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11~18)
약간 서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 준다. 교정 곳곳의 단풍이 운치 있다. 교정의 새소리와 틀어 놓은 성가 안의 새소리 효과음이 완벽한 화음으로 번갈아 운다. 중간고사를 마쳐서인지 평소 시끌벅적하던 곳이 조용하고 한가롭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앉아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찬 공기를 마시러 창문을 반쯤 열었다. 누군가의 기막힌 찬양 기타연주를 들으며 묵상의 시간을 가지는 지금, 이 시간, 이곳이 천국 같다. Thank you, Jesus! |
할례를 강요하는 행위.
어떤 마음의 동기가 그렇게 할까?
‘십자가의 피’를 통해
존재가 새롭게 창조된 일을 겪어도
낮은 수준의 할레적 영역을
다시 찾아 들어가 집착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① ‘십자가의 피’를 실제로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는 은혜가 있었지만
② 죄악에 물들어 외식의 옷으로 자신을 숨기려는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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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우리 담임목사님의 설교,
‘감동보다 해석보다 존재보다 공동체’
도전을 주었다.
로잔대회에 대한 협조 차원이라고 추측되는
사도행전에 대한 묵상이 여러 목사님 사이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듯한데
내가 은혜를 많이 누리는 우리 담임목사님과
겸영봉 목사님의 말씀이 매주 같은 본문이어서
참 흥미롭다.
같은 본질과 맥락으로 설교하시면서도
다른 맛으로 은혜를 누린다.
지난 설교에서 김영봉 목사님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o 두로에서 여러 성도들이 성령의 계시를 분명히 받아서 바울에게 조언했지만 바울이 결국 자신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음. 그러자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답함.
o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바울이 맞았나, 두로의 제자들이 맞았나? → 단정할 수 없다. 왜? 바울이 만약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 그것이 겁에 질려서라면 적절치 않지만 **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는가를 고심하는 과정이었다면 적절. (외형적 선택으로 판단할 수 없음) 또 사람의 상황은 다양하고 다르다. 세상에서 극소수의 명백한 것(예: 사랑하는 것과 사랑 없는 것, 겸손한 것과 교만한 것 등)을 제외하고는 현실에서는 흑과 백의 선택보다 넓은 회색지대에서 옅은 회색으로부터 진한 회색을 선택하는 일이 더 많고 그렇게 하는 게 이해된다. 본질적이고 명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밖에 모든 것은 단지 지름길로 가는가, 아니면 돌아서 가는가의 차이.(오늘 설교에서 바울의 결정도 마찬가지.. 바울 안에 이해되는 동기가 있다면 그것에 따라서 하나씩 행동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음.)
o 그러므로 성령의 계시가 있다 해서 단정적, 일방적으로 행동(적용)해서는 안 됨. 오히려 해야 할 일은, (틀림없는 확신이라면 오히려 경계하고) ① 겸손(나의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 ② 존중(타자의 형편과 사정, 분투의 과정을 인정) ③ 확신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계속 찾아야 함. 하나님의 뜻은 단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찾는 과정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임. |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기적, 마술, 초현실과 같은 엄청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있던 거라 그 소중함을 잘 모르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곤궁에 처해서만 ‘주어진 것’에 대한 귀중함을 아주 조금씩 알아갑니다.
하나님! 겸손과 존중,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헤아리는 마음과 태도를
보유하게 해 주십시오.
오늘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지체, 교회 식구들, 그리고 단국대 학생들
모두 모두 지켜주옵소서.
에너지가 없는 소영이 회복시켜 주시고 힘을 주소서.
정환이 힘든 시간을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 이겨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의 강의도 하나님 의지하여 겸손하게 해 주소서.
젊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