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간은 마치 한 달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야 우리 관희와 미경이 그리고 춘식이 형을 떠올립니다.
'살인미소' 관희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스물 두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관희의 마음만은 너무나 듬직했습니다. 친구들이 임용고시를 준비하거나 번듯한 유치원에 다님에도 이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방 교사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월급이 반밖에 안 되는 어려움도 큰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관희야! 돈이 얼마 안 되는데 힘들지 안아?"하고 물으면 "뭘요? 전 이게 좋아요. 공부방 애들과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제가 배운 다니까요?"하며 한 손으로 안경을 살짝 올리며 짓는 미소는 질문이 무색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리땁고 세침떼기 같은 사월의 '신부' 미경입니다.
작년 6월 동국대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함께 상경하였습니다. 전야제를 마치고 우리는 동국대 학생회관 지하로 숙소를 마련했습니다. 숙소라고 해봐야 바닥에 은박지를 깔고 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몇 조각남은 은박지로 덮고 자야 했습니다. 미경이는 자기가 갖고 있는 한 조각밖에 안 되는 은박지를 쪼개어 옆의 언니에게 "언니 덮으세요"하며 건네주었습니다.
화재가 일어나기 불과 1분 전에 같이 방음공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결혼준비는 잘돼?"
"웨딩 사진도 찍고..으~음..다 그렇죠"하며 양 손을 꼬면서 쑥쓰러워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리땁고 새침떼기같은 사월의 '신부'였습니다.
'마이콜 형님'이라 불린 춘식이 형이었습니다.
춘식이 형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일찍부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프레스 기를 조작하던 중 그만 왼손 중지와 약지가 잘려나가는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집회 현장에서는 비디오 카메라를 메고 우리의 투쟁모습을 놓치지 않고 담아왔습니다. 머리가 꼬불꼬불해서 '마이콜 형님'으로 불렸습니다.
전대 병원 응급실로 달려온 동지들의 모습에서 '고통과 채찍'을 보았습니다.
급히 사고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온 동지들의 얼굴에는 다들 흐르는 눈물을 꾹 참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울 주를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흘릴 눈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관희, 미경이와 춘식이 형은 마약으로도 그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는 3도, 2도 화상으로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습니다.
그래서 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스런 화상을 당한 관희, 미경, 춘식이 형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이 지켜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에 자신을 '채찍질' 하였습니다.
지금 마음 아프고 힘들지만 눈물 흘리지 맙시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회원들 역시 "내가 죄인이다"하며 자책하지 맙시다.
우리가 흘릴 눈물이 있으면 저 깊은 곳에 차곡차곡 담아둡시다. 그래서 관희, 미경이와 춘식이 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뽀얗게 돋은 새살로 우리들 곁으로 달려올 때 그때 어깨 걸고 같이 흘립시다.
관희, 미경이와 춘식이 형과 같이 재빠르게 나오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을 알면 세 명의 벗들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들 가진 것이 없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뻔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거울 앞에서 화장이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지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 명의 벗들은 평생 그 상처와 고통을 보듬고 가야합니다. 그 상처와 시련을 평생 안고 가는 벗들 앞에 지금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떤 희망을 안겨주겠습니까?
지금 붓고 있는 적금 통장을 깨고, 카드 빚을 내는 것은 내 재산의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우리 관희, 미경, 춘식이 형의 희망을 쌓는 저축입니다.
마지막으로 청년 동지 여러분!
관희, 미경이와 춘식이 형의 근황을 접하며 하루하루 병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지만 이로 인해 흔들리지 맙시다.
어느 날은 좋아질 수도 어느 날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맙시다.
초기치료만도 최소 2-3달 걸리는 시간이 요하는 만큼 차분한 마음을 갖고 지켜봅시다.
더욱 튼튼한 청년회 운영으로 한껏 발전하고 커진 청년회를 우리 세 명의 벗들에게 보여줍시다.
첫댓글 이건 무슨 얘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