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우기 철이 오기 전에 비닐하우스와 에너지 기름이 필요 없는 년 4모작의 과학 농장 시현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지난 달 라오스를 둘러 보고 왔다.
성공 실패 사례를 겪은 현지 교민들로 부터 많이 배웠고 현장 답사 하는 도중에 라오스 농민의 행복 지수는 엄청나게 높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들은 우선 의식주가 자연적으로 해결된다. 우리 여름 옷 한벌이면 일년 내내 입을 수 있고 아열대의 과일은 식량으로 충분하다. 태풍도 없어 기둥도 가는 나무에 하루만에 짓는 원두막같은 집에 거주해도 전기는 풍부해서 전자제품의 실익은 다 누리고 있다.
1975년 라오스 공산 정권은 전국토를 세분화하여 국민 1인당 3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하였고 열악하지만 초등교육을 의무제로, 의약품도 매우 싸게 공급하였다. 공산 정권 등장후 숙적의 라이벌 친미, 왕당파 30여만명에 대해서는 거주 선택권을 주어 외국 이주를 원하는 자는 모두 출국토록 했다. 그들은 2~3세까지 150만명으로 늘어 2005년 부터 라오스 국내 투자가 허용되자 라오스 시골 구석까지 은행이 설립되어 외화가 들어 오고 있으니 40년 전 가장 미웠든 자들이 지금은 라오스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라오" 란 말 자체가 사람이란 뜻이다. 라오스는 사람을 중시했기에 가급적 원한을 사지 않으며 서로 싸웠고 그 풍습이 지금까지 잘 내려 오고 있다. 대통령 궁 경호원들이 순찰을 돌때는 낫을 들고 돌때도 많은 데 그건 무기가 아니라 하도 풀이 잘 자라기에 순찰 도중 풀베기하며 임무를 수행한다.
만약 거리에서 거지가 발견되면 즉각 경찰이 출동 체포, 조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 국가가 뭣을 못해 주었기에 거지 짓을 하는 가? 마을 책임자, 친인척은 왜 거지가 되도록 방치했는 가? " 또 라오스 지도층은 대통령제나 내각제,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장점을 취합해서 라오스 현실에 맞는 제도와 법령을 만드는 데 무척 고심했다. 20개 정도의 부처 중에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을, 총리는 내치와 보건을, 부총리는 또 그 아래 역할 분담을 맡아 업무의 과도한 집중을 피하고 책임 정치를 전개한다.
일찌감치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에 변호사 처럼 남의 싸움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 거의 없다. 마을 이장은 반드시 파출소장이 겸하고 논쟁이 벌어지면 마을 마다 지정된 7명의 배심원들이 합류하여 최선의 대안을 강구한다. 그러니 초반 부터 억울함과 원한이 쌓일 겨를이 없다. 8시 출근에 5시 퇴근하면 서늘한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온갖 대화와 노래 등으로 세월을 보내니 행복 지수가 높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쁨 중 불행이랄까 매일 마시는 술에 라오스 남자의 평균 수명은 58~9 세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 5월 17일 라오스 공군기의 추락으로 국방장관, 공안장관, 수도 비엔티엔 시장 등 14명의 요인이 사망했지만 라오스 당국은 보도하지 않았고 태국 TV를 통해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 보도않는 이유는 소승불교 시각에서 이미 극락으로 가신 분들에 대해 관련 부서에서 장례를 치루고 사회에 충격을 주거나 국민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지도층의 의지, 사회 풍토에 기인한 것으로 보였다.
라오스 지도층의 왕족 같은 호화스런 생활과 소비성향에 대해 비판이 없지 않으나 여타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그래도 덕망이 있는 부류라고 할수 있다. 나태하고 거짖에 익숙한 주민들도 상당수 있지만 적어도 라오스에서는 기아 사망, 자살, 고독사는 거의 없다.
열흘 남짓한 시간에 나 자신이 라오스를 안다고 할수 없을 것이다. 평소 국제정세를 강의했고 책자와 인터넷을 통해 라오스를 어지간히 배워서 방문했지만 현지에 가 보니 전혀 다른 사회였다. 땅값이 비싼 도로 변이라 해도 도로변 라오스 농민들의 집에는 차량이 다 있고 안테나가 서 있었으니 나의 어리석음으로 1인당 GDP 1,453 불(2012)이라는 수치에만 속아 라오스를 극빈국으로만 본게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