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師表)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동네의 맨 위쪽 산밑이었습니다. 아랫마을에서는 조석으로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볼 수 있었으나 나는 그런 문명의 혜택(?)조차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아랫마을을 오르락내리락하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넷째 재종조부가 사랑채 마루에 탕건(宕巾)을 쓴 채 장죽을 물고 앉아서 학동들을 가르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나는 아직 그 반에 들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재종조부는 오후가 되면 큰 종조부댁 앞에 있는 연못의 버드나무 밑에 앉아서 낚시를 드리우곤 했습니다. 넷째 재종조부와 말을 나눈 기억은 없고 정원이면 세배를 올리고 급히 물러 나오고는 했습니다. 무섭고 근엄한 모습만이 남아있는데 그 까닭은 훈장이기도 했거니와 언행 또한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분이 계십니다. 둘째 종조부댁 큰 당숙입니다. 당숙은 정월 보름이 지나면 근동의 친구들이 오셔서 근 보름 동안 당숙 댁에 머물면서 시도 읊고,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면서 우정을 나누고는 했습니다. 내 서 조모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논하는 자리에서 논란을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종갑이(나의 아버님) 말대로 막내 아버님과 합장하기로 하세.”하며 서모의 합장을 반대하던 다른 당숙의 의견을 일축했습니다. 논란은 일순에 가라앉고 장례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네 분의 재종조부와 다섯 분의 조부가 일가를 이룬 집성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학(儒學)을 한 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더러는 도회에 나아가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이십여 분이나 되는 당숙과 재당숙이 대부분 농사에 종사했습니다. 집안이 번성하다 보니 큰일이 하루가 멀다고 벌어졌고 수습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생존자 중 제일 맏이던 재종조부가 그 후에는 당숙이 나서서 종중의 마음을 모으고 수습하는 일에 진력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정치가는 많으나 지도자가 없습니다. 학교에는 행정가거나 교육자로서의 교장만 있고 정신적 지도자는 없습니다. 모든 크고 작은 단체가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어떤 문제로 논란에 휩싸여도 이를 정리해 국민을 안심시켜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지도자는 청빈하고, 청렴하며, 상식이 있어야 하고 권력과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쳇말로 물질적으로 형편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용기와 결기가 있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소위 SKY 대학의 총장 출신이 국무총리에 취임하는 것을 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평생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이들이 지닌 것은 학식과 덕망뿐입니다. 그들이 정치적 식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생 갈고 닦은 학식과 쌓은 덕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권력욕과 명예욕 그리고 물욕에 사로잡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치인의 술수를 학식과 덕망만으로 감당하기는 부족합니다. 정치인의 꾐에 빠져 단 열흘 만에 학식과 덕망을 모두 날려버리는 길로 접어들고 맙니다.
그가 어떻게 살 건 알 바 아니지만, 어떻게 살라고 요구할 수도 없지만, 안타까운 것은 국가와 국민이 갈 길을 알려줘야 할 이들이 사라짐으로써 나라가 어려움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훌륭한 대학 총장은 얼마든지 있었어도 대학 총장 출신의 존경 받는 국무총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청렴한 경찰이 도둑무리에 뒤섞인 꼴입니다. 정당도 마찬가지이지만 정당 안에 그런 덕망가가 끼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노릇입니다. 존경과 덕망이 세속에 묻혀서 사라지고 맙니다. 누구 말마따나 제일 형편없는 사람 중 덜 형편없는 사람을 가리는 것이 정치라더니 그 말이 꼭 들어맞습니다. 그러니 꾀가 있는 자라면 그곳에 들 리가 만무입니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법이 하겠지만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패륜이며, 어떻게 해야 인간적인 도리로 사는지를 가리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식이고 도(道)인데 그 판단은 정치인이 할 일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바로 덕망을 갖춘 이여야 하고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는 국민의 지도자여야 합니다. 국민이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불행합니다.
그는 정치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이념에 기울지 않으며, 어느 종교에도 편향되거나 배타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로지 상식과 덕 앞에 서야 합니다. 국민의 사정을 두루 살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데는 오랫동안 덕망을 쌓은 이가 좋습니다. 학식이 출중하면 더더욱 좋습니다. 그래서 총장을 예로 든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럴만한 인물이 정치라는 삼류 직업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에 한마디 한 것입니다.
대학 총장으로 물러나 정치를 하는 위인들은 귀가 얇은 사람이거나, 권력욕에 물든 사람이거나, 꾀가 얕아서 자신의 학식이면 무엇이건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더더욱 총장이라는 자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학교 교장만 해도 존경받아 마땅한데 하물며 총장을 하고도 다른 욕심을 낸다면 그는 철없는 사람이며 자존심도 팽개쳐버린 위인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이 대학의 총장이라면 대학은 학생들로부터 등록금이나 받아서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돈벌이하는 기업의 한 부류입니다.
세상에 총장의 제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잘못한다면 네 이놈 내가 그리 가르치지 않았거늘…하고 호통치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어른이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예 그런 생각인들 하지 마십시오.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제자들이 찾아오면 절을 받고, 어디 한적한 호수에라도 나아가 미늘 없는 낚시라도 드리던가, 좋은 모자 눌러 쓰고 등산이라도 하는 것이야말로 대학 총장의 덕목입니다. 정치라니요!
어찌 총장뿐이겠습니까. 지방 정치도 이와 같습니다. 무슨 의원입네 하고는 그 끝에 브로커로 변신하는 재주도 꼴사납습니다. 그쯤 되면 나이도 제법 들어 배고프면 함부로 음식을 쫓는 개처럼 굴지는 않을 만큼 되었을 법한데 용케도 음식 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동네 개와 다르지 않습니다. 허리가 부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굽히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선비입니다. 오늘날 선비도 없으니 지도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선비는 늘 배가 고프고 그늘에 있으면 우러르는 이가 없으니 마음이 허전하기는 합니다. 그 허전함을 선비의 자긍심과 철학으로 메울 수는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별생각이 다 듭니다.
백성은 늘 어리석고 일상이 분주해 따질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잘 짠 계획대로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것이 백성입니다. 백성의 어리석음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보살핌의 대상입니다. 물이 잔잔한 윤슬을 일으키며 늘 조용히 흐르는 듯해도 윤슬이 커져 격랑이 일면 둑을 무너뜨리듯 어리석은 백성이 울부짖으면 천하가 뒤집힙니다. 참 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불현듯 재종조부와 당숙의 모습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