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을 찾아 나선 네 번의 여행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얼마 전 서대문 독립공원을 산책하다가 서대문형무소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A4용지 크기에 담긴 청년의 표정에서, 뭔가를 노려보는 듯한 표범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독립지사들과 달리 그의 표정은 반항심이 가득한 저항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사진의 눈빛은 만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을 찾아가게 했다. 심우장은 그의 나이 55세 때, 조선총독부를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그가 직접 지은 집이라는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 심우장에서 느꼈던 여러 느낌들이 다시 설악산 만해 문학관을 두 번이나 찾게 했으나 글이 써지질 않았다. 쓰고 싶다는 열망을 안고 그의 기념관이 있다는 남한산성을 찾아 나섰다. 만해를 찾아나선 네 번째 행보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만해 문학관에서처럼 관람객은 우리 일행뿐이다. 관장님에게 설명을 요청해서 자세한 말씀을 듣고 메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879년에 태어나서 1944년 사망하기까지 두 세기를 걸쳐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근대사의 격량의 소용돌이를 살아내야 했던 5척 단신의 남자. 그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된다. 그러나, 그는 14세 때 부모의 주선으로 전정숙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둔 몸이었다. 가정에 맘을 붙이지 못하고 출가하여 결국 승려가 되었으니 전정숙과 아들(한보국)에게는 무책임한 가장이며 아버지였다고 누군가 비난할 만하다. 훗날 그의 아들이 찾아왔을 때도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승려가 되기 전 속세와의 인연을 잊고 승려의 길을 갔다고 해두자. 그러면, 그가 갔던 길에 대해서 우리 후손들은 깊이 공부하고 살펴 볼 일이다.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그가 갔던 길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담사에서 승려가 된 후, 스승 김연곡 스님의 도움으로 양계촌의 [음방실문집]과 [영환지략]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세계 일주 영행을 계획, 세계를 배우고자 시베리아 행을 결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향, 2년 후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문명을 시찰, 견문을 넓힌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독립운동과 저술 활동, 투옥과 석방 등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55세에 19세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한다. 그 이듬해 딸 한영숙을 낳고 그의 대처승 주장을 이룬다.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 -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만해에게 동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땅을 내어준다.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뜻있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이름한다. 그곳에서 저술에만 힘쓰며 말년을 보내게 된다. 심우장 이전까지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오로지 불교 승려로서 불교와 문학 활동과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승려로서의 그의 행보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이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것처럼, 만해 역시 불교가 대중화되어야함을 주장하며 포교에 힘썼다. 개신교와 천주교 등 서양 종교와 문물이 밀려들어 오는 때에, 불교가 산사(山寺)에서만 고립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일환으로 그는 어려운 불교 경전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또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방대한 8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여 [불교대전]을 편찬한다.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찬술 발행되어 불교 경전 현대화 작업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또한, 백담사에 머물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고 1913년 5월 25일 불교 서관에서 발행한다.
1931년 승려 비밀 결사 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 단체로 적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재구속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서대문형무소 최초의 구속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세 번 선창 한 이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백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그는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형사에게 제출해야했다.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고, 그것을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 갈피에 넣어 외부로 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 선언서는 중국 상해까지 전달되게 된다.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을 통해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상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 기사 부록에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된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1922년 출옥 후, 그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논설위원을 겸하게 된다.
그의 집필 활동은 논설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경성 안동서관에서 1926년에 저항시집인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게 된다.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 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 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민족 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독립과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부처 또는 이별한 연인으로 해석되는 중의적 화법을 통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과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문학적인 욕심은 시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5년에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연재했는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를 무대로 하여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했다.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평등사상을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1936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보여주었다. 1938년에 소설 장편 <박명>을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작품들은 은유, 상징이라는 비유의 문학 장치를 통해 그의 저항정신과 독립의지를 숨겨서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직설적인 표현은 검열의 그물망을 피해나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 당시 삼엄한 감시와 억압 속에서 그렇게 가슴 조이며 문학을 통해서 일제에 저항한 그의 열정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지사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유독 만해 한용운이 우리들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것은 그의 문학 작품이 주는 여운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