋아한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고마운 아내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옷도 벗지 않고 목욕탕 수면실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다가 잠시 나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궈 보았다.
목욕탕 분위기가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 언제든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다가 조금 씻고 나오면 기분이 그만일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목욕탕 사업을 한 번 하자는 우리의 목표가 생겨났다. 어쩌면 가능하고 나는 그 일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따져보니 약 5억 이상의 돈이 있어야 가능하겠다 생각했다. 참 순진했던 것이 었다.
그 날 밤 잠을 조금 잔 것 같다. 기분이 참 좋았다.
아내는 그때 모 대기업 고참 대리로 연봉이 삼천만원이나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을 잘 모셔 어머님이 지금도 딸 넷 중에 제일 아끼신다. 어머님이 서울로 이사 갈 적에 돈 2천만원을 아내에게 건네주고 갔다. 그래서 장모님 명의로 된 33평 아파트에서 우리는 오천만원 전세로 살게 되었다. 참 그래도 그 당시에는 돈 걱정은 안 했다.
어떻게 돈을 벌어 목욕탕 한 번 하자고 하면서 우리는 서로 격려도 하고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워 봤다. 우선 내가 무슨 가게라도 하나 하면서 돈을 번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내가 그 당시, 말도 잘 못하던 내가 무슨 가게를 꾸려 나갈 수 있었겠나?
맨날 아내가 퇴근한 뒤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정말 내가 할 수 있을 업종이 눈에 띠었다. 책대여점이었다. 컴퓨터로 관리하는 것이 좋았고 어른들 아닌 아이들 상대로 장사하는 것이 자신이 있었다. 아내는 회사에서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 이천만원을 내었다. 그 돈으로 프랜차이즈 젊은 사장을 만났다. 점포까지 찾아서 모든 시설을 다 책임지고 해준다고 해서 순진한 우리는 그에게 선뜻 돈을 주었다. 점포는 방이 조그만 하게 딸린 8평 정도의 점포였다. 점포세가 5백만원에 월 칠 만원 정도여서 큰 부담이 없었다. 그래도 책값하고 인테리어 간판해서 약 천칠백 만원 정도 들었다. 한 4백만원은 그 놈에게 뜯긴 것이다.
‘성균관 책대여점’. 정말 그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사지내고 그 다음날부터 장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역시 나에겐 무리였다. 아니 이미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터 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수가 있어야지… 아내가 열 시까지는 꼭 문 열고 청소하고 잘하라고 일러놓았는데… 나는 오후 두 시가 되어도 일어나지를 못했다. 오후 세 시가 넘어 일어나서 억지로 물 찍어 바르고 점포에 나갔다. 그 때 무슨 장사를 시작하나… 아내에겐 거짓말했다. 열 시에 문 열었다고. 그러나 매출은 저녁에 몇 사람 만화책 빌려가서 돈을 세어보니 한 2만원 되었나? 참 기가 막혔다. 그러나 아내가 돈을 세어가며 ‘뭐 첫 날이니까 그렇지 이만하면 괜찮아’하면서 자족했다. 미안했다.
다음 날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일어나 열 한 시에 가게 문을 열려고 집을 나섰다. 가게에 들어서니 겨울날 참 서글프기 짝이 없었고 자고 싶었다. 가게 문은 열지도 않고 방에서 안락의자에 담요 덮어쓰고 자기 시작했다. 물론 잠은 자지는 않고 그냥 가장 편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그냥 누워 있을 뿐인데 말이다. 누워있다 보니 그 전날 책을 빌려간 사람들이 책을 반납하려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래도 나가지 못했다. 결국 오후 두 시가 넘어 가게 문을 열고 그 때도 아내가 편하게 쉬면서 일 하라고 사준 편한 의자 위에서 눈을 감고, 가능하면 손님이 안 오길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집에서 가게까지 오는 도중에 마흔 살이 다 된 어른이 똥을 싼 것이다. 약 1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되는데 축축하게 된 바지 안에서 똥물이 바지 밑으로 흘러나오며… 그 날 나는 아내가 오기 전까지 가게에서 그 똥 산 청바지를 씻고 몸을 씻느라 애를 먹었다. 축축한 바지를 입고 그 겨울에 다시 집까지 와서 바지를 세탁기에 넣어 놓고는 새 옷을 챙겨 입고 가게에 다시 나가니 아내가 회사에서 돌아와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이 잘 안 난다. 뭐라고 둘러대어 위기를 넘겼는데 나중엔 똥 산 것이 들통이 났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아내는 나를 기댈 수 있는 남자로 여기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저녁에 아내가 와서 잘 관리를 했기에 우리는 조금 돈을 만져봤다. 한달 수입이 한 70만원 정도는 됐을까… 우리 ‘성균관 책대여점’이 왜 그렇게 매출이 잘 오르지 않나 싶었더니 바로 그 밑 골목에 큰 책대여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아닌가. 아내는 그 때 첫 절규를 하였다. 정말 이혼하자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운 좋게 그래도 한 오백만원 손해보고 책대여점을 넘겼다.
치료가 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일요일 휴일 갓바위 등산은 꼭 했다. 목욕도 가서 사우나도 해보고 그러다 냉탕에도 들어가 봤다. 느낌이 새로웠다. 여하간 그 날은 잠을 달게 조금 잤다. 그리고 이러다 몸이 약해져 죽지나 않나 하는 불안감은 사라졌다. 일주일에 갓바위 정상까지 등산은 규칙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부처님께 기도도 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환청 속에서 신들과 부처의 투쟁에서 부처가 힘없이 무너지는 환영과 화엄경의 교주, 법신(法身)인 비로자나 부처님도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는데 갓바위 부처님이 나를 어떻게 그 신들을 물리치고 나를 구출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하면서 좀 언짢은 상태에서 등산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갓바위 부처가 돌덩이가 되어 우리 집 앞에 떨어져 부숴 지고 우상을 믿은 나는 또 기독교 신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또 그러한 환각에 빠지게 되어 입원을 하게 된다. 별의 별 환청에 의해 조종되고 명상서적에 따라 명상으로 그 환청을 극복하려 시도하나 좌절하게 된다. 낮엔 기독교 신에 좌우되고 밤엔 붕 떠서 실컷 부처님이 내 소원을 풀어 주고 그러다가 부처 나름대로의 요구에 의해 또 그렇게 절을 해대야 되고 그런 환청엔 정말 장사가 없을까? 정말 약 밖엔 그런 환청을 막을 수 없을까?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넘어가 버린다.
퇴원 후 갓바위 등산은 찝찝한 채로도 계속되었다. 특히 여름밤의 야등 속의 등산은 환청이 언제든지 엄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다. 체력은 그 등산 때문에라도 유지를 해나갔음에 분명하다.
그러면서 입원 횟수가 열 번을 넘겼던 것 같다. 그 즈음에 다른 병원에 두 번 입원하기도 했지만 환청도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신에 의해 우리 형님은 조종되어 자꾸 그 동산 병원에 나를 입원시키는 것 같았다.
그런 환청 속에서 기막힌 로맨스도 있었다. 무슨 이미지들로 돈 많이 들어가는 어떤, 심리검사를 하는 여의사를 막 끌어안으려다 그 여자의 힘센 저항에 뿌리쳐 지는 나… 그래도 내 편을 들어 나를 이해해 준 고마운 치료사 아저씨…
그즈음 경제적인 위기가 현실적으로 닥쳐왔다. 아내가 IMF 때 해고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버둥대다 잘리게 된다. 우리 처가댁은 걱정이 태산이 된 것이다. 장모님은 언니들을 앞에 놓고 울었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또 결의를 한다. 15년간의 퇴직금과 전세금 오천만원을 더하니 약 일억이 되는 것이다. 아내는 자신감에 넘쳤다. 뭣이든 성공할 수 있다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나 자신이 일에 대한 자신감이 하나도 없고 도와줄 수가 없으니 그 여린 몸으로 해봐야 무슨 일을 성공하겠느냐는 그런 불안감들이었다.
그 때 우리는 작은 프라이드 소형 승용차에서 아반떼라는 새 차를 먼저 뽑았다. 그 차를 내가 직접 몰고 갓바위까지 시승한 그 때가 눈에 선하다.
나는 정신병 초기에 차 면허 실기시험, 필기시험을 합격한 뒤 약 2년간, 그 몇 시간의 연수교육을 미루어 결국 면허자격이 취소될 위기에 놓인 나를(그 거동하기 어려운 아침시간에 연수교육이 있었다), 아내가 가까스로 나를 면허시험장까지 보낼 수 있었다. 그 면허증은 지금 나에게 얼마나 돈이 되는 소중한 것이었던가.
그렇다. 이제껏 나는 좌절만 했지만 자꾸 뭐든지 일을 저지르는 그런 의욕만은 있었던 것 같다. 아내는 항상 나를 막아서서 뒤로 물러섰지만 나는 어떤 이유를 대서든 내가 할만하다 싶은 것은 결국 관철시켰다. 항상 그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우리는 이리 저리 헤매다가 비디오 가게에 눈을 돌리게 된다. 동생이 사는 아파트 상가 비디오 가게가 나왔는데 장사가 아주 잘된다는 것이다. 하루에 평균 18만원 매출이 오른다는 것이다. 담배포도 있고 해서 세도 걱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책대여점 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리는 이십 만원 넘어까지 가는 일일매출을 달성해봤다. 정말 이렇게 돈 벌면 목욕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이때부터 조금 나은 것 같다. 그러나 아침엔 집사람이 일찍 나와서 청소하고 장사를 하고 나는 여전히 오후 2시나 되어야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손님과 상대하면서 장사하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지만 선배들 한 번 씩 놀러 오게 해서 술도 한 잔하고 이야기도 나누게 되면서 말문이 조금 트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 병원 주치의와 면담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또 사고가 터졌다. 돈 좀 벌고 있으니 왠 조그마한 대학생 애가 우리 상가내의 다른 가게에서 우리와 같이 똑같은 비디오 가게를 한다는 소문이 났다. 아내는 비디오 가게를 고집스럽게 내겠다고 하는 그 조그마한 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제발 다시 생각하라고 아니면 우리 가게를 인수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 애원이 다 무시되고 그 놈은 번듯한 가게를 오픈 했다. 아내의 절규, 이 때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아내는 가게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밤새도록 운 것 같다. 다 정리하려는 것 같았다.
우선 이혼이다. 그 다음 가게를 헐값에 넘기거나 물건들을 다 팔아 치우고 보증금 3천만원만 건지고 권리금 천팔백만 만원은 그대로 날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권리금은 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 홀가분하게 서울 엄마에게 가서 작은 가게 하나 한다는 계획이 섰던 것이다. 이혼은 무조건 필수였다. 나는 무조건 다 받아주겠다고 했다. 난 딱 5백만 원만 달라고 했다. 구루마 장사 같은 것 생각했다. 그래도 그 날 아침 나는 끈덕지게 설득해서 아내를 차에 태웠다. 가게에 나간 것이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오래 처져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렇게 모진 계획을 세워 놓고 다시 “우리 한 번 해 볼래” 하는 것이었다.
그 날 우리는 다시 미래 계획을 짰다. 무엇보다 힘든 건 그 놈이 덤핑을 해서 우리를 죽여 놓겠다는 것이다. 덤핑을 하면 우리는 지금 수입의 반의 반 밖에 되지를 않는다. 설상가상 그 때 그 어린 당돌한 놈의 수작이 알려지자 주위에 있던 대형 비디오 가게에서 덤핑의 덤핑을 하여 신작 비디오를 3백 원 정도에 빌려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매출이 급감해서 하루에 칠만 원을 겨우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담배포가 있어서 담배 순수익만 해도 월 45만원 월세는 낼 수 있었다. 그것이 큰 힘이었다.
버텨나가면서 살아가다가 그 놈이 먼저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치고 가게를 세놓은 것이다. 우리도 운이 좋아 권리금 천 삼백 만원까지 받고 가게를 넘겼다. 지금 그 주위의 비디오 가게는 예전 우리 가게 이외에는 다 없어졌다. 담배포의 위력인 것이다. 면담치료는 계속했다.
그러다가 정말 우리에게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내가 임신을 한 것이다. 이 때만큼 내가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 아내는 울적하게 산부인과를 다녀와서 아이를 지우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이를 두 번이나 지웠다. 아내는 또 지우자고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와 우리의 희망, 우리의 삶의 의미도 강의했다. 아내는 이번 한 번만 더 지우자고 했다. 절대 안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아내는 정말 이해 못할 위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처절한 고뇌도 이해된다.
난 미친 듯이 우리 아기의 예쁘고 예쁜 모습을 환영으로 떠올리며 아내의 모성애를 들춰내보려 했다. 그러다 아내는 내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우리 딸은 이렇게 태어났다.
우리 딸이 태어나는 그 날 즈음에 나는 마지막으로 입원을 또 하게 된다. 열 두 번째였을 것이다.
아내는 한이 져 있다. 옆에 산모들은 멋있는 남편들이 와서 수고했다고 격려하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아 주는데… 나는 또 미쳐 부처 찾고 여호와 찾고 한 것이다. 가장 긴 입원이었다. 한 달여 가량의 입원생활, 아내는 미역국 한 번 못 먹고 오히려 나를 위문 와야 했던 것이다. 아내를 보고 그 때 미쳐 있는 상태에서 “우리 이제 정말 종교를 갖자”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미쳐있던 나를 보고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정말 저 아내의 마음에 들기 위해선 그 환각 속의 나의 (그들에 대한) 맹세 같은 것 다 취소하고 부처고 하느님이고 다 치우고 그 때 그 아내의 눈물을 멈추게 해야겠다는 마음만 들었다.
나는 또 환상들을 박차고 현실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난 그 때 환청에 대한 분노를 처음 가졌던 것 같다. 환청아 좋다. 아니 실제라도 좋다. 이제 정말 한 번 붙어보자. 나는 마지막 남은 용기를 냈다.
지금 같으면 이런 환청들이 나타나는 경우엔, 그냥 죽 일어나는 잡념들을 바라볼 것이다.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자 마음을 먹고 약 한 봉지를 더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사실 이러이러하니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어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린 핏덩어리를 어쩌면 내가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적개심이 무엇에든 온갖 것에도 다 향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애를 내가 해하면 어떡하나. 이젠 정말 끝인가.
집에 돌아와 아기를 찬찬히 봤다. 아기를 해롭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난 그 생각을 그대로 두었다. 그건 생각일 뿐이야… 애기는 새록새록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와 장모님이 그 자리에 함께 있으니 더욱 마음이 놓였다. 나는 아직 멍했지만 아기는 나에게 “힘내세요 아빠” 하는 것 같았다. 아기는 “아빠! 엄마하고 우리 같이 살아요. 같이 살려고 내가 태어났어요” 하는 것 같았다.
가게 보증금 삼천오백 만원하고 전세금 사천만원하고 권리금 천 여 만원 합치니 그래도 팔천만원 정도가 남아서 우리는 또 계획을 짜고 뭘 할까 온갖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다. 아내는 정말 회사를 잘 그만 둔 것이다.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정신병에서 깨어난 지금의 나는 아직 미루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에 대화를 거듭하다가 하루는 컴퓨터로 학습하는 공부방 프랜차이즈 광고를 보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의 학벌을 이용하고 컴퓨터를 이용하는 학습이면 애들 모아서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또 슬쩍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아내는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막 밀고 나갔다.
내 장점이자 단점이다. 조금만 희망이 보이면 막 밀고 일을 벌려 버린다. 그 뒤에 내가 벌린 일은 모두 잘못되게 되어있고, 아내가 모든 일을 다 추스린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 속에서 뭔가 내가 중요한 일을 하게 되고, 내가 배우고 내가 스스로 힘을 키워 나온 그런 모종의 삶의 백신 같은 것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 자라나면서 예쁘기 그지 없었다. 한 번 폐렴으로 입원해서 울고 있을 때는 또 마음속에서 부처님을 찾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고 우리의 이혼 생각은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내가 청소같은 것도 안하고, 최소한의 할 일도 안하고 침대에 퍼져 누워 있으면 아내는 가차없이 이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도 이제 아기 때문에 나는 이혼해도 아기를 위해 뭐든지 하면서 돈을 벌어 도우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이혼하면 저 사람이 잘 살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마 잘 살 것이다. 처가댁 식구들은 단합이 잘되니 아기 하나 못 키우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그 때도 나는 가장(家長) 구실을 할 자신감이 전혀 없었다.
그 때 동산병원의 레지던트였던 서모 선생님, 그 분은 야생적인 신선하게 터여 있는, 뭔가 분위기가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나의 지지자였던 것이었다. 이 분으로부터 나는 변화의 전기를 맞게 된다.
하루는 책을 한 권 그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게 되었다. ‘현대인과 노이로제’, 소암 이동식 선생님의 책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띠고 잘 이해되는 부분이 종교와 정신치료의 관계를 해설해 놓은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참 좋았다. (내가 읽기에) 내가 좋아하는 종교의 핵심적 내용들이 정신치료의 궁극이라는 점에서 해바라기가 해님을 찾아 돌듯이 나는 빨려 들어갔다. 그 책의 조금의 부분일 뿐이었다. 사실 다른 내용은 이해도 잘 안 되었다. 별로 어려운 글도 아닌 책이라는 세간의 평에도…
하여간에 그 책을 많이 읽으면 불치의 정신병에도 효과 아니 완치까지 된다는 저자 자신의 말이 나에게 편안하면서 강렬한 희망을 불어 넣어준 것 같다. 아니 무조건 내 편의 그 분이 우리나라 정신치료의 대가라는 점에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다른 부분도 읽을려고 노력해봤다. 그리고 또 다른 책들 ‘현대인과 스트레스’, ‘현대인과 정신건강’ 등 그 분의 책이라면 다 읽고 싶어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서 선생님이, 지금 대구 남부정류장 네거리에서 밝은 신경정신과를 개원하고 계시는 허찬희 선생님에게 찾아가 한 두 번 정도 인터뷰 형식으로 면담을 받아 보라는 권고가 있었고, 운 좋게도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정신치료비로부터 큰 부담을 안았고 사실 그 치료비도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러나 나의 장점은 열린 가슴, 받아들일 준비가 된 태세였다.
한 두 번만 하려고 한 면담, 첫 면담에서 죽 내가 뇌까리는 과거와 현재 이야기, 그 정신치료가이신 허 선생님은 바로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해야된다고 하셨다. 나는 멍한 상태로 무조건 ‘예’ 하고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나를 이끌고 집에 돌아 왔다. 정신치료 한 번 해 보자 라는 나약한 어떤 의지로부터…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도 잘 커가고 있는 내 딸과 함께 사는 삶(이제 정말 내가 가장이구나 하는 행복한), 나의 삶이 얼마나 변했는가…
나는 이제 이 본격적인 정신치료에서 깨달은 바를 가능하면 명료하게 분석 열거해보고 싶다.
먼저 선생님이 살려 주려는 것은 나의 끈기의 힘과 그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치료는 일단 ‘또릿또릿’에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질투 날 정도로 자신감에 찬 그 선생님의 모습에서 뭔가 나를 다 고백하고 싶어졌다. 비파사나 이야기에서 ‘觀’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냉냉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인들이 다 미치겠네….’ ‘건강한 종교인들도 많이 있어’ 멍청한 나에게 이런 가차없는 얘기로부터 ‘자꾸자꾸 정리되어 간다…’
나는 사실 그 때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렇게 자꾸 나를 앞서 나가셨다. 그때도 지금도 나보다 나이도 별로 많지도 않은 저 분과 나는 왜 이렇게 천양지차일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나도 공부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다. 제일 먼저 내가 이해한 바로는 옳게 알면 즉 무명에서 벗어나면 정신병과 노이로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옳은 앎. 그래서 옳은 행동까지.
아! 이제야 알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알겠다.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불교 용어를 나에게 안 쓰시는지… 나는 그것을 원하는데. 불교 용어 자체가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더럽히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나도 가능하면 불교 용어를 삼가해 봐 야지.
나는 그 당시까지 어떤 이상한 이념에 빠져 세상에 이 ‘옳은 앎’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무조건 허공에 주먹을 허우적대는 행위’라고 할까… 특히 ‘진리’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도 진리고 그것도 진리다’라는 말씀을 잘하신다. 지금에 와서 이해하는 바로는 자꾸 진리를 보려는 눈과 그것을 부정하려는 눈의 차이에서 뭔가 심한 노이로제가 달려 있는 것 같다.
‘또릿또릿한 옳은 앎’.
예를 들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진리다. 또 사후(死後)에 대한 불안과 걱정 정말 우리는 지금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그건 그 때가서 할 일이고… 또 모든 일은 ‘case by case’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 정말 종교나 이념 어떤 이즘 어떤 이데올로기같은 것은 이런 찰나 찰나 맞는 적합한 경우를 막는 것이 아닌가? 미래도 그런 찰나 찰나에 의해 열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하고 알맞게 (편안함도 불안도) 되었을 때 그걸 잘 유지하는 지혜 같은 것들이다.
다음엔 ‘현실생활에 재미를 붙이는 것’이 정신건강이라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현실이 너무 힘이 들어 환각의 세계를 거부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싶었던 것이 정신병의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현실이란 항상 노이로제 정신병 환자에겐 너무 고되고 힘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조금씩 다가가 재미를 붙이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환각과 망상 속엔 자기가 최고 행복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 환각과 망상의 세계를 자꾸 현실이라고 착각하거나 현실자체를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 병을 깊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현실은 고되다. 현실은 지금 당장 아기가 원하는 우유라도 사줄 수 있는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직업이 없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면서 직업을 가져 보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적 삶에 재미를 자꾸 붙여 나가는 과정이 정신치료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엔 그런 현실생활에 ‘자기 힘에 맞추어 조금씩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허 선생님은 만약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이 들면 주먹이라도 주물럭거리면서 운동을 조금 해나가 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중요한 건 자기 힘에 벅찬 그 무엇에 자꾸 매달려 자기가 할 수 있는 실천적인 일을 하지도 못하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몇 번 듣는 순간에 나는 정말 ‘이 순간 이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 있었다. 아내가 직장에 다녀오기 전에 한번도 내가 한 일이 없는 집안 청소를 한 번 해보았다. 그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혼을 생각한 그녀가… 기쁨에 넘쳐서… 청소 한 번 한 걸 가지고.
자기 힘을 아는 것 정말 중요하다. 이 나약한 힘이라도 어떤 일에 투자하면 좋다. 거기서 조금 더 힘이 생긴다. 나는 이때부터 운전도 해보았다. 힘들었지만 내 힘으로 팔공산 갓바위까지 드라이브해서 등산도 하고 맛있게 두부김치를 먹었다. 그러면서 내 힘을 키워 나온 것이 아닐까?
다음엔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선생님과 대화하는 도중에 나온 말 “지금 내가 불만스럽다, 힘듭니다” 선생님의 말씀 “받아들여…” 나는 “받아들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잘하는 게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뭐가 있어야 하는 것, 그 무엇을 받아들이려는 것 그건 노이로제야 있는 그대로…”
나는 이 때 번쩍했다. ‘있는 그대로…’ 선생님이 하시는 중요한 말씀, 즉 ‘자기를 이해하라’ 이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 요소가 걸림돌이 된다. ‘있는 그대로 자기가 자신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가 최대의 걸림돌이 된다. 있는 그대로 정신병자이면서 이렇게 버둥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나. 그래도 이 ‘나’는 유일무이가 아닌가? 비교를 하니 고통스럽지. 이 ‘나’는 누가 뭐래도 된거야. 그것 그대로 된거야. 나는 여기서도 발전을 한다.
지금 좀 더 덧붙이면, ‘나는 날 이 정도로 알아,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뭐요’ 라든지, 아니면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자꾸 들어나 볼 것이다.
다음엔 ‘욕심을 버리기’이다.
욕심은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을 포기하면 그만인 것을 집착하는 것이다. 포기를 못하는 것도 상당한 노이로제이다. 그리고 욕심과 의욕은 다르다. 의욕은 삶의 활력이며 어떻게 보면 욕심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힘이다. 이런 힘은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하다. 선생님은 포기하면 할수록 힘이 난다고 하셨다. 난 이 말의 뜻을 아직 완전히는 모른다.
그러나 포기할만한 걸 과감히 포기하니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실 더 잘 쓸려고 애쓸 수가 있다. 그러나 적당히 포기하고 쓴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글이 마음 편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보자. 아내가 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 땐 가만히 살펴보고 정말 그렇게 원한다면 그대로 이혼 안하고 싶은 그 집착을 포기해 버리면 된다. 모두 다 받아들이리라.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면 많은 일들이 있을 수가 있다. 이혼 한 번 못해 주겠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해 주리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곤 정말 내가 아내에게 잘할 수 있는 일이 요모조모 떠올랐다. 나는 어디에 내버려져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엔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한 번 씩 ‘진지함’에 대해 말씀하셨다. 불교에서도 ‘공’ ‘공’하지만 사실 이런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종 마음가짐은 ‘진지함’이다. 진지하면 사실 힘이 든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편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한 일 년 전에 이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조금 힘이 생겨 등산을 하며 사색에 잠겨 있을 때였다. 등산이 힘이 좀 들었다. 내 생각 속엔 “참 살기가 힘이 드네…” 그 때였다. 이 ‘고통’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때 완전히 180도 도는 이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고통’이 정상이다. 그 고통이 외면된 쾌락 같은 것은 비정상적이다.
고통, 참을만한 그런 고통을 나중엔 참을 수조차 없게 되어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자꾸 그 고통을 연장해나가고 더 키우는 우를 범하는 행위가 바로 고통의 외면 도피 행각이 아닌가? 선생님께서 자꾸 “벗어나려는 것은 안 좋아”하시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 좀 고통스럽다, 견딜만하다, 그러면 그것은 정상인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살 일이다. 나에겐 이 말이 진리인 것이다.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직면해나가면 그 고통은 사라진다. 인생은 낭만도 아니고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여 보람을 느끼는 이것이 행복인데, 그 작은 고통 못 받아들여 술 마시고 힘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렇다고 고통이 없어지는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은 그대로 받아들여 안는 것이다.
다음에 중요한 것이 다이랙티브한 말과 행위이다. 선생님께선 얼마 전에 학자나 교수들보다 장사꾼들이 더 건강하다는 말을 하신 적이 계시다. 그들은 현실감각이 훨씬 뛰어나다. 식자들은 말을 돌려서 걸러서 한다. 그러니 그 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노이로제인 것이다. 반면 시장의 장사꾼들은 바로 “이놈아…”하며 바로 나온다.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조언이 바로 이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행동으로 옮겨봤다. 힘이 나서.
7년 동안 말 못하게 짝사랑하다 헤어진 여자에게, 40살이 다 된 그녀에게 전격적으로 전화를 했다. 이제껏 당신을 “내가 만든 환상으로 좋아했으니 현실의 당신을 한 번 보자” 했다. 그녀는 ok 했다. 그리고 한 번 만나 봤다. 예전 같으면 별 말도 못하고 결국 집에 와서 끙끙 앓기만 했을 나. 환상이 결국 환상이었던 그런 실망스런 현실과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혼자 즐긴 로맨스가 둘이 함께 느꼈던 그런 명확한 사랑의 현실이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현실로 헤어짐을 각오하면서 돌아서는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낸 아름다운 기원으로 끝난 그 날, 나는 정말 그 긴 기간의 사랑이 나 혼자만의 환영은 아니었구나하며 그야말로 그녀에 대한 무의식적 분노, 그토록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를 받아 주지 않았던 그녀에 대해 ‘아름다운 한풀이(폭발하거나 억압되지 않은)’가 되어, 그 한에서 비롯된 나의 화병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다 궁합 맞지 않은 우리의 무지에서 일어난 한스런 결별이었던 것이었다. 한 번 이혼하고 다시 재혼하여 의처증을 지닌 지금의 남편과, 아기도 없이 재미없고 고된 그녀의 삶을 보면서 마음이 측은해지는 걸 느꼈다. 어떤 식으로나 도움을 주고 싶었으나 포기했다. ‘내 능력 밖이야’, 그러면서 내가 시작하여 씨를 뿌린 행위들에 내가 직접 끝을 냈다는 그런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사실 정신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나로서는 정말 어려운 행위였다.
환상은 왜곡이고 외면이고 노이로제이다. 항상 직접 만나 대화하자. 당연히 그런 환상을 깨고 현실을 뭐든지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야 하겠다.
다음엔 대화로서 상호교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위에서 말한 바가 있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하신 상호교류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난 이 말을 실제로 실천해보니 정말 해보면 해볼수록 힘이 나는 것이었다. 상호교류는 우선 자신이라는 감옥을 열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울타리를 열고 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엔 열등감도 장애가 되고, 앞에서 깨달은 ‘옳은 앎’ 그리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이 알면 그걸 고맙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고집이 세고 아집이 강하면 이 ‘상호교류’의 위력을 알 길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남은 나보다 더 훌륭한 정보가 있고 그걸 나에게 줄 수가 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화 해보고 실천해보자.
중요한 건 자기에 대한 집착이 아니고 누구나가 모두 잘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그렇다고 무조건 남의 이야기만 받아들여서는 상호교류가 아니다. 자기를 적절하고, 적당하게, 그리고 알맞게 주장할 줄 알고, 물론 남이 안 받아 들이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실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실력이 없으면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할 줄만 알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다음엔 선명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게 선명하지 않으면 정신병이 되기 싶다. 앞에서도 다이랙티브한 말에 대해 얘길 했지만 선명한 것이 직접적인 것이고 이 선명함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점이 바로 남의 주장과 바램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어렵다. 상대방이 나와 같지 않기에… 온갖 실망감 배신감 오해,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든 남이 본 나, 그 모든 것을 견뎌내면서 자기 말을 할 수가 있어야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아주 거리껴지고 두려운 상대와 이 관계의 선명성을 경험해보면 오해가 많이 풀려지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는 남이 적당히 숨겨져 있는 것도 필요하다. 알맞다고 생각될 때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나는 괜히 힘이 나서 그토록 껄끄러운 형님과 전화도 하고 온데 전화를 다해 보았다. 그러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마음에 거리껴지는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처리하려고 하지마라’고.
다음엔 ‘좋은 것 속에는 나쁜 것이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나 같은 환자들은 특히 붕 뜨기 쉽다. 힘이 나서, 힘이 나는 것은 좋으나 붕 떠서 잡념이 많이 생기면 병이 도진다. 그러면 힘이 나지 않았으니 만도 못한 것이다. 힘없는 채로 좀 고되게 살고 있는 그 상태가 오히려 낫지, 붕 뜬 그 상태에서 온갖 일을 그르치고, 또한 그르쳤다고 생각이 들고 그래서 잡념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할 일도 옳게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좋은 면은 체크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다음엔, ‘항상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잘 관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나 같은 경우엔 요새도 자주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 학생이 몇 명 갑자기 우리 공부방에 몰려들어 올 때면 무슨 신의 은총이나 부처님의 가피가 있지나 않는지 눈치를 본다. 이 때 반드시 무슨 안 좋은 느낌 즉 환청의 느낌이 온다.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냥 자기가 한 일이 자기에게 돌아 온 것이다. 운은 물론 있겠지만 그 운이 그냥 찾아 온 것이 아니다. 다 내가 열심히 뭘 도모하고 일한 덕분이다. 주체는 언제나 나이다. 운은 뒤따라 올 수 있을 뿐이다.
주체는 의존하는 바가 없다. 의존하면 할수록 주체가 아니고 로봇이 된다. 그리고 더욱 의존이 심해지고 더욱 갈구하는 바가 커지고 그만큼 더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의존적이 될수록 좌절이 더 커진다. 또 더 큰 좌절, 이래서 결국 정신병이 된다고 본다. 의존도 적당하게 서로 기본적인 것만 의존하면서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권위에 대한 갈구 즉 이것도 의존심인데, 권위에 대한 의존심이 심한 것 같다. 환청엔 항상 거대한 것이 나와서 즉 어떤 신이나 여호와 부처 따위가 나와서, 나를 좌지우지하고 괴롭혔다. 선생님께선 “자네 아버지는 어땠어?” 하셨다. 결국 어릴 적 무력한 아버님을 둔 나의 적개심이자 굉장히 멋진 아버님에 대한 동경-집착이 결국 나에겐 그런 환청으로 바뀌어온 것이 아닐까? 우리 아버님은 어쩌면 지금 아내를 고생시키는 나처럼 엄마를 고생만 시키고 돌아가셨다.
선생님께선 사람은 결국 ‘혼자’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 ‘혼자 홀로서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적에 나의 인격수양은 성공된다고 생각한다. 정신치료는 끊임없이 이 의존심을 깨닫고 버려나가는 데에 있다고 들었다. 의존하는 바가 없으면 집착도 없고 집착이 없어지면 좌절도 없고 곧 결국 분노 즉 적개심도 없어진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고 겁나는 것이 없어진다. 대화도 잘될 수밖에 없다. 대인관계도 잘된다. 이래서 현실에 충실하면 잡념도 없고 불안도 없고 결국 정신병이 생길 리 없다.
나의 그렇게 힘들고 오래 계속된 정신분열병의 증상들은 결국 채우지 못할 의존심-집착-갈망이 너무 커서, 그 큰 목표로부터 내 힘에 버거워서 힘이 빠져 무기력해진 것이다. 이제껏 나는 이 의존심을 차근차근 줄여온 결과로 힘이 새로 생긴 것이라고 본다.
그 다음 또 중요한 것은 거창한 사념은 불건강한 것이라는 것이다. 항상 작고 단순하며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그런 생각과 행동이 실효성이 크고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는 가장 중요하다. 정신병 환자들에게는 대화가 곧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건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없으니 자꾸 더 대화를 어렵게 만드니 환자들은 더 병이 깊어진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화 속의 매치(match) 즉 공감이 참 어려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화란 참 어렵고 이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 곧 성인이기도 한 것이다.
흔히 대화가 서로 무조건 지지해주거나 치켜 세워주면 잘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정말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런 맹목적 지지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해코지’라고 배웠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대화를 잘 할 수 있는가? 스트레스 없는 대화. 이것 때문에 환자도 자기가 할 역할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대화의 치료가 바로 정통한 정신치료가를 만나서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환자들은 이 대화의 장을 가지라고 부탁하고 싶다. 치료비도 치료비지만 이 대화의 장에 참여하면서 경제사정은 점점 나아진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돈을 벌어서 정신치료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정신치료를 시작하여 돈을 벌면서 정신치료의 효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내 경험이다.
정말 돈 자체가 모든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공감하면서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 그것은 돈으로 잴 수가 없다. 그러나 돈은 필요하다. 경제관념 경제원리 자체가 현실이고 정신병 환자는 이 현실에 직면하고 헤쳐 나가면서 더 큰 어떤 의미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어쨌든 돈을 마련하자. 정 안되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중에 갚는다고 하고 빌려서라도 아니면 카드 빚에 쪼들려 신용불량자가 될지라도… 나 같은 환자는 정신치료를 받아가면서 그런 각오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 정신이 있으면 행복해진다고 본다. 어떤 식으로라도, 정말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다. 빚은 한마디의 잘된 대화로 다 갚을 수도 있다. 물론 일해서 돈벌어 정식으로 갚고 정말 고마웠다는 말 해주면 정상적이지만…
다음엔 앞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인생은 원래 재미가 없고 선생님의 말씀처럼 ‘자꾸 몇 번을 씹어야 맛이 나는 찐살’같은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인생의 의미가 원래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생엔 원래 의미가 없다. 즉 ‘원래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원래의 의미’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 다닌다. 이 세상 그 어떤 진리도 ‘원래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가 그렇게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재미없는 세상살이의 해답도 ‘원래의 무의미함’에서 나온다. 인생의 의미는 원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나에겐 도움이 되었다. 인생의 의미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 인생의 의미는 살아있는 것이다. 아니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자꾸 바뀌고 성장하고 또 어떨 땐 시효가 만료되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나와 인생의 의미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과감히 의미를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하면서.
나는 이 말들을 되새긴다. 어떨 땐 주님의 은총을 어떨 땐 천지신명의 가호를 생각하다가 문득 어떻게든 ‘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더욱 이를 깨문다. 또 이 ‘나의 삶’이라는 것도 선생님 앞에선 한없이 허물어진다. 이 허물어져가면서 다시 세워지는 ‘나의 또 다른 삶’ 어쩌면 ‘완전히 다른 나의 삶’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근간에는 선생님께서 한번씩 말씀하신 유교의 핵심 즉 가족과 함께 ‘조심조심’하는 삶이 최고다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다음엔 ‘자기의 마음이 잘 드러나기’를 강조하고 싶다. 계속 정신치료를 하면 즉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 수련을 열심히 하면 꿈에도 그런 행위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여간에 자기의 마음이 드러나야 어떤 행동을 할지를 잘 결정하게 된다고 본다. 자기 마음에 대한 글을 자꾸 써보고 꿈을 꾸면 거기에 대한 연상을 잘 정리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정신치료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생활 잘하면서 자기 마음을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선생님께서는 정신치료가 교육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훈련을 많이 하면 항상 선명하게 자기 마음이 보여지는 것이다. 중요한 건 열심히 현실을 살아 나가면서 할 일이지 여기에만 매달려서도 안 된다고 본다.
다음엔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기’를 강조하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잘 보여지려고 애를 쓴다. 자기를 내세우려고 애를 쓴다. 대우받으려 애를 쓴다. 존중받으려 애를 쓴다. 결국 모두 남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려 애를 쓴다는 것이다. 지금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자기가 자기에게, 인정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것이다.
남에 의해 자기가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말은 쉽지만 이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나는 요즘에도 하루에 일이 아닌 목적으로 남에게 나를 인정받으려고 몇 번씩이나 전화통화를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일이 아닌 걸로 술 한 잔 하고 이야기 나누는 행동을 많이 한다. 그리고는 결국 나의 주장, 나의 철학, 이런 나의 가르침을 남에게 요구하거나 제안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다가 어느 정도에서 마음이 불쾌한 채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자기를 스스로 존중하고 인정하면 그 뿐이라는 진리를 실천하지도 못할 뿐더러 깨닫기조차도 못하는 것이다. 무슨 병이 이러한 지…
보통 자존심 강하다하는 사람들은 사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이 바로 자존심이 남에게 달려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남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든지, 그건 남의 잣대에 의한 자기이지 진정한 자기는 아니다. 진정한 자기는 자기가 스스로 매긴다. 그리고 남의 말에 귀 기울여 듣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지만 맹목적으로 거기에 좌지우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떠오르는 의식은 자유이고 무죄이고 그러나 말과 행동은 잘 콘트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살다가 보면 무얼 보거나 무얼 생각하거나 간에 별별 마음이 다 일어난다.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금기시 된 그리고 억압된 여러 사태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터부시된 것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의식은 다 무죄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내가 표현하지 않지만 그 연상들을 독자에게 맡긴다. 나는 그런 의식의 떠오름을 ‘그건 잘못되었는데’ 하는 판단, 그런 판단행위 자체를 버리기로 했다.
인간은 인간이자 동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추상같이 해야 되는데… 술술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볼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엇보다 힘이 있으면 그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선다. 힘이 문제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구속하는가하는 그러그러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불건강한 허상들을 허물어 본다.
마지막으로 말해보고 싶은, 내가 깨달은 바는 ‘잡념과 망상을 현실생활에 이익을 주는 유용한 사고와 잘 구별할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쓸모 없는 잡념과 공상 그리고 망상이 참 많았다. 예를 들어 쉰다고 결정을 하면 반드시 쉬는 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아 가장 알맞게 쉴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배우고 익히고, 일을 잘 하기 위해선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어떻게 가꾸어야 그 일에 보탬이 되는가를 잘 아는 것이라고 믿는다.
현실을 잘 자각하고 그 현실에 적합한 사고와 행위를 하는 것이 정신건강이라고 본다. 나는 요새 항상, 힘들지만 현실에 무용한 잡념과 그런 쓸모 없는 행동들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알맞고 적당함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상태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생각이 난다.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더 많이 더 잘된 것을 요구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알맞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고, 그 알맞음의 원인을 잘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더 많은 깨달음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해두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앞에 쭉 열거한 깨달음들은 순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내 마음 속에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보아 참조해보는 그런 교훈과도 같은 것들이리라.
그러나 이런 정신치료의 와중에 환각이 또 있었다. 또 병의 재발이었다. 그러나 입원은 결국 안하고 견디어 냈다. 어쩌면 최후로 내가 기대어 온, 이제껏 나의 모든 정력을 바쳐 한 정신치료도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정신치료를 믿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어쩌면 옛날보다 더 한 실감나는 환청으로부터 로봇처럼 좌우되어 버린 것이다. 정신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그런 고통의 날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도 데리다의 텍스트 조종(弔鐘)과 그에 뒤따른 최후심판이 나를 그런 자살시도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그 때도 완전히 갔다. 환청 이야기는 정말로 이 정도로 끝내자. 이 미친 이야기만 해도 소설을 한 권 쓸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선생님께 약을 한 번 끊어 보자고 하였다. 과학적으로 나의 그런 병 증세에서는 약을 평생 먹어야 된다고 하는 정보가 눈에 들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과학은 또 과학이고 개인의 능력은 또 그 과학의 일반성을 앞서 나가는 주관적 능력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서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은 양의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한 번 중단해보고 싶어 계속 요구하였더니, 그러면 주의 깊게 반응을 관찰하면서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다. 아마 그것도 나의 주장이니까 존중해 주신 것 같았다.
아마 한 두어 달 잘 지냈는가 하더니 그 옛날의 그 거창한 환청들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그러면서 그것들과 겨루어 보고(사귀고) 싶은 오만감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렇게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굉장히 권위에 찬 근사한 소리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다 나의 해결되지 않은 인정받지 못한 데에 대한 복수심 즉 적개심으로부터 시작된 공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도 입원은 안 했다 하면서 정신치료 덕분이 아닌가 라고 말하면서 또 살려고 내 몸과 마음을 자위하면서 추스려 보았다. 정말 내가 정신치료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는 느낌도 지니게 되었다.
그 때 선생님은 약만 주시고 정신치료 이야기는 안 하신다. 그리고는 ‘이 약을 먹으면 환청은 없어져 이건 과학이야 내가 책임지지’하셨다. 환청으로 정신병이 도졌을 땐 우선 약물치료를 적극적으로 해야된다고 말씀하셨다. 약 부작용이었던지 선생님 말씀처럼 내 상태는 좌불안석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몇 번 약을 먹고 환청이 사라지고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너무 고되고 힘이 들었다. 삼 년 간의 공든 탑이 다 무너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입원까지는 안 했다. 그간의 정신치료를 통하여 나를 이해하고 고통을 극복하는 나의 힘이 자란 것 같다. 정신병이 다시 재발하여도 그것에 대처하는 능력이 전과는 달랐다. 나는 자위했다. 잘 모르지만, 내가 이 당시에 믿게 된 것은, 나의 정신분열병의 경우, 급성기의 혼란은 약과 함께 잘 조절될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더 중요한 것은 현실 삶을 그토록 무력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증상으로부터 극적으로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정신치료의 힘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신치료를 첫 걸음부터 새로 해야 하나 생각하니 힘이 빠졌다. “예전에는 더한 적도 있었는데 뭐… 이 때 선생님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앞에서 말한 그런 깨달음들을 다 내팽개치고 싶었다. 선생님은 “뭐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좋아”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무조건 그래도 조금씩 힘이 났던 그 정신치료를 계속하는 것을 선택했다. 아마 그 때 정신치료를 완전히 포기하였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약도 최소한으로 다시 줄이고 선생님과 정신치료를 다시 하면서 서서히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 보면 특별한 깨우침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건 바로 ‘넌 너고 난 나야’할 수 있는 깨우침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겐 그 깨우침이 체득되기까지가 어쩌면 몇 십 년 걸친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활화산처럼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정신병으로까지 몰고 간 것이 바로 남을 동경하고 그 남의 눈치를 보고 집착하며 의존하여 온 그 깊은 나의 열등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지독한 나의 열등감을 봤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좌절이 심했고 그 좌절을 당할까봐 홀로 단절된 세계를 꾸며왔던가… 그것이 바로 나의 정신분열병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치료는 어떤 한 번의 깨우침에 의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열심히 전체적으로 수련한 그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총합으로 서서히 조금씩 그러다 큰 전기를 맞게 되는 어떤 사태에 의해 이해되는 그런 치료인 것이었다.
나는 현실 삶에서 그런 깨우침을 보다 더 견고히 하고 뿌리를 뽑으리라는 의욕이 생기게 되었다. 환청도 바로 그런 열등감에 의한 분노의 억압으로 생긴 것이다.
이런 억압으로부터 생긴 감정의 혼돈에 넘어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그런 방법이 없을까? 또 약을 한 번 끊어 볼까하는 자신감도 가져 본다. 분석해보면 무엇이든 자기가 자기도 모르게 가장 의존하고 싶어하는 존재의 느낌이 자기에게 개입될 때 붕 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더불어 나의 말을 받아 적는 선생님의 필기물이 아주 훌륭한 글로 끝나는 게 아닌가. 그런 현상을 목격하면서 나는 처음 말이 막혀 정신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에서 형편없는 대화로 돈만 아까운 그런 초기의 정신치료 시간에 비해서 정말 내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말은 의존심으로부터 기인된 분노에 의해 항상 억압이 되는 것이다.
대화의 단절이 바로 노이로제와 정신병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이제껏 그 긴 학창시절을 통해 한 번도 남 앞에 일어나 속시원한 발표나 주장을 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바로 일어서서 책을 읽으라는 선생님들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대학시절 아니 대학원 시절까지 그런 억압된 생활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러니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껏 회상해보면 내가 앞에서 깨달은 말 한마디 한마디의 중요성을 실천하시면서, 한 번도 실수하는 법이 없는 선생님의 언어 구사능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나는 헛소리 많이 하면서 사는 편이다. 헛소리란 것도 따지고 보면 무용한 행위임에 다름 아니다. 이 때 또릿또릿한 지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제껏 모든 정신치료의 깨우침이 하나하나 다시 떠올랐다. 앞에서 깨달은 바의 그런 이야기들이 다시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 번도 나에게 억지로 줄려는 그런 가르침은 없었다. 오히려 선생님은 말씀하면서도 침묵만 하셨을 뿐이었다. 그만큼 선생님은 나에 대해 뭘 원하지 않으셨다. 혼란과 착각이 들고나면 그것만 체크를 하셨다.
그리고 나의 깨달음의 발전은 나 자신이 키워나가게 해주셨다. 그러면서 대화의 발전과 더불어 대인관계의 발전이 도모가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때가 왔다고 생각하셨는지 한 말씀이 계셨다. 나는 어느 날 면담에서 오랫동안 잊어온 가족 이야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선생님이 처음으로 끼어든 것이었다. 4 년여에 걸친 대화를 거쳐서… “이제 건강해지니 가족 이야기가 나오는군” “그랬습니까?” “그래” 선생님은 단호했다. 나는 왠지 부끄럽고 정말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힘들게 차를 몰고 집에 돌아와 선생님의 그 말을 되뇌이기 시작했다. 정신병이 재발할 것 같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또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왠지 자신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끊임없는 정신치료의 수련이 그런 망상들을 다 물리치는 것이었다. 앞에서 말한 그런 깨달음을 되살리면서 그러다 약도 한 봉지 더 먹었다. 그 때 마침 선생님께서 전화가 온 것이다. “좋아지면 말이야… 긍정적인 것 속에 안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어. 약 잘 먹어”. 나는 투사같은 것이 막 생긴다고 말했다. 한 번씩 컴퓨터에 대해서만 물어보면서 나를 보살핀(내 생각) 선생님께서 그 때 처음으로 그야말로 ‘말’을 하신 것이다. 혼란이 있을까봐 그러셨던 것이다. 사실 혼란도 있었지만 정신 차리고 되뇌어 보면 내가 건강해졌다는 얘기는 맞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생활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뭐 다른 정신건강이 있냐고 하셨다.
생활에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생활을 잘하는 그런 도(道)만이 진정한 도인 것이다. 이제 이렇게 자신감이 든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과 통화하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랑하고 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 정도에서 치료는 끝나질 않는 것이다. 현재 나는 이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즈음에 우리는 칠곡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공부방도 한 번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공부방은 아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적성과 힘에 잘 맞는 그런 사업이었다. 우리는 지금의 이 보금자리로 오게 되었다.
자 이제 현재의 나의 모습을 다시 보자. 항상 오후가 되어야 침대에서 일어나 배부르게 먹고는 또 침대를 찾았던 그런 옛날 5 년간의 고되고 무력한 생활에서 현재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적어도 새벽 6시에는 일어난다. 그리고는 그 전날 프린트 해놓은 우리 공부방과 컴퓨터 A/S 인쇄물을 한 3백 여 장 챙겨, 컴컴하고 추운 새벽에, 우리 아파트와 이웃 아파트들에 조심해서 들어간다. 그리고 정성 들여 한 집 한 집 인쇄물을 붙인다. 그 일이 다 끝나면 7시 정도 된다. 그리고는 한 번 씩 우리 아파트 부근의 산에 운동하러 나간다. 정상을 올라가 내려오면 헬스장에서 역기 아령들을 들고 윗몸 일으키기도 35번 씩 한다. 집에 돌아오면 예쁜 내 딸과 아내는 아직 잠들어 있다.
아내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고 잠을 깨운다. 그리고 딸을 깨워 같이 밥을 먹는다. 뭐 콩나물에 계란 프라이 몇 개 그리고 아내가 자랑하는 미역국과 함께 맛있게 밥 한 그릇 먹는다. 애를 어린이 집에 맡기고 나면 오전 10시부터 (겨울 방학이기에) 애들을 승용차로 실어 나른다. 나는 10년 정신병환자이지만 녹색면허 운전경력 7년에 가벼운 접촉사고 한 번 없었다. 물론 차를 잘 몬다는 말은 아니다. 조금 덜컹거리지만 조심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학생들은 주로 아내가 가르치는데 나도 거들어줘야 한다. 인원이 거의 40명에 육박한다. 꾸준히 학생들을 잘 관리하고 전단지 붙이니 이제 학생들이 다 차서 전단지 붙일 일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일과 더불어 컴퓨터 네트워크 관리 및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 해왔다. 물론 집일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 일은 내 편한대로 프리랜서로 일한다는 조건으로 출발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아내와 나는 애들을 열심히 가르친다. 그리고 토요일은 오전에 짬을 내서 컴퓨터 교육을 하고 나면 월수입이 500만원에 육박한다. 애들을 가르치는 와중에도 전화가 계속 온다. 학원보다 교육비가 싸고 충실히 가르쳐 결과(학교성적)가 좋으니 입소문도 많이 나서 먼데서도 찾아온다.
물론 이런 결과가 있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다. 결국은 가장인 내가 일어서니 우리 가족 전체가 일어나는 것이다. 주위에 학원이 우후죽순 같이 생겨도 이젠 정말 자신이 있다. 열심히 직접 뛰는 데는 막을 자가 없다. 몸무게도 거의 90kg에 육박하기까지 한 167cm의 단신 배불뚝이가 74kg까지 빼 본 적이 있다. 체중은 지금 81kg을 잘 유지하고 있다. 좀 더 적게 먹고 더 빼야 한다. 뭐 한 번씩 침대에 누워 보지만 정말 필요한 휴식 외에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 하려고 한다.
우리 아내도 선생님에게 정신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왠 정신치료라고? 정신치료는 정신과 의사들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같이 정신치료를 좀 받아 보자 했더니 처음엔 펄쩍뛰다가 나의 달변에 넘어가 지금껏 2달 째 정신치료를 잘 받더니 벌써 효과가 나타났다. 부부관계가 현격하게 바뀌고 좋아진 것이다. 부부가 함께 하는 정신치료는 더 큰 변화를 주고 있다.
나는 지금은 천천히 평생으로 하는 어떤 꾸준한 일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예를 들어 돈을 사기 안치고 많이 벌 수 있는 기술 같은 것에 눈뜨고 있다. 컴퓨터 일도 계속하고 싶고, 늙은 노인이 가장 첨단인 세계를 사는 사람이 되어 볼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선생님은 정신치료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할 일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다. 항상 이 말을 되새긴다.
요샌 3주만에 한번씩 우리 부부가 받는 정신치료 날이다. 그 토요일(정신치료 날)은 힘들지만 행복한 날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의 상쾌한 외출인 것이다.
환자 분들에게 꼭 말해보고 싶은 것이 또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신치료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병이 일반적으로 정해진 증상이고 어쩔 수 없는 병이라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의학 정보와 인터넷의 정보 그리고 책들이 사실 환자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잘못된 정보에 현혹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의사나 사람에 따라서 병은 불치병이 되고 완치되는 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신병은 객관적인 결과로 고정된 증상으로 못 박힌 것이 아니다. 그런 객관성은 결국 의사나 환자 과학자들의 개인적 이해에 불과하다. 객관적이고 일반적이라는 그런 말들, 그런 글들에 현혹되지 말자.
정신병의 치료는 치료자의 개인 능력과 환자와 치료자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이 말도 나의 개인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정보는 나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나온 사실이다.
어쩌면 더 훌륭한 환자들도 많을 수가 있다. 나도 더 깊고 더 행복한 그리고 더한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그냥 내맡기지 말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신치료자를 찾자. 그리고 함께 잘해보자. 선생님께서는 사회에 어느 분야에서도 사기꾼들이 있어도, 전반적으로 볼 때 비교적으로 건강한 그룹이 의사라고 하신 적이 있다.
열두 번 정도 입원한 정신분열병은 일반적으로 보아 계속 입원하고 퇴원하고 반복하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어떤, 정신병 환자 보호 수용소에서 살다가 죽는 그런 병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입원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난 언제든지 입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푹 쉬고 나와서 돈 많이 벌고 대인관계 잘하고 잘 살아가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처절한 고통스런 인생과의 투쟁 속에서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은 정신병 환자인 나처럼 한없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 온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반드시 건강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무슨 인생이든 다 와라. 다 받아들이리라. 다 겪어 내리라. 환청 속에서 벌벌 기면서 누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런 우스운 광경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로 와서 편해지면 그런 나의 기억들을 담담하게 바라볼 여유가 있을 것이다.
안정도 좋고 평화도 좋고 편안함도 좋다. 그러나 정말 더 좋은 것은 힘이다. 힘이 나서 이것 어디에다 쓸까하는 데에 골몰하는 백수의 왕 사자가 되는 것 이것이 건강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측은지심은 이런 큰 고통을 겪어낸 힘과 공감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무슨 관념의 그물에 걸려 허덕이지 말자. 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상들이다. 허상은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그만이다. 망상이 무엇인가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잘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며칠 전엔 유선방송에서 어떤 달변가인 모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를 들어 봤다. 눈에 들어 온 것이 저렇게 열심히 빠져 있는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분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같이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다 훌륭한 분들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종교란 종교인들 각자의 어떤 다른 믿음들이고 그런 믿음들이 어느 것이 더 좋다 어느 것이 더 나쁘다할 것도 없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런 ‘믿음들’이 같이 잘살려하는 데 초점이 주어지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신론자들도 그들 나름의 ‘믿음’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믿음이 현실생활에 잘 맞아떨어지면 다 괜찮은 것이다.
다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 힘든 것은 참으며 버티면 지나간다. 곧 지나간다. 버틴다는 것. 완전히 자빠져 새로 시작하는 시행착오가 아니라 버텨온 거기서부터 또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도가 빠르다. 잘 참고 버티고 과감히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강자의 삶이다.
약자는 인생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는 인생의 고통을 못 참고 진통제 환각제 같은 것을 자꾸 찾는다. 냉철한 지성을 지니고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고 맛도 보지도 않고 피하지 말고 결코 현혹되지 말고 인간에게 교육을 받고 인간을 교육시켜야 된다. 인생은 투쟁도 유희도 아닌 교육과 교육의 연속이라고 본다.
또 한 가지 말을 해보자. 정신병 환자들은 말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 같다. 말은 의사소통을 전제로 쉽고 정확하고 적절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공감이 일어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우선 무슨 이야기든지 받아 줄 정신치료자가 안전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내가 ‘매치(match)’라는 말을 하자 크게 “매치”하면서 고함(?)치면서 정신치료 시간을 끝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 말 한마디로부터 우리는 상대와 매치해야 하는 것이다. 의사가 소통이 되는 것이다. 의사소통은 사실 자잘한 말로써 몇 시간 힘을 쓰고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침묵과 침묵으로 고함과 고함으로 한 방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내용은 사실 천양지차로 벌어져 있다. 정신병 환자들은 정말 이렇게 ‘매치되는 말 한마디’가 되어야 한다.
돈은 모든 것이 아니지만 기본이다. 환자가 경제관념이 생기는 순간 그때부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약만큼이라도 잘 먹자. 그리고 밥만 죽으라고 많이 먹지 말고… 차를 몰고 어디라도 찾아가서 친구하고 얘기 나눌 수 있도록 하자. 나 같은 정신병 환자들에게 차 드라이브만큼 좋은 약도 없었다. 우리 정상인들은 환자들을 이곳저곳 좋은 데 데려가 구경시키고 평화로운 자연을 느끼게 해주자.
내가 말한 또릿또릿한 말 한마디는 인사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인사부터 많이 하자. 난 요새 얼마나 좋아졌는가. 내가 제일 무서워한 장모님과 하루 종일 둘이서만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말 조금 통하면 ‘나 이렇게 말도 잘 못하는 환자입니다’ ‘같이 좀 있읍시다’ 그러고 뭐든지 이야기 꺼내어 몇 마디하고 ‘다음 또 만나면 얘기 많이 합시다’하고 헤어지면 된다.
나의 결론은 ‘힘’이다. 아니 정말 힘날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 때를 살려야 한다. 정신병은 사실 덜 심각한 병인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 보다 더 고통스런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암으로 죽어 가는 어린애들 그리고 말기 위암에 고통스러워하며 우리 어린 애들 모두를 두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고통에 비하면 말이다.
정말 힘들면 한없이 다 포기하고 치료약 먹고 푹 자야한다. 푹 쉬고 또 쉬고 해서 힘이 조금 난다 싶을 때 일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조금의 힘을 내어 조그마한 일을 해나가면서 힘이 커진다는 사실이 진리인 것이다. 지금은 푹 쉴 때인 것 같다. 아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는가? 설거지 같은 것 할 것이 있는가. 산에 한 번 가 볼까. 그런 것들 다 해보고 또 잘까. 그 다음엔 화장실 청소나 해볼까… 아는 사람 찾아가 식사를 같이 한번 해볼까. 그건 너무 내 힘에 벅찬 것인가.
책이나 인터넷 음악 같은 것에만 빠지면 더 게을러진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혼자하고 혼자 실행하는 치료행위들. 즉 음악치료나 명상치료 같은 것들은 정신병 치료에 효과를 많이 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중요한 건 항상 말문이 터여 사람과 함께 둘이서 그리고 여럿이서 함께 하는 대화로서의 치료가 환자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학적인 면 즉 생물학적인 접근도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정신치료 전문의와 함께 하는 것이 정신병 치료에는 가장 안전하다고 본다.
그러나 난 분명히 이 대화의 자신감에서 치료가 되어 간 것이다. 그래서 약과 함께 정신치료의 중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이 글을 보시고 무슨 의견을 지니실까 한 번 여쭈어 봐야겠다. 그리고 이 글을 끝내는 이 순간조차도 이 글 속에 아직 나의 병적인 적개심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눈치의 삶으로부터인가. 그래서 생긴 의존심의 좌절 그래서 이 분노인가. 이 적개심이 더 부채질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사랑 받고 싶은가 나는…
종교적 정서가 다르면 다르다는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 다른 종교에 나 자신을 던져 놓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게 안 맞는 옷이 분명한데 그 옷도 입어 보려는 행위이다. 또 다른 어떤 이에게서 사랑받으려는 욕심임에 분명하다. 이 욕심과 집착과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작은 자리를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자존심이 필요하지, 남의 자리까지 기웃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자리는 그대로 그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지금 내 자리의 중요성과 만족’을 항상 깨닫고 사는 것이 현재 나의 숙제인 것이다.
나를 위한 이 글은 끝에 와서 뭔가 뚜렷한 정신 치료적 실마리를 다시 주는 것 같다. 나를 만족시키는 자기에게 하는 자기표현 자기주장 등 이런 자기이해 같은 것들이 나를 이렇게 편하고 힘나게 해주나… 또한 나의 적개심이 나의 병이라고 이해하게 된 이 순간에 글을 자주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글은 이보다 더 잘 쓸 것 같다. 이 글은 이 정도에서 끝내자.
나와 같은 환자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당부할 말이 더 있다면. 정신치료는 한 번에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길 하고 싶다. 꿋꿋이 참으며… 내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가를 알리고 싶다. 조금만 나은 것을 직접 관찰하며 보는 것도 정말 살 맛 나는 것이 정신병 환자만의 특권이 아닌가 한다. 이만하면 살 만하다. 내일도 기다려진다. 내 글일 뿐이며 나의 병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 옛날 근 30여 년 전이다. 엄마와 동생과 나 동네 교회에 새벽기도를 간 그 옛날이 떠오른다. 엄마가 참고 참으며 시내버스를 가까스로 내려 길가에 토하는 장면과 그 핏덩이가 섞인 토사물이 생각난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근 2년을 외던 엄마의 이상한 종교의 주문들이 생각난다. 그토록 무엇이든 붙들고 살고 싶었던 우리 어머니셨던 것이다. 나의 엄청난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분노의 요인이 거기서도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나의 고통과 행복이 잘 표현되었는지 모르겠다. 잘 안된 것 같다. 독자의 이해에 맡긴다.
이제까지 고되었던 나의 생과 나 자신을 다 용서하고 이해해 주어야겠다. 앞으로 튼튼하고 잘 나가고 기름 값 적게 들어가는 좀 더 중후한 차를 몰고 우리 공부방 아이들을 실어 나르고 이곳저곳 많이 여행 다니면서 친우들과 우정을 나누며, 좋은 이야기 많이 듣고 해주고 싶다.
얼마 전 서울에 계신 장모님을 찾아뵈었다. 새로 구입한 트라제XG를 몰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왕복 600 km를 거의 쉬지 않고 신나게 몰고 다녀왔다. 이것도 첫 경험이다. 마음이 뿌듯했다.
(끝)
첫댓글 오늘 다시 이분의 글을 좀 더 자세히 보았더니..아직 치료가 덜된상태이고 피해망상이 크다고 스스로 말씀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참고하시고 나 자신안에도 아직 사라지지않고있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한번씩 돌아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조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