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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제국의 최초의 도읍지, 부르사
[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 ]
역사상에 오스만투르크의 등장은 극적이었습니다. 오스만투르크는 13세기 말까지 당시 아나톨리아를 평정하고 있던 셀주크투르크의 뒤켠에서 졸졸 따라 다니면서 천막생활을 하던 변변치 않던 투르크 부족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작은 부족이 점차 셀주크 제국을 집어 삼키더니 100년이 채 안되어 그리스와 발칸 반도 남부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급기야 이들은 세계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던 동로마(비잔틴)까지 멸망시키고 발칸반도와 유럽의 중부까지 치고 들어오면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또한 중동과 러시아 남쪽, 북부 아프리카까지 점령해 유럽의 내해라던 지중해와 흑해, 홍해를 자기들만의 호수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동방으로 나가는 페르샤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데 걸린 시간은 22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오스만투르크의 등장은 유럽이 지배하던 세계사의 판도를 아시아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500년의 세월 동안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이슬람세계의 맏형으로 군림했습니다.
* 오스만투르크 전성시대의 판도, 가운데 붉은 부분이 오스만이 일어난 지역(부르사)입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애초에 젊은 지도자 ‘오스만 베이’가 이끄는 투르크계 부족은 소아시아 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대 제국 셀주크와 동로마 사이에 끼어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던 보잘 것 없는 부족이었습니다. 당시 이 오스만 베이가 부족장이 되었을 때 천막은 4만 개 정도였습니다.
한 천막에 4~5명이 거주했으니 총 인원은 약 8만에서 20만 명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나 23세의 젊은 부족장은 탁월한 리더십과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다른 투르크 유목민들을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점차 세를 불린 오스만 부족은 1299년 오스만투르크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고, 오스만은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의 대를 이은 아들 오르한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영토를 넓혀나갔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공격해 콘스탄티노플 인근의 부르사를 빼앗은 다음 그곳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곧이어 부르사 북쪽의 이즈니크와 이즈미트를 차지해 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콘스탄티노플과 대치했습니다. 그리고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발칸반도 남단의 갈리폴리까지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압박해 나갔습니다.
* 오스만 1세
오스만투르크가 넓은 동쪽을 놔두고 바다 건너 비잔틴 제국을 공격한 것은 다분히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동쪽은 같은 이슬람의 땅인데 반해 서쪽에는 거대한 기독교제국이 자리 잡고 있어 먼저 이교도의 땅을 공략한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 기독교도들에 당한 것을 보복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알라의 도구이자 신의 칼인 ‘가지’, 즉 이슬람의 전사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곧 이슬람의 전파이며, 전쟁에서의 죽음은 순교 자체였습니다.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오스만은 무서운 기세로 기독교세계를 잠식해나갔습니다.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란 말은 기독교세계에서 이슬람의 정복전쟁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100년의 역사에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세계가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총고 대포’를 들고 이슬람세력을 무력으로 장악해 나간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유일신을 믿는 이 두 종교 세력에게는 상대방을 반드시 무릎을 꿇려야 하는 ‘야만적 존재’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 오스만투르크의 융성
유럽 기독교세계 정복에 앞장섰던 오르한의 아들 무라드 1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배후 불가리아 접경지역에 있는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을 점령하고 수도를 아예 그곳으로 옮겨 유럽 공략을 본격화했습니다. 그리스 등 발칸반도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무라드 1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 1세의 별명은 ‘번개 왕’이었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영토를 크게 늘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아나툴루 히사르’ 성을 쌓고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공격은 한참 뒤로 미루어져야 했습니다. 오스만이 유럽 공략에 치중한 사이 인도 북부의 티무르족이 중앙아시아를 건너 아나톨리아의 뒤통수를 친 것입니다. 1402년 7월, 오스만과 티무르는 앙카라 평원에서 대격전을 벌였는데, 오스만이 완전히 참패했고 바예지드 1세는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 당시 이스탄불
바예지드 1세는 감옥에서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투르크족이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온 티무르가 오스만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린 것입니다. 다행히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땅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실력만 살짝 보여주고는 물러간 것입니다.
오스만은 겨우 영토를 보전했지만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위기를 추스르는 데만 5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반세기를 미루었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1451년에 재즉위한 메흐메트 2세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습니다. 그는 2년간의 준비 끝에 1453년 기어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에게 정복자를 뜻하는 ‘파티히’란 별칭이 주어졌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1444년 부친인 무라드 2세의 갑작스런 양위로 어떨결에 술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변덕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운명을 기약할 수 없다가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빨리 술탄 자리를 다시 꿰찼습니다. 오스만제국에서 권력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술탄의 자리는 피를 부르는 투쟁의 산물이었습니다.
* 오스만 병사
[ 오스만 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
메흐메트 2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 2세는 아들 셀림 1세에게 권력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잔혹한 술탄’으로 불렸던 셀림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중동지역과 이집트를 공격해 홍해연안까지 진격했다. 이때부터 이집트와 시리아는 400년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슬람 세계를 평정한 셀림 1세는 무함마드의 계승자이자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의 지위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셀림 1세는 거대 제국의 황제와 이슬람교의 지도자를 겸하는 명실상부한 천하 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속국이 된 이집트에서 예언자 모하메드의 망토와 턱수염, 활 등의 성물을 가져 왔습니다. 이 유물들은 현재 톱카프 궁전 특별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보기 위해 많은 무슬림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는 셀림의 외아들인 술레이만 1세 때 이루어졌습니다. 술레이만은 형제들과의 권력투쟁 없이 평화롭게 1520년 즉위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투르크식 발음인 술레이만은 46년 동안 오스만제국을 통치하면서 무려 13차례의 원정을 떠나 오스만의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북쪽으로 발칸반도를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공격해 유럽을 벌벌 떨게한 이가 바로 술레이만입니다.
* 합스부르크군과 오스만투르크군의 빈 근방에서의 전투
빈 점령은 실패했지만 남쪽에서는 계속 승승장구했습니다. 술레이만 1세는 아르메니아를 넘어 바그다드까지 점령한 뒤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 만까지 내려가 홍해마저 수중에 넣었습니다. 지중해와 흑해에 이어 홍해까지 차지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바다를 모조리 ‘오스만의 호수’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 술레이만 1세
튀니지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진출해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제국의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이스탄불에는 재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조공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술탄은 승리를 허락한 신께 감사하기 위해 수많은 모스크를 세웠습니다. 현재 이스탄불의 모스크는 대부분 정복전쟁에 의한 오스만 팽창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술레이만은 전쟁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다방면에서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최고의 문명을 건설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법과 제도를 정비했고, 교육을 장려해 인재 육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거친 황제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사내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포로였던 폴란드 여성 록셀란과 사랑에 빠져 왕실과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술탄들과는 달리 록셀란 이외는 일생동안 다른 부인은 두지 않았습니다. 술레이만은 전쟁, 건축, 예술, 사랑을 아우르는 ‘오스만 번성기’의 위대한 상징입니다. 그는 13번째 원정을 떠났다가 전쟁터의 마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스탄불의 술리이마니예 모스크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 록셀란
* 록셀란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우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쾌활한 성격 때문에 명랑한 여인 즉 ‘후렘’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 예니체리, 이슬람 전사로 탈바꿈한 기독교 소년들 ]
오스만제국이 벌인 정복전쟁에서 항상 앞에서 싸운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는 마지막까지 목숨으로 술탄을 보호했던 친위대였습니다. 그들은 사유재산과 혼인을 금지당한 채 인간병기로 키워졌습니다. 예니체리, 그 이름만으로도 적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했던 이슬람의 진짜 전사들이었습니다.
예니체리는 애초에 기독교를 믿던 소년들이었습니다. 점령지에 있는 기독교 소년들을 잡아와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기독교세계를 공격하는 주력군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슬람 전사로 키워진 젊은 예니체리는 기독교의 심장인 콘스탄티노플까지 밀고 들어와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소피아성당까지 훼손했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오스만제국 건국 초기에는 전쟁이 시작되면 일터에 있던 남자들을 동원해 급하게 부대를 만들어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하지만 정복전쟁이 확장되면서 전투에만 전념하는 전문적인 군인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3대 술탄인 무라드 1세는 묘안으로 포로로 잡힌 기독교 가정의 소년들을 데려다 무슬림으로 강제로 개종시킨 뒤 충분한 보상을 대가로 병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 뛰어난 무슬림들을 이들과 섞어 정예부대를 만들어 ‘예니체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별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예니’는 새로운, ‘체리’는 병사로, 새로운 병사란 뜻입니다. 즉 신식군대였습니다. 부대에는 무슬림보다 기독교 소년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에니체리는 나중에 결혼이 허용되었는데, 이들의 자식들은 대를 이어 예니체리로 충원되었습니다. 예니체리의 활약이 절정에 달했던 16세기에는 이들의 숫자가 1만5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채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병영에 끌려와 혹독한 훈련과 함께 강력한 정신교육이 병행되었습니다. 훈련과정에서 기독교인 아이들은 철저한 무슬림으로 교육되었고, 술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케 했습니다. 유럽이 아직도 봉건적인 군대에 의존할 때 등장한 예니체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정규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중앙정부와 군주에게만 충성을 하였고 정기적인 급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시에는 치안과 소방업무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여 가정도 꾸리면서 연금을 받아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자신들의 자식을 예니체리 군대에 보내는 기독교 가정도 있었으며 나중에는 무슬림 가족들도 예니체리를 출세의 길로 인식하고 자식들을 예니체리로 만들기 위해 로비까지 했다고 합니다.
블루모스크, 술리이마니예 모스크 등 수많은 이슬람 건축물을 만든 오스만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도 예니체리 부대로 징집된 기독교도였습니다. 그는 건설 장교로서 수많은 요새를 설계했습니다. 그가 만든 요새 앞에서 엄청난 수의 기독교 병사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수놓은 수많은 모스크가 바로 그이 작품입니다. 이 많은 이슬람 건축물로 시난은 인류 역사의 혁신을 이끈 건축 거장 40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오스만제국과 흡혈귀 드라큘라 ]
우리가 영화 <괴인 드라큘라>로 잘 알고 있는 드라큘라는 아일랜드의 작가 스토커의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 〉(1897년 작품)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작가는 루마니아의 트랜실바니아 지방의 전설에 의거해 이 작품을 썼습니다.
* 영화 <괴인 드라큘라>의 배우, 크리스토퍼 리
소설은 트랜실바니아 지방의 한 고성에 혼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이 있었는데 이 성을 방문한 영국인 하커가 백작이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저녁이 되면 일어나서 사람을 덮치는 무서운 흡혈귀라는 사실과 흡혈귀에 피를 빨려 죽은 피해자 역시 흡혈귀가 되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흡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늘과 십자가, 태양 광선이며 그들의 영혼에는 안식과 평안이 없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이후 여러 편의 <드라큘라> 영화가 나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 드라큘라의 모델, 블라드 체페슈
드라큘라의 모델이 되었던 백작은 실제 역사속의 인물로써 그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였습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1427년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의 씨기쇼아라라는 도시에서 루마니아 옛 왕국 중의 하나인 발라히아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을 오스만투르크에 끌려가 볼모생활로 보내게 됩니다. 후에 그의 아버지인 블라드 1세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다시 발라히아로 데려오지만 곧바로 이번에는 헝가리 제국에 또 다시 볼모로 잡혀가는 불운을 겪습니다.
1456년에 다시 돌아온 그는 블라디 2세로 발라이하의 영주로 등극합니다. 볼모생활 중에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애국심을 기른 체페슈 왕자는 이후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많은 적들을 포로로 잡게 되었는데 이 포로들을 처형하는 방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고 합니다.
* 블라드 2세가 살았다는 브란 성, 지금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드라큘라 성으로 불리웁니다.
굵은 가시가 박힌 큰 바퀴를 사람 몸 위로 지나가게 해 온몸에 구멍을 내기도 하였고, 장대를 깎아 만든 창으로 항문을 찔러 입으로 나오게 하는 등 갖가지 잔인한 처형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체페슈인데 이 이름은 바로 이 잔인한 처형방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루마니아어로 체페슈는 '가시' 또는 '꼬챙이' 라는 뜻입니다.
* 블라드 2세의 방, 마찬가지 이유로 지금은 드라큘라의 방으로 불리웁니다.
블라드 체페슈는 이처럼 소설의 모델이 될 정도로 잔혹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오스만투르크의 군대를 무찌른 용장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블라드는 드라큘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용(드라큘)이라는 작위를 받은 그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생각해 자신의 이름을 블라드 드라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다 루마니아어로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의 ‘a’를 붙여 블라드 드라큘라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 중 항상 용 그림을 그린 깃발과 문장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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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봣읍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학교(용고)도 루마니아어로 드라큘라학교가 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