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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이어 받았을 때, 영국의 왕 헨리 8세(Henry VIII)는 남편보다는 아버지라는 자격에 대해 나은 점이 없었다. 왕의 각자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은 그의 압도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소 상처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이 낳은 큰 딸인 메리(Mary)는 이에 의해 완전히 지쳐 떨어졌다. 30년 이상을 슬픈 공주는 번갈아서 사랑에 홀딱 빠지는 것을 견디며,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고, 그의 아버지가 마침내 죽고 그녀를 홀로 남겨 놓음에 의해 비참한 무관심으로 간주되었다.
1516년 메리 튜더의 탄생은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약간의 희열로 환영되었다. 이는 대단히 바람직한 남자 아이들의 최후의 탄생을 위한 길조라기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 딸이 태어났다면, 신의 영광으로 다음 번엔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실망하긴 했지만 희망에 가득 찬 군주는 메리가 태어난 후에 곧 언급했다. 작은 공주는 왕권의 모든 부속품 중의 한복판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관습대로 그녀의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았을 때, 헨리는 종종 그의 딸의 두드러지는 음악적인 재능과 명백한 지적 능력에 기쁨을 보였다. 비록 그가 그녀를 '최고의 진주'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는 어떤 풍부한 사랑과 많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소 이는 메리가 유럽의 결혼 시장에서 가치 있는 필수품이었다는 그의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가 12세가 되기 전, 사실 그녀는 프랑스의 왕세자와 그의 남동생이자 그녀의 합스부르크 가 출신의 사촌인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Karl V)와 각각 약혼이 된 바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가치에 대해 진가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결국 외동딸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여자 아이였다. 튜더 왕조(House of Tudor)를 남자 아이를 통해 안정적으로 다질 것을 결심한 국왕에게 있어서, 이는 간단히 받아 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헨리가 그의 신념, 즉 캐더린과의 결혼은 시작부터 무효였다는 것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채 12세가 되지 않았다. 공주는 그녀의 부모의 결혼이 그녀 앞에 해결 짓는 것을 보면서 무시무시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격노한 왕에게 왕의 진정하고도 합법적인 부인이라는 캐더린 왕후의 고집스런 주장과 함께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것을 보도록 강요당했고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버리도록 노력하는 갖가지 다른 방법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지위를 낮추게 하였다. 그의 가장 잔인한 무기들 중의 하나는 메리의 왕실 식솔을 차단함으로써 캐서린을 따돌리고자 했고, 그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딸을 아주 짧은 순간에만 만나도록 허락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헨리가 여전히 자주 메리를 약간의 애정을 가지고 본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가 캐서린과 분열하여 그들의 결혼이 무효화 되고 자동적으로 그녀를 사생아로 만든다는 사실을 위장하지는 못했다.
국왕이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뜻에 반기를 들고 전 왕후 캐서린의 시녀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했을 때 메리는 역사상 가장 사악한 계모를 맞이했다. 덧붙이자면, 점차적으로 멀어지고 적대적으로 변하는 아버지와 함께 말이다. 새 왕후는 메리가 위협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어떤 아이들보다 그녀가 국왕과 함께 왕권을 가질 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소녀를 가장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다. 앤은 왕실의 사람들이 그녀의 대관식에 메리를 향해 애정 어린 환호를 보냈을 때 격노하게 되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셔서 축복해 주시는 것 같군."
앤은 통렬한 불평을 했다. 그녀는 훗날 메리를 굴종적인 시녀들 중의 하나로 만들기 위해 위협을 가했고, 그 후에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기회를 사용했다.
"그녀에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많은 양의 저녁 식사를 주어라(이는 독약을 말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혹은 "시종과 결혼하도록 해라" 라고 했다.
추방당한 캐서린은 앤의 위협에 대한 소식을 듣고 새 왕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메리에게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내 딸아.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내가 지각했던(이것이 사실로 된다면) 이러한 기별을 오늘 듣고 하느님께서 너를 위해 예비하신 날이 아주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구나.
직접 그녀의 전 남편이 얼마나 잔인하게 보였었는지 또한 그의 새 부인은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캐서린은 헨리가 앤이 메리의 죽음을 원할 지도 모른다는 어떠한 요구에 대해서도 묵인하고자 한다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딸이 그녀로부터 이전에 받았을 지도 모르는 마지막 편지가 될 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캐서린은 있음 직한 살인에 직면하여 용기를 불어넣었고 어머니다운 사랑을 쏟아 넣어 결론을 지었다.
나는 얼마나 선량한 마음으로 네가 알고 있는지 하느님께 직접 알려 드리고 싶구나, 좋은 나의 딸아, 나는 이 편지를 네게 쓴다. 나는 이 이상의 편지를 결코 다시는 쓰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 메리는 미래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이자 자신의 이복 여동생이 탄생에서 살아 남았지만 그녀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계승의 법령은 1534년 의회에 의해 앤 볼린의 아이들에게 왕권의 권리가 넘어간다는 것을 통과했다. 전적으로 메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당시 그녀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었지만 공식적인 사생아였다. 법령이 통과되기 직전에 그것이 예견될 즈음에서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식솔로 들어갈 것을 명령받았고 그녀를 하녀로 행동하게 했다. 왕으로부터의 위임은, "레이디 메리, 국왕의 딸" 로 불려지게 했고, 호칭이 삭제되는 것에 대해 용감한 반응을 취하게끔 자극했다.
저는 조금도 놀랍지 않습니다.
편지에서 메리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틀림없이 폐하의 영광이 진정한 결혼 생활을 한 합법적인 딸을 위해 저와 함께 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서명했다.
당신의 가장 비천한 딸인 메리 공주가 올림.
젊은 여인은 그 당시 거의 18세였고, 그녀의 어머니의 상황과 그녀의 용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비록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요구할 지도 모르는 어떠한 것에서 복종적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해도 그녀는 승인에 의한 그녀의 권리의 양심이나 타협을 결코 배신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합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다. 헨리는 반면에, 캐더린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딸의 도전에 대해 화가 났다. 그리고 그의 의지에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 그녀가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메리의 삶을 미천하게 만들기 위한 비상한 노력을 했고 그녀의 삭감된 지위를 받아 들였다.
결국 그녀가 성장하는 것을 돌본 사람들은 멀리 보내졌고,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식솔의 가장 작은 방들 중의 하나가 주어졌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공주가 있었고, 그녀는 앤 볼린의 딸이었다. 아기가 벨벳으로 된 가마에서 이동할 때마다, 메리는 진흙에서 그녀 옆에 걸어다닐 것을 강요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메리가 낮은 서열의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예우의 의자가 주어졌다. 이를 조금이라도 측은히 여기는 어떤 하인들도 멀리 보내졌다. 진정한 공주로서 그녀의 가식을 고무하는 이러한 혐의는 탑 안에 갇혀 멀리 보내졌다. 그리고 아마도 이는 최악의 일이지만, 앤 볼린의 친척 아주머니는 메리에게 죄를 뒤집어쓰게 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무엇이든 그녀를 괴롭히기 위한 감찰이 주어졌다.
메리는 항상 부정하거나 묵인하는 것에 의해 그들이 헨리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타협하는 것을 막게 하기 위해 그녀의 권리를 단언하는 것에 대한 조언을 항상 받아 왔기 때문에, 그녀가 간단히 "레이디 메리" 로 불리거나 혹은 엘리자베스가 공주로 불리는 것을 매번 반대해야 했다. 불변의 처벌은 그녀에게 오고야 말았다. 우선 그녀의 보석과 좋은 옷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에게 속해 있는 거의 모든 것들도 제거되고야 말았다. 그녀가 그녀의 빈곤에 대해 그에게 의논의 전갈을 보냈을 때, 메리는 전언자에게 제공하는 어떠한 돈이나 의복은 받아들이되, 그녀를 공주라는 직함을 붙이지 않은 편지는 받아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헨리 8세는 종종 식솔을 방문했지만, 이는 항상 엘리자베스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메리는 그가 올 때마다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멀리 가 있었다. 한 가지 경우를 보자면 그렇긴 하지만, 왕은 자신의 큰 딸에게 작은 감동의 경험을 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왕에게 그를 보고 그의 손에 키스할 것을 간청하는 말을 전했었다. 그녀는 거절당했지만, 그가 떠날 때 지붕의 테라스로 급히 갔다. 헨리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고, 그녀를 알아챘다. 그녀는 애원하듯 양 손을 깍지를 낀 채 무릎을 끓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모자에 손을 올렸고, 말을 타고 가 버렸다. 이러한 간단하지만 애타게 하는 행동은 오랜 시간 동안 메리에게 끝까지 남아 있게 했다. 공포의 작전 행동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헨리 왕은 계승의 법령을 아직 추상같은 강제성을 보여주지 않은 채 시행하는 것을 시작했다. 이 법령은 아라곤의 캐더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천명하는 것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딸이 사생아이고, 이는 또한 명백하게 영국 국왕의 권한으로 거부되었다. 그 당시 맹세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반역자의 끔찍한 죽음의 주체였다. 장부에 기입한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다. 신부들과 수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종교적인 복장을 한 채 교수형에 처해졌고, 왕의 절친한 친구와 비서 토마스 모어가 왕의 머리 노릇을 하는 동안 부패한 타워 브리지 꼭대기에 앉았다.
메리의 법령 승인의 끈질긴 거부는 그 당시 그녀의 삶을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했다. 헨리는 자신의 딸을 죽일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해,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음모에 가담해 자신의 의지를 방해하고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했다. 메리가 아주 심하게 아팠을 때, 왕은 처음으로 의사가 그녀를 치료하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했고, 그녀가 회복할 동안 메리와 함께 있게 해 달라는 캐서린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의 가장 최고의 진주는 지금은 그의 가장 최악의 적이었다.
메리가 그녀의 미심쩍은 질병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으면서, 앤 볼린의 독살의 위협의 생각은 좀 더 직면하는 사실이 되었다. 왕후는 점차 그녀 자신의 분투하는 권력을 잃고 있었고, 극적으로 선언하는 왕과 새로운 질서에 맞서 분란을 일으킨다고 고발했다.
"내가 먼저 그녀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녀는 내 죽음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녀에게 직면한 모든 원한과 횡포함에서, 메리는 영국을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녀는 에스파냐 대사에게 급히 전갈을 보냈다.
이 문제(그녀의 탈출)에 대해 생각해서 가장 위급하게 그에게 간청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단지 그녀를 죽일 것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잃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당시 에스파냐의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는 동안 메리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마침내 비탄과 질병으로 1536년에 목숨을 다 했다. 캐서린은 딸에게 황금으로 만든 로사리오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녀는 5년 이상이나 그것을 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헨리는 그것을 압수했다. 앤 왕후는 또한 값 나가는 캐서린의 소유물들을 샅샅이 빼앗아 가서, 메리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곧 이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앤 볼린 그녀 자신은 죽었고, 날조된 간통의 혐의로 목이 잘렸다.
메리의 운은 이제 약간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헨리의 새 아내인 제인 시머는 딸과 화해를 시키기 위해 왕을 고무시켰고 그녀를 궁중으로 데려 왔다. 그러는 사이 메리는 자기 아버지에게 겸손과 복종의 사랑의 편지를 썼다. 왕의 고문관인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은 그녀가 목숨을 구하고 다소의 부탁으로 그녀를 회복하게 하기 위한 바램을 갖고 단어들을 구술했다.
비천하고 천한 방식으로 가능한 한 그녀의 아버지와 군주를 이용하기 위한 것.
한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고, 메리는 그 동안의 모든 자신의 과오와 무례함을 인식해, 용서를 구하고 그녀 자신이 '그 어떠한 살아 있는 창조물보다 불쌍한' 것이 되고자 공언해, 그에게 도전하고자 했다. 그녀는 그녀의 연약한 성에 대해 그의 '부성애다운 자비심' 을 부탁해 기록하기를 '저는 여자가 아닌, 당신의 아이입니다' 라고 했다. 또 다른 편지는 장래의 일을 계획해 '가장 비천하게 당신의 고귀한 발 앞에 엎드려, 당신의 가장 복종적인 백성과 천한 아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
편지와 같이, 메리는 뚜렷하게 승인된 계승의 법령없이 가능한 한 낮은 자세로 복종할 수 있었다. 이는 멀리 있지 않았다. 왕은 그의 비서들을 보내서, 주장하기를 그녀는 공공연한 수용에 의해 복종의 자격에 대해 부연한다고 했다. 그녀는 사생아였고 교황은 이제 영국에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했다. 응답이 돌아오기를, 메리는 그녀가 이미 복종의 굴욕적인 편지를 썼을 때 그가 구술하면서 이미 크롬웰에게 말했던 것을 그들에게 반복했다. 이는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기쁘지 못하게 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했지만, 법령을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양심은 거기에다 또 허락하기 위해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과 관련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헨리는 메리가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거절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경멸적으로 제인 시머의 자비에의 간청을 무시한 그는 딸이 반역 죄를 꾀하고 있다고 명했다. 이 때에 그는 정말 그녀를 축출하려고 결심했다. 이는 단지 왕의 딸을 심문하기 위한 판단의 거리낌으로 이는 그녀의 삶을 용서했다. 술책이 지연됨에 따라, 궁중에서는 그녀가 서명할 공식적으로 그녀가 법령을 수용할 문서인 종이를 줄 것을 건의했다.
믿을 만한 조언자들은 메리에게 경고하기를 이는 그녀의 목숨을 구할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서명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는 확실히 방해물이 될것이고, 미래에는 그녀를 고무시킬 것이다. 그들은 그녀에게 좀 더 위대한 선은 이해 관계에 있었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미래에도 가톨릭 교회의 믿음 하에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논쟁을 펼쳤다. 그녀는 누구든지 죽게 하기 위해 선이 없게 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상적인 간청으로, 메리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녀가 문서에 서명한다 할 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읽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또한 문서에 맞서기 위한 비밀 항변서를 썼다. 이는 그녀가 단지 협박 하에 서명을 했다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쉽지 않은 휴전이 나타났다. 비록 그녀가 호의의 조치로 재위치를 찾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메리는 상당한 신분의 결혼이나 계승권을 가진 위치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공식적인 사생아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희망 없는 존재를 유감으로 여겼다.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탄식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불행한 레이디로, 단지 레이디 메리로 살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헨리 8세가 1547년에 서거하자, 그녀는 마침내 아버지의 학정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그의 유지에서 왕좌의 후계자로서 위치를 다시 찾았다. 여전히 그녀는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Edward VI)의 6년 간의 치세 동안에 또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신념은 불변의 급습과 왕좌에서 그녀의 사촌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자리에 앉히기 위한 미숙한 시도 하에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메리 1세(Mary I)로서 1553년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 이단자들에 맞서서 선동에 착수한 그녀는 영원한 블러디 메리(Bloody Mary)의 낙인이 찍히고자 했다.
출처 : [기타] 이야기 영국사-청아출판사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