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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브랜드
출 19: 7-15
물건을 사실 때, 무엇을 보고 삽니까? 청소년들의 구매는 브랜드로 시작해서 브랜드로 끝난다고 한다. 옷이든, 신발이든 간에 물건의 품질보다 브랜드가 구매 동기의 1순위다. 외국의 값비싼 브랜드가 품질이 월등하다면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그들은 브랜드에 집착한다. 한심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봐줄 수 있다. 아직 철없는 어린애들이니까. 문제는 어른들도 별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바람에 품질도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외제물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고, 부끄럽게도 외국 브랜드 이름을 붙인 가짜 상품이 범람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외형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의 잘못된8 사고 방식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물건을 선택하는 데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위조상품박물관"이 개관됐다. 진품을 볼 수 있는 데가 박물관인데 "위품"만을 모아 전시를 한다니 박물관치고는 참 별나다. 세계각국의 가짜상품 2천여점이 진열되고 있다. 그런데 이 위조상품의 "70%는 태국, 중국, 대만,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 "한국과 대만은 모든 가짜상품을 만드는 국가"라는 설명까지 붙어 있다.<>아예 "상표도용왕국"으로 낙인찍고 있어 창피하다.
그것은 상표의 우수성 때문이다. 세계적 브랜드 컨설팅업체인 인터브랜드그룹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계 유명 상표중 코카콜라는 499억달러, 말보르는 476억달러, IBM은 237억달러, 소니는 145억달러의 상표가치를 갖고 있으며 각사의 고정자산과 유동자산을 합한 금액의 4∼7배에 달한다는 분석결과가 있다. 또 국내는 애니콜이 3278억원, 소나타가 2826억원, 하이트맥주가 1013억원, 농심신라면이 285억원의 상표가치를 갖고 있다 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대사(ambassa -dor)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슴에 하나님의 브랜드-상표-를 하나씩 달고 살아가는 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브랜드에 걸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리콜(recall) 대상입니까?
사람이 누리는 복중에 최고의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우리들을 사랑 하사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새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관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사람을 찾아오시고, 불확실한 미래를 보면서 두려워하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아담을 찾아 오셨고, 노아를 찾아 오셨고,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도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도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과의 믿음의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발을 붙인 이상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출애굽기를 통하여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지난주에 살펴 본대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나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1-6절)
하나님께서는 오늘 살펴볼 본문에서, 우선 백성들에게 율법 이행에 관한 약속을 받으십니다.(7-9절). 동시에 율법을 전수 받을 그들에게 그에 합당한 무엇을 요구하십니다.(10-15절)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시며 율법을 수여하시겠다는 것입니다.(16-25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브랜드[상표, 드레이드마크-각 사람(상표)이 가지고 있는 특징, 특성]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브랜드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성결
하나님의 특징-브랜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으로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스스로 이 '거룩'을 지닐 수 없습니다. [참조/ 브디이젠(W. Baudissin) 같은 학자는 성부 하나님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구약의 중심 사상을 하나님의 거룩성이라고 볼 정도로 하나님과 거룩의 연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영역이며, 당신 자신의 표현이기에 당신의 품격과 역사에 부정하고 죄악된 것이 개입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께 절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가차없이 징계를 내리시는 장면을 가끔 보면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가 없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깨끗지 못한 인간이 거룩한 당신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친히 마련하심으로써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인간에게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겸손히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비결은 겸손히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에 겸손히 마음 문을 열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계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그러므로 거스르려고 하지 말고 겸손히 수용해야 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하게 된 것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수용했듯이 우리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수용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최고로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성결 - 옷을 빨라
그러나 이것 보다 더 큰 겸손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 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성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당신의 계시에 따른 영육의 온전한 '성결'입니다. 인간이 오직 이 '성결'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선민으로 택정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결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자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인간의 도리입니다.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10절);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14절)
옷을 빨고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옷을 빨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옷을 빤다고 성결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옷을 빠는 것은 성결케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옷을 빨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옷을 빠는 일을 통해서 저들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의 의식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일이고, 그들이 사는 목적이며, 가장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해 지기 위해서 옷을 빨고 성결케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거룩한 백성으로 초대를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거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것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성결케 해라 그러면 구원해 줄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어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들을 향해 성결케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백성 되었으니 그기에 합당하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옷을 새롭게 빤다는 것은 태도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우울한 생각이나 답답한 마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태도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답답하거나 우울하면 기도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우울하고 답답하게 행합니다. 마치 하나님도 답답하고 우울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나의 감정의 테두리에 넣어두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우울한 것은 우울한 것이고,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내가 침체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침체되실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놀라운 찬양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옷을 빨면서 어떤 것을 생각했을까요? 지난 과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 애굽에서 이방 신을 섬기던 일들, 또 이방 사람들이 살던 삶의 가치관, 풍습들... 그리고 지난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던 일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옷을 빤 것입니다. 3개월 동안 한 번도 옷을 빨아 입지 못했으니 그 옷을 무척 더러웠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옷을 빨면서 지난 모든 것들을 씻어 버렸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면,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것처럼 이들은 이미 예사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 즉 하나님께서 보물로 여기시는 그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거기에 합당하도록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성결케 해야 할 이유가 더 있습니다. 11절 하반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오신다는 것인데, 마치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오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맞으러 올 때 신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저분하게 있지 않습니다. 최고의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신부는 가장 예쁜 모습입니다. 그 날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신부에 합당하도록 옷을 빨고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절제,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세 번째 비결은 절제하는 것입니다. 11절과 15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 속의 인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에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절제하는 생활입니다. 15절에 "모세가 백성에2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 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15 여인을 가까이 말라: 여기서 여인이란 아내를 말하며 '가까이 말라'는 '함께 눕다'는 뜻의 '나가쉬'에 부정어 '알' 이 붙는 말로 '부부 관계를 갖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의식을 목전에 둔 백성들로 하여금 경성하며, 준비하기 위함이지, 결코 부부간의 정당한 성관계를 죄악시 한 것은 9아닙니다. 특별히 거룩한 의식을 앞두고 몸을 절제하던 이와 비슷한 관습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후일 바울도 고전7:5에 보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분방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예수님의 부친 요셉, 세례 요한, 이런 사람들은 모두 절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절제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육신의 정욕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들 스스로 옷을 빨았습니다.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하고, 성결하고, 절제하면 하나님9을 분명히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결의 이유인 하나님의 거룩 - 가까이 하지 말라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12절)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21절)
21 신칙하라: 기본동사 '우드 ' 는 '반복하여 훈계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신칙하다 라는 말은 '단단히 일러서 경고하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옷을 빨라고 말씀하신 후에 저들이 주의해야 할 것을 일러주십니다. 일정한 경계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죽을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지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그만큼 추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담배냄새, 술냄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많이, 쉽게 맞게 됩니다. PC방, 당구장, 커피숍 등등, 손님 접대를 위해 식당에 가서도, 회식 자리에서 등 / 나는 하지 않지만 그 냄새가 몸에 배입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도 그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으니 그는 죽어야 했는데, 하나님은 죽이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만 했습니다. 이사야의 부르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 죄악 중에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시기 위해 우레와 번개와 구름과 나팔소리와 불을 사용하시는데 그 이유를 어떤 성경학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온전치 못함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실상을 스스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존재인 우리를 하나님께는 심판치 않으시고 구원하셔서 거룩한 백성을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십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사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 숨쉬는 것은 고사하고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나아가 죄에 휩싸여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던 어리석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 성도들은 그 거룩하심에 합당하도록 성결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복된 삶을 사시어 하나님의 브랜드를 입은 사람들답게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 만나는 자세
출 19: 7-15
여러분은 계약을 해보셨습니까? 주로 언제 하지요? 집을 사거나 팔 때 합니다. 요즘의 계약이란 그런 상업적 목적으로 맺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하는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신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어떤 왕과 신하, 또는 백성들이 영원한 주종관계로 들어갈때 계약을 맺었습니다. 물론 노예에게는 이런 계약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물건처럼 사고파는 대상이지 계약 맺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는 그냥 돈 주고 사면 그만이었습니다.
인격적 관계로서의 계약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맺는 계약은 영원히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기로 하는 인격과 신분을 연결하는 계약입니다. 결혼식을 할 때 주례는 당사자에게 “상대방을 그대의 아내로 맞이합니까?” “그대의 신랑으로 맞이합니까?” 라고 묻고, 네 라고 대답합니다. 파출부를 두거나 하숙생을 맞으면서 이런 계약을 맺지는 않습니다. 하숙생은 얼마의 돈을 주고, 주인은 무엇을 제공하는 그런 물질의 관계이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상대를 다 얻기로, 인격과 생애를 걸고 맺는 인생이 가장 중요하고 큰 계약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계약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자발적인 의사입니다. 강요에 의해서 맺어진 계약은 무효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례자는 '이 결혼이 강요나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엄숙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십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와도 계약을 맺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근본 없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인도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그들과 계약을 맺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조성하셨고 양육하셨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신다고 설명하시고 그들의 의사를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께는 특별한 소유가 되며,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받고,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려고 축복의 길잡이와 안내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이 먼저 복을 받게 되고, 그 복을 남에게 전달해 주는 너무 좋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귀한 일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데 그들의 의사가 어떤지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백성들은 일제히 그러겠다고,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7-8절입니다.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그들은 자기들의 자유의사로 하나님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엄숙한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온 세상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제사장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선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대리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면 하나님나라의 모든 것을 소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제 그들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복을 누리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지점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오면 하나님나라를 맛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맛보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맛보기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교회는 모든 것이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와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고, 교회로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교회가 이 세상과 똑같다면, 그런 교회는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에는 세상에 없는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세상에 없는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고, 희망이 있고, 참된 관계가 있고, 행복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와서 그것을 느끼는가? 여기에 모이면 하나님을 느끼고 발견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나라의 은혜를 체험하며,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고, 그 나라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발견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교회는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교회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가겠다고 할 때 억지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순전히 자발적인 의사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사를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대답했고 모세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했노라고 회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도 자의로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의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합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약속을 들으시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9절입니다.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로 임재 하셨고, 그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도 못하면서 형상만 있는 우상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형상으로 보이시지 않고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도리와 구원의 길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 말씀을 들어야 구원이 임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여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 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모세와 말씀하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백성들이 모세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 말씀하신 일을 통해서, 앞으로 모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실하고 하나님이 시킨 말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여 그의 말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곳에 함께 계실 것이고 모세의 말의 권위를 보장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어떤 환상을 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이 선포하는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치밀하게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당신이 세우신 모든 계획을 말씀하시자 말씀하신 그대로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그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고 역사를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이 계약의 한편 당사자는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한편의 당사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한 번도 계약을 맺어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사람다운 자세를 하나씩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자세에 대하여 상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흘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11절에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바로 그들을 만나지 않으시고 삼일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삼일동안 시내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삼일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기간이었습니다. 산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삼일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삼일동안 기다리면서 조바심이 났고, 과연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자신들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지 않은가? 그분 앞에 우리가 서게 되면 우리의 죄가 그대로 드러날텐데 우리가 벌을 받고 저주를 받지 않겠는가? 그들은 그 삼일 동안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 괴로워할 때 가만히 놔 두실 때가 있습니다. 아주 바쁘게 살아가던 사람이 중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판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누워만 있어야 합니다. 손발을 다 놓고 가만히 누워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게 되고 한없이 나약하고 죄 많은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절망도 하고 한탄도 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의 모든 논리와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첫 번째 자세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하는 자세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준비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자비하신 하나님이 나를 돕기 위해서 나타나 주시기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빠가 어디 갔다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 선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릴 때 그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먹을 것도 있고 입을 것도 있습니다. 살아갈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고 불안에서 구원하지 못합니다. 직장이나 양식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영생을 약속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우리를 바르게 세우고 구원과 소망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옷을 빨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여 그들로 옷을 빨고” (10절) 왜 옷을 빨게 하셨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우리는 옛날에 특별한 명절이 돌아오면 빨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기쁘고 좋은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받은 것도 너무나도 감사한 일인데, 그들이 이제 천지의 주관자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요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들은 옷을 빨아 입고 새 기분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했음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먹고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던 세상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으로, 우리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갈아입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 나오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올 때는 비싸지 않아도 정장을 입고 나오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옷을 빤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것이며 마음자세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들이 옷을 빤 것은 죄를 회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요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고 하였습니다.
속된 생각이나 우울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악하고 추한 생각은 떨어내고, 우울하고 근심된 마음도 털어내고 믿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옷을 빨아 갈아입고 태도를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22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까지도 성결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도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하나님께 경배하다 죽었습니다(레10:11-3).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범죄 하다가 죽었습니다.(삼상2:22-26)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는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나의 삶에 개입해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진심으로 기대한다면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죄를 버리고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각자가 죄를 버리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한계를 정하셔서 백성이 그 이상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12-13절)
삼일 째 되는 날,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게 울리자 진중의 모든 백성이 크게 떨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과 함께 시내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고 하나님은 불 가운데 시내산위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내려가서 백성들이 명을 어기고 경계선을 넘어 산을 오르다가 즉사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럴 리 없다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산에서 나는 우레 소리와 연기를 보며 벌벌 떠는 백성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경계선을 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분수모르는 백성이며, 얼마나 은혜를 망각하는 백성이며, 얼마나 하나님을 우습게 알다 망할 백성이지 몰랐습니다. 인간의 장담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장담을 믿지 아니하시고 백성들을 단속 하라고 다시 내려 보내셨습니다.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고 하셨는데 신칙하라는 것은 재차 권하고 경고하라, 거듭 말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선을 돌파 하고 하나님을 보려고 올라오다가 많이 죽을까 하는 염려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분수 모르는 기질을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산에 임재하신다고 하니까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 선을 넘어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김없이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경외의 대상이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준비 없이 선을 넘어 하나님 앞에 오는 사람은 화를 자초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정도로 하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 속에 살다가 죽는 인생과 비슷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완전하게 거룩하시고, 피조물과 완전하게 구별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람과 계약을 맺으시겠다고 사람들을 부르셨을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25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려고 성막을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그 성막에서 제사 드리면서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죄인이 죽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피의 제물을 가지고 가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임시로 나아갔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신 후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갈 길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나아가는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뉴에이지운동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퍼뜨립니다. 사람 속에는 신의식이 있다. 그러니 누구라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교만한 사상을 퍼뜨려서, 사람으로 하나님의 선을 범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을 폐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 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21세기 사람의 유전자를 해독하여 유전자지도를 작성하고 복제아이를 생산하려고하는 시대일지라도,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교만하여 신의 영역을 침범하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전자를 변형시킨 콩을 먹으면 인체에 해가 된다고 콩의 수입은 저지하면서도 사람을 복제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지는 짐작도 못하고 덤비고 있습니다.
죄라는 말은 “파라바시스” 라고, “선을 밟고 넘어간다.” 는 뜻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도 선악과라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을 밟고 넘어갔기 때문에 쫓겨난 것입니다. 선악과란,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하나의 선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의 선을 지키며 주실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를 복의 통로로 삼으려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껏 복을 주시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해 주도록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좌우 환경이 아무리 거칠다고 하여도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버리며 말씀 앞에 바로 서기만 한다면 사막에서도 강이 흐르게 하시며 광야에서도 샘이 솟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을 상대하는 사람다운 자세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다운 자세를 갖추고 살아갑시다.
하나님 만날 준비
출19: 7-25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지 3개월 만에 시내 광야에 이르렀고,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시내 산 언약’이란 것을 체결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응답하기를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고 하는 언약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곧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전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앞으로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벧전 2:9에 보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어떻게 충족되었기에, 미래형 약속들이 완료형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 주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왜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까?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번 추석 명절에도 민족 대이동을 통하여 복음이 확산되고, 많은 불신 가족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복된 일들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 산 언약 체결 의사를 밝히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언약 준수를 확약 받은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언약 체결에 필요한 준비를 지시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 체결을 위해 준비하게 하신 것은 바로 ‘성결’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며, 여인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심으로, 시내 산에 강림하시게 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1. 옷을 빨라고 하셨습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을 맺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틀에 걸쳐 옷을 빨면서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 옷을 빠는 외적 성결 행위는 내적 성결을 의미하는 의식적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외적 성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곧 내적 성결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선민 언약을 체결하시기에 앞서 성결을 요구하신 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안에 있는 죄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 된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씻음으로 성결케 되지 아니하고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또 그 앞에 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인간과는 결코 교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 가운데서 구원치 않으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조차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죄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사이를 내었고,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듣지 않으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 ‘죄’가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도 그와 교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씻어 성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바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담가서 빨아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피로 성결케 된 자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더러워진 옷을 빠는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2. 준비하여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언약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으신 후, 즉시 강림하여 언약을 맺지 않으시고, 이틀이라는 말미를 두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 사함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로 하여금, 즉시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 않으시고, 잠시 이 땅에 머무르며 하나님 만날 날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삶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딛 2:13에 보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영원한 우리들의 본향인 천국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준비하는 삶이 바로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 땅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땅엣 것을 바라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 만날 준비를 잘 할 수 없을 것이며, 준비되지 못한 성도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던 다섯 처녀를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만날 날을 준비하여 기다리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에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준비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 그날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도적같이 부지불식간에 임한다고 할지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면서 기쁨으로 뛰어나가 아무런 걱정 없이 주님을 맞을 수 있는 그런 준비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5절에 보면 모세는 백성들에게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되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부간의 성적 접촉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부부간의 성적 접촉을 금하신 것은 그것이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부 관계는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며,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성생활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어 가는 성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이처럼 부부간의 성관계마저도 잠시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육체적인 욕망에 탐닉되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헌신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인과의 동침을 금지시키신 이유는 결코 부부간의 성생활을 배타시하거나 죄로 간주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부부사이의 육체적인 쾌락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정결하고 순수한 심령 상태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 교훈을 배우고자 합니다.
1)예배를 통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이는 외적인 준비를 말합니다. 혹 예배드리는데 무슨 외적인 것이 중요하냐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옷매무새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대에는 주일날 이른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의관 정제하고,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모습이 우리의 신앙선배들에게는 있었는데, 오늘날은 다 까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옷을 빨라고 하셨습니다. 때 묻은 옷, 땀내 나는 옷, 냄새나는 옷은 부부지간에도 싫어하거늘, 하물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오면서 이런 옷을 입고 와서 되겠습니까? 물론 새 옷을 입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빨아서 다려놓았다가 깨끗이 입고 나올만한 정성이 없다면 하나님 사랑한단 말도 경외한다는 말도 진실이 아닐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만날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전날에 올바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의 준비도 필요하지만, 성도들 역시 주일을 마음에 두고 토요일의 일과를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을 차려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게 되며, 설교 중에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들도 모두 놓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요일 밤 12시까지 T. V를 시청한 성도는 결코 주일날 하나님 만날 준비를 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바르게 준비를 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는 의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여인을 멀리하며 몸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내면적인 준비를 뜻합니다. 먼저 도덕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도록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혼과 마음을 씻음으로써 성결하게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최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또는 원치 않던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롬 14:10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으며, 고후 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달 미국의 뉴올린스 지방에서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급습으로 수만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영원한 세계로 가버린 것입니다. 허리케인이 휘몰아쳤을 때 또는 강물이 범람하였을 때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들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암에 걸려 고통하던 28세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처음에 그 청년에게 암이라는 것을 숨겼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복음을 가지고 거의 매일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은 도무지 마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이제 퇴원하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고려해 보겠어요.” 그의 포부를 듣는 그 순간 목사님은 깊은 인생의 비애와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안개와 같습니다. 풀의 꽃과 같은 게 인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입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그 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날은 바로 오늘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를 믿으십시오. 오늘 구원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격언에 유비무환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항상 예비하고 살면 환난을 면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번에 미국의 뉴올린스 지방에 태풍 허리케인이 몰고 온 홍수로 인하여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냈습니다. 대비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예는 많이 있습니다. 노아 대홍수 이전에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노아는 열심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의 외침을 듣고도 무관심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준비를 안 했던 것입니다. 준비를 하지 않은 결과는 대홍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여러분은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 맞을 준비됐나? 진정 거듭났나요? 예수님 피로. 내 옷은 흰눈보다 더 희어졌나요? 예수님 맞을 준비 됐나? 두 사람이 함께 맷돌 갈다가,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겠네. 예수님 맞을 준비 됐나?♪
한 중년의 남자가 한적한 해변을 거닐다 모래사장에 묻혀있던 오래된 램프를 발견했습니다. 신밧드처럼 램프를 만지자마자 연기와 함께 한 종이 나타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생각했던 남자는 "지금부터 꼭 1년 뒤의 신문을 나에게 갖다 주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년 뒤의 주식 시세를 미리 알아서 갑부가 되겠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을 보던 그는 주식 시세 바로 밑에 자신의 부고장을 보고 창백해졌습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그는 그동안 자신의 육신의 일에만 집착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준비를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묘지에 가보면 많은 묘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묘지를 돌면서 묘비들을 읽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떤 묘비 앞에서 그는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묘비의 글은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무슨 이런 묘비가 다 있는가 하고 그는 웃었습니다. 두 번째 줄에는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콱 찔려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금번 추석에도 많은 성도들이 성묘를 하게 될 것입니다. 무덤 앞에 설 때마다 “너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라!”는 무언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 시간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대에서도 하나님 만날 준비가 잘 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