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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5월14일 (백)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청주]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13,13-25
† 복음 : 13,16-20
★ 바오로 일행이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한다. 바오로 사도는 회당의 설교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이끄신 역사와 구세주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그 약속에 따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의
파견과 사명 수행은 당신의 파견과 사명 수행에 밀접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놀라움과 기쁨의 시간이 지난 뒤 과연
무엇을 먼저 하였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하신 말씀과 행동을
다시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처 몰랐던 그 안에 담긴 넘치는 사랑과
깊은 뜻을 점차 깨달았을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함께 감사함과 놀라움이
가슴속을 채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이성적으로 되짚어 보는 것이
아니라 격정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반추하는
시간을 통하여 조금씩 확신과 기쁨에 찬 부활의 증인으로 바뀌어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모습은, 그들이 참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떠올렸을 사랑의 사건일 것입니다. 그 모습을 묵상하니
신학생 시절 '내 발을 씻기신 예수'라는 성가를 부를 때마다 마음이 뭉클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앞부분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 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기셨다네."
제자들이 부활의 빛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어 주신 그 밤을
돌아보았을 때 그분께서 보여 주신 참된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족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삶, 곧 '이타적'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에 대한 증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신 모범을 보이신 것은 부활의 빛을 그들의 마음에
미리 심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삶과 성경 말씀의 만남을 통하여 부활의 빛을 이미 가슴속에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우리의 발을
씻으셨으며, 그로써 부활의 빛을 우리 안에 심으셨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 성경이 증언하는 부활의 빛으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보는 것이야말로 이 부활 시기에 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13,16-20)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 13,16-20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든 일을 감당할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인정한다면 세상이 여유로울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데 있어서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 곧 영을 받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이정도면
됐지 뭐 얼마나 더 어떻게 하란 말이야! 라는 속마음을 들켜서 부끄럽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뽑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느님 앞에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알면 안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롭고
기쁨도 충만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편하고 쉬운것만을 선택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2014년 가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2,16-20
제가 아는 형제님 중에서 운동 하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좋아하는데 땀 흘려 운동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싫어하시지요. 제가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저도 운동해요. 숨쉬기 운동.”이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 요즘 아주 열심히 운동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것도 가끔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하신답니다. 왜 그럴까요?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병원을 다니게 되었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거든요.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고 특히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오래 사실 수가 없어요.
여기서 더 나빠지면 의사인 저도 어떻게 하지 못해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운동을 열심히 하고, 또
생활습관도 많이 바꾼 것입니다.
미리 생활습관을 바꾸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갖기가 쉽지 않지요. 즉, 어려운
상황에 처해야만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교훈은 성공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실패를 통해 큰 상처를 얻기도 하지만, 이 실패 안에서
커다란 교훈,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겪는
‘엄청난 고통과 시련’들이 오히려 축복이며 은총도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인생이 공평한지 아닌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저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않으시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면서도 겪어야 할 그 치욕을 당신의 몸으로 모두 다
받아들이십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당신의 몸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지요. 직접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뒤에, 과연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인지를, 또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음도 이야기하십니다.
문제는 그러한 포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을
선택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과
사랑은 보지 못한 채 불평불만으로 일관된 모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잊지 않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정말로
행복한지 그 답을 스스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슬퍼하는 것만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슬퍼하면 된다. 하지만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새로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이다.
머리가 복잡하고 답답해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마냥 걸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걷던 중에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일기예보에는 흐리기는 하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이날은
안타깝게도 일기예보가 틀렸습니다.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비가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우산도 없고 비 피할 곳도
없는 상태에서 저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 걸을 수밖에 없었지요. 점점 몸이
추워지고 걷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든 고행임을 깨닫습니다. 그때 제일
생각났던 것이 어딜까요?
바로 제 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더군요.
‘왜 내 방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환경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바뀌어야 모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또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 자리가
새로운 일을 하는데 가장 쉬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리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자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새로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는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자리입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복잡한 문제를 풀겠다고 굳이 밖으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파견(소명)과 행복과 계시
2014년 가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는 것이다.>
복음 : 요한 13,16-20
< 파견(소명)과 행복과 계시 >
헨리 나우엔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톨릭 영성가입니다. 많은 책을 썼고
예수회 신부로서 예일대학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교수로서의
소명을 살아가던 도중, 그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열망으로 페루 빈민가 사목을 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요청이 들어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하느님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프랑스 한
장애인 공동체에서 피정에 참여해 달라는 편지가 온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강사로 초빙된 줄 알고 갔으나 알고 보니 대침묵 피정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장애인들을 돌보며 지낸 시간은 그의 나머지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단체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교수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느님의 선물일까요.”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이제 막 교수가 되어 일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갈등하기 시작하였지만 결국 그 부르심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캐나다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Day Break Community)
’라는 정신지체아 새 공동체의 지도자로 가게 됩니다. 공동체 식구는 6명,
그는 그 6명을 위해 하버드대학교 교수자리를 물리치고 그 공동체를 선택했고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그 공동체에서 일했습니다. 그가 대학교에서
선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을까요?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씁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화가... 이 놀라운 평화여,
자유여, 자유여.”
그리고 그는 그 정신지체아들로부터 자신이 치유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우리는 헨리 나우엔 신부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학에서 강의했다면 더 큰 일을 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신부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판단할 때, 자신 안에 느껴지는 ‘평화와
자유’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내 자신의
성소가 무엇인지 헛갈릴 때, 그 판단 기준으로 내 마음의 평화와 자유, 행복을
따라가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외적인 성취가
아닌 마음의 행복을 기준으로 성소를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은 그 이유로
그것을 존재하게 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에서 시계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막
같은 이 세상에 시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더 복잡하고 더 유용한 우리
각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힘든 삶과 상처, 청소년기의 방황을 극복하고 미국을 들었다 놨다
한 인물이 되었던 오프라 윈프리는 그의 마지막 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세요.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이유, 소명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만이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내가 가장 완전하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이유이고 소명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 소명이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판단의 기준을
항상 ‘마음의 평화, 자유, 행복함’에 두십시오. 나를 만드신 분이 나의 길을
가장 잘 아실 텐데 그 길을 가면 반드시 내가 더 행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녀를 낳았을 때 그 자녀가 세상에서 사랑받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행복하도록 우리 모두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종으로서 당신 부르심대로
살게 되면 결국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희생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복하게 못
박히셨고, 이태석 신부님도 마더 데레사도 당신들이 더 행복한 길을 찾은
것이었고 헨리 나우엔 신부님도 그러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새 성인이
되신 교황님도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행복한 분이 성소를 찾은 분이고 성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이유는 참 행복을 찾는 방법을 세상에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참 행복을 찾기 위해 그 소명을
주신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2014년 5월 15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한 줄 복음 묵상)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To turn back against righteousness is a betrayal.
Betrayal will ultimately leave big wounds for both sides.
It is cowardice and a sin that must be avoided.
2014년 가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한 줄 복음묵상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요한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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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음에 등을 돌리는 것을 배신이라고 합니다.
배신은 결국 양쪽 모두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피해야 할 비겁함이자 죄입니다.
正しさに背を背く事を裏きりと言います。
裏切りは結局?側皆に大きい傷を?すことになっています。
必ず避けねばならない卑怯であり罪です。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만물을 있게(창조)한 그 힘님은
2014년 가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 13,16-20
만물을 있게(창조)한 그 힘님은
꽃이 아름다운 걸 보면 흙과 물과 태양이 아름다운 것 아닌가요?
흙 물 태양이 대단한 걸 보면 대자연과 우주가 아름답고 대단하겠고요.
이런 것들을 있게(창조)한 그 힘님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임(任)일 겁니다.
맑고 따스한 날 산과 들과 호숫가에 서서 대지를 보면 절로 신이 납니다.
주변 모든 피조물들이 나에게 힘을 주고 의미를 주며 먹을 것을 주잖아요.
대자연에게 감사하며 그 속에 더 큰 어떤 의미가 숨어있다고 안 느껴지던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5월15일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 13,16-20
예전에 읽은 동화입니다. 그 동화를 읽고 많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몰고
시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들이 타고 아버지가 걸었을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아들은 불효자군!’ 이제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걸었습니다.
그때는 말합니다. ‘저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군!’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귀를 타니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을 학대하는 군!’ 할 수 없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리석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우리는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곤 합니다.
유혹의 바람이 그렇습니다. 자존심의 바람이 그렇습니다. 편견의 바람이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수녀님 혹시 보셨습니까?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학력은
대졸 이상, 인상은 지적이면서도 후덕해 보임, 외국 경험도 있음, 교수 능력이
탁월함(교리, 단체 지도, 훈화 등), 사제와 신자들 사이를 사려 깊게 중재함, 늘
밝고 친절하게 신자들을 대하며 겸손함, 언어구사와 행동에 품위가 있음, 늘
기도하고 상담할 때 내적인 문제를 잘 듣고 해결해 줌, 사제의 권위에 잘
순명함, 신자들을 뒤에서 잘 보살피고 나서지 않음,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시대감각이 있음, 청빈하고 소박함.”
결혼생활을 꽤 오래 하신 자매님들, 그래서 이제 거의 ‘상황 끝’인
자매님들께서도 가끔씩 ‘우리 신랑 이랬으면’ 하고 꿈꾸신답니다. “키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남자, 유머가 많은 남자,
매너가 좋은 남자, 분위기 맞춰줄 줄 아는 남자, 돈 잘 벌어오는 남자,
속박하지 않는 남자, 나한테 목숨 걸지 않는 남자, 해외 출장 자주 가는 남자,
그러면서도 절대로 한 눈 팔지 않는 남자. 이 세상에 이런 형제님이
있을까요?”
이상적인 사제상에 대한 신자들의 답변은 더욱 솔직합니다.
“강론 시간에 제발 잠 좀 안 오게 하는 사제, 그리고 이왕이면 ‘쿨’하고 짧게
강론하시는 사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제, 기도생활에 충실한 사제,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제, 많은 일보다는 꼭 해야 될 일을 하는 사제, 귀가 큰
사제, 쉽게 분노하지 않는 사제, 친절하고 매너 있는 사제, 여러분들, 이런
신부님 구경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
우리는 사람을 외모만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다시 잘못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언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은총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우리의 부족함도 우리의 허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허물을 씻어내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을 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모와
능력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분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분들을
주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우리들의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풍요로운 렉시오 디비나를 위하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5.15.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사도13,13-25 요한13,16-20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 13,16-20
풍요로운 렉시오 디비나를 위하여.
뿌리 없는 나무는 없습니다.
우리 삶의 뿌리를 확인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뿌리와 나무와 잎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역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하여 신구약 성경만의 렉시오 디비나에 이어
내 수도공동체 성경, 내 삶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가 필수입니다.
저는 감히 공동체나, 내 삶의 역사 역시 하느님 은총이 구비구비 서려있는
성경이라 칭하곤 하며, 때로 착잡할 때 묵상하며 마음을 정리하곤 합니다.
제 삶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에 참고가 될 격려와 위로가 된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수사님은 수도공동체의 실질적인 설립자로서 오랫동안 기억되고 존경
받아져야 마땅하다 생각되어,"
이 말마디에서 원장직을 내려 놓은 후, 저에 대한 공동체의 배려를 감지할 수
있어 참 고마웠습니다. 새삼 내 정체성을 새로이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이에 걸맞는 모범적 삶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또 오랫동안 저희 요셉수도원 공동체를 사랑했던 분의 한 마디 말 역시
고마웠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사님이 아버지처럼 생각됩니다.
수사님은 수도공동체 초창기부터 공동체의 아버지처럼 사셨습니다.“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고 공동체 형제들을 사랑하며 정말 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새롭게 한 말이었습니다.
이런 주변의 진정성 담긴 말이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 묵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개인 삶의 역사뿐 아니라 공동체 삶의 역사도 하나의
살아있는 성경으로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입니다.
이 또한 제 지론입니다. 요셉수도공동체 25년 역사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발견했던, 결론과도 같은 네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1.모든 것은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필요했다.
3.모든 것은 지나간다.
4.그러니 지금 여기에 충실하자는, 네가지 깨달음입니다.
저는 성모영보수녀회 피정지도를 하면서 '말씀이 우리와 함께'라는
수녀공동체 50년 역사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동시에 수녀공동체의
창설자 '말씀으로 산 사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님'의 삶의 성경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신부님의 성자다운 거룩한 삶과 영성이 수녀님들의 삶의 역사
성경에 알게 모르게 서려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선종완 신부님의 삶의 성경은 신부님의 은경축(53세, 1967.2.14) 상본의 한
말씀안에 요약됩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에페4.15).
일편단심, 오직 이 한 말씀을 목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위해 평생
성자다운 삶을 사신 창설자 신부님이셨습니다. 말그대로 그리스도는
신부님의 운명이자 사랑이셨음을 깨닫습니다.
신부님의 묘지에서 읽은 유언말씀도 마음 깊이 렉시오 디비나 했습니다.
"자매 여러분, 항상 마음을 합심하여 어려움을 잘 참고 모든 고통 중에
인내하며 하느님 사랑 안에 모였으니 끝까지 겸손하며 가난해야 되고 하느님
사랑으로 남에게 봉사하며 서로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되이 살아야
합니다.“
신부님의 하느님 사랑, 겸손과 가난, 인내와 봉사의 한 평생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유언입니다.
이런 창설자 신부님의 영성의 뿌리를 확인하면서 우리 삶의 정체성을 새로이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만 45세에 수녀회를 창립하시고 만
61세에 선종하셨으니 정말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삶의 성경을 완성하신 성자
신부님이셨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런 두루두루의 깨달음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 성경을 깊이 렉시오 디비나
했음이 분명합니다.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이
떨어지자 마자, 바오로는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진 이스라엘 구원 역사 성경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파견됨과 동시에 종료됨을 가르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씀을 통해 요한 자신은 물론 그리스도의 신원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런 세례자 요한의 그리스도 중심의 겸손한 삶이 바오로 사도의 삶의
성경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여하튼 그리스도 예수님은 요한이나 바오로는 물론,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에게도 '복된 운명이자 영원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도 우리와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 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파견된 우리 형제자매들을 환대함이 바로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형제자매 하나하나가 하느님 뿌리에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아는
것이 겸손과 환대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성모영보수녀회의 특성은 '너무나 평범하여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삶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라 합니다. 바로 이게 평범의
비범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너무 평범하여 드러나지
않는 '보일 듯 말 듯' 그리스도의 향기같은 내 삶의 성경 한 페이지를 살며
쓰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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