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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르코 12,28ㄱㄷ-3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전라방, 전주 쪽에서 오셨습니다.
유튜브로 시청하시는 분이 가끔 묻습니다.
‘신부님 계신 곳은 사제관인데, 왜 십자고상이 없습니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리니 분심 갖지 말기 바랍니다.
저는 월세를 살고 있어서, 벽에 못 하나 테이프 하나 붙일 재간이 없습니다.
만일 구멍이 하나라도 나면 나가면서 새로 도배를 새로 해주어야 하는 것이 계약입니다.
그래서 제 침실에도 작은 십자가를 세우는 정도입니다.
제대 뒤에 십자가 대신, 이렇게 작은 십자가를 제대 위에 모셨습니다.
지금 십자가가 여러분을 향하고 계시지요?
상식으로, 성당 제대 위의 큰 십자가는 여러분을 향해있지만, 제대 위의 작은 십자가는 사제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교우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입당하여 큰 인사를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하는 것이지 신자들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론 준비하면서 읽기는 했지만, 전혀 생각 못 했던 부분인데, 아까 독서를 들으며 마음에 확 와닿은 구절이 있었어요.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맞다,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한평생 사제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죽겠죠?
사제서품 받을 때는 ‘영원한 사제여’라고 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그분,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계가 있지요.
저는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어서도 삼위일체 하느님 옆에서 사제직을 계속하도록 하늘에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죽고 난 다음에는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육신도 없을 것이라 하셨고,
추기경으로 살았다고 하느님 앞에서 분홍모자 쓰고 있는 것도 아닐 것 같아요.
그럼, 저는 개인적으로 죽은 후 사제로 살고 싶을까요?
그런데 저는 저 안 시켰으면 좋겠어요.
좀 편안하게 제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마, 제가 얼마 전 강론에 이야기한 것 같아요.
천국은 누룩과 겨자씨와 같다 하셨을 때, 천국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있겠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자원을 받든 선발을 하시어,
가끔은 이 환난의 세상에 죄 덩어리 인간에게 보내 천국의 모습을 알려 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세상이 덜 험악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죽으면 예수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나를 천국과 지옥을 알리는데 파견해 달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천국도 보여주시고, 지옥도 보여주시겠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곳이 지옥이구나,
또 연옥도 보면서는, 살면서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보속할 기회가 있다면 그 십자가만큼은 양보하지 말고,
평생 기를 쓰고 희생 보속한 사람은 연옥에 머무는 시간이 작다고 가르쳤는데, 내가 맞게 가르쳤구나.
이렇게 제가 확인한 것들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전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 같아요.
살아있는 사람 말은 안 믿어도, 죽었다가 말을 전하러 온 사람 말은 듣지 않겠어요?
그러면 지금보다 세상이 훨씬 정화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마지막 날에 불의 심판을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가 저의 마음이에요.
피조물을 만들 때부터 ‘이것들을 내가 언젠가는 멸망시키겠다.’ 하면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또,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도 자기가 만든 것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를 바라지,
얼마 후에 부술 것을 계획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을 전제로 우리를 창조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멋대로 사니까 그럴 때마다 선지자, 성인 성녀를 보내시어 회개를 시키시죠.
하지만 그때뿐, 듣는 사람만 듣죠.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시죠.
그런데 안 듣는데, 이러면, 제가 다시 와서 말해도 안 듣겠네요? (웃음)
오늘 제2독서에 ‘계약의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할 수 없어 그 수가 많지만, 영원한 대사제는 결코 죽지 않는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대사제이시다.’
그러니 사제들은 이 모습을 따라가려고 죽을 때까지 애써야지요.
어떻게 사제가 되었든, 사제가 된 이상 그것을 직업으로 여기면 그 사제의 영은 죽은 영입니다.
솔직히 사제를 직업이라 생각하면 사제만큼 편한 것도 없어요.
하루에 미사 한 대만 해주고, 요즘은 코로나라 훈화 갈 일도 가정방문도 없어 더 편해졌죠.
하지만 사제가 영원한 대사제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살려고 하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요.
온종일 강론 준비 묵상해야 하고, 신자 방문해야 하고, 찾아서 하려면 24시간이 모자라요.
마귀 새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부들을 직업인으로 만들려고 하고, 수녀들을 매너리즘에 빠뜨리려 하죠.
희생할 줄 모르고 신자들에게 군림하려 하고, 정말 착하고 성모님 닮은 수녀가 오면 본당 자매 얼굴들이 환하게 바뀌죠.
하지만 못된 수녀가 오면 잘 된 단체들도 다 죽어가요.
신부의 영향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어떤 사제가 오느냐에 따라 본당은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자식은 아비를 잘 만나야 한다는 옛말이 틀린 것이 없어요
제2독서 구절로 오늘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강론이 앞에 길게 나왔네요.
여러분, 하느님은 전혀 믿지 않아도 정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인본주의자, 휴머니스트(humanist)라 부릅니다.
성당은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어도, 심지어 하느님을 거부하고, 종교에 적대적이지만,
전 재산을 털어 아프리카나 전쟁터에 가서 그들을 돕고 봉사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인본주의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들은 그냥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죠.
하지만 우리가 인간을 사랑할 때는 하느님의 계명 때문에 사랑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와 크리스천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고 나옵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하느님이고 다음이 이웃이에요.
여러분은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세요, 이웃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세요?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더 쉽다고 생각해요.
왜? 이웃을 사랑하려면 표시가 나야 해요.
내 발바닥처럼, 손바닥처럼 사랑하래요?
또 가끔 생각나면 사랑하래요?
내 몸뚱아리, 내 몸에 더러운 것 닦으려 하는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 더러운 것을 닦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손가락에 상처 나면 빨리 아물게 하려고 소독약 바르고 붕대 감고 병원도 가죠?
지극정성으로 내 몸 돌보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도 뒤돌아보면 정말 목숨 걸고 내 몸처럼 사랑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 인생에 몇 번 되지 않아요.
결국은 내가 내 몸을 더 아끼고 사랑한 거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라던가, 가끔가다 사랑하라던가,
생각날 때라던가 혹은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라면 좀 쉬워지겠지만, 그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명단을 떠올려 보세요.
그 안에 내 속을 뒤집은 놈, 내 돈 떼어먹은 놈, 상처 준 놈이 들어가 있나요? 없어요.
하느님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척’ 할 수도 있지만, 이웃을 그냥 사랑하라는 것도 어려운데,
내 몸 같이 사랑하라니 얼마나 힘들어요
옛날 한글도 모르는 할머니들이 귀동냥으로 외운 수계생활 지침의 요약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손주들에게 신앙교육을 하실 때 늘 이 말을 해주셨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흠숭’이라 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은 ‘존경’이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존경심이 없으면 절대 내 발가락에 있는 각질보다도 못하게 여기죠.
신의가 깨지면 존경심이 생길 수 없죠.
결혼식 때 사제가 사랑과 존경과 신의를 지키겠냐고 묻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신의입니다.
신의가 깨지면 사랑, 존경이 다 떨어져요.
믿었는데 나를 속였다는 것을 알면, 한순간에 그 이뻐했던 사람이 마귀로 보여요.
한번 깨진 신의를 회복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흠숭으로 나타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존경으로 나타나죠.
그리고 내가 누구를 존경하면 존경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말이 상스러우면 안 되겠죠?
그런데 내가 우습게 보는 사람에게는 말을 막 하잖아요, 함부로 욕도 해요.
자기는 장난삼아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목숨 걸고 도망치잖아요.
말 한마디 툭툭 던지는 것이 상처가 되는 겁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존경어를 써야 합니다.
자, 이렇게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이것을 우리는 ‘신앙의 성숙도’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하느님을 흠숭하고 애쓰는 것이 눈에 보여요.
또 사람을 존경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내게는 없는 몇 가지가 보여요.
영성 신학에서는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영성 신학은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과도 관련이 있어요.
첫 번째, 고통을 대하는 자세, 두 번째, 하느님께 순명하는 자세요, 세 번째는 혀를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이 세 가지가 내가 남을 볼 때나 하느님이 나를 보실 때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또 본인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느님이 내게 순명을 원하실 때, 때로는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순명을 원하실 때
나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일 년, 한 달, 일주일, 혹은 오늘 하루를 뒤돌아볼 때 과연 내 혀로 하느님을 참여한 적이 몇 번 있었는가?
오히려 마귀의 도구가 된 적은 없었는가?
칼날이 되어 남의 심장을 찌른 적은 없었는가?
이 세 가지는 끊임없이 우리가 묵상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묵상을 위해 하나씩 짚어봅시다.
첫 번째 ‘고통을 대하는 자세’였죠?
야고보서 1장 2절에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라고 나와요.
고통 그 자체는 철학적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고, 다만 힘든 겁니다.
고통이 악은 아닙니다.
어떤 고통은 내가 분별을 잘못해 스스로 만든 것도 있죠.
충치를 빨리 뽑았으면 되는데, 모르다가 나중에 팅팅 부은 것은 내가 만든 고통이죠.
지혜롭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해 나와 가족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자기의 영적 분별이 부족하기에 당하는 고통이라도 우리는 즉시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 수 있어요.
또 어떤 고통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것도 있어요.
고통은 종류도 많고, 또 모두 같지도 않아요.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시험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고통, 다른 말로 시련, 십자가예요.
하느님이 ‘마리아야, 루시아야, 너희 나를 사랑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너희만 보면 닮고 싶다 하며 존경받고 사는데,
내가 십자가 한번 줄 테니 견디나 보자.’ 하면서 그 사람을 단련시키기 위해 주시는 십자가도 있어요.
예전에는 전쟁이 나면 칼싸움했고, 장수들은 명검을 얻으려고 애썼죠.
명검을 몇 번을 부딪쳐도 불이 번쩍번쩍 나도 이가 빠지지 않아요.
그런데 이 명검을 만들어지는 과정은 참 힘들죠.
담금질, 불에 넣었다 물에 넣었다 하는 것을 수백 수천 번을 해야 명검이 만들어져요.
우리는 시련을 겪을 때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또 어떤 종류인지 알아요.
어느 정도인가?
쉽게 여러분 손에 금반지가 있다면 14K냐 18K냐, 24K냐, 순금이냐 하잖아요?
신앙도 똑같이 14K, 18K, 24K, 그리고 순도 100 프로가 있어요.
고난을 겪을 때 그 순도가 드러나요.
다음, 어떤 종류인가?
기복신앙, 확 뜨거워졌다 사그라드는 냄비 신앙, 성당 안 가고 집에서 하느님 믿는다는 앉은뱅이 신앙 등이 있죠.
요즘 코로나 때문에 앉은뱅이 신자가 더 늘어났어요.
미사에 갈 수 있는대도 안가고 집에서 소파에 앉아 평화방송이나 제 미사를 유튜브로 시청해요.
2년 동안 어둠이 많이 들어왔어요.
또 부적을 가지도 다니는 신앙, 점집에 들락거리는 신앙 등 정말 종류도 많아요.
우리는 유일신이죠?
순탄할 때는 누구나 자신의 믿음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역경 중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앞에서 말한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시련 중에 기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고통 자체를 기뻐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을 겪은 후 ‘아, 내가 이만큼 하느님 사랑하는 단계가 올라왔구나.’,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달라졌네,
사람들이 사랑스러워.’하는 선물이 오기에 기뻐하는 것이지, 십자가 자체를 기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성숙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성숙함이라는 것은 인생이라는 실험실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 실험실 안에는 고통이라고 하는, 누구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겪고 나면 사람이 바꿔요.
여러분 다윗왕 아시죠?
이스라엘의 모든 왕 중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도 처음부터 성왕은 아니었어요.
다윗왕도 어떤 고통을 겪고 난 다음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백성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아시죠?
부하 마누라와 간음하고 난 다음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강간 수준이었죠.
여름날 왕궁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인이 목욕하는 것이 보였어요.
그 순간 음란 마귀가 들어옵니다.
시종에게 누구냐 물으니 우리야 장수 아내라고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데려오라 합니다.
임신이 되죠
거기서 나온 아이가 나중에 솔로몬입니다.
다윗은 걱정이 되었죠. 왜냐하면 우리야는 지금 전쟁에 나간 지 2년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윗은 우리야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가서 쉬라 합니다.
하지만, 우직한 우리야는 내 부하들이 죽어가는 데 집에 갈 수 없다 하며 갑옷을 입은 채
왕궁 문에서 신하들과 함께 잠을 잤지요.
우리야가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안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썼죠.
그리고 그것을 우리야에게 전하라 합니다.
그 편지에는 편지를 들고 가는 이놈을 최전방으로 보냐 반드시 전사하게 하라 적혀있었죠.
참 기가 막히게 어둠의 머리가 돌아간 거죠.
직속상관이 요압이 받아 보니 우리야를 죽이라는 뜻이니, 그를 죽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간음죄가 살인죄까지 번진 겁니다.
이 세상의 살인죄의 80프로는 간음과 관련이 있지요.
다윗은 시종의 입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단 예언자가 알고 있었죠.
나단 예언자는 계시를 받은 거지요.
나단 예언자는 다윗에게 면담을 청하여 가서, 지팡이를 꽝꽝 두드리며 회개하라 하며 예화를 듭니다.
‘양이 많은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자기 양이 대신 하나뿐이어서 자식처럼 아끼는 하인의 양을 잡아 대접합니다.
임금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주인 놈이 아주 죽일 놈이지!’
‘네, 바로 당신이 그런 인간이요. 어떻게 자기 부하의 아내를 간음하고 부하까지 죽일 수 있습니까?’
그때야 다윗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옷을 찢으며 회개했지요.
바로 그 고통을 통해 다윗은 성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뿐 인가요?
코린토 2서 12장에 보면 바오로 사도는 불치병이 떠나지 않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예수님에게 3번이나 그 가시를 뽑아달라 청하죠.
하지만 뽑아주시지 않고 이 말씀을 주시죠.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때부터 바오로 사도는 그 고통을 완전히 다르게 생각했죠.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의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병이 간질병일 것이라 조심스레 이야기합니다.
위대한 설교자가 설교하다 말고 발작하며 진흙 바닥에 뒹굴고 거품을 무니, 깨어나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전에는 자기의 약점인 간질을 일으켰던 장소에 절대 가시 가지 않았었죠.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는 그것을 겪은 후에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신앙성숙도의 측정 기준은 ‘하느님께 순명하느냐’입니다.
저는 한평생 정말 너무 많이 순명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순명은 내가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순명하면 축복이 따라온다 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성모님의 순명도 있고, 어떻게 보면 성경은 순명의 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제일 큰 순명을 요구한 것은 이사악이었죠.
그 늙은 나이에 얻은, 죽으면 내가 죽었지, 어떻게 자식을 죽여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칼을 빼 들었고. 시험에 통과하여 그 결과 자손의 축복을 받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이스라엘은 고난의 역사였죠.
하지만, 꼿꼿하게 일어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유대인이죠.
유대인이 왜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고요?
첫 번째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잘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할아버지의 절대순명 덕에 후손들이 축복을 받는 거지요.
나 살다 죽으면 그뿐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한테 얼마나 순명했는가에 따라
내가 보지도 못할 자손에게 그 축복이 내려간다는 말입니다.
순명한 결과는 성경에는 첫 번째로 자손들에 대한 축복으로 나옵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순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합니다. 즉, 해방입니다.
해방을 다른 말로 치유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치유를 받아요.
이밖에 구약에도 많지만, 신약의 성모님은 어떻게 순명하셨나요?
요셉과 약혼한 사이이고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천사가 나타나 성령의 힘으로 잉태할 것이라 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여 ‘이 몸은 처녀입니다.’ 하죠.
15살짜리가 무엇을 알았겠어요?
하지만 천사가 ‘하느님이 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단다.’ 하니,
즉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합니다.
그 말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이룰 수 있는 구세사와 연관이 되죠.
그렇게 순명하셨기에, 성모님에게는 영적인 명예가 가지요?
이 세상 레지오와 쁘레시디움의 이름은 모두 성모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자하신 어머니, 상지의 옥좌, 바다의 별, 천상 은총의 어머니, 겸손하신 어머니 등,
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은 성모님뿐이죠.
순명 때문에 성모님은 들어 올려지고, 나중에는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시고 하늘에 계시고, 지
금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시죠.
이것이 바로 순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순명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긴 사제생활을 하면서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순명입니다.
은퇴 미사에 말씀드렸었습니다.
지난 세월 뒤돌아보면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순교하는 마음은 순명에서 나왔다.
이상한 모함과 질투, 주교님이 정말 힘든 곳으로 보내도 순명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더라.
그 폐허 같던 곳이 지금은 전 세계에 내놓아도 아름다운 장소로 바뀌었어요.
이렇게 순명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저의 38년 사제생활을 뒤돌았을 때 순명하는 마음이 없고, 순명을 통해 순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저는 옛날에 옷 벗고 나갔을 겁니다.
저를 지켜주는 것은 순명입니다.
제가 우스갯소리로 그랬죠?
이제까지 한 순명이 아까워서 앞으로도 순명 할 거다.
맞아요.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이렇게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재는 두 번째 기준은 순명입니다.
마지막은 혀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입니다.
집회서 28장 17절에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라고 나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손찌검에 멍이 들어도 달걀 마사지하고 화장 진하게 하면 한 번에 없어질 수 있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목소리도 안 크고 조용조용 이야기하면서 뼈를 부러뜨리는 사람이 있어요.
조곤조곤 말하면서 사람을 뒤집어 놓죠.
맞은 자국은 세월이 지나면 없어지는데, 혀로 맞은 상처는 잘 없어지지 않아요.
혀에 맞았는데 뼈가 부서져요.
우리 모두 그런 상처 있죠?
저도 있어요.
잊을만하면 다시 떠오르고, 참 지우기 어려워요.
우리는 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언어가 얼마나 정화되어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를 알 수 있죠.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만 특별히 놀라운 언어의 기능을 주셨습니다.
언어는 인간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기기도 하는 무기이기에. 정말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훈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들의 역할입니다.
부모가 서로 거칠고 상스러운 욕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결혼해서 똑같이 합니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 존경어를 사용하면, 자식들도 결혼해서 항상 존경어를 사용합니다.
언어는 다듬어가는 것입니다.
혀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온몸을 다스리는 거죠.
주먹이나 발길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혀입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은 엔진이지만, 방향을 잡는 것은 배 꽁무니에 있어 물에 잠겨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방향키입니다.
혀도 평상시에는 우리 입속에 잠겨있지만, 나와서 날름거리기 시작하면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웃겼다 울렸다 합니다.
혀는 우리의 방향키입니다.
대단한 웅변가였던 히틀러는 그 카리스마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1억 넘는 사람을 죽였죠.
반면 성인들은 혀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사제의 좋은 강론도 그 혀로 인간을 정화시키고 하느님께 이끕니다.
자, 이제 결론을 냅시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은 구체적으로 고통을 얼마나 기쁘게 받아들이는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가,
얼마나 자기 혀를 잘 다스리느냐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해 세 가지를 우리는 늘 묵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원에 하루를 더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아멘
♣2021년 연중 제31주일 (10/3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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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