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16
10월17일 [연중 제2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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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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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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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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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점점 최후의 장소, 예루살렘, 그리고 골고타 언덕에 가까워지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극도로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스승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드려도 모자랄 판인데,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모습은 참으로 미성숙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않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장 37절)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 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코 복음 10장 43~45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사제서품 미사 후 축하의 자리에서 한 마디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 양성 기간 끝에 거룩한 사제로 거듭난 형제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참으로 기쁘고 가슴 벅찼습니다. 동시에 다양한 감정들이 제 머릿속에서 교차되었습니다.
고마움, 대견스러움, 기대감, 등등. 그러나 반대로 이제 사목자로서 세상의 거친 들판 앞에 서게 될 형제들을 생각하니, 걱정, 우려, 연민의 정도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새 사제들을 향한 덕담에는 본의 아니게 날이 서 있었습니다.
“사제 서품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품이 승진하는 것, 벼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꼭 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회로 치면 이제 여러분은 사원 가운데서도 신입사원, 신입사원 가운데서도 수습사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제로서 갖춰야 될 가장 기본적인 덕행인 겸손의 덕을 늘 가슴깊이 간직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겸손이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있을 자리는 높은 자리, 고상한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낮은 밑바닥이요, 세상의 끝이라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사제가 되었으니, 그간 지긋지긋하게 해온 청소나 빨래, 설거지와는 작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파릇파릇한 수습사원이니만큼, 더 자주 운동장에 나가고, 더 자주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과 동고동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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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mdObHI-zZ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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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마지막 때에 당신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확고한 의지를 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저는 이전에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오른편과 우편에 앉는 것도 당신이 정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리고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을 더 높은 자리에 앉혀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미 그 자리에 정해진 이들이 있다니?’ 그런데 살다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사람, 혹은 그 자리에 합당하다고 원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을 때 항상 이런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다!”
특별히 전임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던 이들은 전임보다 더 안 좋은 행태를 보이곤 했습니다. 결론은 자신이 그 자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것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초대받았을 때 주인은 어디에 앉으시라고 이미 자리를 정해놓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내가 그 자리에 앉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해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면 자기는 주인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라건, 회사건, 성당이건, 내 것이 있습니까?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주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당연히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여기는 이는 무엇을 운영하던 하느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할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자리가 주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앉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능력 있는 만큼 자리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는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만약 엄청난 자기관리로 어마어마한 돈과 재능과 능력을 보인 여자가 연애를 위해 남자를 고른다면 그렇게 선택된 남자들과 태어난 자녀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재산이 약 5천억 원에 달하는 미국 할리우드 배우이자 가수인 제니퍼 로페즈는 17년 전에 헤어졌던 벤 애플렉과 재결합했다고 합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 싶지만 제니퍼 로페즈는 벤 애플렉과 재결합하기 전에 이미 3번의 이혼과 2번의 파혼 경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빼고는 4번이 모두 남자의 외도로 헤어진 경우입니다. 그러면 제니퍼 로페즈가 외도하는 남자들만 사귄 것일까요? 어쩌면 남자들이 제니퍼를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제니퍼 로페즈는 1969년생으로 작은 섬나라인 푸에르토리코 출신입니다. 50세가 넘었지만,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에서 공연할 정도로 열정이 넘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힘들게 성공한 커리어를 놓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자기관리를 넘어서서 완벽한 무대를 위해 백댄서나 스태프들에게 무례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합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라틴계 여배우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로페즈는 자신의 노력으로 라틴계 여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출연료 100만 달러를 받는 배우가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가수로 데뷔한 것은 1999년 30세가 넘은 나이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영화계와 음악계의 디바로서 우뚝 선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백댄서와 코러스를 하며 라틴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스타가 되겠다는 꿈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쫓겨나 댄스 학원에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고생을 하고 수모를 견뎌내며 버텨왔다는 일화들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로페즈는 엄청나게 연습하고 관리하고 노력하는 일 중독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상급이 ‘관계’에까지 미친다고 여기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 앞에서 남자들은 스스로 한없이 작아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로페즈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남자를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면 남자는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또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있는 유명인, 어쩌면 우리도 내가 노력하면 저 사람과 결혼하거나 저 자리에 당연히 앉아야 한다고 여기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결혼이나 교회에서 어떤 자리에 앉는 것은 주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이고, 내가 하면 더 잘할 것 같고, 내가 저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관계 내에 주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교만’이 바탕이 된 관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기는 마음이 없으면 상대의 교만으로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나 자리를 유지하는 힘은 ‘겸손’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은 내가 노력해서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혹은 내 능력으로 이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정해주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교황님이 가장 많이 탄생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들은 교회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주님의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근 성인이 되신 두 교황은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성 요한 23세이시고 그 공의회를 실현하기 위해 사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입니다.
교황 23세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그분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폴란드인 교황이라는 것은 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본인들도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앉은 두 교황은 현대사의 큰 획을 긋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지금 그런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것은 잘된 일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제가 되면 본당 신부보다 잘할 것처럼 여기며 비판하는 사람은 관계나 자리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는 무신론자와 같습니다. 모든 관계와 자리의 주인을 하느님으로 믿읍시다. 그래야 겸손하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교회가 분열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선거처럼 우리 교회도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로 뽑았습니다. 관계와 자리에서 나는 섬기는 종의 모습인지, 하느님을 밀어내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모습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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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당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힘과 권세로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인 구원을 이루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종으로서 약하디약한 새순(이사 53,2),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력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신비가 드러난다. 이 신비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 드러났다. 바로 생명을 위한 고통이다.
복음: 마르 10,35-45: 출세와 섬김.
이 의미를 오늘 복음을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면서 세 번씩이나 점점 더 분명하게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말씀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첫 자리에만 골몰하고 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37절)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절) 여기서 이 잔은 당신 자신의 운명이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이사 53,4)가 되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고통스럽고 무자비한 죽음의 운명을 말한다. 예수님의 참된 세례는 주님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지는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39절) 그들의 대답은 그냥 자리에 대한 욕심에서 한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39절) 하여간 요한은 정확한 것을 모르지만, 야고보는 실제로 44년 헤로데 아그리파 1세 때 순교한다(사도 12,2).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첫 자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순교한다고 하여도 그것 역시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다른 열 제자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신다. 제자들은 세상의 지도자들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43-44절) 일반 사회의 조직체에서는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이나, 공무원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경제적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했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작금의 상황이다. 교회 안에서는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것은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권위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와 협잡꾼이 모인 일반 사회조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45절) 이 말씀으로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확실히 말씀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이사 53,4)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만물에 대한 최고의 권위와 주권을 차지하신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종으로서, 그분의 봉사는 인간들에 대한 철저한 사랑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은 포악한 죽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영광과 권능을 차지하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수행하는 봉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우리의 연약함, 걱정, 실망, 모욕, 박해 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까지 받아본 일이 없는 포악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삶으로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며 닮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느님의 영광중에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히브 4,14)로서 우리의 결정적인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께 가까이 가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과 봉사의 자세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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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마르 10,35-38)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청한 것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말은,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는 뜻입니다. 즉 서열 1번과 2번을 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중요한 일을 하실 때 그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이 많은데, 그래서 아마도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자기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왜 베드로 사도를 빼놓고서 가장 높은 자리를 청했을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마태 16,18)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 일은 ‘예수님의 나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저희가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두 사도의 말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요청을 당연히 들어 주실 것이라고, 또는 당연히 들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는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즉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때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메시아 왕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모르고 있어서 잘못된 요청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이 말씀은 사두가이들이 ‘부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인데,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메시아 왕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나라’는 지상의 왕국들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도를 부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더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2) 그 나라는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자격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잔’과 ‘세례’는 ‘십자가’를 뜻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서 그대로 뒤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르 10,39-40)
“할 수 있습니다.”라는 두 사도의 말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뜻으로 한 말로 생각됩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두 사도가 겪게 될 고난과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너희가 지금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청하고 있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있지만, 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에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을 깨닫고 믿게 될 것이고, 나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ㄱ) (확실히,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해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 나라에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만(하느님께서 자격을 인정해 주신 사람들만)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들어갈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1-45)
이 말씀은, ‘높은 사람이 되는(첫째가 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서 사람들을 ‘섬긴’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반대쪽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내가 더 잘났다.” 라고 주장하면서 서로 싸우는 지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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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좋은 생각’을 보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9월호에 나왔던 문요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강건하였던 아버지가 담도암 판정을 받았고, 몸이 쇠약해지면서 나중에는 거동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아버지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곡기를 끊으면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요양병원에서 지내면서 어린 아기처럼 기저귀를 차야했고, 직원들에게 몸을 맡겨야 했습니다. 거동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몸을 씻어 줄 때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고 합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샤워를 해주면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식사도 하셨고, 환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기가 기저귀를 차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몸을 씻겨주고, 닦아 주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면서 보듬어 줍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맞이하는 죽음은 거의 없습니다. 아기처럼 거동하지 못하고, 기저귀를 차야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죽음을 기꺼이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렇게 바란 꽃이 지는 것은 창피한 것도, 수치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비로소 넓은 바다로 갈 수 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사다리를 오르기 전에,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지난 9월 19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기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티 꽃동네에서 사목하시는 정창용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아이티는 지진과 내전으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꽃동네의 창설자인 오웅진 요한 신부님께서 아이티로 가는 신부님께 한 마디만 하셨다고 합니다. ‘큰일을 하려하지 말고, 그냥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됩니다.’ 신부님이 하는 일은 매일 수십 명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몸을 씻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수건으로 닦아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매일 세족례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좀 더 큰일을 하고 싶기도 했고, 편안한 일을 하고 싶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럴 때면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신다고 아무나 못하는 일을 하신다고 성인처럼 사신다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매일 수십 명을 목욕시킬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오지만 몸이 먼저 그곳으로 나갈 것이고 그리고 보통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따라오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다른 10명의 제자들은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왜 다른 10명의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예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했던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아니었을까요? 교구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임지를 갈 때입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주로 보는 것이 재정적인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영광의 자리를 원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수인계의 과정에서 아픈 사람은 몇 명인지, 봉성체는 몇 명인지, 가난해서 꼭 도움이 필요한 분은 몇 명인지, 지역에 힘들게 사는 분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정년퇴임하시고 남은 시간에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형제님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제자입니다. 아이티에서 매일 세족례를 하시는 신부님 또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제자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것은 아닌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 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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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저는 오늘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나는 섬기러 왔고, 내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당신 스스로 사람들을 섬기고, 희생으로 목숨을 바쳐 사랑하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당신 나라에 살게 해 주신 예수님의 그 삶과 같아질 수 있도록 우리의 허영과 우리의 집착과 욕심을 주님께 봉헌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의 일화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설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한 젊은 여성이 입회를 했습니다. 그녀는 부잣집에서 자랐으며 의사였습니다. 곱게 자란 이 젊은 수녀님이 어느 남자의 몸을 만졌습니다. 그 남자는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거리에 버려진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치료를 마친 후 젊은 수녀님이 데레사 수녀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베푼 감격을 그 수녀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 말보다 즉각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젊은 수녀님은 데레사 성녀로부터 “긴 말보다 즉각적인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호주를 방문했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사님이 데레사 수녀님의 수행원이 되어 가까이에서 좋은 말씀을 듣고자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왔을 때에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그녀가 뉴기니아로 떠나게 될 때였습니다. 젊은 수도자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마더 데레사에게 청원을 합니다.
"뉴기니아로 가는 여비를 제가 부담한다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수녀님의 말씀을 나누며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뉴기니아로 갈 항공료를 낼만한 돈을 갖고 있어요?"
"예."
"그러면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세요.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움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마더 데레사는 지금 바로 자신 앞에 있는 한 명을 돕고 섬기며 즉각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셨고, 그것은 어떤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직접 사랑을 실천하면서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렌지에 대해 아무리 많은 설명을 하더라도 오렌지를 먹어 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듯이, 사랑에 대해 아무리 이론적으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에도 배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는 데 있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지 않을 때는 결국 자기 만족이 되고 말거나 불쌍한 사람에게 덤으로 선심 쓰며 생색을 내는 경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섬기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종은 자신의 뜻 보다는 주인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할 때 주인이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주인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 자신도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실천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고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 마저도 내어 놓으셨습니다. 아버지를 진정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방법을 제자들에게 오늘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우리는 더 낮아지고 또 낮아져 죽기까지 순종하고, 죽기까지 사랑한 당신의 그 섬김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행복이셨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의 섬김을 살아갈 때, 더 이상 높아짐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일치되어 사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질투할 것도 없고,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벗이요 나와 함께 하나되어 살아가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직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용서하고, 그분의 마음으로 자선과 선행을 베풀고,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잃어버려야 하는 어둠의 시간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도 노벨 평화상 수상 3개월 전에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님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입을 움직여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녀께서도 하느님의 침묵 앞에 영적 공허감과 무력감을 체험하셨듯이 우리가 진정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분의 더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둔 밤을 거쳐 "자기 내려놓음"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 놓기 위해서 포기가 필요합니다. 잡고 있는 것보다 놓아 주는 것이 더 어렵고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나를 비우고 내려 놓기 위해 침묵과 공허, 어둔 밤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은총의 빛이 스며드는 순간 자유로운 마음으로 더 큰 사랑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참된 섬김의 사랑은 주인의 뜻을 먼저 생각할 때 가능해 집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라는 것을 행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기 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움켜지고 붙들고 있는 나의 자존심, 집착하고 있는 내 방식을 내려 놓고 예수님 사랑에 나를 던져 넣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만져 주실 수 있도록 그분께 나를 내어 맡겨 드립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질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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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공감(共感)
대학로를 걷다 보면 뮤지컬 배우와 길 위에서 대화를 나누려 줄 서 있는 팬들을 봅니다. 유명 연예인과 달리 뮤지컬 배우는 SNS나 공연 후 짧은 대화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기회가
비교적 많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 소통·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커지면 그만큼 관계성이 깊어지는 이유입니다.
<공감이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을 뜻합니다. 이번 주일 하느님 말씀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감’입니다.
제1독서(이사야 예언서 53장 10절-11절)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관한 예언입니다.
바빌론 타향에서 고통스럽게 포로 생활을 하던 하느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이사야서 속 주님의 종은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고통받으며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메시아로 묘사됩니다. 이 구약의 메시아는 고통받는 우리와 공감하는 메시아, 즉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한편 제2독서(히브리서 4장 14절-16절)에서 ‘대사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리서 4장 15절)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신 대사제, 우리와 하느님을 화해시켜주시는 대사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고통받는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우리와 공감하며 사랑과 은총을 베푸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마르 10,35-45)은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마르코 복음 10장 37절)라고 청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낙수 효과’를 기대했던 것일까요?
한편 옆에 있던 다른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불쾌해합니다. 그들 또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다른 이와 공감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코 복음 10장 43절-45절)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감의 아이콘’이 되어주십니다.
오랜 시간 계속되는 고통의 일상을 살다 보니 우리의 축처진 어깨와 공허한 마음에 공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비록 우리가 무관심할 때에도, 우리와 공감해 주며 말 걸어오는 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과 어떻게 소통하며, 얼마만큼 공감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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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최덕성 안토니오 신부님]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한국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울 때 어려움을 느끼듯이, 외국인들도 한국말을 배울 때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한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외국인의 마음이 되어 한국어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어는 같은 단어인데도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 꽤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국 사람들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 “연패”라는 단어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연패’는 명사로서 뚜렷하게 반대되는 두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패(連覇) : 운동 경기 따위에서 연달아 우승함.
연패(連敗) : 싸움이나 경기에서 계속하여 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이 단어들을 배우고 사용하며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한국말을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들이 ‘연패’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되면 그 의미를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코 복음 10장 45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때, 한 명은 왼편에 다른 한 명은 오른편에 앉게 해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은 지금 비록 누추하지만 언젠가 보란 듯이 ‘연패(連覇)’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빗나갑니다. 주님의 뜻은 세상에서 철저한 ‘연패(連敗)’의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늘 주님 곁에서 주님과 함께 지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국말을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말하고, 듣고, 써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이 아닌 남의 나라 말을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단어 자체는 우리가 암기해서 외울 수 있지만,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온도와 습도까지 이해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말하고 듣고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감(感)’이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고 고독한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생명으로 향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길어지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신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됩니다.
지금은 비록 성당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나가시길 기도합니다.
은총의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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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상훈 미카엘 신부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복음 10장 43절)>
‘2017년 가장 깨끗한 공항’으로 뽑힌 일본 하네다 공항에는 숨은 일등 공신이 있습니다. 바로 청소부 니이츠 하루코.
그녀가 갓 일을 시작했을 땐 청소 기술을 익히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사는 칭찬 대신 “마음을 더 담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상사의 추천으로 전국 빌딩 클리닝 기능 경기 대회에 나간 그녀는 예선 2위를 했습니다. 전국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출전권을 얻었으나 1위를 하지 못해 실망했습니다.
그 무렵 공항 로비에서 부모님의 품을 빠져나와 바닥을 엉금엉금 기는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아기가 기어 다니는 바닥을 지저분한 걸레로 닦아도 될까?’ 줄곧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일했던 그녀는 이용자들의 마음으로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전국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했습니다.
마음을 고쳐먹자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쳐다보느라 유리벽에 손자국을 내는 일에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않았습니다. 아이들 손길이 닿는 아랫부분까지 꼼꼼히 닦고, 부모가 아이들을 그냥 두는 것도 공항의 청결을 믿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저에4게 일이란 마음을 담는 거예요. 어떤 것이든 마음을 담아야만 진정으로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어요. 다양한 아이디어도 떠오르고요. 프로답게 청소한 덕에 스스로 평온해지면 행복한 기운이 퍼져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된다고 믿어요.”
(정정화/ 「좋은 생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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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을 차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가지면서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역시 더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랐던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에 걸맞은 책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지닌 제자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10장 43절)
섬긴다는 것이 어떤 대단한 행위를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네다 공항에서 청소일을 했던 니이츠 하루코가 자기 일상에 ‘마음을 담아냈던 것’을 생각해보면, 섬기는 삶이란 바로 우리 일상에
마음을 담아내는 데서 시작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담아’ 이웃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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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우리도 죽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을 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10,37)
이 청탁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영광을 얻으려면 역설적이게도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고, 너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오늘 제1독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인데, 이 노래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이사53,10)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어야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고, 희생 제물이 되셨는데도,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처럼 높아지려고만 하고, 죽지 않으려고만 하고, 주인이 되려고만 합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문제의 근본적인 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부부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나와 너와의 관계,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 안에서 참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너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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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사는 세상>
마르코 10,35-45 (출세와 섬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람 사는 세상>
높아도 높지 않고
낮아도 낮지 않게
앞서도 앞서지 않고
뒤서도 뒤서지 않게
잘나도 잘나지 않고
못나도 못나지 않게
가져도 갖지 않고
없어도 없지 않게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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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물에 빠진 사람을 함부로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설프게 수영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었다가는 함께 물 속으로 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조대원을 부르거나 도구를 이용해서 구해야 합니다. 만약 구조대원도 없고 도구도 없다면 물에 빠진 사람의 힘이 완전히 빠졌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습니다. 인명구조대원 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 그냥 단순히 필기시험만 보고 나서 자격증을 받겠습니까? 당연히 힘도 있어야 하고 또 기술도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랜 시간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냥 자고 일어나니 힘과 기술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도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도울 힘과 기술을 스스로 갖췄을 때 가능합니다. 단순히 좋은 마음만으로는 오히려 서로 힘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과 기술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실천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런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당신이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지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을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즉, 죽음을 넘어서는 노력으로만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도 당신의 허락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여기서 인상 깊은 또 다른 장면은 야고보와 요한의 청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불쾌한 감정을 갖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원칙이 아닌, 하늘 나라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 원칙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주님을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주님의 뜻을 따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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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열정도 생겨나는 일을 합시다>
잘하지만 열정이 생기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지못해 살기 위해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자기 일에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잘하고 열정도 생겨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심리학자 에이미 프제스니에프스키 팀은 병원에 따라 청소부들이 자기 일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는지 연구했습니다. 한 병원 청소부들은 자기 일이 특별히 만족스럽지 않고,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일을 직무 설명서 읊듯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병원 청소부들은 자기 일을 즐기고, 이 일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청소 외에도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환자가 힘들어하는지, 방문객이 줄었는지, 그들과 더 자주 대화하려 안부를 묻는다고 했습니다.
잘하고 열정을 생기게 하는 일은 자신의 관심과 노력에 따라 결정됩니다. 자기 일만 한다면 의미를 찾기 힘들지만, 관심의 세계를 넓히고 사랑으로 나설 때 최고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은 어떤가요? 할 일만이 아닌 더 넓고 큰 사랑의 실천에 잘하는 것은 물론 열정적인 최고의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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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갈 길은 멀고 험해도>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삶에 활력을 줍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향하는 바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서 가르쳐도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스승은 끝까지 품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안 된다고 반박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8,31-35). 하고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고(마르9,30-32)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고(마르10,35-37)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높은 자리, 영광을 받는 자리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만 집착하는 제자들에게 이제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일깨움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도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베풀고자 하시지만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챙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지만, 인간은 육적인 것을 우선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아버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의 뜻과 이익만을 찾습니다. 세속적 승리, 이성적 승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실패를 통한 승리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은 역시 그들도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영광의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수고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고와 땀 없이 주어지는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높이 높이 오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멀고 험해 보여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섬김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3장36-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착한 목자가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듯이(10,11.15.17 참조) 자신도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 데서(“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와야지, 자신의 의지나 용기를 과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간절한 원의와 실천할 능력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배워서 알았으면 안 만큼 진실하고 겸손하게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개신교신자의 많은 분들은 ‘ㅇㅇ교회를 섬긴다’는 말을 잘 씁니다.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으나 당당하게 말합니다. 섬김의 삶이 따르지 않을 때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바라보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섬김의 삶은 세상 가치관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완전한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안일한 신앙생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청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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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섬김의 삶>
-들어라, 섬겨라, 나아가라-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17,8)
오늘 입당송 시편이 은혜롭습니다. 시편 기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제 집안에서 최고 어른인 100세의 요한 사촌 형님댁에 들려 병환중인 99세 사촌 엘리사벳 형수님 병자성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병중이시지만 평생 기도와 믿음으로 사신 분이기에 여전히 잘 들으시고 의식도 또렸했습니다. 떠날 때, 함께 있는 분들에게 “하루하루 사십시오!” 덕담을 드렸습니다. 100세 형님과 바오로 조카와도 잠시 식사를 나눴고 귀원할 때는 지금까지 42년동안 사촌 형님과 함께 해 온 기사 분이 운전해 주었습니다.
“회장님은 한결같으시고 사모님같으신 분도 없으십니다. 회장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일 1시간은 걸으십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쓰고, 병원에 가면 그 연세에 휠체어를 안타는 분은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기사님도 29세부터 지금까지 무려 42년 동안 함께 하셨으니 참 한결같으십니다. 성공하셨습니다.”
기사분과 덕담도 나눴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걸어야 합니다. 걷는 것 자체가 삶이고 기도여야 합니다. 살기 위해 기도하듯 살기위해 걸어야 합니다. 저도 매일 강론 쓰기가 끝나면 30분동안 수도원 경내를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며 걷습니다.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묵주는 천국에 들어가는 패스포드입니다. 끊임없이 묵주 관상기도를 바치며 파스카의 예수님과 더불어 마리아 성모님과의 사랑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그렇게 합니다. 하루하루 바다향해 흐르는 강처럼 그분을 향해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걷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하루하루 이렇게 바다향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처럼 기도하며 걸으며 사는 것입니다. 요즘 옛 동요를 발견하고 기뻐서 매일 산책 때마다 즐겨 부르는 ‘바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시편이 기도가 되듯 동요도 기도가 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 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넓고 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흡사 행복한 평생을 하루로 요약한듯한 참 정겨운 동요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번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기도가 되는 노래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듯, 기도밖엔 길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에는 사랑밖엔, 기도밖엔 답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느님밖엔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도 기도와 사랑뿐이 없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기도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사랑이신 하느님께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호흡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순간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영육의 치유요 건강입니다. 기도와 삶이, 사랑이 하나된 삶을 사는 이는 다음처럼 살아갑니다. 세 삶의 지침을 오늘 말씀을 근거로 소개합니다.
첫째, “들어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들음의 종교, 귀의 종교입니다. 성인聖人의 한자뜻도 잘 듣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귀로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며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이렇게 경청이 습관화되면 저절로 내적침묵에 고요와 평화도 이뤄집니다. 환대와 경청은 필히 함께 갑니다. 분도 규칙의 맨 첫 말마디도 “아들아, 들어라!”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대부분 “들어라!”로 시작합니다. 제 식탁에 식탁보에는 붓글씨 체로 “들어라!”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잘 들음은 겸손입니다. 잘 들어야 잘 배울수 있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누구말을 듣습니까?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엇보다 주님 말씀을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필시 다음 주님 말씀을 깊이 경청했을 것입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온전히 하느님 처분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루하루 순교적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 절대적 희망과 신뢰를 두고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온힘을 다해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귀로 깊이 경청하며 사는 이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필시 늘 주님과 대화하며 깊이 경청하며 배우며 순종하며 살았을 당대의 제자들이 우리 들음의 롤모델입니다.
둘째, “섬겨라!”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귀로 경청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섬김의 삶입니다. 들어라, 섬겨라, 순 우리말 맛도 좋습니다. 봉사라는 한자 말마디보다 훨씬 정겨운 섬김이란 말마디입니다. 주님을 닮은 우리의 영성은 종과 섬김의 영성뿐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쉽입니다.
복음적 가치를 요약하는 섬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형제들을 잘 섬기는 것이 장상의 우선적 자질입니다. 교회의 장상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참으로 영성의 진위를 가리는 시금석이 섬김의 삶입니다. 참으로 믿는 섬김의 사람들은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리지 않습니다. 지위에 관계없이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임합니다. 이런 이들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 근거하는 섬김과 종의 영성입니다. 교만과 정 반대에 있는 겸손한 섬김의 종입니다. 섬김의 삶과 저절로 함께 가는 비움의 삶, 겸손의 삶입니다. 종중의 종이 교황님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은 ‘교황’보다는 권위적이지 않는 ‘교종’이란 어휘를 많이들 사용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섬김의 배움터입니다. 평생 섬김을 배워야 하는 섬김의 여정중에 있는 섬김의 학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바로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종,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 섬김의 영원한 롤모델이 우리의 위로와 치유의 원천이신 구원자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나아가라!입니다.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희망이자 비전이자 꿈인, 우리 여정의 궁극 목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야 혼란과 방황에서 벗어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제대로의 방향입니다.
궁극의 희망이자 꿈, 비전이자 목표인 주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주님께 삶의 닻을 내리지 못해, 뿌리 없이 부평초처럼 표류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제2독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고백하며 신앙을 굳게 지켜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죄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와 힘이 되는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그러니 날로 주님계신 은총의 어좌로 가까워지는 우리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대로 일상에서 체험하는 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줄 알면 행복입니다.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한결같이 사랑과 섬김의 주님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며 주님을 알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경청과 섬김, 당신 추종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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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36)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무언가 청하려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뭐라도 맡겨 놓은 듯 주님께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마르 10,40)
두 형제가 바란 것은 예수님의 곁자리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그분과 가장 가깝고 친밀한 사이로 남겠다는 충성스럽고 사랑 가득한 지향에서라기보다는, 언젠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극하실 때,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게 해 달라는 모종의 정치적 청탁에 가까웠지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같은 일화를 다루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향할 부정적 시선을 경감시키려고 그들의 어머니를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마태 20,20-28 참조)
예수님은 두 형제(우리)가 현세적 야망과 욕정, 재물과 성공을 청하러 당신께 온다면 주소를 잘못 찾은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당신이 '허락할 일이 아니'라는 뜻은 그분의 한계와 무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영광을 받으신 십자가 제사의 현장에는 두 강도가 곁에 있었지요. 그 둘의 행적이 복음서에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재물에 대한 탐욕과 욕망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다 잡힌 것으로 짐작됩니다. 둘 중 하나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갔고 한 명은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하다 숨을 거두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서 끝을 모르는 탐욕과 야망이 향하는 정점의 자리는 두 강도의 자리일지 모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혹 제자들이 예수님을 현세적 정치적 메시아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낭패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겠지요. 역사를 통틀어 어느 임금이나 영웅도 종, 노예처럼 남을 섬기거나 목숨을 내놓은 적이 없었으니 어리둥절하기도 했을 겁니다.
여러 다양한 동기로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의미를 깨닫기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속과 야망, 욕정에 물든 영혼을 정화하는 아픈 시간을 건너야 합니다. 세상 물질과 명예에 집착하는 옛 인간이 죽고, 스승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까지 수용하는 새 인간이 살아날 때 비로소 구원을 향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 메시아성의 본질을 밝힙니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
예수님은 현세적 영광을 보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순간 가난과 배척, 박해와 고난, 그리고 죽음까지 일사천리로 예약되지요. 하지만 그런 예수님을 미워할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건, 그분이 먼저 우리 모두의 속량을 위해 당신 목숨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를 원죄의 결과로 이야기하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내외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세상 곳곳에서도 자기 탓이 아닌 고통으로 무참히 짓밟히며 스러져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떠안으신 고통을 통해 세상의 고통에 존엄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은 질병과 슬픔과 고통을 겪는 약자를 업신여기고 경시하지만, 깊은 지혜를 지닌 어느 부족은 자기들 중 가장 병들고 슬프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신이 계심을 믿기 때문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올리는 눈물의 기도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도 고통은, 참 싫고 피하고 싶은 거지만, 예수님 덕분에 적어도 그 고통을 인내하고 견딜 이유는 있는 것이니, 고통도 존엄하고 귀할 수 있는 겁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화답송)
시편 저자는 우리가 주님께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노래합니다. 바로 그분의 자애, 곧 자비와 사랑입니다. 현세적 부나 명예, 성공이 아니라, 우리 앞길에 널려 있는 고통을 이겨낼 주님의 자비와 사랑,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바라야 할 바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 4,16)
우리의 대사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모든 이를 속량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치르신 값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것이지요. 이를 믿고 확신할 때, 그분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을겁니다. 이렇게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이가 바로 주님 어좌의 곁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우리 안에 이런저런 바람이 올라올 때마다 이 질문의 체로 걸러 보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바람이 감지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오직, 그분의 자애입니다. 주님의 자애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주일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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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Hyc-_Vup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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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5)
진짜 가을은
온통
불타오르다
떨어져내리는
십자가의
뜨거운
가을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며 사는
우리들 삶이다.
목숨 너머에
있는 참생명을
아직도 볼 줄
모르고 사는
우리들이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이시다.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신다.
우리를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신다.
우리대신
몸값을
치르신다.
속죄 제물이
되신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물(祭物)이
되신다.
참된 사랑은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시다.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이다.
내어주는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참된 믿음이다.
목숨까지
바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신다.
진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죽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역설이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매일매일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다.
진짜 사랑에
감사드리는
은총의 주일이다.
목숨 바치는
사랑의 빛이
눈부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시고
내놓으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사랑을
치유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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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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