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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4월 7일
제목: 십자가의 죽으심과 지금의 우리
성경: 히 9장 23-28절
우리가 지금 사순절을 맞이하여 21일 작정저녁기도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순절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늘 고난을 통해 나타난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은 2000년 전에 돌아가신 그 분에 매여 있어서 샌들을 신고 누더기 옷을 입고 희생제물로의 삶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집중해야겠지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부활 후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교회 머리되시며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 그 분을 우리가 기억하며 그 분을 섬기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권세를 누리게 되었느냐하는 원인은 분명히 알아야 되고 또한 보혈의 은혜가 지금도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설교가 이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은 그 의미를 알면 굉장한 은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드렸던 속죄제사의 실체로서, 단번에 자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장이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자신을 드린 것을 강조해서 비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약에서 나타난 제사법은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막을 보더라도 오실 예수님을 위한 모형임을 입구 출입문부터 시작해서 번제단을 거처 물두멍에서 성소까지 와서 그 성소에 놓여 있는 떡상, 분향단, 황금촛대의 의미와 휘장을 거처 지성소에 이르는 것까지 철저하게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형적인 부분이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법이 실체가 아닌 모형이라는 강력한 증거는 그 제사가 해마다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27절에서 ‘한 번에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라는 말씀이 갑자가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죽음을 맞이하도록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범죄 해서 그 죄 값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 값은 여러분 치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 값을 치러야한다면 한번 밖에 치룰 수 없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죽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 값을 받는다면 한 번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루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단 한 번에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결국 구약의 제사가 반복적 이였다는 것은 그 제사가 죽음을 대신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가지고 들어가는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제사를 모형과 상징으로 나타낼 뿐이었지, 실제로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죄를 전가시키는데 그친 것입니다. 죄는 계속 반복해서 짓게 되고 그 죄 값은 죽음인데, 여러분 죽을 수 없으니까 죄만 전가 시켜서 대신 짐승으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상징과 모형은 끝나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어시고 산제사의 제물이 되셔서 한 번에 제사로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것이 실체와 모형의 차입니다. 문제는 히브리서에서는 그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죽음이라는 것은 끝나는 것입니다. 죽음 다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28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얘기함으로서 예수님이 구약제사의 실체요 구약제사가 모형이요 상징인 것을 예수님께서 단 한 번에 이루셨으며 동시에 그 이루신 제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자가 이제부터 새로운 길, 생명과 거룩한 길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없었다면 죄용서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십자가야말로 우리가 꼭 누리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가 소유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보충해서 설명한다면 죄 씻음만 강조하고 죄 씻음에만 머물러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을 소유하고 살아가야할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 생활에서 벗어나서 죄 씻음으로 인해 새로운 신분으로 변화된 상태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시작을 잘 알아야 그 과정과 목적적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합니다. 히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의 죄를 끊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사망에서 건졌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합니까? 영원한 나라, 새로운 사람이 가야할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결국 이것이 어디로 연결되냐 하면 히9:27-28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난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초림 사역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초림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초림은 재림을 준비하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 때 하신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모두 결벽증에 걸러있는 환자들과 같습니다. 죄를 씻는 일 밖에 안합니다. 물론 죄 씻음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 씻음을 통해 정결함을 받고 예배를 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나가기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죄 씻음을 받아야합니다. 회개는 거룩으로 가는 첫 관문이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일만 한 단 말입니다. 이것이 죄냐 아니냐하는 기준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답답한 문제입니다. ‘회개했다’가 신앙생활 잘 한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회개했다가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지요. 새롭게 태어났으면 커야합니다. 가야하고, 살아야 되고,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잘하느냐하면 십자가까지 오는 데는 잘 합니다. 그러니까 맨 날 죄냐 아니냐만 따지고 그 이상을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밝히 보는 것같이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바는 신앙 안에서 자라나고 신앙으로 사는 책임입니다. 분명히 부름 받은 자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학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학생이 책을 깨끗이 쓰고 연필이나 노트를 아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공부를 잘 해야지요. 교복 깨끗하게 입고 아우에게 물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옷을 입고 튼튼하게 커야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죄를 졌느냐 안 졌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인격과 존재가 크고 넓어지고 철이 들고 지혜로워지고 커가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는 매년 사순절에 맞추어 특별기도회를 합니다마는, 이런 것이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혈을 의지해서 이 번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작년에 비해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참 열매를 맺어가며, 성장의 길로 걸어왔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절기가 되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분의 변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태어난 것으로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수준의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다음 십자가에서 새롭게 출발할 인생은 바로 수준의 변화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느냐를 십자가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셔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감각을 가지고 주님이 열어놓은 길을 가면서 맺는 열매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분께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 부분에 대해 요한복음15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꽃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런 질문 하나 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해당되는데 손 한 번들어보세요. 우리는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대표 기도할 때 의인이라고 기도하는 사람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늘 죄인의 모습을 하고 주일을 지킵니다. 그런데 구원파라든지, 믿음지상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엄청나게 강조합니다. 이들은 신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회개할 필요 없다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수준을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늘 죄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신분변화는 찰나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준변화는 노력해야합니다. 가르침을 받고 깨우치고 깨우친 것을 연습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하는 문제입니다. 엡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니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얻었지만 이것이 신분의 차원이 아니라 수준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새 사람이니까 새 사람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새사람을 입어라는 것은 우리가 신분적으로 변화된 새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새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으니까 새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문제입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각오하고 가야할 길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이 되신 하지 않습니다. 큰 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해야 하는 것이지 성령님께 한 번에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속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서쪽으로 가라’ 그러면 리모컨 움직이듯이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항복하고 그리로 가야합니다. 내 주권입니다. 그 명령을 내가 따르고 내가 움직여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항복하고 내가 결단하고 가는 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답게 되기를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 다우라’는 것입니다. 엡4:20-21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 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배우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내가 나를 고치고 그 명령을 따라 사는 주권 행사를 해야 됩니다. 오직 내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어서 그렇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 문제는 먹는 것으로, 그 결과로 어떻게 사느냐하는 싸움입니다.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초콜렛 먹었어요, 나 사탕 먹었어요’만 하고 있습니다. 이빨만 썩지요. 무엇을 먹어서 지각을 사용하여 분별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먹은 만큼 힘을 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신앙적으로 힘을 내지 못하고 늘 지쳐 있다면 혹시 내가 말씀을 먹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영적 양식을 먹는 일에 소홀히 하면 세상에서 지배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양식을 풍부히 섭취하는 분은 세상에서 영적인 싸움을 할 수 있는 자로 세워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 적 있습니다. 목사의 어려운 점 중에 하나이기도합니다. 왜 자꾸 부정적인 설교를 하느냐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을 선호하느냐하면 적당히 아이들 비위나 맞추어주고 첫사랑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그런 이야기나 해주고 가르치는 것보다 아이들과 적당히 인생사에 대해서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하는 선생을 선호하지, 엄하게 가르치고 숙제를 많이 내어주고 쪽지 시험도 수시로 치고 매를 들고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를 위해서는 엄한 선생이 사실 감사한 것이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제 자랑 같지만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좀 엄하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편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연단 받고 훈련해야합니다. 살을 베이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운동선수들도 기업인들도 이 땅에서 목적을 이루는데도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십니까? 어제 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캄보디아에서 시집을 온 스롱 피아비는 가난 때문에 돈이 없어서 중1을 마지고 중퇴를 하고 감자밭에서 김을 맸습니다. 스무 살이 되자 국제결혼 제안을 받고 28나이차가 나는 신량과 결혼을 해서 한국에 옵니다. 그를 ‘캄보디아 택’이라고 불렀습니다. 결혼 이듬해 남편을 따라 당구장에 간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어 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잡은 큐를 잡았는데 재능이 폭발한 것입니다. 여자 당구 3쿠션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고 2017년 프로가 되었습니다. 대뷔10개월 만에 국내 1위 남녀 통틀어 최단 기록입니다. 현재는 세계 랭킹 3위에 올랐습니다. 이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오전11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당구만 쳤다고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고 눈물도 많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픔을 이기고 세계 랭킹3위에 오를 수 있었고 국내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스롱 피아비선수는 캄보디아 영웅이 되었고, 모교에 일천만원 상당의 학용품을 가지고 방문도 하고, 꿈은 학교를 지어서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돕겠다고 합니다. 세상의 원리도 이 세상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물며 그 나라의 영광과 꿈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결단하고 노력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엡5:8-10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내야 되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봄의 꽃샘추위를 이겨야합니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버터내야 합니다. 비와 바람과 태풍과 순간순간 싸워야합니다. 물이 부족하여 목말라야 하고, 해충과 일전을 벌려야 합니다. 인내하고 싸우고 버텨서 맺은 열매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이 내 마음에서 절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연습해야 됩니다. 연단 받아야 됩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소유한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뼈 속 깊이 느끼고 하는 자기 싸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실천할 용기를 가지고 결단하고 그래서 말씀이 삶 속에 살아 역사하는 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떠나서 사는 삶은 어리석고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성령을 보내셨고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알고 유혹을 벗어나고 이기고 성령의 감동으로 실천하고 결단하고 가는 인생길에서 절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하늘나라를 위해 심은 것의 결과를 이 땅에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람이 있고 살맛이 나고 영광을 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연단과 훈련을 여러분만 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받아야 됩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나를 죽이는 삶을 살기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받아야합니다. 가르치는 자도 받고 가르침을 받는 자도 받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성도면 누구나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잠도 못 이루고 원통해하고 분해하고 그러면서 새벽에 나와서 ‘하나님 붙들어 주세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날을 참고 가는 것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내 마음에 평강이 무엇이며 감동이 무엇인지 배워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기대하지 마세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전혀 마음이 상하지 않고 오해를 받아도 기쁘기만 해서 누구를 보던지 주의 사랑으로 눈물을 철철 흘리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생활하지 않지 않습니까? 자기중심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던 것을 말씀 안에서 자꾸 무너트리고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으로 성장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십자가가 한 일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사 우리에게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내가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게 허락된 인생, 내 존재를 제대로 살았느냐를 물으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물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랐는가를 물으러 오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만 보고 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감격에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하고 영향을 미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갈 길이 다르고 목적지도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인생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번 사순절, 고난 주간, 부활주일이 하나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풍성해 졌느냐를 아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