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어느 한순간의 과거는 아주 감동적인 모습이었지만
지나고나면 그것은 아무 민망할정도로 나약한것임을 생각케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적에 옆집 윤검사인지 판사인지 하는 집을 기웃거렸다고한다
그들로부터 권력을 맛을 본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졌다고 주위사람들은 전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학자집안의 후손이시고
어머니는 불자의 집안이셨지요
그러던차에 저는 사립학교 미션스쿨에 입학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기에 공부도 중하위권을 멤돌고있기에
담임선생마저 그에게 관심을 쏟을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에게 유달리 관심을 맡이 쏟는이가 있었지요
그분이 바로 학교목사인 교목이었지요
학교에서 수업하기전에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말씀을 읽고 대표기도를 하였지요
일주일에 한번인가 대강당에 모여서 예배도 드렸지요
취미도 모르고 공부할재주도 타지 못하는 그가 예배시간에 들려주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기기울이는 것이었지요
큰재래시장옆에 있는 학교는 70계단이라는 것을 거쳐 언덕위에
지어진집입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초창기라고 말할수있는 평양장로교회가 남으로 해서 그언덕에 학교를 세운것이지요
한쪽에 남자학교를 그 반대쪽에 여자학교와 그사이에 서양식병원을 지은것이지요
버스를 타고 1원짜리 3개 3원이 버스비였지요
그때에는 용돈이라는 것이 아에없고 학용품도 그날그날 매번타다써야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저에게는 명절날 세배비가 가장 큰 몫이었지만
정작 그돈은 어디갔는지 기억도 없고 학용품비에도 도움이 안된것 같았지요
그때에는 교회를 나가지는 않았던것 같아요
지금도 그러하지만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지요
시내에는 강이 흘렀지요
유일한 놀이는 강에 가서 멱을 감는일이었지요
강바로옆부분부터는 온통 논이어서 여름철이면 논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이
너무 기분이 좋았지요
그곳으로 가다가 한쪽은 개신교회 반대쪽은 천주교회가 있는곳에 다다르지요
저는 그때에 별로 차이를 못느꼈던것이지요
대학교다닐적에는 학교후문에 있는 하숙집을 이용했는데
아마도 제주도를 포함해서 전국팔도사람들이 다 모였지요
그들중에 더러는 개신교회를 다녔고 더러는 천주교회를 다닌것으로 기억됩니다
훨씬 나중에 안일이지만 학교후문 독쟁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용현4동인가 하는 성당은
유명한 교우집에 세운교회라고 하더군요
희안한일이 생기지요
학교내에서는 개신교서클모임에 나갔고요 학교밖에 나서는 천주교예비자교리반에 참여했지요
학교내에서는 학교같은과친구이고 학교밖은 하숙집선배님이 권한것이고 했지요
하숙집뒤에서 식당에서 라면국물을 시켜서 친구들과 나눠먹고
후문에 있는 탁구장은 주인이 좋아하셔서 공짜로 쳤던 것 같습니다
유달리 찰흙같은 흙으로 되어서 발이 빠지지 않는 그 공동묘지와 함께 했는
어느나라인지 모르지만 외국신부님의 자상함에 자주 미사에참여했던 것이지요
그이전에 2학년때에 같은 방을 전라도광주애와 같이 사용하게 됩니다
전 경상도사람인지라 그때만 하더라도 전라도와는 절대로 동조할수가 없다고 배운 저이었지만
대부분 제주변에는 다들 전라도 사람이었지요
전라도 화투인 삼봉을 배워서 이에 미쳐서 밤잠을 설쳐서 맨날 아침수업을 빼먹었지요
해서 저는 대학성작이 안좋고요 1학년때는 특별히 안좋아요
그덕분인지 1학년여름때 재수강하는 바람에 송동에서의 추억만을 남긴일도 있었지요
서해안은 동해안과는 달리 바닷물이 아침일찍가면 먼바다에 걸쳐있지요
해수욕장이라고는 송도해수욕장이라고 있지만 가보고싶지도 않았지요
입장료도 있고해서 말입니다
그준변을 돌아서 지금은 없어진 협꿰철도를 지나서 찾은 바다가에서
망둥이를 잡았지요
같은방을 쓴 광주애가 혼자 방에서 뒹굴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운지
한번은 같이 시내에 같이 갈까였지요
그래서 가본것이 동인천역앞대로에 있는 답동성당이었지요
저는 서울에 외4촌이 살고있었지요
그래서 가끔씩 주말이면 서울낙원동으로 놀러갔지요 귀여운 4촌여동생도 있었고
제가 대학생인데 처음만날때 여동생은 초등학생이었지요 가면 맨날 숙제헤달고 조르기도했었지요
그애따라서 걸어서 창경궁도가고 비원도 가곤했지요
그때느아침일찍 비원에서 운동하는 이들이 있어서 아마도 그시각에는 입장료를 안받은것 같았요
제4촌이 사는 집옥상에는 그건물 관리인아줌마와 여동생과 나이비슷한 사내가 같이 살고있었지요
그 아줌마친구가 가끔씩 놀러오시는데요 간호사이지요
간호사아줌마와 같이 온 젊은 처자 간호사도있었지요
4촌형이 그건물주이면서 탁구장을 하셔서 그탁구장에서 그녀를 만났지요
지독한 개신교신자였지요
저는 그녀의 매혹에 빠져서 저의 누나가 되어달라고 졸랐지요
그땟가는 매주수요일 저녁에 나와서 성경공부를 듣고 매주일은 교회에 나와서 하루종일 있으라고 했지요
얼마가는 그렇게 했나봅니다
몇달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서독으로 간호사로가셨지요
오랫동안 계셨지만 편지는 불과 몇통을 나눗지 못했지만 아주 절실했지요 애틋함이 말입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고 저는 다시 집으로 내려오셨지요
서독에서 돌아온 그녀는 제가있는곳에 있는 어느 시골에서 살고계셨지요
그곳에서 재회를 하였습니다
교회는 마루로 되어있고 의자도 없이 마루바닥에 앉아서예배를 드립니다
풍금소리에 찬송가도 없어서인지 가사는 챠드를 보고 따라 불렀지요
가만히 상상해보십시오 가락이 쳐지는 듯한 소리가 흥겹기만 했었지요
저는 그때에 특별한 신앙있었던것이 아니라
그냥 교회에 나간것입니다
집에서 불과얼마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교회에도 나갔지요
가면 그곳에서 잠심먹고 내가 있고슾으면 하루종일도 있을수가 있었지요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구요
아버지는 지방에 계셔서 주말이되어야 집으로 오시기에 하루종일 집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지루했었지요
이러한 아무것도 아닌것같은 저의 지루한 생활이 지나고나면 이런추억이 있었나싶었고요
주님이 이미 저를 배려하셨던 것 같았지요
대구는 아주 넓은지역같았지만
1960~70년대 그곳도 한낱조그마한 도시에 지나지 않았지요
시냐를 조금만 벗어나면 혼통 논이었고 가을이면 도시전체가 벼이삭으로 넘실거렸고
지나가면서 벼배뚜기도 잡았던것이지요
집에서 한시간걸어서 재래시장을 지나면 천주교회학교인 대건고등학교가 있고
지금기억이 안나지만 메주를 만들어 파는 수녀원이 있었고
그바로옆이 성모당이 있었지요
지금 같으면 안다녔을것 같은데요
왜 그때에는 천주교회신자도 아닌것이 그곳에 다녔는지는 잘모릅니다
흐릿하게 기억나는것은 영화관이 거의 없을시기인데.. 아마도 그곳인지 수도원인지 활동사진을
보여준것 같았지요
그곳을 갈라치면 조그만한 극장을 지나가야하는데 아마도 돈도 없구해서 영화는 못본것 같아요
그러나 그곳앞에서 파는 단팥죽의 맛은 잊지도 못해서 간혹 엄마를 졸라서 돈을 조금타와서 먹고했지요
이밖에 애기할수없을정도의 부끄러운 사고들을 많이 했지요
언젠가 용기가 나면서 여기에 대해서 글을 올리지 모를것이지만 말입니다
참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있는 개신교의 찬송가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