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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선시,시조 스크랩 이규보의 시 문학
하늘재 추천 1 조회 497 12.06.20 16: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168~1241

고려시대의 문장가. 호는 백운거사. 스물여섯살때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동명왕편'을 지었다. 생활에 관한 시를 잘 썼으며, 특히 벼슬이 올랐을때나 생활에 변화가 있을때의느낌을 시로 잘 보현했다. 시와 술 거문고를 좋아하여'3혹호 선생'이라 불렸다. '동국이상국집','백운소설'등의 저서가 있다. 

 

 

 

 

 

작 성  자  :
 길버트 한   (2005-04-02 11:47:00, Hits : 927, Vote : 19
출      처  :
 논문 연구
제      목  :
 이규보의 시 문학
                                            
1. 들어가면서

  예로부터 외교는 중시되어왔다. 이는 옛 땅을 돌려달라는 거란의 침입에서 서희가 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麗)의 뒤를 잇는 나라라고 말하여 오히려 강동6주를 돌려 받았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즘 나라 안팎이 전쟁 때문에 시끄럽다. 밖으로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연일 우리의 뉴스를 달구고 있으며, 안으로는 노대통령의 발언 이 후 국회의 파병 동의안 결정여부를 두고 파병 반대와 찬성의 두 여론이 들끓고 있다. 노대통령 및 지도자들도 명분이 없는 전쟁임을 알면서도 오랜 미국과의 관계와 북핵 문제 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했음을 안다. 이렇게 명분과 실리, 두 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는 없기에 언제나 외교는 중요시되어 왔다.
  이규보가 살았던 시기도 이러했다. 몽고군의 침입에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로운 국가의 위기 앞에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이규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땅을 짓밟고 백성들을 유린하는 몽고군에 쫓겨 강화도로 천도하던 그 당시 상황에서 한문장 한문장 조심스레 외교문서를 썼던 그에게는 그 일이 피를 말리는 듯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외교문서를 맡을 정도로 문학적 능력이 탁월했던 이규보의 문학 그 중에서도 시문학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에 앞서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상황과 그의 일생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이규보의 생애와 시대상황.

  동방 최고의 시인이요 문인이며 정치가인 이규보는 1168년 (고려 의종 22년) 12월 16일 첫울음을 개성 땅에 울렸다. 이규보의 자(字)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 ),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이 아이는 천만금보다 귀한 아기인데 왜 이렇게 내버려두느냐, 잘 보호해야한다 " 얼굴에 부스럼으로 온통 뒤덮여, 보기에 너무 끔직하여 문밖에 내다 둔 아기를 보고, 지나던 신인(神人)은 이 한마디를 불숙 던지고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졌다. 이 아기가 바로 어려서부터 시 잘 짓는 신동이라 불리던 이규보이다.
  우선 이규보가 태어날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아보자.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호족(豪族)과 무신(武臣)들의 도움을 받아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하고 삼국(三國)을 통일(統一)을 한 후,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건국공신(대부분이 무신)이나 그 덕택에 관위(官位)에 오른 공신의 자손들은 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을 견제하는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역대 왕들은 이들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역대 왕들의 이런 정책은 효험이 나타나 문신보다 무신을 천시하는 풍조를 낳게 되었고 이런 풍조는 무신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 후, 오랜 태평으로 문약(文弱)의 폐풍이 나타난 데다 왕의 무능 및 실정과 경박한 문신들의 노골적인 무신멸시 등으로 누적되었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무신 란(武臣亂,1170)이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의 문신에 대한 적대감정은 문신의 마구잡이 처형으로 나타나서 거사 당일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부하들에게,「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들은 비록 사리(胥吏)라도 죽여 씨를 남기지 말라.」고 명하여 수많은 문신들이 무고히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3년 후 김보당(金甫當)의 의종(毅宗) 복위운동 진압과정에서 또 한차례의 대대적인 처형을 당하여 문신들은 크게 위축되고 국정은 무신들이 독단하게 되었다.
  무신들의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무신 상호간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이의방이 이고를 죽였고, 정중부가 다시 이의방을 죽이고 전권을 장악했다가 경대승에게 죽임 당하였고, 경대승이 병사한 후에는 이의민이 폭정을 계속하다가 최충헌 형제에게 죽임 당한 후, 최씨 정권이 4代 60여년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규보는 태어났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스스로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자호할 만큼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였던 이규보는 부지런히 그리고 차근차근 학문의 길을 닦았다. 그리하여 14살 때는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16살 때 아버지가 수주(水州,지금의 경기도 수원)로 벼슬살이를 나갔으나, 이규보는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개성에 머물면서 이 이부(吏部는 벼슬이름)에게 수학하고 학업에 정진하며 과거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이규보는 16살에 처음으로 사마시에 응했으나 낙방을 하고 다시 18살 때에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제 2의 쓴잔을 또 마셔야 했다. 그 후에, 수주에 있으면서 18살 때에 또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역시 낙방하였다. 하지만 비록 과거에는 떨어졌지만 벌써 그의 시명(詩名)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20살 때에 또 사마시에 낙방, 그러나 그는 청운의 뜻을 버리지 않아 2년 후인 22세에 장원급제라는 최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그는 과장이 열리기 전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내용은 이러하다.

  촌백성인 듯한 노인들이 모두 베옷을 입고 마루위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이 그에게 '이들은 스물여덟수(二十八宿)이다.'라고 은밀히 속삭여 주었다. 그는 이들에게 공손히 두 번 절하고 물었다. "제가 금년 과시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까?" 한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규성(奎星)이 알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규성에게 다가가 재차 물었으나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그만 대답을 기다리다가 잠을 깨고야 말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부여잡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노인이 찾아와 귀한 말을 전해 주었다. "자네는 꼭 장원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그러나 아직은 천기이니 절대로 누설해서는 안 되네."

  그래서 그는 이름을 규보(奎報, 규성의 보답)라고 이름을 고치고 과장으로 나가 장원급제의 영광을 얻게 되었고 다음해(23세) 6월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진사로 뽑혔다. 하지만 24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개성 북쪽에 있는 천마산(天魔山)에 들어가 잠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모든 것은 다 뜬구름과 같은 것이기에 그는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부르면서 천마산 골짜기에 싱그러운 산의 정기를 마시며 심신을 수양하고 시와 벗을 삼았다. 그의 나이 26세인 1193년에 지은 <동명왕(東明王)>도 천마산을 오갈 때 지어진 것이다. 급제한 지 8년 만에 겨우 벼슬길이 열리는 가 했으나, 등용길이 막혀버리자 이규보는 총재( 宰) 조영인(趙永仁),평장사(平章事) 최당(催 ),추밀(樞密) 최선(崔詵)에게 시와 편지로 벼슬을 얻기를 청원하였으나 끝내 이들에게서 벼슬을 구하지는 못했다.
  1199(신종 2)년은 이규보에게는 인생 최대의 해이었다. 그의 나이32세로 과거에 장원한지 10년만의 일이다. 드디어 최충헌의 집에서 천엽유화시(千葉榴花詩)를 읊은 지 한달 만에 벼슬을 하나 얻었다. 전주목사록 겸 서기(全州牧司錄兼書記)가 그의 직함이었다. 하지만 임기인 3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1200년(선종3년)에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군웅할거의 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진주, 합주(陜州, 지금의 협천), 운문(雲門, 지금의 청도), 초전(草田, 지금의 위산),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 울진, 태백산 등지를 중심으로 여러 도당들이 서로 호응하기도 하고 침공하기도 하는 등 민심을 동요시키는 전운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중 동경중심의 민란은 이비(利備)란 자를 두목으로 한 일당과 운문의 패좌( 佐)를 두목으로 한 일당이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왕업은 거의 다하고, 신라가 반드시 부흥한다'라는 구호아래 각지에 격문을 돌리고 주군을 침략하였다. 최충헌은 이 민란을 철저히 토벌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벌군을 일으키었다. 관군의 총지휘관인 김척후는 장병들이 피로하다는 핑계로 이들과 대항하지 않으니, 적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모든 사람은 일신의 몸만 아끼느라 도망갔으나, 이규보는「 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하고는 스스로 종군의 길을 택하여 병부녹사 겸 수제원(兵部綠事兼修製員)이 되어, 눈 내리는 12월 동경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35세였고,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대체로 상중에는 외지로 나가지 않으나,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떠난 것이다. 김척후를 대신하여 새로 파견된 중도사 정언진(丁彦眞)은 동경부근에 이르러 계략을 폈다. 서낭당의 문당과 밀약하여, 거기에 기도하러 오는 이비의 부자를 체포하고, 이어 운문산에 대장 함연수(咸延壽)를 보내어 패좌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이로써 경상도 지방의 민란은 그 종말을 거두었다.
  이 때에 이규보는 운문산에 주둔하면서 난적들을 무찌르기에 온갖 정열을 다 바쳤다. 도통상서부사시랑(都統尙書副使侍郞)에게 서(書)를 올려 전사한 장졸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또한 논공행상을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상부에서는 이 글을 받자, 이규보의 애민과 논리 정연함에 감복되어, 각 부대에 쌀을 보내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게 하고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로써, 난적들이 들끓는 와중에도 천륜을 다하고 인륜을 다하여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그의 소망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204년(신종7) 경상도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개선을 했으나 논공행상에서 이규보는 제외되었다. 그는 외직하나 얻지 못해, 불우한 신세를 한탄하며 문을 닫아걸고 출입도 하지 않았다.  
  최충헌은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문사들을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문인들을 불러 시연(侍宴)을 베풀고 문사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당시의 쟁쟁한 문사들이 다 모인자리에서 <진강후모정기(晋康侯茅亭記)>가 최우수작품으로 뽑히어 현판에 새겨 걸어 놓는 최대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2월에 이규보는 직한림원(直翰林院)에 권보(勸補)되었다. 그동안 바라던 벼슬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벼슬은 날로 높아져, 50세에는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고 문관으로 최대의 영예인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해인 51세에는 좌사간(佐司諫)이 되었다. 하지만 52세 되던 1219년(고종 6)에 팔관하표(八關賀表)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고 탄핵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기도 계양(桂陽)의 도호부사병마금할(都護府使兵馬  轄)이 되어 계양으로 부임하였다. 서울의 생활에 비하면, 시골의 생활이라 보잘 것이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오(自娛)'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며 노력하였다. 그는 계양에 있으면서 최우에게 죄를 풀어주기를 비는 시를 지어 바쳤다. 그때는 이미 그를 귀양살이 보낸 최충헌이 죽은 다음해의 일로, 국원을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잡고 있던 때이다.
  드디어 이규보는 1년만에 귀양살이가 풀려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가 되어 복직하였다. 이 모두는 최우의 덕이었다. 다시 그의 벼슬은 날로 올랐다. 그러나 벼슬이 오를 때마다 양사표(讓辭表)를 지어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의 붓을 아낀 임금은 그를 쉽게 벼슬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호화스런 벼슬살이는 계양에서 풀려난 지 10년 만에 또 한번 붓이 꺾이게 되었다. 그의 나이 63세 때이다. 역시 팔관회 연회가 규례에 어긋났음이 문책되어 고도인 위도( 島)로 유배되었다. 이번은 완전 삭탈관직되어 절도에 위리된 것이다. 그는 위도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이듬해 정월에 감형되어 유배지가 그의 고향인 황려로 옮겨졌다가 65세 되던 해 4월에 완전히 귀양에서 풀려나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자지제고(正議大夫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제수되었다. 이 때가 바로 몽고가 침입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던 때이다. 그는 늙은 몸이었으나 몽고군을 막는 데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1237년 70세에 이규보는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 장사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례부사한림원사 태자태보(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하였다. 동방의 시성(詩聖) 이규보는 74세로 그의 시적 삶을 마치었다. 그의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다.

2.  이규보의 시문학.


1)  역 사 시 ( 歷 史 詩 )
  
  이규보에 관한 작품 중에서 역사시(歷史詩)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려 한다. 종래에는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만을 묶어서 '영사시'(詠史詩)라는 갈래로 다루었지만 이동철 교수의 저서 '이규보시의 주제연구'에서 역사시(歷史詩)라는 큰 틀에서 영사시(詠史詩), 회고시(懷古詩), 잡고시(雜古詩)로 세분하였는데 이를 참고하여 다루겠다. 그리고 류 만우(劉 若遇)는 저서 『중국시학』에서 영사시와 회고시의 내용상의 상이점에 대하여 어떤 역사적 사상에 대하여 단순히 무상감(無常感)이나 회상(哀傷)을 표현한 것은 회고시이고, 여기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 영사시라고 하였다. 하지만 양자의 구별은 대단히 애매한 경우가 있고, 모두가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설 쪽에서 취재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시라는 큰 갈래의 일부로 정했다. 그리고 잡고시란 고사(故事)나 유래(由來), 전설(傳說) 등을 묶어서 편의상 붙인 이름임을 미리 밝힌다.


(1)  영 사 시 ( 詠 史 詩 )
  ① '동명왕편'시는 한국 서사시의 효시로서 이규보의 어느 작품보다도 빈번하게 논의되어 왔고 또 높이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동명왕편의 구조에 관하여 살펴보면 이 서사시는 287字로 된 병서(幷序), 282句 1,410字의 오언고율시로 된 본시, 442句 2,210字로 된 주(註)로 구성되어있다. 주의 내용을 보면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 東明王 本紀)의 분주(分註)  31조목(條目)과 연대표기·지리 ·문자정의 등 8조목의 주가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동명왕편의 내용은 본시 부분을 축으로 해서 병서부(幷序部)· 서두부(序頭部)는 결미부(結尾部)와 대응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왕편'에는 삼계(三界)가 설정되어 있고, 인물의 유형도 다채롭다. 그리고 작품의 구조를 보면, 단조롭기 쉬운 이 개인의 전기적 기술에 플롯을 전개시키고 있다. 주인공과 상대역과의 이러한 대결을 통하여 사건이 신속하게 전환되는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긴박감과 흥미를 더했다.
  동명왕편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규보는 유교의 합리적인 사관에 맞선 전통적 신이사관(神異史觀)에 입각하여 오히려 신기한 일들을 강조함으로써 동명왕의 신이지역(神異之逆)이 중국 창국시조(創國始祖)의 그것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결국 이규보는 동명왕의 신이성을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규보는 유교적 전통사관을 토대로 하여 이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규보의 이러한 민족의식 및 전통적 신이사관(神異史觀)과 천(天)의 연결 인식은 그 후 <삼국유사 三國遺事>와 <제왕운기 帝王韻紀>에 전승되어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데에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명왕편'은 조선조 소설을 비롯한 각종 전기적 서사의 최초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명왕편'은 가장 거대한 신화일 뿐 아니라 <삼국사기 三國史記>(동명왕 본기 東明王 本紀)를 후세에 전해주는 사료(史料)의 원전적(原典的) 역할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는 점, 군왕의 윤리를 엄격히 밝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서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② '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는 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명왕편'에 가려져서 그 논의 자체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이 작품은 '동명왕편'을 창작한 1194년, 27才에 쓰여진 것이므로 이규보의 청년기의 역사의식과 가치관, 나아가서는 작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또 그 다음해에 '차운오동각 략삼백운시' (次韻吳東閣 略三百韻詩)를 짓는 등 연이은 삼 년간 역사 인식에 열을 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次韻吳東閣 略三百韻詩'는 이 시의 창작 동기는 병서(幷序)에 따르면 선배인 오세문(吳世文)의 삼백 운시에 화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하나의 사교적 행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명왕편'이나 '개원천보 영사시'처럼 영사시 본래의 창작 동기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가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의 지리와 역사를 소재로 하였다.

東都古樂國   (동도고락국)         동도는 옛적 좋은 나라로
宮殿有遺基   (여은유유기)         궁전에 터 남아 있네
靑史窺陣跡   (청사규진적)         역사에서 지난 자취 엿볼 수 있고
淳風記昔時   (순풍기석시)         순박한 풍속은 옛날을 되새기게 하네

  본 시의 처음부분이다. 신라의 풍속이 순박하다고 함으로써 무신정권 시대의 황량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는 이 시 말미부에서 최치원, 박인범 등 주로 문사들에 대한 칭송을 열거함으로써 소위 '경계지란'(庚癸之亂)으로 반전을 거듭해 온 문인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의례적인 역사 서술에 그친 감이 있다.
  아무튼 26才 때 <동명왕편 東明王篇>·27才 때 <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28才 때 <차원오동각 략 삼백운시 次韻吳東閣 略 三白韻詩>를 거푸 쓴 이규보의 이십대 후반기는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주창하기에 진력했던 뜻 깊은 시기였다고 할 만하다.
④  기타의 영사시  ( 其他의 詠史詩 )
  '楊貴妃'(名賢集 I)는  양귀비의 경국지미와 현종의 타락(墮落)을 주제로 한 시이다.

未必楊妃色絶奇 (미필양비색절기)  양 귀비의 얼굴이 정말 빼어난 것이 아니라
只緣誤國作嬌姿 (지연오국작교자)  나라를 그르치려고 예쁜 자태 지은거야
君看貞觀太平日 (군간정관태평일)  그대여, 정관의 태평시대를 보게나
宮掖那無一美姬 (궁액나무일미희)  궁중에 어찌 미녀 하나 없었으랴

  어느 시대나 가인(佳人)은 있으되 군왕의 현우(賢愚)가 문제라는 논조이다. 당 태종 시대에도 미희가 있었겠지만 선정으로써 이를 극복하여 태평성대를 열었으나, 현종의 혼정(昏政)은 양귀비로 하여금 마침내 '경국지미'(傾國之美)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위의 시는 기록의 순차로 보아 그가 '경사의 난'(京師의 亂)을 피해 상주에 가 있다가 돌아온 직후인 29재 때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지은 '개원천보영사시' 중 '화요'(華妖)나 '금속보경'(金粟寶璟)과 그 주제가 유사하다고 하겠다.
  '왕명비(王明妃) 이수(二首)'는 왕소군(王小君)의 비운과 실정에 대한 한탄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廟算難降 悍倫 (묘산난항광한윤) 조정의 정책이 잔인한 오랑캐를 꺾지 못해서
反將宗女結和親 (반장종녀결화친) 도리어 종실의 여인으로 화친을 맺었구나
漢庭無限垂線客 (한정무한수선객) 한 나라 조정의 그 많은 신하들이
及椒房一婦身 (불급초방일부신) 한낱 초방의 여인에도 미치지 못하다니

  '종녀'(宗女)니 '초방부'(椒房婦)니 하는 것은 왕 명비(王 明妃)를 가리킨다. 그녀는 한(漢) 원제(元帝)의 궁녀로 이름은 장( )이고 자(字)는 소군(小君)이었다. 절세의 미녀로서 흉노(匈奴)와의 화친책으로 호한야 단간(呼韓耶 單干)에게 출가(出嫁)하여 아들 넷을 낳고는 자살하였다. 이 시는 미인계의 희생이 된 왕 명비의 비운을 강조함으로써 무능한 왕정이 빚은 역사적 비극을 부각시키고 있다. 앞의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경국지미'(傾國之美)의 숙명을 왕정과 결부시키고 있다.


(2)  회 고 시 ( 懷 古 詩 )
  <동국여지승람>의 편차에 관한 한 영사시(詠史詩)보다는 회고시가 먼저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한식감자추사'(寒食感子推事)는 그가 부친 상(喪)을 당하자 천마산에 우거(寓居)할 때(1191년, 24才)지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衆鱗化雲雨 (중린화운우)   뭇벌레들 구름과 비에 은택 받을 때
一蛇不與爭 (일사불여쟁)   외로운 뱀 한 마리 함계 다투지 않았었지
未見恩波潤 (미견은파윤)   내려지는 혜택을 보지 못하고
反爲燥炭烹 (반위조탄팽)   도리어 숯불에서 삶겨버렸구나
線山山上火 (선산산상화)   면산 산마루까지 타오른 불은
已忍焚人英 (이인분인영)   뛰어난 인재 그만 태워 죽였다
                 < 중    략 >
廢興餘老木 (?흥여노목)   늙은 나무 흥망을 겪은 채 서 있고
今古獨寒流 (금고독한류)   차가운 물 고금에 한결같이 흐르네
往事憑誰問 (왕사빙수문)   지난 일 누구에게 물어볼거나
幽懷只自愁 (유회지자수)   그윽한 회포 스스로 시름할 뿐이네
                 < 후    략 >

  안화사에 가서 인생의 무상감에 젖어서 읊은 시이다. 비명(非命)에 간 군왕이 노닐던 환벽정에 떠도는 구름은 그것이 바로 허무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류(寒流)-경벽정(璟碧亭)-노목(老木)의 구조 속에서 무한한 자연과 숙성하는 인사가 대위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주목사록(全州牧司錄)에서 파직된 직후의 허탈과 염세적 정서가 여기에 부가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  잡  고  시 ( 雜  古  詩 )
'칠월칠일우'(七月七日雨)는 견우와 직녀의 정사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자신의 상상을 읊은 시이다.

銀河杳杳碧霞外 (은하묘묘벽하외)   은하수에서 아득한 푸른 노을 밖에서
天上神仙今夕會 (천상신선금석회)   하늘의 신선들 오늘 저녁 모이겠지
龍梭聖斷夜機空 (용사성단야기공)   북소리 멈추고 밤 베틀 비운 채
烏鵲橋邊促仙馭 (오작교변촉선어)   오작교 향해 신선 행차 재촉하겠지
相逢才說別離若 (상봉재설별리약)   만나서는 이별의 괴로움도 못다 나누고
還道明朝又難駐 (환도명조우난주)   내일 아침이면 또 헤어질 것을 한탄하겠지
               < 후     략 >

  이러한 전설 류의 시에 나타난 이규보의 사고는 어떤 감명이나 심각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의 전설을 현재의 장황처럼 실감나게 표현하였으며 이십대의 소박함과 가벼운 감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향당이삼자유마암'(與鄕黨二三子遊馬巖)은 이규보의 고향인 황려(黃驪)의 명칭의 유래를 소재로 하고 있다.

變馬權機出水涯  (변마권기출수애)    두 마리 말이 기이하게도 물가에서 나왔대서
縣名從此得黃驪  (현명종차득황려)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 했다네
詩人好古煩徵詰  (시인호고번징힐)    시인은 옛을 즐겨 번거롭게 증거를 대지만
來往漁翁豈自知  (래왕어옹기자지)    오가는 어옹이야 어찌 알 리 있으랴

  29才 時(1196년), 최충헌 형제에 의해서 이의민 일당이 제거된 소위 '경사의 난'을 피하여 그의 어머니가 머물고 있던 상주까지 갔다가 귀로에 황려에 들렸을 때의 작품이다. "詩人好古煩徵詰'이란 시구에 집약되어 있듯이, 이십대의 유달리 주력했던 자의식이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이 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2)  군 사 시 ( 軍 事 詩 )

  군사(軍事)란 군송·병비·전쟁이나 군무 등에 관한 일을 뜻하며, 그러한 사항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시들을 가리켜 군사시(軍事詩)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군사시를 역사시와 마찬가지로 외침시(外侵詩), 민란시(民亂詩), 종군시(從軍詩) 등 세 분야로 세분되어 나누어 살펴보겠다.
  외침시(外侵詩)란 '계단유종'(契丹遺種)들의 침입 및 몽고의 삼차에 걸친 침입을 소재로 한 것이며, 민란시(民亂詩)란 명종조부터 신종조에 이르기까지 십여 회에 걸쳐 일어난 각종 민란이 그 소재가 된다. 한편, '종군시'(從軍詩)란 '연보'(年譜)에 "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드디어 종군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명명한 것이다.


(1)  외 침 시 ( 外 侵 詩 )
  외세의 침입에 직면하여 이규보의 대외항쟁을 주제로 하여 창작한 시들은 계단유종(거란)의 침입에서 시작되어 몽고의 침략으로 연계되어 나타난다. '개관군여로전침''開官軍與虜戰捷)은 오랑캐에 대한 두려움과 조정에 대한 불확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대민무마적(對民撫摩的) 성격을 띠고 있다.

虜氣日披猖  (로기일피창)   오랑캐의 기세가 날로 창궐하여
殺人如刈草  (살인여예초)   사람 죽이기를 풀 베이듯 한다네
虎吻流 涎  (호문류잠연)   굶주린 범처럼 침 흘리면서
呑 無幼老  (탄서무유노)   노유를 가림없이 함부로 삼켜버릴 듯
婦女愼勿憂  (부녀진물우)   부녀들은 부디 근심하지 말게
腥穢行可掃  (성예일가소)   더러운 오랑캐들 곧 일소될 테니
國業未遽央  (국업말거앙)   국업이 아직 다하지 않았고
廟謨亦云妙  (묘모역운묘)   조정에선 역시 묘한 계책이 많다네
行且自就誅  (행차자취주)   오랑캐들 또한 스스로 와서 죽을 것이니
焉得변天討  (언득변천토)   임금님의 토벌을 어찌 면하랴
吾言豈妄云  (오언기망운)   내 어찌 망령되게 말했겠는가
今日聞捷報  (금일이첩보)   오늘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 들었다네

  이 시는 '초여가간겸수자희증김정언'(初除可諫兼受金紫 贈金正言) 바로 뒤에 있어서 그 출전상의 위치로 보아 그의 나이 50才 때(1217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연보'(年譜)에 의하면 이 해 2월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를 여수하고 '자금어대'를 하사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위의 시는 전황(戰況)이 불안하고 불투명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내용은 외침에 대한 공포와 자위, 반격에 대한 기대감 등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집권자 측의 편의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저항감이나 전승에 대한 확신이 포함되어 있다.
  '문호종입강동성자보재성중작'(聞胡種入江東城自保在省中作)은 이러한 위화감이 증오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殘胡厭竄逃  (잔호염찬도)      남은 오랑캐들 도망가지도 않고
已人圈 內  (이인권로내)      이미 울타리 안으로 침입했다네
得肉幸平分  (득육행평분)      저들의 고기를 골고루 나누어 준다면
萬人共甘膾  (만인공감회)      만인이 함께 회를 달게 먹으리

  이 시에서 보여주는 이규보의 대 계단의식은 극도의 저주이다. 이러한 심적의 표면에는 고려군에 대한 불신감과 거란군들의 폭악성 복합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민 란 시 ( 民 亂 詩 )
  고려는 농업을 위주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은 대체로 토지를 매개로 하였다. 국가에 대한 농민들의 부담은 조세(租稅)·공부(貢賦)·공역(公役)의 세 가지로서 이것이 고려왕조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귀족사회는 언제나 농민과 천민들에게 수탈을 자행하여 원성을 받기 마련인데, 특히 고려 중기 이후 문·무신의 난정(亂政)과 수탈이 계속됨으로써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무신 난 이후 하극상의 풍조가 유행하여 누구든지 폭력으로 대권을 잡을 수 있었으므로, 농민·천민들도 이에 자극되어 그들의 신분 해방이나 빈관오이(貧官汚吏)에 항거하여 수많은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규보가 당면했던 민란의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신라의 부흥운동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신분질서의 개혁과 정권의 탈취에 있었다. 이들 반란군들은 운문(雲門)·초전(草田)등 각지의 반란군들과 연합전선을 폈고, 그 규모와 기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민란은 원래 사회적 비리와 적폐(積弊)에 대한 개혁을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거니와 이규보가 이들을 보는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농민을 두고도 일반 농민의 경우에는

一國瘠肥民力內  (일국척비민력내)    나라의 흥망은 민력에 달렸고
萬人生死稻芽中  (만인생사도아중)    백성들의 생사는 벼싹에 달렸다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王孫公子休輕侮  (왕손공자휴경모)    왕손 공자들아 얕잡아 보지 말라
富貴豪奢出自   (부귀호사출자농)    그대들의 부귀영화는 농부들로부터 나오나니

라고 하여 극도의 민존·농본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민란의 주체인 양민들을 두고는 마치 구적(仇敵)처럼 인식하고 있다.

紅旗白刃討黃巾   (홍기백인토황건)   붉은 깃발 날카로운 칼로 황건적 토벌하는데
膽怯書生 幕賓   (담겁서생첨막빈)    담력 약한 서생이 참모로 참여했네
擇肉豺狼方作艱   (택육시랑방작간)    고기 찾는 승냥이와 이리떼 날뛰는 판국에
簪膚蟻 又爲敵   (잠부의슬우위적)    피 빠는 이 또한 적이 되었네

  앞의 시에서는 민란의 주체인 지방민들을 후한 때의 장 각 등이 주도한 황건적에 비유하고 있고, 뒤의 시에서는 오랑캐를 암유하는 용어인 이리·승냥이에 비유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시들은 '동명왕편'이나 '개원천보영사시'등을 쓰던 이십대의 거창한 대국적 의식시계, 각 국가적 차원만을 강조하던 그러한 사고가 정장된 이십대 중반에 쓰여졌다는 점에 통반랑장의 모함을 입어 벼슬길의 시작인 전주목사록에서 파직된 충격이 역으로 작명했을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의 납득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70才 때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노장'(老將)에서까지

報國壯心長凜凜   (보국장심장름름)   국가에 보답하려는 장한 마음 길이 늠름하여
夢中鳴鏑射戌王   (몽중명적사술왕)   꿈에서도 활 쏘아 오랑캐 두목 맞춘다네

라고 하여 지방민들을 여전히 오랑캐라고 지칭하고 잇는 것은 "이규보의 현실인식의 폭이 그의 입장과 처지를 완전히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러한 편향적 의식은 그가 예제(禮制)를 긍정하고 그 예제 내에 안주하려고 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그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하극상의 사태는 사회나 국가의 상하질서를 파국으로 몰아 간다는 이른바 군신유의 흐름을 가진 유가적 가치관의 소산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  종  군  시
  종군시는 이규보의 35才 때인 신종 5년(1202년)에 동경의 반도(叛徒)들이 운문산 작당들과 합세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종군하면서 쓴 시들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삼군을 내어 정대(征代)케 하였는데, 군막에서 산관(散官)·내제(乃第) 등을 핍박하여 수제원(修製員)으로 충족시킬 때 세 사람을 거치도록 모두 꾀를 내어 회피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이규보는 연연히 말하기를 "내가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하고 종군하였다.
  이규보는 이 때의 종군이 주로 나라를 생각하는 일념에서 비롯되었음을 만년(晩年)에 지은 '노장'(老將)에서 보여주고 있다.
    
當年身似 飛揚   (당년신사골비양)   당시에는 몸을 송골매처럼 날려
東北曾馳百戰場   (동북증치백전장)   동북의 여러 전장을 누비었었지
雪霽錯應看箭影   (설제착응간전영)   눈 개이면 화살이 날아오는가 착각하고
天陰時復發金瘡   (천음시부발금창)   날씨 흐리면 때때로 칼에 맞은 상추 쑤신다오
彫弓蛇蟄堂中掛   (조궁사칩당중괘)   새긴 활은 뱀 숨듯이 방안에 걸어두고
白刃龍蟠匣裏藏   (백인용반갑리장)    시퍼런 칼은 용이 서린 듯 칼집에 감춰뒀네
報國壯心長凜凜   (보국장심장름름)   국가에 보답하려는 장한 마음 길이 늠름하여
夢中鳴鏑射戌王   (몽중명적사술왕)   꿈에서도 활 쏘아 오랑캐 두목 맞춘다네

  35才 때 동경 반도 토벌에 참여했던 일을 다시 35년이 지난 70才때 추억하면서 술회(述懷)한 시이다. 이 시의 핵심어는 '보국장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활약상과 전공에 대한 내용과 위국(爲國)의 애정(哀情) 등이 스스럼없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규보에게는 이민족에 대한 고려인으로서의 강한 국가·민족의식과 더불어 국내적으로는 현 질서와 체제를 정비하고 수용한 유가적 사회, 역사의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경의 난은 명종 20년 이래로 약 15년간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이 난이 평정되자 최충헌이 동경유수를 격하시키고, 관내의 州·府·部曲을 안동·상주에 분속(分屬)시키고, 경상도를 상보안동부라고 개칭할 정도로 심각했던 것이다.


3)  사 회 시 ( 社 會 詩 )
  
  '사회시'란 문자 그대로 주제나 제재 면에서 사회 문제를 지칭한다. 개인의 관조적 정서를 축으로 하는 단순 서정시와는 달리 서민들의 곤약(困若)과 사회적 비리를 국외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사회의 잡학한 실상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의식이 가한 시들이 이 범주에 든다고 하겠다. 한편으로는 이규보 문학에서 본격적인 사회를 운위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격으로 보여질 수 있다. 사필(史筆)들이 '최씨문객'이라고 평할 정도로 그는 최씨일가에 협조했었고 또 오랫동안 권력에 유착(癒着)했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침입이 가열해지자 주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강화천도를 감행한 최 우의 처리를 칭찬하고, 그가 아니었던들 삼한이 벌써 호만(胡蠻)으로 되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이규보의 눈에 비친 최충헌·최 우 부자는 국가의 간성(干城)이며 민족의 지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이규보 자신이 '공문'(孔門)임을 아무리 강조했더라도 그는 사회시의 창작자로서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규보는 엄연히 수십 수의 사회시를 남겼다는 것이다.  
  '개군수수인이장피죄이수' (開郡守數人以贓被罪二首)는 신축년(1241년 6월 74才)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 전 불과 3개월 전에 쓴 일종의 유서적 성격을 띤 시라고 할 수 있다.

歲儉民幾事 (세검민기사)  흉년 들어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은
唯殘骨與皮 (유잔골여피)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았네
身中餘幾肉 (신중여기육)  몸 속에 남은 살이 얼마나 된다고
屠割欲無遺 (도할욕무유)  남김없이 모조리 긁어내려 하는가
  
君看飮河   (군간음하언)   그대는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不過借其腹 (불과차기복)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음을
間汝將幾口 (간여장기구)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貧喫蒼生肉 (빈끽창생육)  백성들의 살을 겁탈해 먹는 것이냐

  벼슬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드날린 그가 지배층을 보는 시각은 비애와 저주였다. 공자의 이른바 '가정맹어호'의 현상이 거침없이 만행했던 극신한 세태를 이 시는 비탄조로 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뚤어진 세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전리지견방여음대취증지'(全履之見謗與飮大醉贈之)이다.

  前 略
何者是賢愚          (하자시현우)           무엇이 어질고 어리석음이며
何者是得失          (하자시득실)           무엇이 옳고 잃음인가
得者未必賢          (득자미필현)           얻은 자가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니
 頭鼠目翔貴秩      (장두서목상귀질)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도 귀한 벼슬에 오르니까
失者未必愚          (실자미필우)           잃은 자가 반드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니
 意琦行樓蓬       (괴의기행루봉필)       사상과 행위가 뛰어나도 가난하게 사니까
吾   齪何足言      (오제  착하족언)       나처럼 잗단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如子雄豪取爵不可必  (여자웅호취작불가필)   그대같은 호걸이 벼슬을 못하다니
神龍未起逋龍昇      (신용미기포용승)       신룡이 일어나지 않으니 포룡이 올랐고
左道乘時直道黜      (좌도승시직도출)       좌도가 때를 타니 직도가 쫓겨났네
  後 略

  현인(賢人)쓰지 못하고 직도(直道)가 핍박받는 타락된 세태를 탄식하고 있다. 전주목사록에서 파면되어 불우의 생애를 보낼 때의 작품을 보이는 이 시는 벗인 김 이지임을 감안하여 동병상련의 심정을 읊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비뚤어진 세태를 직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혹세무민의 무속을 비판적인 시사적 시도 있다.


4)  생 활 시 ( 生 活 詩 )

  앞에서 우리는 이규보의 작품 중 역사시(歷史詩)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이규보의 작품들 중 생활시(生活詩)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 생활시(生活詩)라고 말하면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질 수 있기에 여기서는 이규보의 작품 중, 교류시(交流詩)와 몽환시(夢幻詩), 생활시(生活詩), 정회시(情懷詩)를 생활시라 칭하고 그것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이 생활시는 이규보의 생애 자체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따라 일어났던 일, 예를 들어 귀양을 간다던가 하는 일들에 대한 이규보의 감상과 감회 등이 생활시라는 장르 안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시는 이규보의 생애에 대해 조사할 때 소상한 자료로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규보의 생활시는 다른 작품들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생활시에 관해 알아보려 한다.

(1) 교 류 시 ( 交 流 詩 )
  交流詩란 이규보와 교분(交分)이나 연분(緣分)이 있는 사람들과 교류(交流)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시를 말한다. 이 交流詩는 남에게 감사하거나 혹은 친구와의 우정, 승진을 하거나 영달을 한 사람에 대한 축하 등이 주된 내용이다. 한편, 교류 대상 인물을 살펴보면, 이규보의 성품과 인간관계 등을 알 수 있는데 이규보는 횡(縱)으로는 왕후장상에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종(橫)으로는 은사(恩師)에서 기녀(妓女)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였다. 이들 중, 문사와 관인들과의 관계가 主를 이루고 있음은 실로 당연하다. 과거로 발신(發身)했거나 최씨 정권에 등용되어 최씨의 문객(門客)이라는 평들 들었던 이규보가 이런 인간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가 이렇게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문재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절도있는 처세와 중용적 가치관에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교류시의 양은 509首에 이를 정도로 매우 많지만 그 방대한 양을 모두 실을 수는 없기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례시와 하송시, 그리고 왕래시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려 한다.

①  사 례 시 (謝禮詩)
  사례시란 선물이나 온정에 대한 감사시이다. 이규보가 가장 많은 사례시를 썼던 대상 인물은 혜문선사이지만, 물질적인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것은 최우임이 당연하다. 혜문선사는 순수(純粹)한 우정으로, 최우는 권력자의 시혜(施惠)로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시 중에서 '주필사대왕사문사송탄(走筆謝大王寺文師送炭)'은 혜문선사와의 담백한 우정을 보여준다.

臘天銖炭價超翔        (납천수탄가초상)         섣달 추위에 숯 값이 크게 올랐는데
千里殷勤寄草堂        (천리은근기초당)   먼 곳에서 은근하게 초막으로 보내 주었네
不獨炙炎柔手足        (불독자염유수족)         손발만 포근히 쬘 뿐만 아니라
感也熏酒暖於湯        (감야훈주난어탕)         따끈하게 술 데워 먹으니 더욱 고맙네
           < 후    략 >
                            
  이 시를 읽으면 추운 겨울에 땔감 걱정을 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던 이규보에 대해 알 수가 있다. 그래서 혜문선사가 보내 준 숯에 감사하는 시를 쓴 것이다. 이에 비해서 최충헌, 최우 부자는 이규보의 벼슬길의 안내자이자 후견인 격이었다. 특히 최우와는 교분이 깊어 후에는 주종의 관계를 넘어 지기지우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 그 친분이 밀착되었다. 치사 후 생활이 극도로 빈곤했던 이규보에게 최우가 보내준 백미와 석탄에 대한 감사의 정을 이규보는 '상진양공(上晋陽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別作天開雨露恩        (별작천개우로은)        하늘이 각별히 우로의 은혜를 내려
忽如珍賜到閑門        (홀여진사도한문)        뜻밖에 귀한 물건 가난한 집에 이르렀네.
里人大嚼塡街見        (이인대작전가견)        마을 사람들은 크게 씹으면서 길거리를 메웠고
衆馬交嘶滿路暄        (중마교시만로훤)        뭇 말들은 울어대어 길거리가 떠들썩하네
炭玉  堆可仰        (탄옥점점퇴가앙)        구슬같은 숯 무더기 볼수록 흐뭇하고
米珠石石重難         (미주석석중난흔)        하얀 쌀 섬섬이 들어 올리기 힘겹네
 奴喜笑聲先飽        (동노희소성선포)        하인들은 기뻐서 먹기도 전에 배부르다 하고
妻子環觀面已溫        (처자환관면이온)        둘러 선 처자들 표정 이미 환하게 펴졌네
始也過顚心似失        (시야과전심사실)        처음에는 흥분되어 실신한 것 같았더니
 然靜念淚如噴        (번연정념루여분)        나중에 생각하니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네
一生祝壽憑誰證        (일생축수빙수증)        일생을 축수하는 마음 누가 알아주려나
無盡虛空有佛存        (무진허공유불존)        끝없는 허공에 부처님이 계신다네

  이 시에는 최우의 우정에 대해 감읍하는 절절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군왕의 은혜를 일컬을 때 쓰이는 '雨露'라는 말을 사용했다던가, 최우의 존재를 '虛空有佛'에 비유하고 있는 것들이 그러한 심상의 발로이다.
  
②  왕 래 시 ( 往 來 詩 )
  왕래시란 심방(尋訪)이나 내방(來訪)의 소회(所懷)를 읊은 시들이다. 이러한 작품에는 내방자체(來訪自體)에 대한 정감이 중심이 되어 있고, 어떤 행사에 관한 감흥은 부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규보의 왕래시에서 특징적인 점은 대상 인물 중 승려(僧侶)가 많고, 한결같이 방문의 기쁨과 설레임이 짝하여 나온다는 점이다.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이규보와 그 대상인물의 깊은 우정도 느낄 수 있다.

覓佯成三老        (멱양성삼로)        세 늙은이 짝이 되어
危 度木梢        (위전도목초)        높은 산마루와 나뭇가지 끝을 지나가네
猛風衝帽過        (맹풍충모과)        모진 바람 모자에 불어치고
微雪點衣消        (미설점의소)        가는 눈 옷에 내려 녹는구나
路原猶甘         (노원유감군)        길이 멀어서 살갗 터짐을 참아내고
人遐幾費翹        (인하기비교)        그 사람 멀리 있어 여러번 고개를 들어 보네
興來聊訪戴        (흥래료방대)        흥겨워서 그대를 찾아 가거니
不必見招邀        (불필견초요)        어찌 부름을 기다릴 필요 있으랴

위의 시는 이규보가 '경사의 난'을 피하여 그의 어머니가 머물던 상주까지 갔다가 돌아온 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적수공권으로 지내던 시기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탈속 인사들을 尋訪하고 쓴 시일 것이라고 산견(散見)된다. 위의 작품도 그 중에 하나이다. 불과 30才전후의 연배들인데도 "三老"라고 자칭한 것은 내적인 인고(因苦)를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하 송 시 ( 賀 頌 詩 )
  하송시란 경하(慶賀)나 칭송(稱頌)을 그 내용(內容)으로 한다. 경하는 주로 경사, 시운, 선정이 그 대상이 되며, 칭송은 인물, 기량 등이 그 대상이 된다. 둘 중에서는 칭송이 양적으로 더 우세하다. 먼저 경하를 주제로 한 시를 보도록 하자. 선배의 승진을 축하하는 내용의 시로 제목은 '현기추밀입상(賢奇樞密入相)'이다.

聞公拜相倍欣然        (문공배상배흔연)         공께서 정승이 되셨다니 곱절이나 기쁘고
且爲朝家賀得賢        (차위조가하득현)         조정에서는 현인 얻은 것을 하례합니다.
內署直來黃閣密        (내서직래황각밀)         내서에서 곧장 온 황각이 엄밀하고
新堤行處白沙連        (신제행처백사련)         새로 쌓은 방축은 백하장과 이어졌네
玄成作鏡君心正        (현성작경군심정)         현성이 거울 되니 임금 마음 발라지고
傳說調羹衆口便        (전설조갱중구편)         전설이 조미한 국 여러 입에 맞았네.
草芥孤生偏踊躍        (초개고생편용약)         초개같은 제가 반가워서 날뛰며
更磨頑鈍望陶甄        (경마완둔망도견)         다시금 둔재 연마해서 성인 정치 바라려오.

  기추밀은 기상서, 기평장 등으로 나타나는 인물로 본명은 기 홍수로서 이규보보다는 이십년 선배 되는 사람이다. 이 선배가 입상하자 그것을 축하하며 쓴 시라고 추정된다. 이규보의 이러한 축하의 시는 왕·태후·동궁, 최충헌·최우 부자, 금의·최종준 등 현직자들, 문선사(文禪師)를 비롯한 지기나 이수(李需)와 같은 후진들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번에는 칭송을 주제로 한 시를 살펴보자. 다음 시는 '태후전춘첩자(太后殿春帖子)'라는 이례적으로 왕실의 여성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이다.

發生雖帝力        (발생수제력)        발생은 비록 임금의 힘이나
亭育本坤元        (정육본곤원)        양육은 본래 태후의 덕이라네
文母仁風照        (문모인풍조)        태사의 인풍처럼 온화해서
剛添氣候暄        (강첨기후훤)        강직한 데에 따스한 기운을 더하였네.

  위의 시는 강종(康宗)의 비( )인 원덕태후(元德太后)를 대상으로 읊은 시이다. 이규보는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태후를 주 문왕의 비에 견주면서 동양의 이상적인 여인상인 외강내유형(外剛內柔型)의 인품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규보는 태후뿐만 아니라 기녀의 재색과 풍류를 칭송했던 시를 썼었다. 그랬던 이규보임을 생각해 보면 이규보의 이 칭송시는 경하시보다 더욱 다채롭고 진실한 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2)  몽 환 시 ( 夢 幻 詩 )
  몽환시란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읊은 시들을 가리킨다. 이 시들은 이규보의 신선사상과도 연관성이 있어 비록 양은 적지만 꼭 다뤄야한다. 이규보의 꿈 이야기나, 혹은 자호(自號)를 백운거사라고 한 것이나, 시화에서 '고고(高古)'등을 취한 것이 있는 점들을 종합한다면 선교적 사상이 농후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환몽시 자체가 남아 있는 양도 너무 적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는 몇 안되기에 몽색부분과 몽선부분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려 한다.

①  몽 색 시 ( 夢 色 詩 )
  꿈속에서 있었던 정사를 읊은 시들이다. 이중 이규보는 스스로 삼마시(三魔詩)를 쓰고 그 중에서도 색마시(色魔詩)를 수위에 둘 정도로 호색 적인 면이 있었던 듯 싶다. 그의 말년의 작품 중 '몽여미인희각이제지(夢與美人 覺耳題之)'는 꿈속에서 만난 미녀에 대한 정회를 읊었다.

我年七十四        (아년칠십사)                내 나이 일흔 넷이니
久斷衾中事        (구단금중사)                방사를 끊은 지 오래인데
云何夢魂中        (운하몽혼중)                어찌해서 꿈속에서
偶與美人         (우여미인희)                우연히 미인과 희롱했을까
        <중 략>
毋謂此眞心        (무위차진심)                이 마음을 참이라고 이르지 말라
生死或有異        (생사혹유이)                생과 사가 혹시 다를지도 모른다네

  그가 임종을 반년 정도 앞두고 이런 꿈을 꾸었다는 점이 실로 이채롭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집념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위차진심"이라고 변명 비슷하게 말한 구절에서도 그 방증(傍證)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②  몽 선 시 ( 夢 仙 詩 )
  이규보가 꿈에서 선경을 다녀왔거나 선인과 만났던 이야기를 읊은 시이다. 이러한 시들은 꿈 현실이나 꿈 중간상태 현실의 내용 구조를 갖고 있다. 이규보는 그의 시 '경자십이월일몽승천(庚子十二月日夢升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전        략>
仙凡一瞥中 (선범일별중)        선경과 속세가 눈 깜짝할 사이일세
夢覺若等觀 (몽각약등관)        꿈과 생시를 한가지로 본다면
眞箇到珠宮 (진개도주궁)        진실로 천궁에 갔던 것이리라
        <후        략>

  죽음을 불과 구개월 정도 앞두고 쓰여진 이 시는 운명에 대한 예감(豫感)과 생사에 대한 잠재적 심리가 꿈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환몽시가 일반적으로 갖는 유형인 현실 꿈 현실의 구조가 비약(飛躍)되어 꿈 현실로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가 이렇게 선인시를 쓰고 말년에 선교적 사상에 빠져든 이유는 분분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이규보가 선계에 대해 집착했던 이유는 사회적인 불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자기 개인적인 불우에 연유되었다. 비록 그가 후기에는 문관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화를 누리긴 하였으나, 최충헌의 총애를 받기 전인 46才 때까지는 매우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처럼 출세욕이 왕성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을 신선이란 초인환상에 의해서 자위(自慰)한 것이다.

(3) 생 활 시 ( 生 活 詩 )
  이규보는 빈한한 가문에서 입신하여 어려운 시대에 생을 영위했던 탓인지 현달(顯達)한 만년에까지도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자주 병고에 시달렸음을 그의 작품 여기 저기에서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표출시킨 것이 생활시이다. 생활시는 그 성격상 다시 생계시와 병고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중 빈한시와 실의시는 생계시에 포함할 수 있고, 와병시와 요양시는 병고시로 포함시킬 수 있다. 이번에는 생계시와 병고시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빈한시와 와병시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①  빈 한 시 ( 貧 寒 詩 )
  가난의 서러움과 괴로움을 읊은 시이다. 이러한 작품은 전 생애를 통해서 간헐적(間歇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은연(隱然)중으로 청빈(淸貧)의 미덕(美德)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시 '고한음(苦寒吟)'은 이십대 시절의 생활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吾非孔墨賢                     (오비공묵현)           내 공묵과 같은 어진 이가 아니거나
胡爲突不黔兮席不暖  (호위돌불검혜석불난)  어찌 굴뚝이 검지 않고 자리 따스하지 않으랴
妻兒莫啼寒                    (처아막제한)           아내와 아이야 춥다고 울지 말라
吾欲東伐若木燒爲炭   (오욕동벌약목소위탄)  내 약목을 베어 와 숯을 만들어서
灸遍吾家乃四海        (구편오가내사해)           우리 집과 온 천하를 따뜻하게 해서
臘月長流汗                 (납월장류한)           섣달에도 항상 땀을 흘리게 하리라.

  이십대 무렵의 작품인 탓인지, 빈한(貧寒)의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거창한 포부(抱負)로까지 확산(擴散)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②  와 병 시 ( 臥 病 詩 )
  와병 중의 고통과 실의, 허무의식 등을 읊은 시이다. 안질을 소재로 한 시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안질이 심해지자 마침내 최우에게 특효약으로 알려진 용뇌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상수단에도 불구하고 안통이 완치되지 않자 그는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는 비통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병안미간화유탄(病眼未看花有嘆)'을 보면 그러한 심정이 잘 나와 있다.

病是天之爲        (병시천지위)        병은 하늘이 한 일이지
看花誰所破        (간화수소파)        꽃구경을 누가 못하게 했겠는가
天旣不吾憐        (천기불오련)        하늘이 이미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니
春亦孤負我        (춘역고부아)        봄도 또한 외롭게 나를 저버린 것이야
已有開花權        (이유개화권)        하늘은 이미 꽃 피우는 권능은 있으면서
開目何未可        (개목하미가)        어찌 내 눈을 고쳐주지 못하는가

  실의와 절망감이 비감하게 토로되어 있다.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독서와 시작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매우 괴로워했다. 자신의 눈을 고쳐 주지 않는 하늘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가득하다.

(4)  정 회 시 ( 情 懷 詩 )
  정회시는 그 성격상 가장 다양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희노애락의 정서나 회포를 읊은 시들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이 정회시는 이규보의 시 전체에 있어서 영물시(詠物詩)나 交流詩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양도 많은 만큼 그것의 분류도 어렵다. 여기서는 자족시와 탈속시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①  자 족 시 ( 自 足 詩 )
  중심 내용은 긍부(肯負)나 득의(得意)이다. 이것을 다시 세분하자면 자위적 자족, 시재(詩才)에 대한 자부(自負)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규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와 자존심이 매우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 특히 시작(詩作)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심한데, 그것이 가장 잘 들어 나는 시는 그의 생이 마감되던 신축년(辛丑年)(1241년, 74才)에 쓴 '말유여지우이일절기지(末有餘紙又以一絶寄之)'에서 그대로 나타나 있다.

多少詞人和我詩        (다소사인화아시)        보통의 시인들은 나와 시를 겨룰 때
數篇成了竪降旗        (수편성료수항기)        몇 편을 짓고는 으레 항복의 기를 꽂았는데
嘉君痛礪鋒 銳        (가군통려봉망예)        그대는 칼날을 날카롭게 갈고 갈아
百戰場中輒出奇        (백전장중첩출기)        수많은 전쟁 중에서 기이한 솜씨 보였구려

  만년에 이규보가 아꼈던 후배인 이수에게 준 시이다. 그는 『동국이상국전집』의 서를 쓸 만큼 이규보와의 교분이 깊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요지는 후배에 대한 칭찬인 듯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시재에 대한 자족감이라고 볼 수 있다.

② 탈 속 시 ( 脫 俗 詩 )
  탈속적 주제의 작품들은 다시 일상적인 物外閑情을 읊은 것, 실직이나 치사(致仕) 후의 한가함을 노래한 것, 속기(俗氣)를 극기하려는 심정을 읊은 것, 타인의 탈속적 생활을 부러워한 것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후에 선교적 사상에 심취했던 그의 삶과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 임을 감안하면 탈속시가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수차이선(睡次移船)'은 이규보의 이러한 의식이 자세하게 들어 난다.

晴湖浪靜枕眩眼 (청호랑정침현안)        맑은 호수에 물결 잔잔한데 팔을 베고 졸다가
不覺 工已放船 (불각고공이방선)        사공이 이미 배를 띄운 것을 깨닫지 못했네
夢罷回頭沙岸異 (몽파회두사안이)        꿈 깨어 머리를 돌리니 다른 모래 언덕인데]
忽驚移繫綠楊邊 (홀경이계녹양변)        푸른 버들 가에 옮겨 맨 것에 홀연히 놀랐네

  29才 때에 '경사(京師)의 난(亂)'을 피하여 상주에 갔을 때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읊은 시이다. 난세(亂世)에, 더구나 한열병(寒熱病)까지 겹친 이규보였지만, 그는 이 무렵을 '강호(江湖)의 락(樂)을 얻은 때'라고 읊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탈속의 정서는 풍류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무료감(無聊感)으로 볼 수 있다.

(5)  환 로 시 ( 宦 路 詩 )
  이규보의 추관의 목적은 자신의 영달, 포부의 실현을 통한 보국(輔國)의 도모, 불후(不朽)의 성예(聲譽) 보전 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관직이야말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도구라고 그는 믿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은 所信詩이다.

①  소 신 시 ( 所 信 詩 )
  이규보가 관직을 수행하면서 품었던 소신을 읊은 시들을 所信詩라고 한다. 관직생활의 좌우명 등이 들어 있는 이 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시를 하게 되었다. 이 소신시들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이규보의 마음이 깊이 배어 있다. 하지만 이규보가 청백리의 반열에 들 수 있다는 것에는 의문이 든다. 그래도 그는 특히 만년으로 올수록 청빈의 미덕을 자긍하곤 했다. 그의 많은 생활고를 읊은 시들이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의 장년기(46才)에도

我生無點累 (아생무점누)        내 평생 조금도 누라고는 없어
自負心地淸 (자부심지청)        스스로 깨끗한 마음 자랑했다네

라고 청정의 실현을 자임했던 것이다.


5)  도 덕 시 ( 道 德 詩 )

  도덕시란 가정이나 사회생활, 혹은 환로생활(宦路生活)에 있어서 준수하고 지향해야 할 덕목들을 읊은 시들을 지칭한다. 이규보의 도덕시를 권면시(勸勉詩)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권면시(勸勉詩)란, 처세의 지혜와 생활 향상의 도모를 권유(勸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을 가리킨다. 그 대상은 주로 자녀들이나 후생(後生)들로 되어 있다.
  
  '兒三百飮酒(아삼백음주)'는 아들에게 금주(禁酒)를 권하는 내용의 시이다.

一世誤身全是酒 (일세오신전시주)  일생을 몸 망친 것이 오로지 술인데
汝今好飮又何哉 (여금호음우하재)  지금 너마저 좋아함은 또 무엇인가
命名三百吾方悔 (명명삼백오방회)  삼백이라 이름 지은 걸 방금 뉘우치노니
恐爾日傾三百杯 (공이일경삼백배)  날로 삼백 잔씩 마실까 두려웁구나

  어린 아들이 어쩌다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장난기 섞인 내용으로 훈계(訓戒)하고 있다. 이규보가 음주벽(飮酒癖)이 심했던 것을 감안해 볼 때, 자식에게 주는 첫 시가 금주(禁酒)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하겠다. 이 시에는 이십대의 호방성(豪放性)이 그대로 번득이고 있다. 이처럼 젊은 날에 이미 술의 병폐를 인지하고서도 평생을 통하여 애주가(愛酒家)로 일관한 것도 바로 이 호방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가 아들에게 준 두번째 시인 '囑諸子(촉제자)'에는 청렴(淸廉)의 미덕(美德)이 강조되어 있다.

家貧無物得支分 (가빈무물득지분)  집이 가난하여 나누어 줄 물건은 없고
唯是    老瓦盆 (유시점  로와분)  오직 대그릇, 표주박과 낡은 질그릇들 뿐이다
金玉滿    手散 (금옥만    수산)  광주리 가득한 금과 옥은 쓰다보면 그 뿐
不如淸白付兒孫 (불여청백부아손)  자식들에게 청백을 부탁함만 못하리라

  그가 평생을 한결같이 생활화했던 덕목은 바로 이 청백(淸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만년(晩年)의 생활훈이 바로 이 시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권면시의 정수(精粹)는 '辛丑三月送長子以洪州守之任有作(신축삼월송장자이홍주수지임유작)' 이라고 할 수 있다.

桑楡景云迫 (상유경운박)  죽음이 가까워 온 이 나이에
泣別阿兒涵 (읍별아아함)  울면서 아들 함을 작별하네
問汝向何處 (문여향하처)  너에게 묻노라, 가는 곳 어디냐고
杳杳天之南 (묘묘천지남)  아득한 남쪽 지방이라네
    
專城雖汝榮 (전성수여영)  태수가 된 너는 무한한 영광이지만
此別吾何堪 (차별오하감)  이 작별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랴
安有大 翁 (안유대모옹)  칠십이 넘은 늙은이가
留待期年三 (류대기년삼)  어찌 삼년간의 기한까지 살 수 있으랴
懸知是永訣 (현지시영결)  이것은 분명히 영원한 이별이니
痛絶那容談 (통절나용담)  애통한 마음 어찌 말로 다하랴
好去好還朝 (호거호환조)  잘 갔다가 조정에 잘 돌아와서
公府坐潭潭 (공부좌담담)  나라의 중신(重臣)이 되어라
毋或휴家聲 (무혹휴가성)  부디 가문의 명성 떨어뜨리지 말고
人許某家男 (인허모가남)  아무개 아들답다는 칭찬 들어야 하느니라
眼前雖未見 (안전수미견)  생전에는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地下豈不  (지하기부암)  죽어서야 어찌 알아보지 못하랴
淸白是第一 (청백시제일)  청백이 제일이고
其次愼而謙 (기차신이겸)  그 다음은 삼가고 겸손하는 것이니라

  이 시는 그의 나이 74세 때의 작품으로, 인생을 정리하면서 토로(吐露)한 인생관 내지 처세관의 집약(集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생동안의 좌우명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시의 핵심어는 청백(淸白)과 신겸(愼謙)이다. 종명(終命)을 앞둔 인간의 본원적 감상(本源的 感傷) 위에 부모로서의 자상함과 현직(顯職)을 지냈던 공직자적 충언(公職者的 忠言)이 간곡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음은 이규보의 도덕시 중 메마르고 혼탁한 세심(世心)에 주목한 '路上棄兒(로상기아)'이다.

虎狼雖虐不傷雛 (호랑수학부상추)  호랑이가 사납다지만 제 자식은 다치지 않는데
何 將兒棄道途 (하구장아기도도)  어느 아낙네가 길가에다 아이를 내버렸나
今歲稍壤非乏食 (금세초양비핍식)  금년은 풍년이 들어 양식 걱정 없을텐데
也應新嫁媚於夫 (야응신가미어부)  응당 개가한 여자가 남편에게 잘 보이려 했겠지

  57세 때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이 시는 당시의 궁핍(窮乏)과 문란(紊亂)을 반영해 주는 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어느 무심한 모정(母情)을 고발하고 있다. 이 시기는 거란족 침입의 여파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였고, 몽고의 대대적인 핍박이 준동(蠢動)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 무렵의 인류의 타락과 성의 무절제까지를 나타내주고 있다고 하겠다.


6)  사 유 시 ( 思 惟 詩 )

(1)  사유시의 개념
  사유시(思惟詩)라 함은 철학적 단상이나 종교적 사념(宗敎的 思念)을 주제로 한 시들을 지칭한다. 사유시는 소주제에 따라 논단(論斷), 번고(煩苦), 이법(理法), 찬불(讚佛), 탈속(脫俗), 탐구(探究)로 분류할 수 있다.

(2)  논 단 ( 論 斷 )
  논단시(論斷詩)란 자신의 소견을 논리적으로 주장하거나 평소의 시론(詩論)을 강조하는 내용의 시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에는 주로 색채(色彩)에 대한 소견, 심신(心身)에 대한 이원적(二元的) 중요성, 종교의 등가성(等價性) 등의 문제들이 언급되고 있다.
  색채에 대한 시 중에서 백색(白色)에 대한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백색을 읊은 시로는 자선 '차운박기주문수시랑수화영백시(次韻朴起注文需侍郞需和詠白詩)'를 들 수 있다.

       전략(前略)
下布門誠壯 (하포문성장)  포의(布衣)를 면하니 가문(家門) 진실로 번성하고
飛劉水自靈 (비류수자영)  도끼가 나오면 물은 스스로 영험해
浣溪紗稱軸 (완계사칭축)  시내에 빤 비단을 명주라 칭하고
淘 石宜  (도은석의형)  물결에 씻긴 돌은 숫돌로 쓰기 좋네
食  駒堪熱 (식연구감열)  콩잎 먹는 머리는 백마(白馬) 매어 두어야 하고
嗚皐鶴可廳 (오고학가청)  언덕에서 우는 학의 소리 들을 만하네
牛  沸鼎 (우수미비정)  우유죽은 솥에서 끓어오르고
人面酒 甁 (인면주발병)  인면주는 병에 가득 담겨 있네
司馬稱呼鄙 (사마칭호비)  백사마라는 칭호가 비루하다고
何須更孟靑 (하수경맹청)  어찌 모름지기 맹청으로 바꾸겠는가

  이 시에 사용된 소재들은 원론적인 것에서 자연(自然), 인사(人事), 생필품(生必品), 기호물(嗜好物)에 이르는 다양한 것들이며, 어휘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전고(典故)의 남용을 볼 수 있다. 이 시에서의 백색은 다양한 고사(故事)나 존재의 배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3)  번 고 ( 煩 苦 )
  번고시(煩苦詩)는 일상적 쇄사( 事)가 주는 고충(苦衷)에서부터 본원적(本源的) 번뇌에 이르는 갈등(葛藤)이나 실의(失意), 애로(隘路) 등을 읊은 시들이다.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① 육신적 고충(苦衷) ② 인생과 현실에 대한 실의나 갈등(葛藤) ③ 오도적(悟道的) 번민(煩憫) 등으로 다시 세분(細分)될 수 있다. 이규보가 지향하는 내면의 세계가 암시적으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십이월이십육일장입위도범주(十二月二十六日將入 島泛舟)'는 육신의 고충(苦衷)을 읊은 시이다.

半夜舟人久因風 (반야주인구인풍)  밤중에 사공이 풍랑으로 시달리어
醉中驚起訴天公 (취중경기소천공)  취중에 놀다 이어나서 하늘에 빌었네
靈胥有意今方   (영서유의금방험)  영서의 뜻 있음을 이제 경험하여
退却孤臣一器中 (퇴각고신일기중)  고신의 한번 울음으로 물리쳤네

  위의 시는 이규보의 생애(生涯) 중 단 한번 유배당했을 때에 쓰라린 체험(體驗)을 읊은 것이다. 이규보는 이 시에서 육신의 위기가 곧 바로 자신의 파탄(破綻)을 의미하며, 이러한 운명적 사실(事實)은 인간의 힘이 아닌 절대자(絶對者)의 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절대자인 천(天)에 대한 그의 인식은 고대 동양인들이 지녔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4)  이 법 ( 理 法 )
  이법(理法)시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인식이나 자연현상에 대한 관점을 읊은 시들을 지칭한다.
'투화풍(妬花風)'은 바람과 꽃의 관계에서 자연의 이법(理法)을 읊고 있다

       전략(前略)
鼓舞風所職 (고무풍소직)   바람의 직분은 만물을 고무하는 것
被物無私阿 (피물무사아)   만물에 입히는 공덕은 차등이 없다네
惜花若停  (석화약정파)   만일 꽃을 어찌 길이 자랄 수 있겠는가
其奈生長何 (기내생장하)   그 꽃이 어찌 길이 자랄 수 있겠는가
花開雖可賞 (화개수가상)   꽃 피는 것도 비록 가상하지만
花落亦何嗟 (화락역하차)   꽃 지는 것이 또한 슬플 것이 없네
開落總自然 (개락총자연)   피고 지는 것이 모두 자연인데
有實必代華 (유실필대화)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꽃을 낳는다네
莫問天機密 (막문천기밀)   하늘의 오묘한 이치를 묻지 말고
把盃且高歌 (파배차고가)   술잔 잡고 더욱 소리 높여 노래 부르세

  자연의 미묘한 이치를 읊었다. 생사가 다 자연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또 신비스러운 자연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攝理)앞에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일뿐더러, 그런 변환(變換)에 관여하거나 시비를 논할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5)  찬 불 ( 讚 佛 )
  찬불(讚佛)시란 불타(佛陀)나 보살(菩薩)의 공덕(功德)을 칭송하는 내용, 혹은 불력의 영험(靈驗)을 믿거나 간구(懇求)하는 내용의 시를 지칭하고자 한다. 찬불(讚佛)시의 주종은 불력(佛力)에 의한 호국(護國)의 기원과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들이다.
  '대장경급소재도장음찬시(大藏經及消災場音讚詩)'는 왕명에 의하여 지어진 시로서 강화천도 직후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대장경도장음찬시(大藏經場音讚詩)'의 첫 수(首)는 다음과 같다.

殘寇虛張採色軍 (잔구허장채색군) 굶주리고 잔혹한 도적들 부질없이 설치는데
吾皇專倚玉毫尊 (오황전의옥호존) 우리 임금님 오로지 부처님 힘만 믿으시네
若敎梵唱如龍吼 (약교번창여룡후) 저 범패 소리를 용의 울부짖음과 같게 한다면
寧有胡兒不塵奔 (녕유호아불진분) 어찌 오랑캐가 사슴 달아나듯 않으랴
藏海徵言融乳酪 (장해징언융유락) 장해의 은미한 말은 우유처럼 부드럽고
叢林深旨辨風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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