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생각하는대로 나이든다
글 스텔라 박
나이는 지혜와 함께 온다. 하지만 가끔은 나이 혼자 오기도 한다.
-오스카 와일드
이번 학기, 내게 가장 많은 통찰을 주었던 과목은 <현대 사회의 노화 문제>라는 과목이었다. 예전에야 노화와 죽음이 거의 동의어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지만 이제 노년의 삶이 길어도 너무 길어진 만큼, 노화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여겨지는 추세인지라 대학원 심리학과 수업에서도 이런 과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통찰보다 더 먼저 다가왔던 것은 엄청난 무게의 부담감이었다. 담당 교수인 루시 코터(Lucy Cotter)는 10주간의 강의를 이틀 동안의 풀데이 워크숍으로 대체했는데 수업 스케줄 자체가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주중 내내 일하고 토요일 하루 종일 학교에 갔다가 일요일까지 종일토록 수업에 참가해야 했으니, 아무리 공부를 사랑하는 모범생이라 할지라도 기겁을 하고 도망갈 만한 스케줄이었던 것이다.
두번째 부담감은 수업 첫날, 돌아가면서 하는 자기 소개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아는 바를 이야기하라는 교수의 주문이었다. 학부에서 철학이나 역사 또는 예술을 공부한 다른 클래스메이트들은 자기 나름의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를 제법 조리있게 말했다. 나는 켄 윌버(Ken Wilber)의 책에서 읽었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지식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내게 있어 포스트모더니즘은 내가 수행하고 있는 불교와 그 결을 같이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껏 인류가 선대로부터 물어받아온 지식과 철학을 무조건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지식이 형성되었는지를 묻는 ‘진정 깨어 있는’ 철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세계 최초로 세계가 무엇인지를 논의하기에 앞서 비로소 그 세계가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인간은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우리가 이제껏 무비판적으로 답습했던 지식이 다분히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해석한 세계였음에 동의하고 있다.
담당 교수는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부담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언급한 이유에 대해 <노화 이론>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과목의 교재였던 존 블라우더의 책에는 ‘노화에 대한 암묵적 이론’이 소개되어 있다. 이 말인 즉슨, 우리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노화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나의 노화 이론
생각해보니 그렇다. 내게 있어 ‘노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렸을 때 함께 목욕탕에 갔었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지금 내 나이가 60인데, 당시 할머니의 나이도 갓 60을 넘기셨었던 때였다. 환갑 잔치를 해드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니까. 하지만 당시 60세를 막 넘긴 우리 할머니는 별로 남지 않은, 숱이 적은 흰머리를 한 가닥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소중하게 동백기름을 발라 뒤로 모은 후 은비녀를 꽂았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었다. 특히 입술을 중심으로는 세로로 참빗 같은 가느다란 주름이 촘촘했었다. 치아는 효자인 아빠가 금니를 해드렸지만, 앞니는 어쩔 수 없었는지 철사줄 같은 것이 가장자리에 둘러져 있었다. 눈은 늘 침침하셨었는지 무언가를 보실 때에는 항상 실눈을 뜨셨었다. 목욕탕에 함께 갔었던 할머니의 배는 출렁출렁했었는데, 그 주름이 마치 프렌치불독의 얼굴 같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내게 있어 노화란 별로 아름답지 않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 초라한 외모와 동의어였다. 이러한 개념은 이어 아무도 원하지 않는, 효용가치가 없는, 내버려진, 아름답지 않은, 모든 것을 치르
‘안티’에 실려진 엄청난 저항의 힘
노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늙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당연지사다. 어디 나뿐일까. 우리 시대는 모두 노화 즉 에이징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장품, 피부관리 등에는 의례히 ‘안티에이징’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이 따라온다. ‘사회적’이라는 단어인 ‘소셜(Social)’에 접두어 ‘안티(Anti)’를 붙이면 ‘안티소셜’이 된다. 연예인들은 팬들의 환호에 즐거워하다가 한 안티 팬의 악플 한 줄에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만큼 ‘안티’라는 접두어에 따라오는 저항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노화와 이렇게도 힘을 들여 싸우고 있다. 왜? 바로 노화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 각자 나름대로의 노화 이론 때문이다.
풍요로움과 동의어인 노년
하지만 노화에 대한 이런 개념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 친구에게 “에이징”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냐고 물었더니, 은퇴, 연금, 여행, 크루즈, 여유 있는 삶 등의 단어를 줄줄이 말한다. 그렇다보니 그 친구에게는 노화가 멀리 해야할,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빨리 왔으면 좋겠을, 삶의 목적, 지향점과도 같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희한하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적이고, 또 불교적으로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라도 우리들이 갖고 있는 개념은 늘 그대로 체화된다. 그야말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미 55세 때부터 맥도널드에서 시니어 커피를 사마시고 있었고, 55+ 스페셜 전화기 플랜에 가입해 있었지만 55세 때와 60이 된 이후, 내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나이의 온도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잠깐, 만약 생각하는 대로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나 나름대로의 노화 이론을 펼쳐나갈까.
다시 정립하는 노년
노년은 살아온 날들의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으로 인해 현재 삶의 경험을 대할 때도 지혜의 눈으로 대할 수 있는 시기이다. 나는 나의 노년에 대한 이론으로 ‘지혜와 통찰의 시기’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어릴 때에는 “이건 이래야 해,” “저건 저래야 해”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이것이 꼭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매사가 순탄하다. 그래서 또 하나 노화에 더하고 싶은 개념은 개방성과 유연성이다.
세번째는 모든 면에서의 여유이다. 아직은 내가 일하는 학생이라 밤낮없이 바쁘지만 이제 좀더 나이가 든다면 지금보다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직 그리 여유 있는 삶은 아니지만 20대 30대, 개스값이 없어서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던 처지는 벗어났다. 그래서 이제 나 스스로에게도 먹고 싶은 것, 참지 않게 하려 하고, 경험하고 싶은 것을 허락해주려고 한다. 그동안 하도 욕망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연습을 해놨더니 너무 사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는 게 걱정이다. 이제 가만히 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수행자에게 가장 큰 적인 “감각적 욕망”을 채운다는 죄의식도 없이, “나”라고 불리는 존재의 욕구를 충실히 채워주려 한다.
또한 주변의 수많은 “너”라 불리는 또다른 나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의 욕구는 무엇인지를 살피고 함께 찾아가는 일을 도우려 한다. 좋은 의도를 실현하려는 비영리기관이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기부하며 그 좋은 뜻을 세상에 더 펴게 하는데 도움이 되려 한다.
노년기에는 내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더욱 집중해서 펼쳐나갈 수 있다. 이제 남은 생애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에만 집중해도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놓아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노년에 하고 싶은 일 하려면
근육이 있어야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은 몸에서 나온다. 다행히 젊을 때부터 나는 꾸준히 운동을 했고, 요즘은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근육 운동을 하고 있어, 근육의 양이 20대 때보다 더 늘어났다. 그만큼 내 몸은 지구력이 있고, 빠른 속도로 탄력회복한다. 근육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오늘부터라도 매일 매일 줄어만 드는 근육을 키우기 위해 무언가를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는데 구슬을 꿸 실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의지요 체력이다. 그런데 이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매일 매일 조금씩 쌓아나가야 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런 의미에서 근육운동은 반복으로 인해 가장 쉽게 결과가 드러나는 수행이다. 몸만을 위해서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운동하는 순간 생각이 사라지고 존재와 하나가 되는 느낌을 체험하게 된다. 요즘엔 사회관계망을 통해 60대부터 꾸준히 근육 운동을 해온 시니어들의 멋진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근육을 꾸준히 개발하는 한, 당신은 80에 여행을 떠나더라도 다리가 떨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끊임없이 아상을 내려놓고 마음의 유연성을 연습한다면 무얼 보더라도 가슴이 떨려올 것이다. 다리가 떨리지 않고 가슴이 떨리는 그를 우리들은 ‘청년’이라 부른다. 청년의 몸과 마음에 노년의 지혜와 통찰, 여유를 갖춘 당신의 노년을 나는 함께 축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