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포럼]춤추는 탬버린
( 강원일보 오피니언 2006-1-19 기사 )
웃음이란 넉넉한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행복한 소리이다. 웃음은 빙산도 녹인다는 말이 있다. 즉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한바탕 웃음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유머를 던지는 사람이나, 유머를 듣는 사람이나 모두 넉넉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웃음이라는 것도 먹고 살기 힘들거나 고통 받는 일이 있을 때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들지라도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 곳에서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고 했다. 웃음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맞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래이다. 유행가가 될 수도 있고 가곡이 될 수 도 있다. 노래방의 풍경을 떠 올려보자. 서로 다른 노래 속에 그래도 유행가는 우리의 찢겨지고 힘든 일들을 모두 잊고 함께 어우러짐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노래방 속에 유일한 악기는 탬버린이다. 흥을 돋우는 가장 중요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치는 사람에 따라 그 리듬이 4분의 2박자 일 수도 있고, 4분의 3 또는 4분의 4박자가 될 수 있어 자유자재이다. 아울러 부르스, 토르도, 지루박, 탱고, 고고, 월츠, 어느 쪽에도 잘 어 울린다. 그러나 흥을 돋우는 이 탬버린은 두 사람이 동시에 칠 수는 없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상해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많이 들려온다. 아무리 기자 회견을 해도 서로가 맞고소를 해도 도대체 줄기 세포가 어떻게 되어서 없어 졌는지 서로 떠 넘기를 공방하고 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난자 제공자들과 난치병 환자들은 그래도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황우석 교수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고 있고, 좀 안다는 교수와 학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연실 반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한쪽에서는 사학법을 들고 서로가 네 탓과 내 탓을 하며 비리 학원에 감사와 개방이사를 보낸다느니, 감사 거부 운동과 학교 폐쇄와 신입생 배정 거부 운동을 바라느니 심각하게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고 있다.
우리 교육계도 이즈음 학생들 교육을 둘러싸고 서로의 의견이 상반되어 자기만의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다. 수준별 이동 수업을 해야 되느니, 우리 실정과는 다르니 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하고 있으니 말이다.
독일의 어느 한 초등학교의 수업시간 중에 있었던 일화이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참 다 못한 여선생님이 1에서 10까지의 모든 숫자를 더하라는 문제를 벌로 냈다.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은 조용 할 것이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개구쟁이 꼬마 소년이 몇 분도 되지 않아 문제를 풀었다고 손을 들었다. 으레 또 장난치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답을 드려다 보니 뜻 밖에도 정답이었다, 깜짝 놀란 선생님이 어떻게 풀었냐고 물었다. “아주 간단해요”하고 어린이가 대답 했다. “100에 1을 더하면 101, 99에서 2를 더하면 101, 98에서 3을 더하면 101이 되죠, 이렇게 해 나가면 101이 50개가 되니까 그걸 모두 합치면 5050이 되잖아요.”
여선생님은 그 아이에 천재성을 발견하고 수학교수를 소개하며 특별지도를 했다. 그 소년이 바로 19세기에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된 프리드이 가우스였다. 가우스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잘 만났기 때문에 세계적인 수학자가 될 수 있었다. 즉 학습자가 자신의 적성과 요구대로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와 선택 폭을 넓혀 주었으며, 교육 내용과 방법 역시 창의력과 개성, 합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쪽으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만큼 선생님은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존재다. 앞서 이야기한 수준별 이동 수업이 학생의 수업권을 훼손해서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 실정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교육 개혁안들을 만들어내고, 장관이 바뀔 때 마다, 창조력을 키우는 교육을 위한 새 개혁안을 발표한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다 정작 그런 교육을 맡아서 할 교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는 게 보통이다.
`서투른 외과 의사는 한 번에 한사람만 해치지만 서투른 선생님은 30~40명의 학생을 해 친다'고 카네기재단의 교육진흥회 회장인 어네스트 보이야가 한 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지금의 교단 갈등을 지켜보며 `선생님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교감 교장 교육부는 또 누구를 위해 존재 하는가?' 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 모두가 학생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학생을 잊고 있는데 학생들은 어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앞날을 밝힐 창조적인 새 세대를 키우는 독일의 초등학교 교사처럼, 참다운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일선 교사들이다. 그들이 있는 한 우리는 넉넉한 웃음이 함께 묻어나고, 어느 한쪽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하는 탬버린이 되지 않도록 모두들 도와주어야 되겠다.
이봉수〈횡성교육청교육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