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 省齋 李始榮을 아시나요?
이시영 (1868년)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 독립운동가, 교육자
이시영(李始榮, 1869년 12월 3일 ~ 1953년 4월 17일)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1],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1]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 부제조, 상의원 부제조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시영
李始榮
초대 부통령 취임 당시 연설하는 이시영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
임기
1948년 7월 24일~1951년 5월 14일
대통령
이승만
후임: 김성수(제2대)
신상정보
출생일
1869년 12월 3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953년 4월 17일(83세)
사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감기와 경미한 부상, 정신적 충격 등의 합병증
국적
대한민국
정당
한국국민당(1935)→한국독립당(1940)→독립촉성중앙회(1946)→민주국민당(1952)
배우자
경주김씨부인 (김홍집의 딸), 반남박씨부인
자녀
아들 이규열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 개신교(감리교)
별명
호는 성재, 시림산인, 자는 성옹, 성흡
군사 경력
복무
병역 입대 연령 제한 사유 미필자
서훈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임정 요인이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는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로, 영조 때의 영의정 이종성의 5대손이다.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낸 이유승(李裕承)과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아들이며, 이건영(李健榮),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榮), 이회영(李會榮)의 동생이자 이소영(李韶榮), 이호영(李護榮)의 이복 형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신익희와도 인척간이다.
생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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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일 정도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15] 대대로 대소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재산과 영달을 포기하고 형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 동생 호영(頀榮)과 함께 6형제가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으로 유명하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음에도 개인적으로도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하였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저서
상훈
가족 관계
이시영을 연기한 배우
참고 자료
같이 보기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외부 링크
211.36.142.240님이 1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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