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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병계열과 애국계몽운동계열이 결합한 충절의 고장 창평
처음부터 필자 얘기를 꺼내 조금 그렇다. 필자의 딸이 8년 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고향에 데리고 갔다.
나이 든 친척을 만났는데 딸 손을 잡으며 “왕대밭에 왕대가 나온다”라는 말을 하며 기뻐한 것이 눈에 선하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쫄대 밭에 쫄대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훌륭한 가문에서 위인들이 태어남을 말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나다니엘 호돈의 ‘큰바위 얼굴(원제, Great Syone Face)’도 큰 바위 상(像)을 바라보며 꿈을 키운 소년의 얘기이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키우는 표상의 중요함을 말해준다.
우리 지역 명문가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담양 창평 장흥 고씨 가문을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 이 가문은 우리나라 대표적 명문가이다.
이 가문의 상징적 인물은 임진 의병에 빛나는 고경명이다.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그는 왜군이 침략해오자 나주의 김천일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왕실을 보위하려 북상하다
금산 전투에서 그의 차남 인후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부친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장남 종후 또한 ‘복수의병’을 조직하여 진주성을 사수하다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고경명 삼부자의 충절은 호남 의리 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한편 고인후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들은 창평에 있는 외가에 맡겨졌다.
이들이 가문의 역사를 새롭게 일구어 ‘창평 고씨’로 거듭났다.
창평 고씨의 충절을 빛낸 이는 한말 의병을 빛낸 녹천 고광순 의병장이다.
일본군과 싸울 때 ‘불원복(不遠復)’ 글씨가 적힌 태극기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그는,
장흥(창평) 고씨 유림세력이 강하게 뿌리를 내린 창평 출신이다.
1895년 일본이 명성왕후를 살해하는 만행(을미사변)을 저지르자 장성 유림 기우만과 의병을 일으켰으나 국왕의 해산 권고에 따라 중단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 의병을 일으킨 고광순은, 1907년 1월 고제량, 고광훈, 고광채 등 문중들과 함께 화순, 능주, 광주 지역을 누비고 다니며 일본 정규군과 치열한 무장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일본과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이른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꾀하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고광순 의진(義陳)에 참여한 수많은 창평, 담양 출신 의병들도 함께 민족의 제단에 기꺼이 피를 뿌렸다. 연곡사 입구에 그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이 있고, 고향 창평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포의사’ 편액이 있는 사당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본 이들은 이 편액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역사를 당대가 아닌 후대의 눈으로 해석하면 진실이 왜곡된다는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작금의 역사 인물에 대한 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05년 가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은 일본과 전면적인 투쟁에 나섰다. 이때 투쟁 방략은 무장투쟁인 의병 항쟁과 실력을 기르자는 애국계몽운동의 두 갈래로 나뉘었다. 전자는 주로 위정척사운동 계열의 유생들이 주도한 반면, 후자는 개화사상을 지닌 지식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상대의 투쟁 방략에 대한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며 민족운동을 하나로 전개하였던 곳이 창평이었다. 창평이 지닌 역사성이라 하겠다.
의병 전쟁의 중심지였던 창평은, 근대 민족 교육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였다. 광주와 인접한 탓으로 근대문물 수용이 빠른 탓이기도 하였지만, 이와 무관하게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은 이미 시대의 변화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곧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실력을 기른 것이 국권 수호의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출신 고정주가 세운 ‘영학숙(英學塾)’이 대표적인 예이다. 영학숙은 1906년 4월 춘강 고정주 선생이 오늘날로 말하면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교육 운동을 전개하며 세운 학당이다.1)
“을사조약을 체결한 대신들은 매국을 한 적(賊)”이라고 하며 관직을 내려놓았던 그는, “구차한 선비가 되지 마라. 반드시 고금과 사리에 두루 통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력을 갖춘 인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확고한 교육관을 지녔다. 송진우·김병로 등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인물들이 이 학교 출신인 것은 이러한 학풍 때문이었다. 이 학교 출신들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 독립을 위한 다양한 투쟁에 앞장섰다.
이처럼 고정주는 고광순이 무장 항쟁을, 고정주는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같은 시기, 같은 고을, 같은 문중에서 우리 민족이 취한 두 방략을 동시에 수행하며 국권을 찾으려 한 점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창평이 지닌 지역적 특성을 주목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렇듯 창평은 일제의 국권 피탈에 맞선 대표적 충절의 고장이었다. 의병 전쟁이 치열하여 보성, 곡성, 장성, 함평, 남평과 더불어 ‘삼성 삼평’의 하나로 불렸던 창평은, 일제가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창평면으로 격하하여 인근 담양군에 속하게 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남평군 역시 면으로 격하되어 나주군에 편입되었다.
일제는 행정구역을 격하시켜 항일의지를 꺾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창평인들은 일제에 더욱 치열하게 맞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담양 지역에서는 3·1운동 때 모두 여섯 차례 1,8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창평까지 포함된 이 통계는 1919년 당시 사실의 반영이지만, 담양·창평지역에서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음을 반영한다. 담양읍내의 만세 시위는 정기환 등이 주도한 만세 시위가 판결문에 나와 있어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담양에서 일어났다는 여섯 차례 가운데 창평지역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나, 아직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창평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사실은, 이듬해인 1920년 1월 23일 한익수, 조보근 등이 한봉준, 전길환 외 9명을 규합하여 창평면 창평리에서 시위를 일으켰다고 판결문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이들이 대형, 소형 태극기 33매를 제작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시위 규모는 수십 명에 달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들 가운데 조보근이 징역 1년, 한익수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한봉준과 전길환 등 10여 인 역시 시위 주동 집단에 속한다고 여겨진다. 이들의 구체적인 양상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이 시위로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이는 한익수 1인뿐이다.
의병계열과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민족운동이 결합하여 형성된 창평지역의 항일의식은, 개성과 함께 일본 상인이 발붙이지 못한 대표적인 곳이었다는 빛나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창평인의 항일의식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이 지역 출신이 앞장서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창평 출신 학생운동의 주역은 단연 1928년 유명한 대맹휴 사건을 이끈 고인석이 있다. 고인석 외에도 같은 집안인 고광신과 박무길 역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같은 집안 고재천은 수원고등농업학교 재학 당시 ‘건아단’ 등 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2. 대맹휴 주동자 고인석
오늘은 이들 가운데 고인석의 빛나는 항일운동의 궤적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필자가 고인석을 다루려는 까닭은, 최근 전라남도 교육청의 도움으로 독립운동가 출신 교사들의 삶을 다룬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2021, 전남교육청)라는 책을 편찬할 때 다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을 펴낼 때는 그에 대한 삶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 비교적 짧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그에 관한 자료 및 후손을 만나면서 그의 삶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임진 의병장 고인후의 직계 14손이자 한말 의병장 고광순의 후손으로, 고인석은 1909년 3월 15일 창평군 창평면 창평리 19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대한제국의 운명이 사실상 꺼져가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에 맞선 의병 전쟁이 창평을 비롯하여 전남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태어난 순간 나라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숙명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가 자아를 느끼는 청소년기에 곧장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부친 재열은 천석꾼이었다고 한다. 재열은 천석꾼이었지만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의병,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의 지사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아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인석은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에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빛나는 임진 의병 전쟁을 이끈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그리고, 한말 의병장 고광순 등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집안의 내력을 들으며 일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키웠다. 그는 늘 이러한 집안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특히 고정주가 세운 영학숙이 토대가 된 창평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선각자적 안목을 지닌 집안을 더욱 존경하였다.
인석은 1918년 그가 9세 되던 해 고향에 있는 창평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시절 겪은 3·1 만세운동과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정책은 그의 투철한 항일의식 형성에 중요한 토대였다.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정책의 하나인 일본인 보통학교 6년, 한국인 4년제 교육과정이 1922년에 이르러 한국인도 6년제를 적용하면서 1925년 3월 졸업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호남의 인재를 기르기 위해 이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세운 후 공립학교로 전환한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광주고보’에는 이 지역의 수재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영재들은 누구보다 일제 식민 지배의 모순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1920년대 중반부터 독서회 등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식민 지배체제에 조직적으로 나선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26년 11월 3일 장재성 등이 결성한 비밀결사 ‘성진회’가 대표적이다. 고인석이 고보 2학년 재학 중일 때였다. 고인석이 성진회에 참여하였다고 후손들이 작성한 국가보훈부에 제출한 공훈록 자료에 들어 있으나 판결문 등에서는 확인이 되고 있지 않다.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고 피신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공식 기록에 나오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부분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성진회가 일본 경찰에 노출되자 곧 위장 해체를 하면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 등 광주의 중등 교육기관에서는 ‘독서회’ 등의 이름으로 항일 비밀조직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항일의식이 조직화되고 있었다.
1928년 4월 11일 광주 송정 출신으로 광주고보 5학년에 재학 중인 이경채2)가 일제의 식민 지배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삐라 사건을 일으키면서 촉발된 광주고보 등의 항일 시위에 고인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그의 삶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이경채 사건’이다.
광주고보 5학년 재학 중인 이경채는 1928년 4월 11일 ‘선언서’라는 제목의 식민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삐라를 제작하여 광주역 앞 파출소, 광주고보 앞 전주, 송정리 역 앞 등 여러 곳에 부착하고, 이틀 후인 13일 밤 다시 그 삐라를 전남도내 각 중등학교 및 경찰서 등 19곳에 우편 발송하는 대담한 행동을 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식민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경채가 체포된 것은 2개월 후인 6월 초였다.
학교 당국은 이경채가 체포되자 아직 사건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이경채 부친을 학교로 불러 퇴학 처분을 통고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동요하며 이경채의 퇴학 철회 요구를 하며 조직적으로 반발하려 하자 학교 당국은 주동자 및 적극 가담자에 대한 퇴학 등의 중징계를 내렸다. 이때의 사정은 당시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피고 정동화(鄭東華)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제5년생, 피고 임주홍(林周弘), 변진설(邊鎭契), 박세영(朴世英), 이만동(李萬童), 서재호(徐在晧)는 동(同) 제4년생, 피고 최규창(崔圭昌), 김기권(金基權)은 동(同) 제3년생이다. 그런데 소화(昭和) 3년 6월 중, 제5학년생 이경채(李景采)가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사건의 피의자로 검거되어 퇴학 처분에 부쳐진 후, 그 결과 동(同) 제5년생 일동(一同)은 동교(同校) 백정(白井) 교장에 대해 이경채(李景采)의 복교(復校) 운동을 하였으나 귀담아듣지 않음에 의해 동(同) 교장의 태도에 불평을 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同) 제2, 3, 4년생과 함께 동맹휴교를 할 것을 계획하였고, 동월(同月) 26일 동(同) 교장에게 동교(同校) 장곡천욱(長谷川旭) 외 6명의 교사의 사직, 또는 반성을 요구하고, 기타 조선인 본위의 교육의 실현 및 이경채(李景采)의 복교 사항에 관한 사항을 기재한 진정서를 제출한 채 동맹휴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이튿날 27일 피고 정동화(鄭東華), 변진설(邊鎭契) 등 27명을 퇴학 처분, 피고 박세영(朴世英), 이만동(李萬童), 서재호(徐在晧), 김기권(金基權) 등 281명을 무기정학 처분에 부치고, 피고 임주홍(林周弘), 최규창(崔圭昌)에 대해 임시정학을 명(命)하였다.”
피고 정동화(鄭東華)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제5년생, 피고 임주홍(林周弘), 변진설(邊鎭契), 박세영(朴世英), 이만동(李萬童), 서재호(徐在晧)는 동(同) 제4년생, 피고 최규창(崔圭昌), 김기권(金基權)은 동(同) 제3년생이다. 그런데 소화(昭和) 3년 6월 중, 제5학년생 이경채(李景采)가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사건의 피의자로 검거되어 퇴학 처분에 부쳐진 후, 그 결과 동(同) 제5년생 일동(一同)은 동교(同校) 백정(白井) 교장에 대해 이경채(李景采)의 복교(復校) 운동을 하였으나 귀담아듣지 않음에 의해 동(同) 교장의 태도에 불평을 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同) 제2, 3, 4년생과 함께 동맹휴교를 할 것을 계획하였고, 동월(同月) 26일 동(同) 교장에게 동교(同校) 장곡천욱(長谷川旭) 외 6명의 교사의 사직, 또는 반성을 요구하고, 기타 조선인 본위의 교육의 실현 및 이경채(李景采)의 복교 사항에 관한 사항을 기재한 진정서를 제출한 채 동맹휴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이튿날 27일 피고 정동화(鄭東華), 변진설(邊鎭契) 등 27명을 퇴학 처분, 피고 박세영(朴世英), 이만동(李萬童), 서재호(徐在晧), 김기권(金基權) 등 281명을 무기정학 처분에 부치고, 피고 임주홍(林周弘), 최규창(崔圭昌)에 대해 임시정학을 명(命)하였다.”
학교 당국이 6월 27일 정동화, 변진설 등 27명을 퇴학 처분하고, 박세영 등 281명에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음을 판결문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반발하여 1학년을 제외한 2, 3, 4, 5학년 전체 학생이 동맹휴학(盟休)에 나섰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7월에 ‘맹휴 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 이때의 사정이 이경채의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1928년 7월 동맹휴교 때 다수 희생자(구속, 퇴학 학생을 말함)와 재학생 독서회원들과 장기 계획을 모의하였다. 시위할 때 제1선 학생진용이 체포되면, 제2선 학생진용이 앞으로 나가고, 제2선 학생진용이 체포되면 제3선, 그리고 제4선이 항쟁을 계승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투쟁 계획이 맹휴 중앙본부를 통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1929년 11월 3일,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된 11월 12일의 대항쟁이 가능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이경채 사건 등 이후의 학생운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록이 최근 발굴되었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인 조용표는 고보 재학 시절 매일매일 얘기를 일기로 정리하였다. 그의 일기를 통해 이경채 사건 이후부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까지의 고보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생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3)
조용표의 일기에 따르면, 이경채가 퇴학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 가운데 이경채와 가까운 동료, 선후배 학생들이 수감된 이경채를 응원하기 위해 이경채의 본가가 있는 송정리로 달려가 그곳에서 시위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을 눈치챈 경찰과 학교 당국이 현장에 달려가 시위를 제지하였는데, 이 과정에 고인석이 학교 당국에 붙잡혔다고 조용표 일기에 나와 있다. 고인석이 시위의 주동 집단을 형성하였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학교 당국이 처음에 퇴학 처분한 27명 가운데 고인석이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4) 고인석의 공훈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 있다. 고인석이 이경채 본가 있는 곳의 시위에 앞장섰다는 것은 이경채와 고인석 사이에 선후배 사이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학교 당국에 붙잡혀 퇴학 처분을 받은 고인석은, 경찰의 출두 요구를 받자 곧 도피하였다. 도피 과정 중에도 그는 결성된 ‘맹휴’ 중앙본부와 연결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경채 사건의 주동자임에도 끝까지 경찰에게 체포되지 않은 것은 동료들이 그를 보호하려고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광주고보에서 퇴학당한 인석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있다가 이듬해 서울에서 비교적 민족교육을 하고 있는 경신학교에 편입하였다.
역시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은 조용표도 경신학교에 편입시험을 치렀다. 조용표 일기에 보면 경신학교 시험장에서 고인석을 만났다고 한다. 고인석이 경신학교 시험을 치렀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신학교 1930년도 졸업생 명단에 고인석이 나와 있다. 곧 그가 4학년 재학 중에 퇴학 처분을 받았기에 1년 채 못 다니고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인석의 공훈록 자료에 고인석이 일본에 건너가 이경채를 만났다는 진술이 있다. 물론 이 부분은 고인석의 딸 증언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인석의 딸은 이경채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굳이 사실을 조작할 이유가 없다. 곧 생전의 고인석이 이경채와의 얘기를 하였음은 분명하다. 이경채는 1931년부터 1933년 4월까지 약 2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고인석이 이경채를 일본에서 만났다면 이 무렵의 얘기인데, 아마 경신학교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사이에, 일본에 건너가 이경채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고인석이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인석이 1938년 보성전문학교에 졸업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33년 무렵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창흥의숙을 나온 김성수와 집안과의 관계가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주오(中央)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운동 조직망을 결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석이 일본에 유학할 때 집안의 경제적 형편이 넉넉해 학비 부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경역 근처에서 구두수선을 하는 좌판대를 운영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고인석이 좌판 구두 수선대를 설치 운영한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는 수단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경채도 일본 망명시절 일본 노동자들의 항일운동을 엮으려고 페인트를 칠하는 방법을 배우는 모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유숙(留宿)한 친지의 증언에, 일본경찰청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있던 친지 고 재두를 비롯하여 유학생들과 자주 만나 독립문제를 의논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 거금 300원을 친지에게 빌려간 사실에서 그가 일본 유학생들과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그가 가져간 거금은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후손은 짐작하고 있다.
3. 교육 운동에 여생을 바치다
그는 일제 말 인천을 근거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공훈자료에는 그가 해방 후 귀국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필자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귀국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가 인천의 한 해운회사에 취업하였다는 후손의 증언 때문이다. 곧 그가 해운회사에 취업해 그곳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며 항일운동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해운회사를 나와 인천상업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해방된 조국의 민족 역량을 강화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교육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치적 혼란으로 그가 꿈꾸었던 교육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미군정청이 설립한 신한공사에서 친일 재산 처리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은 이유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적산 재산을 불하받아 부를 축적할 기회가 있음에도 그는, 사익을 전혀 취하지 않고 공정하게 임무를 처리하였다. 정부 수립 후 고향 창평으로 내려왔을 때 빈손으로 내려온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창평에 내려온 그는, 평생 꿈인 후학을 기르고자 ‘창평고등공민학교’를 세워 경제적으로 곤궁한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 헌신하다 1997년 작고하였다.
1965년 2월 9일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은 고인석은, 군사정부에서 주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사실이 군부 독재정권에서 가치가 퇴색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사후에 그의 공적을 인정받으려는 후손들은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보훈처는 결정문을 통해 ‘고인석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공적 사실은 뚜렷하나, 도일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라는 이유를 들어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각하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에 아들은 길고 외로운 싸움을 20여 년 동안 하였다. 국가기록원과 일본대사관·영국대사관·중국 상하이·하와이 등 세계 각국을 전전하며 아버지 기록을 찾았다. 그의 사후 21년 만인 2018년 8월에 마침내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그가 광주학생운동을 촉발한 다른 주동자 공적과 비교하면 낮은 격이다. 후손은 “보훈처는 한결같이 수 형 사실에만 기준을 두고, 독립유공자 선정 여부를 심사했다”라며 “독립운동에 대한 가치판단이 왜 수형 사실 하나에만 국한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이런 보훈 정책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현재 전라남도가 추진하고 있는 미서훈 독립운동자 발굴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필자가 갖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고인석 |
1) 낙향한 춘강은 어렸을 때 자기가 공부한 상월정(上月亭)을 수리하여 학당을 열었으니 곧 ‘창흥사립학교(영학숙)’였다. 이곳에서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뜻으로 영어의 英자를 첫머리자로 하여 영학숙으로 불렀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이표라는 귀화인을 서울에서 불러와 교육에 전념하게 하였다, 는데, 호남 지역의 대표적 근대교육의 도량이 되었다. 1908년 창평군 객사로 옮긴 영학숙은 1909년 4월 창흥학교로 개칭하고 1910년 2. 26. 창흥사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국권피탈 후인 1911년 창흥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창평초등학교의 전신이다.(담양 창평초등학교 연혁)
2) 이경채(1910-1974)는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맹휴(盟休)가 결성되게 한 인물이다. 학생운동은 1930년대의 노동, 농민운동을 비롯하여 1945년 해방 그 순간까지 독립운동이 이어지는 원동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3·1운동을 능가하는 위대한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운동의 촉발점이 이경채의 삐라살포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투옥된 이경채는 출감 직후 일어난 1929년 11월 12일의 제2차 광주 광주학생 운동을 계획하였고, 일본 망명 후 일본에서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조직 결성 및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활동, 한·중 연대 실천을 통해 독립을 찾고자 중국육군사관학교에 자진하여 입교한 후 중국군 장교로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중일전쟁의 대표적 전투인 ‘상해 크리크 전투’의 한복판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고인석 후손이 적은 공훈록 곳곳에 이경채와의 인연이 보인다. 아들 욱(광복회 광주지부장)은 이 얘기를 나이 많은 누이에게 들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경채 평전’(2023, 전남대 출판부)를 펴냈기에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인석의 독립운동에 더욱 관심을 두고 살피고 있는데 여러 정황 등이 양인의 관계 얘기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필자가 고인석을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3) 조용표는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수감되었고, 퇴학 처분을 받은 애국지사이다. 아직 미서훈자이고, 특히 광주고보 명예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공적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으므로 우선 명예졸업장을 학교 당국이나 동창회에서 서둘렀으면 한다.
4) 맹휴 주동자로 학교 당국이 최초로 징계할 때 퇴학 처분을 받은 27인 명단이다. “나봉현, 김부득, 정동화, 서두평, 이채래, 이종표, 유기화, 김영찬, 양병우, 김기수, 양병전, 허창두(이상 5학년), 고인석, 이대기, 김창주, 김시성, 최규창, 변진설, 김시철, 김재을, 최창진, 신도순(이상 4학년), 오쾌일, 정우채, 김병옥(이상 3학년). 박현규, 김시탁(이상 2학년)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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