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8년째 이어지는 별신제와 오롯이 전하는 동계 문서-
대저 어찌 근년에 길함은 적고 재앙만 이르고 질병도 이어진 탓에 일마다 탄식만 하나이다 작은 마음에 경외로워도 그 허물을 모르더니 드디어 좋은 계절이 이르러 신에게 바라오니 신은 이르시고 굽어 쫓아주길 삼가 비나이다 재앙은 없애주고 큰 복은 드려 내려 주십시오 길함은 적고 재앙만 이르더니 질병이 이어지고. 재앙을 없애주소서. 질병을 쫓아 주소서. 큰 복을 내려 주소서. 간절하다. 작금의 현실같다. 언제적일까. 1702년께부터 이어져 온 장흥 호계리 별신제 만수재 이민기(1646~1704)선생의 글이다. 장흥 출신 학자로 경세에 밝아 향촌과 민생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개선책을 제시한다. 상순상민막장(上巡相民瘼狀) 등. 그 연정선이랄까. 인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설행한 별신제의 축문도 짓는다. 1702년(숙종 28) 무렵이다. 만수재집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318년 째, 정월 대보름이 오면 그 전날 밤부터 어김없이 별신제를 올린다.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별신제가 설행되고 얼마뒤부터 기록된 동계 문서 18건이 2008년 4월 11일 별신제와 함께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제318회 호계리 별신제(2020.2.7. 음 1.14) 현수막과 별신제장(동백정이 있는 나무숲 아래) 별신제(1987년) 동백정-호계마을의 인문학 문화공간이다. 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전라남도 문화재이이다. 호계리에는 전국적으로 드물게 마을박물관(호계문화예술회관)이 있다. 벽에 설치한 홍보물. 마을 박물관을 찾은 마을 어르신들. 호계 마을의 돌담도 중요한 경관이다. 호계리는 매년 대보름에 마을제사를 모셔 왔는데 별신제 제장과 당산제 제장 두 곳이다. 별신제는 천제(天祭)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북쪽 호계 주변 자갈밭에 자리를 잡아 모신다. 마을에 유고가 있으면 서로 반대 자리로 잡는다. 별신제에서 모시는 신은 천·지·인(天․地․人)을 신격으로 하여 삼위를 모신다. 제상을 ‘흐릿상’이라고 한다. 메와 탕은 올리지 않지만, 떡이나 술은 모두 3의 숫자를 맞춰 올린다. 음력 정월 14일 오전에 생대나무를 세우고 주변에 금줄은 친다. 대나무는 28숙을 뜻하는 28개를 세우며 제관 출입하는 한 곳만 남기고 빙둘러 왼새끼 금줄을 친다. 제관은 원래 21명인데 근래 줄어들었다. 별신제의는 전형적으로 유교식 집례 절차를 따르고 있다. 제관과 제물, 제차와 희생까지도 유교식 의례를 준용하고 있다. 특히 홀기에 따라 전반적으로 별신제가 집전된다. 당산제는 동쪽 다리곁 당산나무에서 지냈는데, 당산목은 고사되었다. 1990년대까지는 마을 동쪽의 큰 도로 곁 터에서 제장을 마련하고 산신제를 지냈다. 호계리 별신제는 원래 호계마을과 함께 지금의 장동면 만수동, 노루목(장항) 세마을이 용계면에 속해 함께 지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면(호계리)과 장동면(만수동, 장항)으로 나뉘면서 호계 마을 주민들만 지내고 있다. 1715년 창계, 호계리 대동계
장흥 호계리 동계문서는 모두 18점이다. 1715년(숙종 41)에 대동계를 만든 내력을 담은 『대동창계(大洞刱契)』, 동계안, 임원진 집강록, 제관록과 결산 내역책이 있다. 또 금고(농악)를 칠 때 부의했던 동리와 명단 기록, 홀기 따위이다. 마을의 재난 구제 요청 상서와 용계면 향도제감절목 등이 있다. 『대동창계』는 을미년(1715)과 신축년(1721)에 기록된 대동계 임원과 계원 명단, 그리고 8조의 완의이다. 지금 남아 있는 호계리 동계문서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대동창계(1715)
대동창계 명안 『대동계안(大洞禊案)』은 1734년(갑인) 문서로 대동계 서문과 완의(完議)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계의 배경과 목적과 마을에 관련된 제반 규율과 의무 등 일종의 자치규약 34개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상부상조를 회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에 대한 처벌, 춘추강회의 실시, 마을의 공동납 등 대동계를 운영하고 마을을 교화하기 위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호계촌중집강안』(임신년~정유년, 1752~1777)은 임원 명단으로 1년 단위로 교체되었다. 구성은 촌장(1), 도유사(1), 공사원(2), 유사(2), 직월(2)이다. 『호계촌중집강안』(1781~1831)에는 임원 명록과 함께 완의 2종이 있다. 마을 공동 소유의 상여 활용에 관한 내용과 춘추강회를 실시할 때 힘을 보태지 않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따르지 않으면 마을에서 쫓아내도록 했다.
대동계안(1734)
규약(도적 초범자는 태(笞) 5도(度), 재범자는 태 10도로 동계에서 치죄하고 삼범자는 사사로이 다스리지 말고 관에 고발하여 처치할 것 등등) 그리고 『대동계촌안』(1832~1858), 『호계리집강안』(1858~1873), 『호계리집강안』(1873~1894), 『호계대동안』(1895~1932), 『호계대동중』(1933~1953), 『호계동안』(무술, 병신), 『제관록』(1918년 외), 『별신제제수전장기(祭需傳掌記)』(1921), 『호계대동별신제홀기 축문』(이민기, 김기권) 등이다. 특히 현대사의 혼란한 시기인 광복과 6․25전쟁 전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호계동중 금고부의책(경인, 1890)
금고 부의책 장동 반산대동중 기록 51개 마을을 넘나든 농악 걸립 문서 『호계동중금고부의책(洞中金鼓扶儀冊)』은 경인년(1890년) 금고(농악) 부의 내용이다. 마을 주민은 물론 인근 마을, 보림사에 이르기까지 부의에 참여하는 농악 걸립 문서 자료가치가 있는 귀한 문서이다. 마을은 장동 11개 마을, 부평 39개 마을, 그리고 보림사중 등 모두 51곳에 이른다. 『상서(上書)』(정미)는 정미년 7월에 장흥부사에게 이규정 등 32명이 올린 것이다. 폭우로 인해 전답이 유실되고 인명이 표류하여 익사하였으며 제방이 파손되고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구휼해 달라는 내용이다. 자세히 살펴서 원조를 하겠다는 제음(題音)이 있다. 『상서』(무신)는 이듬해 정월에 29명이 올린 것이다. 전년 6월 태풍 피해로 잠긴 제방을 보수하여 물이 소통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전년 상서의 답신에 확인하여 처리한다 했는데, 해가 바뀌고 농사철이 다가와도 안 되고 있어 장정을 동원해 보수해 주고, 인근 주민도 동원해 달라는 내용이다. 『절목(龍溪面香徒除減節目)』은 갑술년(1814)에 향도역을 감제하는 절목이다. 용계면에 부과된 향도역을 순찰사가 조정해 주었는데 시일이 지나 다시 부과되자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이에 대해 감제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감제해준 절목이다. 끝에 기록된 내용을 통하여 향도역의 과중을 알 수 있다. * 신영(新迎)할 때 필요한 풍차죽(風遮竹) 31개, 내아(內衙) 풍차죽 30개, 주죽(柱竹) 2개, 죽석중(竹席竹) 25개 * 무과 시험에 필요한 과녁판(貫革板), 가게(假家)3칸, 동아줄(同和乼), 주죽, 주목(柱木), 기죽(旗竹), 죽력죽(竹瀝竹), 시목(柴木), 위리장목(圍籬長木), 탱주목(撑柱木), 측간목(厠間木), 장목(長木), 삭목(槊木) 용계면 향도역 감제절목 300년의 제의와 기록, 살아 있는 역사 자료 별신제는 전남지역에서는 흔한 용어는 아니지만, 장흥 호계리 지역에서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에서 사용되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전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당산제와는 크게 차이를 보인다. 제의 형식은 유교식 제차로 진행되는데, 제차․제물․제관 등이 국조오례의 「길례(吉禮)」에서 볼 수 있는 관제(官祭)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어서 호계리 별신제를 통하여 관제가 민간화되어 가는 양상을 알 수 있다. 호계리 별신제와 동계문서는, 동계의 창설과 운영 등 마을사의 변천, 그리고 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운영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들 문서는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 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