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강택민이 최초로 북한 방문뒤 ,장덕강을 연변에 파견한 이유는 북한당국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대량의 북한난민들이 월경하여 귀국하지 않는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고,연변경제발전의 진일보 촉진에 의해, 날로 향상되는 당지 인민의 생활수평을 산교재로,강을 사이둔 맞은켠의 북한당국자들에게 양호한 시범을 보여 주려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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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은 1981년에 대학직함평정을 회복뒤,장덕강은 3년간의 공년병학원 학력(문화대혁명시기 대학 학력을 말함)의 기초상에서 또 2년간의 북한 유학경력 때문에 정규대학학제 아래의 본과졸업학력에 뒤지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후,영도직무를 담임하였지만,여전히 연변대학의 공공과목인 “맑스-레닌주의 교학연구실”과목을 담당하고 있었음으로,강사로 직함이 평의되였다.
(당시 3년간의 “공농병학원”학력자들이 학교에 남아 교사에 종사할 경우 기껏해야 조교로 직함이 평의될뿐이다.장덕강은 강사로 평의되였고,연변대학 상당위원회 상무위원,부교장 등 영도직무를 담임하였다.)
1982년 8월,장덕강은 북경중앙교육행정학원에서 개최한 제1기 전국고등학원 행정영도훈련반에 참가 하였고,1983년 1월 수료후, 연변대학으로 돌아왔으나,연길시 당위 책임자로 전근되였다.
1983년3월 중순,장덕강은 이미 조남기를 교체하여. 중공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서기를 담임하고 있는 이덕수의 추천하에,연변주 정부 소재지인 연길시 당위 부서기로 배치되였고,3월하순,장덕강은 중공 길림성 제4차당대표대회 출석하였고,회의에서 길림성 성위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년뒤, 장덕강은 또 연변주 당위 상무위원겸 연길시 부서기로 발탁되였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연길시당위서기만이 주당위 상무위원으로 될 자격이 있음으로,이덕수가 장덕강에 대해 특수한 배치를 하였다는것을 볼수 있다.
1985년 4월.이덕수는 장덕강을 또 자신의 조수로 연변주 당위 부서기로 제발시켰고,한달후 이덕수는 길림성 성위상무위원으로 승임하였다
이덕수는1985년 9월 에 열린 중국공산당전국대표대회에서 제12기중앙후보위원으로 보충선거되였으나 구체적인 직무는 1988년에 이르러서야 교체되였지만, 이덕수가 친히 제발시킨 장덕강은 1986년에 중앙고층의 마음에 들어 연변주 당위 부서기(부 청급간부)로 부터 곧바로 국무원 민정부 부부장겸 당위 부서기로 월급하여 제발되였다.
(국무원민정부는 1978년 제5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 1차회의에서 비준을 받고 설립된것으로
優撫(우대하고 위문하는것),사회구제과 복리사업,혼인등기와 출관과 매장개혁,퇴대군인 안치를 주관하는외 국가적십자총회를 대리 관리하고 대외원조사항를 책임진다)
장덕강이 국무원민정부 부부장겸 당위부서로 배치될때,부 부장들중 양탐과 장명(두명 모두 여성)은 동시에 파면되였고,추은통(邹恩同)만이 남아있어,장덕강이 민정부 제1 부부장으로 되였음을 의미한다.당시 민종부 부장은 최내부(崔乃夫)였다.
당시 40살도 되지 않은 장덕경이 윌급하여 국무원민정부 부부장으로로 제발된것은 이덕수가 추천한 결과로 근본적으로 볼수 없다(이덕수의 급별제한)
당시 중공중앙총서기 호요방의 1984년,1985년 두차레의 북한방문과정중,장덕강이 모두 호요방을 수행하면서 호요방의 호감을 얻었는데---장덕강이 호요방에게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업을 회보할때, 언급한 “어떻게 하면 길림성연변지구로 월경하여 돌아가지 않는 북한인들의 문제를 심중하게 해결할것인가”는 호요방으로 하여감 매우 만족스럽게 하였다.
외국적경제난민들이 월경하여 귀국하지 않는것과 같은 문제들은 바로 민정부에서 관할하였다.민정부는 후에 탈박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국제합작사(合作司)를 증설하였다.
당시 중국이 북한에 대한 여러가지 경제원조활동의 진행은 모택동시대처럼 중공중앙대외연락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것이 아니라,당정분리의 원칙에 따라 국무원 민정부 혹은 민정부에 귀속된 국가 적십자회에서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호요방은 맨처음으로 장덕강을 민정부로 민정부로 승진시킬 구상을 가지게 되였다.
장덕강이 민정부로 부터 다시 연변으로 파견된것은 장덕강이 강택민을 수행하여 북한을 방문한 후였다.
1990년 3월 14일 부터 3월16일,강택민은 새로 당선된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북한을 정식으로 우호적으로 방문하였다.
1990년 10월 강태민은 장덕강을 길림성 성위 부서기 겸 연변주위 서기로 . 배치하다.
북경을 떠나기 전 장덕강은 중남해에서 강택민을 알현할때,강택민은 장덕강에서 “연변을 전국소수민족지구의 모범자치주"로 건설할것을 희망했다.
중공정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집거지구에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위글족,장족자치구처럼 날로 엄중해 지는 민족분열우환은 존재하지 않으나,김일성과 김정일부자의 독재통치에 참을수 없어 북한인들이 대량적으로 월경하여 장기적으로 귀국하지 않는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의 개혁개방정책이후,중국과 북한의 경제발전속도와 인민생활수평의 격차가 날로 현저한 차가 남에 따라,북한인들이 중국경내의 연변조선족자치주생활에 대한 동경은 결코 중국대륙의 복건인들이 미국의 부유생활에 대한 동경과 뒤지지 않았다.
때문에 당년에 강택민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후,장덕강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파견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영도역량을 강화한 이유는한방면으로는 가능한 북한당국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대량의 북한인들이 월경하여 귀국하지 않는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고,한방면으로 연변경제발전의 진일보 촉진에 의해, 날로 향상되는 당지 인민의 생활수평을 산교재로,강을 사이둔 맞은켠의 북한당국자들에게 양호한 시범을 보여 주려는 것이였다.
중앙은 장덕강의 연변조동령을 발표함과 동시에 중공중앙은 김림성 부성장을 담임하고 있던 이덕수를 국무원으로 조동 시키고,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장덕강이 길림성 연변으로 조동된 3개월후,강택민은 곧 길림성 시찰로 나갔고,연변을 이번 순시의 중요한 고리로 삼았다.
다음은 관방언론매체들은 곧 명령을 받고 장덕강을 선전하기 시작하였는데,1991년 4월2일 “인민일보”는 신화사 기자의 탐방기사인 ”마음에 언제나 로백성을 담고 있는 장덕강”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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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강은 한반도 통:
공년병학원신분으로 1972년5월 부터 1975년1월간 간 연변대학 조선어계에서 학습하였고, 1978년 8월 부터 1980년 8월까지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계에서 학습하였고,유학생 당지부서기를 담임하였다.
장덕강의 정계진출 경력
장덕강은 선후하여 민정부 부부장,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김림성 성위 서기,절강성 성위 서기.광동성 성위서기 및 중공 중앙 정치국위원을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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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领导中国的新人物》(32):九十年代初张德江就受江泽民青睐
出版社:明鏡/香港 出版日期: 2003年1月28日
高新《领导中国的新人物》/当年江泽民首次访问朝鲜之后,之所以派张德江回到延边朝鲜族自治州,一方面希望他能在尽量不开罪朝鲜党的前提下妥善处理大量朝鲜人入境不归的问题,另一方面希望他通过进一步发展经济,用人民生活水平日益提高的活教材,为对岸的朝鲜当权者起到良好示范
中国大陆于一九八一年恢复大学职称评定后,张德江因为在“工农兵学员”三年学历基础上又有两年朝鲜留学的经历,已经不亚于正规大学学制下的本科毕业学历。回校后虽然担任领导职务,但仍在该校的公共课教研室马列主义教研室开课,故职称评为讲师。当时,如果只有三年“工农兵学员”学历后被留校任教者,只能被评为助教职称。
一九八二年八月,张德江到北京中央教育行政学院参加了该院举办的首期全国高等院校行政领导培训班,于一九八三年一月结业后回到延边大学,两个月后即被调离该校。
一九八三年三月中旬,张德江在已经接替赵南起出任了中共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州委书记的李德洙的推荐下,被安排为州府所在地的延吉市市委副书记。三月下旬,张德江出席了中共吉林省第四次党代会,在会上当选吉林省委候补委员。一年后张德江又被提升为州委常委兼延吉市委副书记。
正常情况下,只有延吉市的市委一把手才有资格被安排为州委常委,可见李德洙当时对张德江作了确实是比较特殊的安排。
一九八五年四月,李德洙又提拔张德江进入延边州担任自己的副手,一个月后,李德洙即升任吉林省委常委。
李德洙升任吉林省委常委后,又在一九八五年九月召开的中共全国代表会议上被增补为十二届中央候补委员,但具体职务却被延续到一九八八年才得到更替。而李德洙一手提拔起来的张德江却在一九八六年即被中共高层看中,在延边州委副书记(副厅局级)任上上被越级提拔为国务院民政部副部长兼党组副书记。
国务院民政部是一九七八年被第五届全国人大第一次会议批准设立的,主管优抚、社会救济和福利事业、行政区划、婚姻登记和殡葬改革、军队复员退伍安置,以及生产救灾等工作,同时也代管国家红十字总会,负责对外援助事项。
张德江被安排进这个部门时,部长是崔乃夫,张德江入局的同时,原副部长杨琛和章明(均为女性)同时被免职,只剩一个邹恩同。而张德江被排为部党组副书记,意味着他是第一副部长。
毫无疑问,当时还不满四十岁的张德江被越级提拔进入国务院民政部,不会是李德洙举荐的结果。有吉林省的干部认为,当时的中共中央总书记胡耀邦于一九八四、一九八五年两次对朝鲜访问的过程中,张德江都有陪同。
而在向总书记汇报延边朝鲜族自治州的工作时,张德江谈到的如何慎重处理朝鲜人向吉林省延边地区入境不归的问题时,令胡耀邦很是满意。
而处理外籍经济难民入境不归之类的问题,就是归民政部管辖(民政部后来曾为此专门增设了国际合作司),而当时对朝鲜进行的各种形式的经济援助活动,已经不再象毛泽东时代那样,归中共中央对外联络部具体操作),而是在党政分工的前提下,由国务院民政部或者归民政部管辖的中国红十字会出面。于是,首先是在胡耀邦那里有了调升张德江进入民政部工作的设想。
到底是不是胡耀邦先发现了张德江,笔者暂没有进行进一步的考证,但张德江日后被从民政部重新派回吉林省工作,以利进一步陪同,则肯定是在张德江陪同江泽民访问朝鲜之后的事情。
一九九零年三月十四日至三月十六日,江泽民以新任中国党总书记身份对朝鲜进行首次正式友好访问。
一九九零年十月,江泽民即安排张德江回到吉林省担任省委副书记兼延边州委书记。
离开北京前,张德江在中南海勤政殿觐见江泽民,江泽民希望他能够把延边建成全国少数民族地区的“模范自治州”。
在中共政权治下的所有少数民族集中居住地区,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虽不象一些维吾尔族、藏族自治区域那样,存在越来越严重的民族分裂忧患,但却长期存在着不堪忍受金日成和金正日父子独裁统治的朝鲜人大量入境,乐不思归的问题。
中国大陆实行改革开放政策后,随着中国与朝鲜经济发展速度和人民生活水平差距的日益拉大以至悬殊,朝鲜人对中国境内的延边朝鲜族自治州生活的向往,绝不亚于中国大陆的福建人对美国富裕生活的向往。
所以,当年江泽民在首次访问朝鲜之后,之所以要派张德江回到延边朝鲜族自治州加强对那里的领导力量,一方面要希望他能够在尽量不开罪朝鲜党的前提下妥善处理大量朝鲜人入境不归的问题,另一方面也要希望他能够通过进一步促进当地的经济发展,用当年人民生活水平日益提高的活教材,为隔江对岸的朝鲜当权者起到良好的示范作用。
在宣布将张德江调回吉林的同时,中共中央亦宣布将已经担任吉林省副省长的李德洙调赴国务院,任国家民族事务委员会副主任。
张德江回到吉林延边的第三个月,江泽民即前往吉林考察,并把延边作为此次出巡的重要一站。
接下来,官方媒体即奉命开始宣传张德江,一九九一年四月二日,《人民日报》刊登新华社记者采写的文章《心里时刻装着老百姓──专访张德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