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이라 했던가?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시절을 지낸 고향생각이 더 짙어 지는 거 같네요. 얼마전 깨복쟁이 친구들 모임인 초교 동창회 모임을 다녀온 소회를 몇 자 적었습니다. 고향의 향수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싶어 이 방에 띄웁니다.
<초교 동창회 모임을 다녀와서>
오랜만에 초교 동창회 참석을 위하여 서울 회원의 출발장소인 강변역 1번 출구에 당도하니 붉은색 아담한 중형버스가 나를 반긴다. 생각보다 작은 버스라 우려스런 맘으로 버스에 오르니 아직 승차해 있는 사람은 없고 여자 기사님이 날 보고 인사를 건넨다. 실망해하는 나의 표정을 금세 알아보셨는지 잘 모셔드릴 테니 안심하시라 한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07:00시가 돼서야 전원 탑승이 이뤄졌다. 참가인원을 다 태운 버스는 목적지 진안을 향하여 회색 서울 도심을 벗어나 중부고속도로를 내달린다. 차창에 스치는 짙푸른 녹색의 향연은 상쾌함 그대로다. 도시의 생활이란 것이 늘 긴장과 경쟁의 연속이 아닌가. 오늘은 모든 근심 걱정 다 내려놓자. 그리고 반가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가슴이 설렌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한참을 달려온 버스가 이천 마장휴게소에 멈춰 선다. 장거리 여행을 위한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버스 뒤에 모였다. 댓바람에 나온 이유로 거른 아침을 먹기 위해서다. 아침 식은 전×× 님이 혼자서 준비해 온 것 이란다. 전에도 회원들을 위하여 이렇게 했다 하는데 난 정말 탄복을 금할 수 없다.
알맞게 간간한 찰밥, 손수 채취한 산나물, 잘 익은 김장김치, 찰밥에 궁합인 김, 시원한 오이냉국, 접시와 젓가락까지 어느 것 하나 정성과 진심이 깃들지 않은 게 없이 바리바리 준비해 온 것이다. 또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부천에서 강변역까지 왔다는 사실도 대단하고, 밥과 반찬 한 가지 한 가지가 까다로운 내 입맛에 맞는 것은 분명 정성과 진심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말해준 한 마디는 더 충격적이다. “매사에 감사하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이다.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평소에도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존경스럽고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 없다.
허기진 민생고를 해결하고 나니 버스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중부에서 경부, 경부에서 대통, 대통에서 장수완주 간 도로를 논스톱으로 달려 약속된 11:00에 마이산 북부주차장에 도착한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진안 홍삼스파호텔이 있는 곳이다. 오래전에 와 봤던 곳이라 새롭다. 그때엔 주위에 많은 상가가 없었는데 지금은 음식점이 꽉 차 있다.
그런데 웬일인가 상가가 영 썰렁하다. 코로나19의 영향인가 마치 썰물이 빠져 나간 것 같아 안타깝다. 동창회 장소인 식당 앞에는 먼저 와있는 친구들이 서서 서울에서 내려온 우리 일행을 반긴다. 오랜만에 만나니 변해버린 모습에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는 친구도 있다.
마스크를 벗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40여 년 만에 보는 친구인데도 옛 모습 그대로인 친구도 있다.
지금 나에게 초교시절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떠오르는 친구가 하나 있다. 운동장 맨바닥에 앉아 마이산을 그리는 미술시간 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던 그가 내 그림을 도와준 친구다. 그때 사실이 기억나느냐고 묻고 싶은데 오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섭섭하다.
서로 간의 수인사를 끝내고 자연스레 각자의 자리에 앉자 회의를 진행한다. 회장이 간단히 인사말을 하고 바로 차기 회장선임건을 상정하자 누군가가 임×× 회원을 지명하자 모두의 박수로 가결됨을 선포하고 회의를 마친다.
내가 이 초교 동창회에 참석한 때가 20여 년쯤 된 것 같다. 참 오랜만에 왔다. 우리 속담에“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다 흐린다”는 말이 있다. 회원 중 누군가가 그 미꾸라지 짓을 한다면 여러 사람이 불편하게 되고 그게 보기 싫어 모임에 참석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품을 갖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최소한 남을 괴롭히고 불편해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되는데 모임에는 꼭 그런 불량품이 하나씩 끼어있다.
그간 코로나19로 인하여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한꺼번에 풀기라도 할 듯 식사와 반주가 들어가자 곳곳에서 파안대소와 건배를 외치는 소리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식사를 마치고도 식당 밖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못다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누군가가 기념촬영을 한다고 외치고 환영플래카드 밑에 모이라고 하자 참석자 모두가 자리를 차지한다. 나도 참가의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대열 뒤쪽에 서서 고개를 내 밀어 본다.
전체의 기념촬영이 끝나자 남녀와 친소관계에 따라 여기저기 그룹지어 사진찍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여 멀리에 서서 구경한다.
사진을 찍고 나니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았는데도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아쉬운 맘으로 서로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며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고 서울 팀은 귀경버스에 오른다. 가는 길에 운일암반일암과 용담댐을 구경하고 가기로 하고 버스가 출발한다.
읍내 네거리를 관통한 버스는 마침 내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이 달리고 걸었던 그 길, 옛날에 다녔던 등굣길을 지나간다. 지금은 새 길이 만들어져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지만 고개 넘고 물 건너 희뿌연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돌아 돌아 찌는 삼복더위에도, 살을 에어갈 듯 엄동설한 맹추위에도, 목매어 죽은 원혼이 머리 풀고 서 있는 등골이 오싹 식은땀 나는 무덤을 지나서 다니던 나의 등굣길 그 길을 지금 지나간다.
내가 다닌 등굣길을 지난 버스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이리저리 돌고 돌아 계곡으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와~ 하는 탄성으로 차내가 소란하다. 운일암반일암이다. 창밖을 보니 시꺼멓게 커다란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맑은 물과 붉은 몸에 짙푸른 옷을 입은 소나무가 일품이다. 오늘이 토요일 쉬는 날 이어서일까 많은 자동차와 천막이 함께 어우러져 계곡을 꽉 메웠다.
문명의 이기, 자동차 문화가 거리개념도 없앴다. 아무리 멀리 있는 곳이라도 좋다고 소문나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라도 금세 갈 수 있는 세상이니..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호사를 누리는 사이 버스는 운장산 고개를 향해 달린다. 용담댐 구경은 졸지에 포기하고 고개 넘어 대아저수지를 지나 호남고속도로로 간단다. 젊은 날 등산에 미쳐 전국 곳곳의 산을 누빌 때 이곳 운장산도 올랐다. 사방이 온통 무성한 산죽으로 인해 앞을 헤쳐 나가기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꾸불꾸불 비탈진 고개를 넘자 하니 버스도 숨이 차서 쉬어 가잔다. 운장산 휴게소다.
말이 휴게소이지 아무것도 없고 허름한 간이화장실 하나만 덩그렇게 서 있는 넓다란 공터다. 이때다 싶어 숲속 깊이 들어가 옛날에 진 빚을 거름 공양으로 답하고 돌아오니 그사이 총무님께서 수박 잔치를 벌였다. 속이 빨간 달고 시원한 수박을 실컷 먹고 운장산 고갯길을 넘어간다.
고개를 넘어서니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다. 고개에서 시작한 계곡은 대아저수지까지 이어지는데 흐르는 물과 계곡의 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운일암반일암 못지않은 것 같다. 이 좋은 피서지를 놓칠세라 곳곳이 인파로 넘친다. 달리는 주위 경관이 너무 좋아서 용담댐 구경을 포기하고 이 길을 선택한 기사님의 지혜가 신통하여 물으니 기사님도 처음 오는 길이란다.
대아저수지 길을 달려온 버스는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양촌 인터체인지를 통해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선다. 호남에서 다시 경부고속도로 바꿔 탄 버스가 한참을 달리다가 남청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어느 음식점 앞에 멈춘다. 허기진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식당이 넓고 큰 것에 휘둥글 눈을 돌리고 네 사람씩 자리에 앉자 갈비탕 대령이다. 참 맛있다 고기도 많이 들었고 국물의 감칠맛이 끝내준다. 입 짧은 나도 금세 한 그릇 뚝딱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맛집을 알아 두는 것은 이런 일을 하시는 기사님의 영업 비밀에 관한 사항일 것이다.
식사도 든든히 했겠다 버스가 다시 서울 강변역을 향하여 마지막 스피치를 올린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검은 도로면에 물에 잠겨 있어 매우 위험해 보이는 데도 기사님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 운전에 집중한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고 차안은 조용하다. 밀려오는 여독에 잠이 들었는지 코고는 소리도 들린다.
생각해 보면 살아 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렵고 힘들었던 코흘리개 초교 시절엔 산과 들, 맑은 물의 소중함은 고사하고 지겹도록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가난과 주림을 벗어나고 싶어서..
오지 중의 오지 진안 내 고향! 그곳은 늘 가슴 뛰는 영원한 나의 노스탤지어.
옛일을 떠올려도 이제는 아련할 뿐 뚜렷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먼 태고적 일만 같다. 등굣길이 멀어 어떻게 학교에 다녔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체험한 일이지만 신기하다.
그때는 그 신기한 일이 일상이 되어 있어서 힘들어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소박한 웃음 짓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버겁고 힘든 세상을 꿋꿋이 살아 온 깨복쟁이 친구 동창생들도 세월 앞엔 장사 없다고 해 묵은 서리를 이고 살아야 하는 백발노인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지 오래다. 조급한 자들은 벌써 불귀의 먼 길을 떠났다. 그 길은 우리도 가야 할 길인데..
주마등처럼 생각이 스치는데 “다 왔습니다” 한다. 정확히 아침에 출발한 강변역 1번 출구 그 자리다. 밖에는 바람과 함께 비가 세차게 내린다. 작별의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각자 전철역을 향하여 빗속을 뛴다. 끝.
2022. 7. 23. -이××-
첫댓글 고향 방문기 잘 읽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자주 방문
함께 하여 주시길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친구들과 소중한 시간 만드셨네요.
자주 그런기회 만드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