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報恩)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연의 하나는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언젠가는 그 보답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살아가는 재미와 맛이 있는 것이고, 선하면 복을 받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은 있어도 여건이 미흡하고 인연이 닿지 않아 그냥 마음속으로만 짐작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인과응보의 섭리는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대개 망각하고 지낸다.
「이 병주」작가의 평전을 읽고 쓴 글에 대하여 뜻밖에 작가를 폄훼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작가가 「이 승만」 박사와 「박 정희」 대통령을 비난한 전력이 마땅치 않았다고 하였다. 아마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그들의 공과는 이미 드러난 사실임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순전히 주관적인 견해일 뿐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에 불과하다. 더구나 누구보다 보수우익을 옹호했던 작가에게 색깔 딱지마저 씌운다면 지나친 편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부유하게 살았고, 차가 없던 시절에 자가용 볼보를 몰았으며, 고급 식당과 고급 술집을 다녔으며, 여자관계도 화려하여 여러 집 살림을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제기하였다. 이런 이유는 따지고 보면 그런 형편이 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된 사연을 모르면 대부분은 분노하고 비난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하나 그 깊은 사연을 알게 되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가 타고난 운명인 것을 어찌하랴.
그는 적어도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문학의 대가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좌절하고 울분에 처한 것은 국가가 개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조국의 부재’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다수 지식인의 공통적인 느낌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비해 그나마 여유 있는 집안에서 교육을 받고 선택된 직업에 종사한 것은 사실이다.
전쟁으로 처가가 있는 고성으로 피신했으나 이곳도 점령되자 부모님의 안위가 궁금하여 고향에 되돌아가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었다. 그의 능력을 아는 친구의 도움으로 문화선전대에서 노역을 하였다. 전세가 기울면서 대원들을 각자 희망대로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진주가 수복되면서 대학에 사직서를 내고 부산으로 향했다. 이후 진주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자수했다가 본의 아니게 부역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석방되었다. 그해 12월에 다시 미군 방첩대에 연행되었으나 아버지와 주위의 노력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결국 두 차례 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리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작가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였다. 훗날 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혁신계를 타도 대상으로 한 군사정부에서 구속되었다. 혁신운동가들을 처벌하기 위해 마련한 소급법이 적용된 것이다. 그는 평화통일과 중립화를 주장하여 반국가행위를 한 혐의를 받았다. 이일로 재수감되면서 감옥에서 작가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 때 박 대통령에 대한 사감이 평생의 한으로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전 두환」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가 혹 혁신계를 포용하고 정치권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위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을 말하다보면 선뜻 인간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제 아무리 능력이 있고 권세와 부귀가 있어도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요, 반면에 아무리 비천하고 배우지 못했어도 인생의 최 정점에 이르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이 다르다는 점이다. 소위 천명이란 것도 하늘이 주는 개인의 운명이니, 타고난 팔자는 제 아무리 주변에서 시기하고 질투한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병주」가 해방 이후 진주 농고의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인근 진주 중학교의 소사(小使, 사환)로 일하던 「김 현옥」이란 청년이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진주농고 교정에 들어 왔다가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막 집단폭행을 당하려는 찰나였다. 우연히 이를 본 「이 병주」 교사가 학생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배우는 학생들이 집단으로 자신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감화를 받은 「김 현옥」은 평생 존경하는 인생의 선배로 「이 병주」를 기억하였다.
이후 1947년에 「김 현옥」은 육사 3기생으로 군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당시 못 배우고 돈 없고, 배경 없는 젊은이 들이 출셋길을 따라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던 시절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국제신보』 주필실에 육군 중령이 찾아왔다. “선생님, 절 기억 못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김 현옥」과 재회한 둘의 교류는 이후 끈끈하게 이어 졌다. 5,16 직후에 「김 현옥」은 육군 준장으로 부산 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 병주」가 옥살이할 때도 시장이던 「김 현옥」은 매달 「이 병주」의 집으로 쌀을 보냈다고 한다.
군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 부드럽고 서민적인 이미지의 「김 현옥」은 부산 시민의 신망을 얻고 시정도 안정시켰다는 평판을 받았다. 이어서 서울 시장으로 영전하여 ‘불도저’란 별명을 얻으면서 과감한 도시 건설을 주도하였다. 시민아파트 10만호 건설, 서울 역 고가도로, 청계고가도로, 남산 1, 2호 터널, 세운상가 등이 이때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옛날부터 존경했던 「이 병주」에게 「김 현옥」은 경제적 특혜를 베풀었다는 말이 따른다. 특히 용산 청과시장을 건설할 때 특권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후락」 중정부장과도 막역하게 지낸 터라 해외여행을 가면 100불짜리 지폐를 봉투째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고액이었다. 사실 이런 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끈적끈적한 정경유착의 대가로 거래된 검은 돈이 아니었겠는가? 아마도 이처럼 시대 상황이 맞아떨어져 비교적 타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해외여행이라니 상상 이상의 호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돈을 여유 있게 쓰면 사람이 따른다. 여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유명세를 타는 소설가에다가 말주변도 좋으니 많은 여성들의 타킷이 된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이 사노바(카사노바)나 이 나시스(오나시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어지간한 도덕군자가 아니고서는 숱한 염문의 벽을 자제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가정을 깨지 않고 죽어서도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 있으니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한 셈이다.
누구에게나 보은에 얽힌 사연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사정에 처했을 때 성원과 위로는 물론이고, 새로운 길을 가도록 이끌었던 다수의 은인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 가슴에 담아 보은하려 해도 행동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사람의 도리는 잊지 않고 지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1997년 말 어느 날 모 언론사의 기자가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만나니 15년 전 육사에서 훈육관(訓育官) 시절에 중대원이던 1학년 생도였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누가 보더라도 운동선수로 제격이라 당연히 럭비선수로 선발되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운동선수로는 생활하기 싫다고 하여 나와 몇 차례 면담을 하면서 조언과 위안을 해 주었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한 밤 중에 합숙소를 빠져나갔다. 다행히 다음날 학교로 복귀시키고 일체를 불문에 부치기로 하였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로 마침 배짱이 맞은 동기생이 담당 장교라서 가능하였다. 1학기를 마치고 하기군사훈련이 시작되면서 나는 4학년 생도들을 인솔하고 병과학교를 순방 중 이었는데, 합숙하던 생도가 또 다시 월장하여 결국 퇴교를 시켰다는 동료의 전화를 받았다. 아쉽지만 잊고 지냈는데 그 해 늦게 학교에 찾아와 명문대학으로 진학하였다고 인사를 하였다.
이런 사연을 뒤로하고 반갑게 만났다. 본인이 어려웠던 시절에 윽박지르지 않고 따뜻이 위로하며 의견을 경청해준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앞장서 무마하고 해결해 주었다. 특히, 육군의 입장을 이해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나 육본에 근무하고 있는데 전화연락을 받았다. 진급 발표를 앞두고 나를 음해하는 투서가 관련부서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장관은 그런 사람들을 뿌리 뽑겠다고 언론에도 공표했지만 자칫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대처하라는 내용이었다. 설마 그럴 일이야 하고 초연하게 지냈지만 얼마 후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도 모르게 운명을 바꾸는 일이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하지만 우리는 전혀 모르고 살아 갈 뿐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로 따뜻한 사람 냄새를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기본자세이다.
「이 병주」에 대한 인간적인 품격과 과거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당 태종이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구리를 거울삼아 의관을 정제하고, 역사를 거울삼아 일의 흥망을 살피고, 사람을 거울삼아 일의 성공과 실패를 살피라” 모름지기 자기 관리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역시 보통 사람으로 운명의 힘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길이 편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태양은 중천을 벗어나 석양으로 기울어 가고 있으니 좋은 가르침도 한낱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다만 할 일은 많고 해는 저물어 가는데 자칫 타인의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결코 회피해아 할 일인 듯싶다. 역사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아무리 외쳐도 마이동풍인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2023.1.6.작성/1.11.발표)
첫댓글 남당의 글을 읽고보니 나 나름대로 내가 받은 은혜를 제대로 갚지못한 일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할 때, 기숙할 곳이 없었는데, 단칸방에서 삼남매와 함께 사는 먼 친척뻘되는 전쟁미망인의 아주머니가 나를 받아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기적같은 일이지요. 그후, 10여년 전에 영월로 한번 찾아뵌적이 있었는데 그후 연락이 두절되었지요. 분명 돌아가셨을텐데, 묘소라도 참배하려고, 최근까지 삼남매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직도 나는 그분한테 은혜를 갚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각자 나름의 운명적인 삶의 모습이 있지요. 그때 내가 이렇게 했으면 어땟을까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하고,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합니다.
남당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마음으로 성원하는 외우의 기억을 깨웠다니 반가워요. 여러 차례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추억이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진해의 비좁은 관사를 나누어쓰던 일은 언제라도 뭉클한 추억이지요. 여하튼 백강이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와 꽃 잎을 노래하고,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장정의 길과 연암의 궤적을 답사한 글은 기록문학의 경지에 오른 부러운 백미지요! 풍부한 식견과 문학적인 배경이 튼튼하니 백강 본인과 갈헌에게도 문인회의 가입과 왕성한 활동을 당부했던 것이지요. 여하튼 진실을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마음은 이심전심으로 통하니, 다소 언젠가 본인에게 진심을 담은 충고에도 감사하고 있지요. 생각만 하고 실현하지 못한 과거 인문대학의 동료들을 모아 회동하도록 하십시다. 국문, 중문, 영문, 불문, 독문, 철학과 서양사 그리고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던 교수부 출신의 동료들과 만날 수 있도록 추진하도록 하지요. 진실한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면 어떤 자린들 마다하겠어요? 불편한 자리를 피하는 본인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여 주시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민의 마음을 계속해서 다른 곳에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살면서 은혜를 받은 일 많았죠. 초교시절 섬진강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때 건져준 용희형. 나의 어린 시절 무척이나 놀려대고 나를 갖고 놀던 그 형 그래서 내가 그리 싫어하고 미워했던 그 형이 나를 살려 준 거죠. 찾아 보니 이미 돌아가시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