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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세 황후들
강희제의 세 황후: 허서리씨
강희4년(1665년) 칠월, 효장태후는 사대보신(四大輔臣)의 하나인 소니(索尼)의 아들인 영시위내대신 갈포라(?布喇)의 딸인 허서리씨(赫舍里氏)를 황후로 정하고, 예물을 보냈다. 같은 해 구월 초여드레, 현엽(玄燁, 강희제)은 조모의 명을 받아, 허서리씨와 대혼예식을 거행했다. 신랑의 실제연령은 11살 6개월이었고, 신부는 11세 9개월이었다.
허서리씨가 입궁한 후 태황태후, 황태후와 계속 잘 지냈고, 두 사람의 호감과 환심을 얻었다. 나이어린 여자로서, 이렇게 복잡한 환경속에서 잘 처신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치에 밝고, 온유하고, 현숙하며 대가집 규수의 풍모를 지닌 소녀를 자신의 황후로 삼았으니 현엽도 아주 만족해 했다. 그는 조모가 선택해준 여인에 만족했고, 조모의 안목에 감탄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듦에 따라, 그는 황후와의 애정이 깊어갔다.
강희8년(1669년) 십이월말, 허서리씨는 사내아이를 하나 낳는다. 그는 현엽의 적장자이다. 현엽은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승호(承祜)라고 지었다. 이름 그대로 이 아이가 하늘의 보우를 받아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대했다. 적장자의 탄생은 허서리씨의 중궁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대청왕조의 승계에 공헌을 했고, 이를 통하여 태황태후,황태후로부터 더욱 환심을 얻어냈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졌다.
어린 승호는 총명하고 귀여웠으며, 활발했다. 현엽은 그를 아주 아낀다. 그런데, 이 아이는 부친이 바라던대로 신명의 보호를 받지를 못하고 이년반만에 병사한다. 강희11연 이월초엿새, 적성탕천(赤城湯泉)로 조모를 따라갔던 현엽은 이 나쁜 소식을 듣고, 여러날동안 우울해 하였다. 그의 곁에 있던 신하들도 그가 침울해하는 것을 보고는 계속하여 절애(節哀)를 권했다. 현엽은 아주 이성적이고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승호의 앞에 이미 몇몇의 황자, 공주가 차례로 병으로 요절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승호가 그의 유일한 적자라는 것 외에 허서리씨가 낳았다는 것도 관련될 것이다. 현엽은 황후와 애정이 깊었고, 자식의 죽음은 그의 슬픔을 더하게 만들었다.
승호의 죽음은 허서리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녀의 신체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점차 쇠약하며, 병이 많아졌다.
강희12년(1673년)말, 평서왕 오삼계가 운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삼태자(朱三太子)" 양기륭(楊起隆)이 경성에서 방화를 저지르며 사건을 일으켰다. 일시에 인심이 흉흉하게 되었고, 어떤 북경백성들은 서산으로 도피했다. 강희13년 삼월, 정남왕 경정충(耿精忠)이 복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월, 청나라조정은 북경에 있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을 죽였다. 바로 이 때 허서리씨는 둘째를 낳으려고 하였다.
마음이 평온한지 여부는 임산부에 아주 중요하다. 출산조건이 비교적 낙후되었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다. 허서리씨는 아직 21세도 되지 않았고, 자식을 낳기에 가장 좋은 연령대였다. 여러해전에 이미 순조롭게 한차례 분만한 적이 있다. 이번 출산에 의외의 사고가 발생한 것은 그녀가 당시의 국면이 긴장되고 우려하였다는 것과 관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오월 초사흘 오전 사시, 허서리씨는 바라던대로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그녀는 출산으로 기가 빠져서 오후 신시에 곤녕궁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청나라때 황후중에서 가장 젊어서 죽은 사람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난산으로 사망한 황후이다.
새로 적자를 얻는 기쁨과 황후를 잃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단지 2시진을 사이에 두고 현엽은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다. 그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이로 인하여 조회를 5일이나 취소하고, 허서리씨에게 "인효황후(仁孝皇后)"라는 시호를 내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갈포라는 1등공에 봉해지고, 대대로 세습되도록 한다.
허서리씨가 죽은 후, 삼년동안 현엽은 새로 황후를 세우지 않는다. 십육년 팔월, 그는 조모의 명을 받아 두번째 황후를 책봉한다.
강희제의 세 황후: 뉴후루씨
강희16년(1677년) 팔월 이십일, 현엽은 조모의 명을 받아, 어비롱(?必隆)의 딸 뉴후루씨(?祜祿氏)를 황후로 책봉한다. 동시에 퉁궈웨이(?國維)의 딸 퉁자씨(?佳氏)를 귀비(貴妃)에 책봉하고, 이씨(李氏)등 7명을 빈(嬪)으로 책봉한다. 이는 강희제 최초의 정식 비빈책봉이다.
뉴후루씨는 단지 6개월간 황후를 지냈다. 강희17년(1678년) 이월 이십육일 사망한다.
강희제가 처음에 황후를 책봉할 때, 뉴후루씨도 후보자에 들어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연령은 허서리씨와 비슷했다. 출신으로 보면, 그녀는 보정대신(輔政大臣)의 딸로서, 당시 선발명단에 들어있던 만주족 여자들 중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니의 손녀인 허서리씨보다 더 우월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을 보면, 그녀의 용모나 자질은 모두 허서리씨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정대신 아오바이(鰲拜), 수크사하(蘇克薩哈), 어비롱등은 모두 뉴후루씨를 황후로 밀고 있었다. 효장태후는 당시 상황기를 대표하는 아오바이집단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막고, 동시에 정황기의 대신인 소니와 그 가족을 묶음으로써, 양황기를 분화시켜,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허서리씨를 황후로 결정했다. 동시에 뉴후루씨도 궁안에 받아들였다.
<<후비전고>>에 따르면 뉴후루씨는 "어려서 입궁하여 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는 입궁한 후에 정식으로 비의 봉호를 받지 못했다. 당시 현엽의 후비들 중에서 정식으로 책봉받은 사람은 황후 허서리씨 한 사람 뿐이었다.
부친대에서의 정치투쟁의 와중에 휘말려서, 뉴후루씨는 황후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나이가 어렸지만, 이것이 자신의 평생운명을 좌우하는 일이라고 잘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허서리씨를 황후로 한다는 유지가 반포되자, 어비롱, 아오바이, 수크사하는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되고, 함께 들어가서 진언을 올린다. 그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갈포라의 딸이 황후가 되다니,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 수하 만주인의 딸이 어찌 황후가 될 수 있는가?" "우리 친구의 딸이 황후로 봉해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영시위내대신 갈포라 및 그 딸을 경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불만정서는 뉴후루씨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비교적 억울하고, 억압된 심정으로 입궁한다. 이 점은 그후 십여년간 그녀의 궁안에서의 처세에 영향을 미친다.
강희16년 팔월 뉴후루씨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문에서 그녀에 대하여, "성품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예법을 잘 지키고, 모범이 되어, 궁안에 칭찬하는 말이 자자하고, 스스로를 잘 가꾸어서, 중국과 외국에 황후가 될 만하다" 이를 보면, 그녀도 태황태후, 황태후 및 현엽의 호감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3년 오월에 황후 허서리씨가 서거한 후, 그녀의 실제적인 지위는 점차 상승하여, 이미 후궁을 통할하는 지위에 있었다. 단지 현엽이 죽은 황후를 위하여 3년상을 치러야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뉴후루씨의 정식책봉은 계속 미뤄졌던 것일 뿐이다. 뉴후루씨는 입궁한 후 첫 10년간이 그녀에게는 우울한 시기였다. 허서리씨가 서거하기 전에, 그녀는 일생동은 허서리씨의 아래에 처하며,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힘든 운명이었다. 그리하여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조그만치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비교적 우울한 상황하에서 뉴후루씨는 태황태후, 황태후, 황제, 황후와 모두 잘 지냈으니, 그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뉴후루씨는 허서리씨와 마찬가지로 태황태후, 황태후를 잘 모셨을 뿐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도 어질게 대했다. 그리고 독서를 좋아하여 글재주가 있었다. 그녀의 사후에 시호를 내리는 책문에서도 그녀가 비교적 높은 문화적인 소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뉴후루씨는 현엽으 후궁중에서 자신의 장점을 잘 발휘했다. 그녀는 허서리씨를 이어 황후에 오르는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녀와 현엽은 서로 얘기를 나눌 것이 많았고, 서로간의 감정도 깊어갔다.
뉴후루씨는 황후가 되자, 즉시 현엽에게 이미 돌아가신 부친을 위하여 가묘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현엽의 동의를 받는다. 그러나, 가묘가 황제의 명을 받아 완공되었을 때는 이미 뉴후루씨가 사망한 이후였다. 강희18년 삼월 이십사일, 현엽은 친히 비문을 쓰고 이 일의 경위를 기록한다.
부친때문에 뉴후루씨는 입궁할 때 황후가 되지 못한다. 곧이어 부친에 연루되어, 묵묵히 말로 하기 힘든 압력과 고통을 견뎠다. 그러나 그녀는 부친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조건이 허락되자, 갖은 방법을 강구하여 가묘를 건립하는 방식으로 부친의 은혜에 보답한다.
뉴후루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가 입궁한 후 십여년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다. 어렵사리 황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강희17년(1673년) 이월 이십육일 사시, 뉴후루씨는 곤녕궁에서 서거한다. 나이는 약 25세였다. 관련사료에서는 그녀의 사인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병을 앓았다는 기록도 없다. 아마도 그녀는 지나간 세월동안 너무나 많은 심혈을 쏟았는지 모르겠다. 실현되지 못한 숙원을 위하여, 억지로 버티고, 억지로 웃었다. 일단 소원을 이루자, 긴장이 풀렸는지, 잠복되어 있는 질환이 발작해서 그녀의 젊은 생명을 빼앗아간 것은 아닐까?
강희제의 세 황후: 퉁자씨
현엽의 세번째 황후 퉁자씨는 먼저 귀비에 봉해진다. 강희16년(1677년) 팔월 이십사일, 현엽은 예부에 유지를 내려, 퉁자씨를 귀비로 하고, 이씨를 안빈, 왕가씨를 경빈...등으로 임명한다. 이것은 현엽이 후궁을 정식으로 책봉한 첫번째이다. 이전까지는 뉴후루씨를 포함한 모든 궁인들은 정식으로 봉호를 받지 못했었다.
퉁자씨가 언제 입궁했는지는 불명이다. 그녀는 현엽이 처음 비빈을 책봉할 때 귀비가 되었다. 이는 그녀가 명문집안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부친 퉁궈웨이(?國維)는 현엽의 생모인 효강황후의 남동생이다. 강희9년에 내대신이 되고, 21년에 영시위내대신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정대신이 된다. 그녀의 생모는 퉁궈웨이의 정실부인인 허서리씨이다. 청나라초기 퉁씨가족중에는 두명의 국구(國舅, 황제의 외삼촌) 이외에 관직이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적지 않다. 당시에 '퉁반조(?半朝)'라는 말이 있었는데, 퉁씨가 조정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퉁자씨는 이러한 특수한 가족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현엽의 사촌여동생이면서, 퉁궈웨이의 적녀이니, 자연히 신분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강희20년(1681년) 십이월, 현엽은 조부의 명을 받아, 귀비 퉁자씨를 황귀비(皇貴妃)로 승격시킨다. 현엽이 책봉한 모든 비빈중에서 그녀는 유일한 황귀비였다. 청나라제도에서, "황후의 아래로 황귀비가 가장 높고, 육궁의 일을 통할할 수 있다. 즉 부황후라고 할 수 있다." 퉁자씨는 명목상으로는 황귀비였지만, 황후의 자리가 비어있으므로, 실제로 황후의 직책을 수행했다.
현엽의 앞선 두 황후와 마찬가지로, 퉁자씨도 온화하고 단정했다. 말과 표정에 법도가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당시 후궁중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였고, 비빈들에게도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녀는 사망하기전에 이미 30이 넘었다. 여자로서의 가장 좋은 시기는 지나간 것이다. 현엽이 그녀보다 젊고, 예쁜 비빈들에게 정을 줄 때도 그녀는 질투, 간섭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녀가 생각하기에 적합한 여인을 현엽에게 추천했다.
퉁자씨는 현숙하고 이치에 밝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 2세기이후 청나라말기에 관리를 지낸 하인호 선생이 쓴 <<청궁사>>의 주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성조의 세 황후는 효성 허서리씨는 갈포라의 딸이다. 효소 뉴후루씨는 어비롱의 딸이다; 효의 퉁자씨는 퉁궈웨이의 딸이다. 효의황후는 외가가 가장 현명하고, 예절이 뛰어났다."
강희22년(1683년) 육월, 퉁자씨가 딸을 하나 낳는다. 현엽이 조모를 모시고 새외로 피서를 가 있었기 때문에, 내무부 총관 투바(圖巴)는 붉은 종이에 글을 써서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육월 십구일 사시 황귀비가 공주를 낳았다. 환관, 어의에 다르면, 황귀비는 몸이 건강하고, 공주고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공주는 부친이 얼굴을 보기도 전에 1개월후에 사망한다. 이는 퉁자씨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후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전의 두 황후와 비교하여, 퉁자씨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즉 현엽의 자식들과 잘 지내는 문제였다. 허서리씨, 뉴후루씨가 살아잇을 때는 황자, 공주들 중에서 요절한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몇몇은 모두 나이가 어렸거나 강보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퉁자씨가 사망하기 전에 황장자 윤시는 이미 18세이고, 이공주(황삼녀)는 이미 17세였다. 이들 둘 아래에는 십여명의 서로 나이가 다른 동부이모의 자매동생들이 있었다. 퉁자씨는 이들 황자, 공주를 자신의 자식처럼 길렀다. 그녀는 아이를 아주 좋아했고, 아이들을 아꼈다. 이를 보면 그녀의 선량하고 온화한 성품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퉁자씨가 황사자(皇四子) 윤진(胤?, 나중의 옹정제)을 친히 부양했다. 윤진은 강희17년(1678년)에 태어났고, 생모는 당시 아직 작위를 받지 못했던 우야씨(烏雅氏)였다. 윤진이 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퉁자씨가 길렀는데, 십년후에 그녀가 사망한다.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해서, 다른 비빈이나 궁녀가 낳은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데려와 기르곤 했다. 이는 강희제때 보기 드문 일이었다. 퉁자씨는 어린 윤진을 아주 아꼈고, 잘 보살펴 주었다. 그녀는 친아들이 없고, 친딸은 1달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을 다른 비빈들이 낳은 자녀들에게 충분히 쏟았다. 특히 황사자 윤진을 많이 아꼈다. 생모는 당시에 겨우 비의 작위밖에 받지 못했는데, 황귀비의 사랑을 어려서부터 받은 것은 윤진에게 행운이었다. 그 자신과 자손들도 이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했다. 퉁자씨의 10년간의 양육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것 이외에 자랑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뉴후루씨가 죽은 후 중궁의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 있게 된다. 이치대로라면 일찌기 강희20년, 귀비 퉁자씨가 황후가 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한단계 올라 황귀비가 되었을 뿐이다. 또한 이 자리에 8,9년간 머물게 된다. 강희28년 칠월초에 그녀는 중병을 앓아서,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칠월 초여드레, 현엽은 비로소 예부에 유지를 내려, "황태후의 유지를 받들어, 황귀비 퉁자씨를 황후에 책봉한다'고 하게 된다. 칠월초아흐레, 현엽은 퉁자씨를 황후에 봉하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한다. 초십일 신시에 퉁자씨는 사망한다. 여러해동안 미뤄왔던 황후책봉도 그녀의 목숨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책봉식은 장례식으로 바뀐다.
강희28년 육월상순, 현엽은 황태후의 명을 받아 창춘원으로 가서 거주한다. 칠월 초이레 깊은 밤, 그는 돌연 궁으로 돌아온다. 이는 심상치않은 일이었다. 그는 황귀비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되돌아온 것이다. 황태후는 초여드레에 궁으로 돌아온다. 이를 보면, 퉁자씨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효혜황태후는 퉁자씨를 황후로 세우도록 명한후, 그녀는 퉁자씨를 매우 좋아했고, 일찌감치 황후로 책봉할 뜻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효도를 다했던 현엽은 적모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지 않았고, 신하들이 여러번 황후를 책봉해달라고 요구해도 미루기만 하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태자를 폐위했던 기간동안 현엽은 일찌기 황태자 윤잉이 "태어나면서 모친을 죽였다(生而克母)"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실제로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에게 극후(克后)의 운명이 있지 않은가 걱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황후도 그와 함게 있은지 10년만에 죽었고, 나이가 겨우 22세였고, 두번째 황후는 책봉전 10여년간 아무렇지도 않다가, 일단 황후가 되자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현엽은 세번째 황후로 책봉된 여인이 다시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같다. 그리하여 퉁자씨에 대하여 그는 만족하면서도, 그녀를 황귀비의 지위에 머물게 했고 황후에 책봉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황태후와 대신들이 간언함에도 생각을 한 후에 미루고 허락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퉁자씨의 병세가 위독해졌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책봉에 대한 일을 꺼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사망을 앞당길까 우려했던 것이다. 황태후가 말을 꺼내자 비로소 그 뜻에 따라 책봉한다.
퉁자씨가 사망했을 때, 현엽은 36세였다. 한창 때였는데, 이후로 그는 황후를 책봉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황후'의 지위라고 볼 수 있는 황귀비의 자리마저도 계속 비워두게 된다. 봉건사회에 황제와 황후는 지고무상의 군권을 상징한다. 한 자리라도 비어서는 안된다. 황후는 백성들이 존경하는 국모이고, 그녀의 품행은 천하여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당시의 도덕기준으로 보자면, 나라에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황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는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의 이웃나라에서는 이 일을 오랫동안 주목하여 왔다. 강희58년(1719년) 조선의 사신은 북경에서 돌아간 후에 이렇게 말했다: "저 나라는...황후와 태자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 지금도 세울 생각이 없다" 황후의 자리와 태자의 자리를 나란히 언급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엽은 여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여전히 황후를 다시 두지 않는다. 그 속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말못할 점이 있을 것이다. 만일 비빈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