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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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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휘종 황제가 화가를 뽑는 과거시험 문제로
'봄나들이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말 발굽마다 일어나는 꽃 향기를 그리시오' 라는
출제를 했습니다. 여기에 장원한 작품은
"말 타고 흥겹게 돌아오는 행렬 뒤로 나비가 나풀거리며 따라오는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요.
독서 자료 보냅니다. - 이 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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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준 잡문집
0 1949 서울 서촌 생
0 중동고 서울대 미학과
0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
0 1981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0 민족 미술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0 1985~2000 서울과 대구에서 한국예술공개 강좌 개설
0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0 문화제 청장, 한국학 중앙연구원 이사장
0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퇴임후 석좌교수
0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국내편 1-12, 일본편 1-5, 중국편 1-3
<국토박물관 순례> 1-2, 평론집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미술사저술<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1-2, <국보순례>, <명작순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6, 추사 김정희> 등
0 제18회 만해 문학상 등
◎ 책을 펴내며
나의 잡문과 글쓰기
■ ‘글쟁이’의 현장은 원고지
나는 정년 퇴임하였지만 지금도 강연을 많이 한다. 문화유산을 전도한다는 마음으로 먼 거리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강연장에 가면 사회자가 나를 소개하는데 짧게 해달라고 해도 항시 길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라는 현직은 기본이고 학력부터 시작해서 문화재청장을 지냈고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작가라고 소개한다. 좀 더 자세히는 <한국 미술사 강의>를 펴낸 미술사학자라고 덧붙이기도 하고 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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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많아 나온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중요한 모습을 소개하는 곳은 없었다. 그것은 나의 글쓰기이다. 곡 되게 말해서 나는 글쟁이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문사(文士)다.
지난 세월 나는 미술평론가로서, 문화유산 전문가로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신문, 잡지, 도록 등 여러 지면에 예술과 인생에 대하여 쉼 없이 사회적 발언을 해왔다. 일간신문에 고정 지면까지 갖고 <이달의 미술>(한국일보), 국보순례>(조선일보), <삶과 문화>(중앙일보), <특별기고>(한겨레), <안목>(경향신문) 등을 몇 년씩 써오다 지금은 <중앙일보>의 칼럼니스트로 <문화의 창>을 쓰고 있다.
나의 글쓰기는 일반적인 산문 형식을 벗어난 ‘잡문(雜文)’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내가 젊은 시절에 루쉰의 잡문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내 또래와 내 선배들 세대에게 루쉰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루쉰은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 했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등 루쉰 잡문집이 여러 형태로 나와 있다. 그러나 루쉰의 잡문이란 그냥 잡문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시작해 사상의 담론에까지 이르는 글이다.
■ 내 글 속 사람 이야기
그간에 써온 글들을 모아 처음 책으로 펴낸 것은 <정직한 관객>(학고재 1996)이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추스를 필요가 있는데 이후 2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글을 써오기만 했다. 이를 주제별로 나누어 보니 ‘인생만사’ ‘문화의 창’ ‘답사 여적’ ‘예술가와 함께’ ‘스승과 벗’ 다섯 장으로 분류된다.
사실 내가 글쟁이로 살면서 가장 쓰기 어려워하는 것은 추도사이다. 신문기자가 오늘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내일모레 아침까지 써달라는 것이 신문의 추도사이다. 고인의 죽음에 마음이 황망한 가운데 3천 자 분량의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어 마치 수능 논술고사 보듯이 쓴 글들인지라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거친 가운데 진정성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여 지면 관계로 못다 한 이야기들만 더하고 그대로 실었다.
■ 나의 삶과 글쓰기
이번 책엔 ‘나의 글쓰기’를 부록으로 꾸몄다.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은 2013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발간 20주년 기념 강연회 때 독자 질문에 응하며 편하게 이야기한 것인데 이것이 <중앙선데이> (2013년 6월 2일 자)에 기사화되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어차피 세상에 공개된 것이기에 이번에 많이 고치고 보완하여 내 나름의 ‘문장강화’로 정리하여 실었다.
<나의 문장 수업>은 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받고 있는 질문, ‘어떻게 글쓰기를 배웠나요?’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다.
2024년 10월 유홍준
◎ 제1장 인생만사
■ 고별연 :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
새해로 들어서면서 나도 담배를 끊었다. 내가 담배를 피운지 45년이다. 한 생을 같이해온 이 기호품과 결별하자니 깊은 감회가 일어난다. 200여 년 전, 나하고 종씨인 유씨(俞氏) 부인이 27년간 써오던 바늘이 부러지자 이를 애도하는 ‘조침문(弔針文)’을 썼듯이 나도 고별연(告別煙)이라도 남겨야겠다.
담배의 해독을 부정하진 않지만 순기능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영화를 보면 일터에서도, 공원에서도, 전쟁터에서도 휴식의 상징은 담배였다. 글을 쓰다 펜이 멈출 때 담배 한 대 물고 잠시 사색에 잠기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특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엔 담배가 약이다. 정희성 시인은 <동년일행(同年一行)>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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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운다.
담배는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기 귀하던 시절 남의 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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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1994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은 1997년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북길에 올랐을 때는 담배를 듬뿍 사 가지고 가 선물로 내놓고 그들이 ‘백두산’ 담배를 권하면 나는 남한의 ‘한라산’ 담배로 응했다.
그러다가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신령스러운 천지 못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북측 안내원이 다가와 “교수 선생, 백두산 정상에는 ‘백두산 담배가 제격 아니겠습니까?’라며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한 대 피우지 않는다면 그건 감성의 동물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담배를 건네받아 불을 댕겼다. 핑 돌거나 거부감이 일어나면 바로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천지가 더 황홀해 보였다. 이후 나는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지하철 안국역 입구 가판대에선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영어식 담배 이름을 외우는 것이 힘들다며 ‘말보로’ 담배는 ‘날보러’, ‘오마샤리프 담배’는 ‘오막살이’로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갔는데 할머니가 또 새로 나온 담배라며 이걸 뭐라고 읽느냐며 묻는 것이었다.
“클라우드 나인’이네요. 이게 국산이에요?”
“그렇다네요. 오늘 놓고 갔어요. 그런데 이름이 꼬부랑말로 이렇게 길어 어떻게 외운담.”
“그냥 ‘큰일나요’라고 하세요.”
이후 고별연까지 피운 담배는 ‘큰일나요’였다.
문화재청장 시절 한번은 대통령 기록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께서 청장님과 저녁 식사를 한 뒤 담배를 바꾸셨는데 무슨 사연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엄청난 골초이셨다. 식사를 하고 나면 담배를 연거푸 두 대를 피우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니 대통령은 타르가 1.0mg인 ‘에쎄’를 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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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5.0mg인 클라우드 나인을 피워보시라고 권했더니 맛있다며 묻는 것이었다.
“이게 어디 제입니까?”
“국산입니다.”
“클라우드 나인이 무슨 뜻입니까?”
“속어로 ‘뿅 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 단어를 써도 됩니까?”
“외국에도 수출하다 보니 자극적인 이름이 필요했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담배는 마약쟁이들의 비속어를 이름으로 썼다고 비난받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조선왕조실록>에선 광해군 때부터 담배 얘기가 나온다. 담배라는 말은 스페인어 타바코(tabaco)에서 나온 것이고 옛날에는 연초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던 담배를 끊은 이유는 담뱃값이 올라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다.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 하고, 공공의 유해 사범으로 모는 것이 기분 나쁘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길에서도 담배 피울 곳이 없어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피우고 있자니 서럽고 처량하고 치사해서 끊은 것이다.
금연은 정말 힘들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역설적으로 말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작가 :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저자
■ 잡초 공적비
잡초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곡식, 농작물, 원예작물 등 인간에 의해 재배된 것이 아닌데 저절로 번식하는 잡다한 풀을 말한다. 잡초라면 흔히 개망초, 까마중, 쇠비름, 강아지풀, 피, 토끼풀, 엉겅퀴, 질경이 따위를 떠올리지만 맛있는 나물의 재료인 달래, 냉이, 씀바퀴, 고사리, 고들빼기, 쑥, 머위도 밭에서 농사를 방해하면 잡초다. 야생초라 불리는 제비꽃, 초롱꽃, 달개비, 민들레, 쑥부쟁이, 부들 꽃창포 등이 잡초로 분류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가녀린 꽃을 피우는 풀에 애기똥풀, 며느리밑씻개, 개불알풀이라 이름 짓고 업신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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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농업을 시작한 이래 곡식과 농작물의 영양소를 씨앗이나 열매에 축적하도록 개량해 왔다. 이에 비해 잡초는 생태 그대로 영양소를 성장과 번식에 사용한다. 그래서 곡식과 농작물은 잡초를 이길 수 없다.
김수영 시인은 <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 난다
그러나 잡초는 무죄다. 잡초의 해악이란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라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일 뿐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잡초는 땅의 표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된다.
잡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한 분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잡초를 연구하는 ‘한국잡초학회’가 있다. 이들의 활동은 제법 활발하여 국제 학술대회도 열었다.
조경가 정연선은 야생초를 조경에 끌어들이고, 화가 김정헌은 전시회 주제를 ‘소위 잡초에 대하여’로 하였고, 농사꾼이 된 철학자 윤구병은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가 하면 강원도 평창군 청옥산의 산마루, 속칭 육백마지기에 사비를 들여 ‘잡초공적비’를 세운 분이 있다고 한다.
지난여름 잡초 예찬론자인 김정한 화백과 이 ‘잡초공적비’를 보러 갔다.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평창 읍내를 지나 정선 쪽으로 가다가 미탄면 소재지에서 청옥산으로 꺾어드니 이번에는 깊은 계곡 길이다.
그렇게 30여 분 산자락을 타고 올라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풍력발전소 바람개비 여남은 개가 돌아가다 멈추고, 멈추다 다시 돌아가고 있다. 잠시 후 고원지대가 펼쳐지면서 산마루 이름 그대로 육백마지기는 될 성 싶다.
한 마지기란 한 말의 씨를 뿌려 생산할 수 있는 면적으로 대개 200평인데 아주 기름지면 150평, 아주 거칠면 300평인 경우도 있다. 평균 200평으로 치면 육백마지기는 12만 평으로, 축구장 55개의 넓이가 된다.
정상으로 가는 길가 한쪽에 잡초공적비가 반듯하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비는 청옥산 육백마지기 생태 농장의 노부부(이해극, 윤금순)가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황무지가 된 땅을 30여 년 전(1991)부터 잡초농법으로 무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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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농산물을 생산하면서 5년 전(2019)에 세웠다고 한다. 비석 받침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태초에 이 땅에 주인으로 태어나 잡초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뽑혀도 그 질긴 생명력으로 생채기 난 흙을 품고 보듬어 생명에 터전을 치유하는 위대함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다.”
자리를 걷고 일어나 잡초 공적비를 둘러보니 비석 뒷면에 이렇게 쓰여있다.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김정헌과 나는 청옥산 육백 마지기의 잡초 공적비를 떠나면서 이생진 시인의 <풀 되리라>를 큰 소리로 낭송하였다.
물 가까이 살다 / 물을 만나도 / 아무렇지도 않은 /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 편한 사람 되어도 / 나 다시 공부해서 / 풀 되리라
■ 꽃차례
봄이 왔다. 새봄을 맞으며 추사 김정희는 “봄이 깊어가니 이슬이 많아지고 땅이 풀리니 풀이 돋아난다(春濃露重 地暖草生)”라며 향기 은은한 난초를 그렸지만 나는 봄꽃이 만발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서울의 5대 궁궐…. 전 국토를 거대한 정원으로 삼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봄의 전령, 화신(花信)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온다.
화신은 언제나 동백꽃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면 동백은 봄꽃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겨울 꽃이다. 제주도에는 눈 속에서 꽃 피우는 설동백도 있다 그래도 동백은 봄꽃의 상징이다.
동백은 반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동백꽃은 송이째 떨어진다. 그리하여 동백나무 아래로는 떨어진 꽃송이들이 붉은 카펫처럼 깔려있다.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원림인 세연정에 떨어진 동백꽃이 둥둥 떠 있을 때,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즐겨 찾았던 강진 백련사의 동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인데 그 숲속 자그마한 승탑 주위로 떨어진 동백꽃이 가득 널려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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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환상의 나라로 여행 온 것 같았다.
봄꽃은 생강나무, 산수유, 매화가 거의 동시에 피면서 시작된다. 어디에 핀들 마다하리오마는 매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노매(老梅)에 있다. 노매는 아름다운 늙음의 상징과도 같다. 수령이 300년에서 500년 이상 되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무우전매, 구례 화엄사의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에는 인왕산, 북악산에서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소리 소문없이 노란 꽃을 피워 내고 비록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연륜있는 초등학교 교정에선 여전히 밝게 핀 개나리가 새학기 학생들을 맞이한다. 서울의 진달래는 아무래도 북한산 진달래 능선이 제일이다. 4월 중순으로 들어서면 서울의 남산은 벚꽃이 솜사탕 뭉치처럼 피어오른다. 이때부터 전 국토에 봄꽃의 향연이 벌어진다.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배꽃, 사과꽃, 모든 유실수들이 다투듯 희고 붉게 피어나며 찔레꽃 넝쿨까지 뒤엉키면서 전국의 온 산이 연분홍 파스텔 톤으로 물든다.
밭고랑을 매고 모종을 사다가 심으며 연신 호미질하던 내 친구 어머니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앞산을 바라보며 무심코 내뱉었다는 한마디 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뭔 꽃이 저렇게 난리도 아니게 지랄같이 피어댄데여,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데 우쩌란 말이여.”
농사꾼은 이처럼 바쁜 일손을 놓지 못하고 봄을 탄식하고, 고단한 인생살이에 시달리는 사람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고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몸으로 살아가지만 옛 문인들은 봄을 한없이 만끽하면서 수많은 봄 노래를 남겼다.
봄꽃은 희망이기도 하다. 송나라 애국 시인인 육방옹(陸放翁)은 <산서 마을을 노닐며 (遊山西村)>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산은 첩첩, 물은 겹겹이라 길이 없는듯했는데
버들잎 짙고, 꽃들이 밝게 피어난 곳에 또한 마을이 있네
산중수복의무로 山中水復疑無路 유암화명우일촌 柳暗花明又一村
이처럼 봄꽃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해마다 피어나고 있지만 아무 때나 봄꽃 축제를 만끽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꽃은 나이가 들어야 그 아름다움의 진수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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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바둑 취미
미술과 답사는 나의 직업이고 나의 취미는 분명 바둑이다.
바둑TV를 즐겨 시청하고, 주말이면 나의 영원한 호적수와 혈전을 벌인다. 나의 바둑 실력은 한국기원 공인 ‘아마 5단’이고, 기원 급수로는 ‘3급 갑 정도다. 그게 소문이 나서 바둑TV와 인터뷰하면서 바둑은 ’생각의 힘‘을 길러준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중에는 한국기원 이사도 지냈다.
내가 바둑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울 무궁무진한 수가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기쁨도 있다. 나는 바둑을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둑의 규칙, 규범, 생리 심지어는 현상까지도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한다.
바둑은 우선 승패에 군소리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게임이 다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바둑처럼 한 수에 선악은 있어도 운수소관이나 우연이 개입하지 못하고 필연의 수순을 갖고 있는 게임은 드물다. 그만큼 엄정하고 공정하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듯이 바둑은 곧잘 인생에 비유된다. 바둑을 둘 때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열 가지 교훈을 말한 ’위기십결(圍期十訣)’은 그대로 처세술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무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부득탐승(不得探勝)’같은 가르침이 어디 바둑만의 예기일 수 있겠는가.
* 부득탐승 : 승리를 탐해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 정직한 관객
1995년 제1회 광주 비엔날레 때 나는 커미셔너로 참가하였다. 그때 전시장에서 나는 아주 정직한 관객 두 분을 만났다. 한 분은 중년의 신사로 아마도 아내와 함께 구경 온 것 같았다. 그 중년의 신사가 비엔날레 전시장 나가는 문 가까이에서 이제나저제나 나올 때만 기다리던 아내의 모습이 비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니 뭐 볼 게 있다고 여지껏 있는 거야. 이 따위가 무슨 예술이야. 죄다 사기지.”
이 중년의 신사는 연신 아픈 다리를 털면서 아내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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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엔 비엔날레에 온 것 자체도 아내의 성화 때문에 마지못해 왔는데 구경거리라는 것이 하도 요상해서 홧김에 세상 사람 들으라고, 아니면 현대미술가라는 잘난 인생들 들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중년의 신사야말로 ‘정직한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백남준도 일찍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뼈있는 일갈을 하지 않았던가.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른바 설치미술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바람에 종래의 예술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장면만을 불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는 회화, 공예, 조각, 사진, 공예 등의 장르 개념을 찾아볼 수도 없을뿐더러 작가들이 무언가 고상하고 품위 있게 그 무엇을 창출하려는 성의도 엿보이질 않으니, 예술을 아름다움의 상징쯤으로 기대한 관객으로서는 당연히 터뜨릴 불만이다. 나 역시 여기서 벌어진 설치 작업에서 어떤 깊은 미적 감동을 받은 것은 얼마 안 된다. 다만 나는 미술평론가이기에 낱낱 작품들을 이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광주 비엔날레에서 또 다른 정직한 관객 한 분을 만났다. 말씨로 보아 벌교나 장흥쯤에서 오신 듯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상수상작인 쿠바의 크초(Kcho) 작품 앞에서 작은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사정을 보아하니 무슨 구경났다고 비엔날레 왔는데, 엑스포 같은 것이 아니라 해괴하기 짝이 없어 실망스럽기만 한데 영감님은 빨리 갈 생각은 않고 대상작 앞에서 영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카초의 이 작품은 2천여 개의 맥주병 위에 배를 올려놓아 쿠바 난민들의 처지를 은유한 것이었다. 한잔 걸치신 것인지 주독이 오른 것인지 코가 빨간 할아버지는 연신 맥주병만 바라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가자고 보채는 것이었다.
“영감, 인자 그만 보고 가십시다. 오래 본다고 아요? 다 배움이 깊어야 아는 법이제.”
“자네는 꼭 날 무시해야쓰것는가? 모르긴 뭘 몰러?”
“그라믄, 그것이 뭐다요?”
“뭐긴 다 뭐여, 인생이란 맥주병 위에 떠 있는 빈 배란 말이시.”
천연덕스러운 이 할아버지의 해설 앞에 나는 미술평론가로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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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했던 술과, 그 술기운에 실어왔던 꿈과, 그 꿈의 허망을 모두 읽어 냈던 것이다.
백남준의 말을 빌리든, 한 중년 신사의 고함을 인용하든, 현대 미술을 일컬어 사기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기란 정치꾼이나 장사꾼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애교 있고 악의 없는, 그래서 우리의 정서 함양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사기이되 이유가 있는 사기인 것이다.
■ 우리 어머니 이력서
2014년 9월 27일, 음력 9월 4일은 우리 어머니의 88세 생신날이어서 우리 6남매 직계가족과 외가댁 식구들, 그리고 어머니 친구 네 분과 내 친구 여덟 명 등 모두 40명이 함께 식사하는 조촐한 미수연(米壽宴)을 가졌다. 88세를 미수라고 하는 것은 한자의 쌀미(米) 자가 팔(八), 십(十), 팔(八)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전치가 끝날 무렵 어머니께 한 말씀 하시라고 했더니 생전 나서는 일이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88년 동안 살아온 옛날 생각이 나셨던지 이제껏 내게도 해주신 적이 없던 얘기를 하시는데 나는 들으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그것은 어머니뿐만 아이라 우리 민족이 해방 전후와 6•25 동란 중에 겪었던 고난의 삶을 생생히 전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우리 어머니는 1927년생, 돌아가신 아버지는 1923년생이다. 경기도 포천 깊은 산골인 신북면 금동리에서 태어난 농사꾼의 딸인 우리 어머니는 17세 때인 1944년 2월, 서울 종로구 창성동 유씨(兪氏) 집안으로 급하게 시집오셨다. 그때 갑자기 혼사가 이루어진 것은 정신대 때문이었다.
21세 된 우리 아버지는 비행기 정비공장에 다니기 때문에 군수산업 종사자라 징용을 안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 쪽에서는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 쪽에서는 일할 며느리를 얻기 위해 한겨울에 급하게 혼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비행기 공장 직원도 징용 대상이 되어서 아버지에게 영장이 나왔다. 이에 우리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도망갔다. 매일 순사가 와서 데려오라고 독촉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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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징용 도피자가 있는 가정은 가족이 고문을 당하는 등 그 횡포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이제 일본으로 징용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닷새 뒤 해방을 맞았다.
그때부터 우리 어머니는 비로소 아버지와 사실상 신혼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낳은 첫 아이인 우리 누나가 46년생이고 첫 아들인 나는 49년생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처음들은 해방 전후 우리 어머니의 삶이다.
그리고 내가 갓 돌이 지났을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53년 휴전협정이 되면서 상경해서 궁정동의 빈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1955년 4월, 내가 서울 청운국민학교에 입학하기 한두 해 전에 우리는 창성동 130번지 일본식 2층집으로 이사했다. 적산가옥으로 20년 상환 조건이어서 얼른 구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우리 집은 친구들의 사랑방 내지 꿀방이었고 데모꾼의 아지트였다.
우리 집에 친구들이 많이 온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의 마음이 좋아서였다. 열 명이 와서 자고 가도 싫은 기색은커녕 우리 집 식구 여덟 명이 먹는 밥솥을 연탄불에 한 번 더 앉혀서 꼭 아침을 해 먹여 보냈다. 어머니는 우리 친구들을 정말로 아들처럼 생각하셨다.
키 180Cm의 장신에 풍부한 유머 감각을 지니셨던 우리 아버지도 내 친구들을 잘 알고 계셔서 임종 며칠 전 웃으시며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죽으면 네 친구들이 죄다 문상 오는 게 장관일 텐데 그걸 볼 수 없는 게 서운하구나.”
이렇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더니 우리들은 삼선개헌 반대, 삼과 폐합 반대, 교련 반대 데모로 군대에 끌려갔고, 제대해 나와서는 긴급조치 4호, 9호로 감옥으로 갔다. 내가 1974년 2월 군 복무를 마치고 두 달도 채 안 된 4월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가 결국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우리 어머니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목요기도회에 꼬박 참석하여 아들 석방을 기도했다.
미수연에 내 친구로는 우리 어머니 밥을 많이 얻어 먹은 녀석들을 불렀다. 유인태, 유영표, 이광호, 안양노, 심지연, 서상섭, 그리고 감방 동무 장영달, 미학과 후배로 내 동생 세준이 가정교사를 했던 곽병찬 등 여덟 명이 왔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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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친구들의 자리로 가서는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하시더니 마침 지방에 강연회가 있어 못 온 안병욱과 서중석이 안 보인다고 마치 결석생 점검하듯 하셨다.
내 친구와 어머니 친구분들은 한결같이 지금 세상에도 이런 어머니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어머니를 칭송했다.
우리 어머니 이름은 신(新)자 영(榮)자 전(全) 자이시다.
◎ 제2장 문화의 창
■ 시각장애인을 위한 ‘터치 미 뮤지엄’
- 복제기술과 예술감상
20세기 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서구 문명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면서 귀신같은 복제기술이 등장했을 때, 예술가들은 자신이 하는 예술 작업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작품의 자율성과 고고한 분위기를 지탱해주는 근거로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예술작품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이 갖는 일회적이고 유일적인 존재로서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데, 이 아우라는 복제할 수 없다고 했다.
아우라는 본래 사람이나 사물의 주위에 감도는 숨결, 또는 독특한 분위기를 뜻한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복제기술은 점점 더 발전해 디테일까지 생생히 재현해내는 정밀 복제로 원화와 복제화를 구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예술품의 아우라로 가득한 박물관에서도 복제품이 원화를 대신해 전시되는 경우가 생겼고, 아예 정밀 복제품에 의한 명화전시회까지 열리고 있다.
원화의 정밀 복제는 고도의 사진술과 인쇄술에 의지하는데, 마침내 세라믹 프린팅으로 수명을 지닌 종이나 천과 달리 반영구 보존이 가능하다고 자부할 정도까지 됐다. 일본 도쿠시마에 있는 오츠카(大塚) 미술관은 원화를 세라믹에 복제해 전시하는 ‘세계명화 반영구 레플리카’ 미술관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제화가 원화와 크게 다른 것은 불규칙한 질감으로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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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마티에르(matiere) 효과를 재현하기 힘든 데 있다. 이는 평면 인쇄의 명확한 한계다. 그런데 포스코에서는 부식에 강한 고내식(高耐蝕) 철판에 질감까지 나타내는 포스아트(posART)라는 놀라운 인쇄기술을 선보였다.
현재 경복궁 안내판은 이 포스아트로 교체됐다.
■ 시각장애인의 예술 감상
2022년 서울 강남에 있는 포스코센터 1충 아트리움에서는 포스코와 경북도청 공동 주최로 ‘철(鐵) 만난 예술, 옛 그림과의 대화’ 전이 열렸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등 한국 미술사의 명화 60여 점을 철판에 고해상도 잉크젯 프린팅 기술로 정밀 복사해 생생한 색감과 함께 섬세한 질감까지 보여 주었다.
특히 울주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에서는 면 새김, 선 새김을 요철로 나타내 입체적인 질감까지 느낄 수 있다.
그림을 손으로 만지면서 촉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전시의 부대행사로 2023년 3월 31일, 나는 경북도청의 동락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옛 그림 감상법’이라는 세상에 있기 힘들고, 하기 힘든 강연을 하였다.
시각장애인의 형상적 상상력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예민한 경우가 많다. 오래전 바둑 TV에서 시각장애인 아마 7단이 바둑 두는 것을 중계하였는데, 공배까지 다 메우고 계가도 직접 하는 걸 보았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시각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후천적일 경우, 예를 들어 11세 때 녹내장을 앓다가 시각을 잃은 분, 교통사고로 실명한 분 등은 말로 설명해 주면 능히 그 이미지를 그려낸다.
■ 세상에 있기 힘든 강연
나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옛 그림 감상법’ 강연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부터 설명하였다. 시각장애인 곁에는 자원봉사 도우미가 있어서 대신 필기도 해 주고 있었다.
“동양화의 핵심 주제는 산수화입니다. 산수화는 5세기 종병(宗炳)이라는 분이 늙어서 산에 갈 수 없게 되자 방에다 산수화를 그려놓고 누워서 감상한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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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했습니다. 이를 와유(臥遊)라고 합니다. 처음 산수화가 등장할 때는 대자연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담았는데 점차 인간이 서정을 발하는 산수 인물화로 바뀝니다. 선비가 바위에 턱을 기대고 냇물을 바라보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자 앞쪽에 앉아있던 분이 도우미에게 낮은 목소리로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송나라 휘종 황제가 화가를 뽑는 시험문제로 ‘봄나들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말발굽마다 일어나는 꽃향기를 그리시오’라는 출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수강자들은 ‘아!’하는 조용한 감탄과 함께 엷은 미소를 보였다.
“그때 장원으로 뽑힌 작품은 말 타고 흥겹게 돌아오는 행렬 뒤로 나비가 따라오는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한번 ‘아!’하는 기벼운 탄성과 함께 밝은 미소를 보였다.
■ 좌측보행 우측통행
- 우리나라 보행체제를 국제적 관례에 맞게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바꿀 때 문화재청장으로서 <대한민국 국정 브리핑에>기고한 글(2007. 9. 6.) 요약
“사람들은 왼쪽 길, 차나 짐은 오른 길”
이것이 한동안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보행규칙 노래 구절이다. 그러나 이 보행체제는 잘못된 것이다. 우측보행이 맞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서울 송파구가 앞장섰고, 건설교통부가 교통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에 문화재청장으로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문화재청장이 뭐 이런 데까지 관심을 갖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여기엔 문화재청 입장에서도 현실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있다. 경복궁 창덕궁을 비롯한 고궁에 들어가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들이 이 보행체제의 애매성 때문에 뒤엉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우측이면 우측, 좌측이면 좌측으로 통일되어 있으면 걸어가는 흐름대로 가면 혼잡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뒤엉키면 관람 동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잡하기 마련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아 오는 유적일수록 그 혼잡성은 더하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이나 중국의 자금성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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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질서가 우측통행으로 자리 잡혀 있어 우리처럼 어지럽지는 않다.
그뿐 아니라 호텔의 로비, 공항의 로비에서 좌측, 우측 통행으로 뒤엉키는 모습은 무질서에 가까운 지경이고, 밤낮으로 인파가 북적이는 인사동 거리는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해가느라고 어느 때는 세 발자국 나가기가 힘들다.
본래 세계적으로 자동차와 기차는 우측으로 달리는 것이 대세다. 유독 영국과 일본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몇 나라만이 좌측으로 달린다.
그러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그 이외 국가들은 기차, 자동차, 사람 모두 우측통행이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만 “사람들은 왼쪽 길, 차나 짐은 오른 길”이라는 보행규칙을 갖게 되었는가?
19세게 말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일제강점기가 겹치면서 보행문제를 혼잡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자동차 기차가 없던 시절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측통행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지내고 있는 600년 전통의 종묘제례도 우측통행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1905년에 발포한 대한제국 규정은 우측통행을 명시했다. 그런데 기찻길이 좌측통행으로 들어오면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제가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아예 1921년 도로규칙을 일본과 똑같이 좌측통행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8•15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식 우측통행 차가 거리를 누비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찻길은 우측통행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차량 우측통행을 규칙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기존의 습관대로 좌측통행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1962년 제정된 도로교통법이 ‘보도와 차도’의 구별이 없는 도로에서는‘좌측보행’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많은 실수를 범한다. 우리는 해외 관광을 가서 습관적으로 좌측으로 걸어가기 일쑤다 우리들이 외국에 나가 공항 로비, 호텔 로비, 박물관 로비, 그리고 유적지에서 무의식적으로 좌측통행을 하는 바람에 한국인들은 보행질서가 없는 민족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자금은 우측보행으로 개정됨)
■ 백자 달항아리, 한국미의 영원한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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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 낸 생활 용기 중 백자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4세기 중국에서 처음 카오링(고령토)이라는 백토 광석을 재료로 만든 경질 백자는 이후 15세기엔 조선왕조 분원백자와 배트남의 안남백자, 17세기엔 일본의 아리타야키, 18세기엔 독일 드레스텐의 마이센 자기로 이어지며 전 세계가 사용하는 생활 용기로 되었다.
도자기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자기를 보면서 잘생겼다, 멋지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귀엽다, 앙증맞다, 당당하다, 소박하다 등등 본 대로 느낀대로 말하곤 한다. 그런 미적 향수와 미적 태도를 통해 우리의 정서는 순화되고 치유된다.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색,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체가 밝고, 한국은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의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 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영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듯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징이다.
조선백자 중에서도 18세기 전반기, 영조 시대에 금사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미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18세기에 높이 한자 반(45Cm) 이상 되는 백자 대호는 조선 이외에 어느 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예가 없다. 아직 기계식 동력이 발명되지 않은 때여서 수동식 물레로는 이처럼 둥근 원형의 항아리를 만든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동시대 항아리들은 고구마처럼 길거나 작은 몸체에 목을 길게 붙이곤 했다.
그러나 달덩이 같은 항아리를 만들고 싶었던 조선 도공의 예술 의지는 마침내 커다란 왕사발 두 개를 아래위로 이어붙여 달항아리를 만들어 냈다. 때문에 달항아리는 기하학적인 동그라미가 아니라 둥그스름한 볼륨감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기교가 주는 꽉 짜인 차가운 맛이 아니라 부정형이 주는 여백의 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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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된 백자 달항아리는 현재 국내외에 30점이 전해지는데 그중 국보로 지정된 것이 3점, 보물로 지정된 것이 4점이다. 이외에 수화 김환기가 소장했던 전설적인 백자 달항아리, 프리마호텔의 상징적 유물인 백자 달항아리, 도둑이 팽개치고 달아나 300여 조각으로 깨진 것을 기적같이 복원한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백자 달항아리 등이 유명하다.
202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달항아리는 약 60억 원에 낙찰되었다.
달항아리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한익환, 김익영, 박영숙, 권대섭 등 현대 도예가들에 의해 재현되고 있고, 고영훈, 강익중, 최영욱 등은 달항아리의 화가로 되었다.
2009년 영국 왕실의 보물창고 격인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은 저명인사 5명에게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가장 맘에 드는 것 한 점만 골라보라는 흥미로우면서도 어려운 과제를 냈다 그 저명인사 5명 중에는 영화 ‘007시리즈’에서 ‘마담M’ 역으로 유명한 주디 덴치(Judi Dench)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 현대 도예가 박영숙의 달항아리 작품을 꼽으면서 그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하루 종일 이것만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대가 달항아리 형태로 만들어질 정도로 달항아리는 한국미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이 어제의 미학이 아니라 한국미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미의식에 살아 있다는 것은 여간 큰 행복이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한국의 이미지’로서 누정의 미학
해마다 여름이면 국제교류재단에서는 외국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참여하는 한국 미술사 워크숍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에 줄곧 참여해온 서양의 한 큐레이터에게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서 물으니 그녀는 단숨에 정자(亭子)를 꼽았다.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족에 정자가 하나 있음으로 해서 자연풍광의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며 이처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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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친숙하게 어울리는 문화적 경관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표정이라고 했다.
정자는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된 건축문화인데 이 또한 3국의 특질이 다르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다실로서 건축적 상징성이 강한데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생활 속의 공간으로 자연풍광의 문화적 액센트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자는 생김새보다 자리 앉음새가 중요하다. 특히 강변에 세운 정자에 명작이 많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이층이면 누각, 단층이면 정자라 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흔히는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 사찰, 서원, 저택, 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생기기도 잘생겼다.
남한의 3대 정자로는 진주 남강변의 촉석루, 밀양 낙동강변의 영남루, 제천 청풍 남한강변의 한벽루를 꼽고 있다. 북한에선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 의주 압록강의 통군정 등이 예부터 이름 높다.
* 정자에는 대개 내력을 알려주는 당대 문사가 쓴 기문(記文)이 걸려있다. 그 리고 많은 명문이 정자의 기문에서 나왔다. 세종 때 하륜(河崙)이 보물 제 528호인 한벽루(寒碧樓)에 쓴 중수 기문은 가히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생각하건데, 정자를 수리하는 것은 한 고을의 수령된 자의 일로서는 아주 작은 말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되고 못됨은 실상 고을의 다스림과 깊이 관계된다. 다스림에는 오르내림이 있어 민생이 즐겁고 불안함이 늘 같지 않듯이 정자의 흥폐도 이에 따른다. 하나의 정자가 흥하고 폐한 것을 보면 그 고장 사람들이 즐거운가 불안한가를 알 수 있고, 그것으로써 한 고을의 다스림의 실태를 엿볼 수 있을지니, 어찌 그것이 하찮은 말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이 공주 금강변 정지산 산마루의 취원루(聚遠樓)에 붙인 기문 또한 천하의 명문으로 그 경륜의 시각은 참으로 원대하다.
“정자를 세우는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뜻 만이 아니다.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기 하고,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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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 바라보면서 민생의 고통을 알게 하고, 나루터와 다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를 잘 건너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여기서 보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운 자를 따스하게 해 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이는 멀리 있는 사물에서 얻어낸 것을 정자에 모으고, 정자에 모은 바를 다시 마음에 모아서 내 마음이 항상 주인이 되게 한다면 이 정자를 취원루라고 이름 지은 참뜻에 가까울 것이다.”
정자는 고을 사람들의 만남과 휴식의 공간이면서 나그네의 쉼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자는 여기에 오른 문인, 묵객들이 읊은 좋은 시들을 현판으로 새겨 걸어놓고 그 연륜과 명성을 자랑한다. 이를 국문학에서는 ‘누정문학’이라 부른다
특히 청풍 한벽루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남긴 시가 많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모두 한벽루를 다녀가면서 시를 남겼다. 이는 옛날에 서울에서 경상 좌도로 갈 때 죽령을 넘어가자면 남한강 뱃길을 타고 올라와 청풍에서 하루를 묵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중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을 때 고향 안동으로 가는 길이 지은 시다.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밤 서리 바람에 낙엽소리만 들리네
과연 징비록의 저자다운 시다.
* 누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면서 2023년 12월,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 <조선왕조 실록> 그 수난과 보존의 긴 역사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 무료 서비스로 누구든 자유롭게 원문과 번역문으로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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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기록유산의 나라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유산은, 해인사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동학농민혁명기록물>등 18건이나 된다. 그 중 <조선왕조 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물이다. 유교문화를 가진 중국, 일본, 배트남 등도 왕조의 실록이 있지만 그 양과 내용의 다양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 록한 종합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배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 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탈락이 없는 세계 유 일의 실록이다
3.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많으나 글자 수는 1,600 만자 정도로 4,965만 자인 <조선왕조실록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실록들은 배부문 원본이 소실 되었고 근현대에 만 들어진 사본들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래로 남아 있다.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말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정략적으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별도로 취급한다.
■ 무명의 선비가 지켜낸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국초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세종대왕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만일을 위해 4부씩 만들게 하여 경복궁 춘추관(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분산 보관시켰다. 이것이 4대 사고의 시작이다.
태조, 정종, 태종까지는 필사본으로 제작하였으나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완성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1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다. 3년에 한 번씩 꺼내 말리는 ‘포쇄’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
* 중종 33년(1538.11.6.) 성주사고에 화재 발생 태조실록부터 연산군 실록까지 전소, 다른 사고본을 필사하여 복원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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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 소실. 하나 남은 전주 사고도 풍전등화에 있을 때 관리들은 땅에 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를 모신 경기전의 참봉인 오희길(吳希吉)은 내장산으로 옮길 계 획을 세우고 태인에 있는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도움으로 내장산 산속 암자로 피란시킴.
8 훗날 이들에게는 별제(6품)의 벼슬이 내려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은 새로 4부를 복간하여 춘추관에 1부,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에 1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무주 적성산으로 옮김)에 4대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이때부터 사고의 관리는 사고가 소재한 사찰의 승려가 맡았다.
■ 근현대의 격랑 속 실록
일제강점기의 <조선왕조 실록>
0 적상산 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0 정족산 본과 태백산 본은 총독부로, 그리고 다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도 서관으로 이관
0 오대산 본은 일제가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 1923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불에 타고 27책만 남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 후일 48책이 새로 발견되어 총 75책이 됨
0 6•25때 임시수도 부산으로 수송, 창경원의 적상산 본은 해방직후 도난 사건 으로 낙권이 생긴 상태에서 북한군 사학자 김석형이 평양으로 옮겨감
* 최종적으로 현재 사고본은 남한에는 2종 북한에는 1종이 남아있다.
■ 모두를 위한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옛 전적으로 보관된 데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 시료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한 기록유산이다.
0 북한:1970 번역작업 시작, 1975년 10월, 1책 발행 후 1991년에 번역 완료.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총 400권을 출판
0 남한 : 196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번역을 추진, 민족문화 추진회 주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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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1993년에 번역 완료 및 출판
- 1995년 CD롬 초판이 발행되었고 1997년 1차, 1999년 2차 개정판 출시
-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 누구나 인터넷으 로 원문과 한글 번역본을 볼 수 있게 함(2006년)
■ 100년 뒤 지정될 국보 • 보물 있는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한 지 3년째 되던 해(2007)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 때 느닷없이 “문화재청장을 오래 지내면서 말 못 할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이때 나도 모르게 나온 것은 “100년 뒤 지정될 국보•보물이 이 시대에 창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는 대답이었다.
문제는 건축이다. 현대 건축의 기술과 재료의 발달로 멀쩡한 집을 부수고 재건축하는 일이 다반사인 오늘날의 추세로는 100년을 넘길 건축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건축의 기본이라 할 주택의 문제는 더욱 회의적이다.
조선 시대엔 목조에 기와를 얹은 ‘한옥’이라는 주택 형식이 완성되어 하회마을의 양진당(보물 306호)과 충효당(보물 414호), 안동 내앞 마을의 의성 김씨 종가집,(보물 450호), 경주 양동마을의 무첨당과 관가정(보물442호)등이 나라의 보물을 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현대주택’이 몇 채나 지어졌을까?
문화재란 최고 수준의 예술, 최고의 기술, 최고의 재력이 만나야 한다. 평범한 주택은 민속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는 아니다.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한옥들도 그 당시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 불린 호화주택이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조선 시대에는 삼천리강산 곳곳에 아름다운 정원(庭園), 원림(園林), 별서(別墅), 정사(精舍)를 지어 오늘날 우리들은 이곳을 행복한 답사처로 찾아가고 있다. 정원은 집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아름답게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좋은 곳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정원과 원림의 차이는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바뀐 것이다. 별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별장이고, 정사는 집 가까이에 있는 독서처다. 이것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명승이다.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청암정과 석천계곡(명승)은 대표적인 정원이고, 담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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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명승)과 윤선도의 원림(명승)으로 지정된 보길도 세연정이 대표적인 원림이며, 독락당(보물)으로 유명한 경주 안강의 옥산정사가 대표적인 정사이다.
그런데 자금 우리 시대에 훗날 명승으로 지정될 정원, 원림, 별서, 정자가 지어지고 있는가?
요즘 시골에 폐가가 즐비하여 사회적 문제로 된지 벌써 오래다. 만약에 도시인들이 그 폐가들을 사서 원림으로 정사로 별서로 가꿀 수 있도록 합법적인 길을 열어주고 1가구 2주택 양도소득세에서 제외해 준다면 폐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반세기 전, 1인당 국민 소득이 몇백 달러밖에 안 되던 시절에 제정된 호화주택, 별장, 농가 주택에 대한 규제를, 3만 달러가 넘는 지금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마치 인구는 줄어는 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 문화재청장의 관할 영역
문화재청장 시절 한번은 청장 10여 명이 모여 식사를 하며 모처럼 담소를 나누었는데 저마다 하는 얘기가 남들이 모르는 자신 업무의 고달픔이었다.
* 우리나라 면적 : 해방 후 남북 분단 시 남한은 9만4천 제곱Km 였으나 지금 은 간척사업을 많이 하여 10만 제곱Km 정도 이다.
평수로 하면 서울이 약 2억 평, 제주도는 6억 평, 전국은 약 300억 평
* 산림청 : 우리나라 면적 300억 평 중 3분의 2가 산, 200억 평을 관리
* 경찰청 : 에누리 없이 300억 평의 사람을 관리
* 해양경찰청 : 우리나라 바다는 영토의 4배이니 1,200억 평을 관리
* 문화재청 : 5대 궁궐, 40개 조선왕릉, 전국에 산재 된 국보 보물, 300억 평 땅속의 매장문화재, 1,200억 평 바다속의 침몰선과 수중 문화재, 몽골에 가 있는 천연기념물 검독수리, 태국에 가 있는 노랑부리저어새 안부까지 관리
* 기상청장 : 우리 기상청은 면적이 평수로 계산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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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제2부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