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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자에게 있어서 16세는 ‘결혼 적령기’이고, 여자는 비녀(笄)를 꽂을 수 있는 나이(계년·笄年)로 보는 만 14세가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여자 나이 16세는 집에서 이미 ‘과년한 딸’로 취급받았다. 과년(瓜年)의 瓜자는 8(八)이란 숫자가 상하로 두 개나 들어찬 모양새가 맞다. 다시 말해서 8(八)+8(八)=16세이니 “딸이 과년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혹 아버지가 젊다면 모를까, 아버지가 병 들고 나이가 많아서 늦둥이를 둔 경우엔 좀 더 빨리 서둘러서 자식을 결혼시키고자 했다. 다음 편지를 보자. 편지를 쓴 사람은 낙향한 조선의 선비 김낙현(金洛鉉, 1817~1892)이다.
오랫동안 적조하여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자연에 묻혀 사느라 서로를 잊은 듯도 합니다. 다만 옛적에 노닐던 일을 생각하면 꿈에서도 때로 놀랍니다.
동지 추위에도 대감께서는 건강하시고, 슬하의 자제분들도 다 잘 지내신다니 마음이 놓이며 축하드립니다. 제 자식들도 무고합니다. 6월에 또 증손이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된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가을 초 감기에 걸린 뒤 숨이 막히고 어지러워 목숨을 잇기가 어렵습니다. 이대로 해놓은 일도 별로 없이 세상을 뜬다면 그것도 한탄할 일입니다.
다름 아니오라, 열두 살 난 아이가 아직 혼례를 치르지 못하여 제 마음에 빚처럼 놓여 있습니다. 내년이면 그 아이가 열세 살이 되는데, 바로 제가 혼인한 지 예순 해가 되는 때입니다. 봄에 물이나 떠놓고 혼례를 치를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오직 대감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전날 둘째 아이를 보내 말씀을 드렸고 지금 다시 아뢰오니 이제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는 <사서>와 <시경> <서경>을 읽어 문리는 조금 트였습니다. 그러나 산 속에서만 생활했으므로 하루빨리 대감께서 그 아이를 바루어주시고, 겸하여 서울의 예절도 두루 가르쳐주십시오. 나머지는 정신이 혼미하고 손도 떨려 다 갖추어 적지 못하고 올립니다. 경인년(庚寅年) 11월 열흘경.
위의 편지는 임유경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쓴 <대장부의 삶>에 나온다. 열세 살 아들을 기필코 장가 보내기 위해 서울에 사는 대감에게 연통(連通)을 넣는 부정(父情)이 비장하기도 하고, 은근 협박조로 읽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귀여워 보인다. 비록 <역경>을 공부했단 말은 없지만 열두 살 아이가 사서이경(四書二經)을 모두 뗀 것을 주저리 늘어놓고 자랑하니 말이다. ‘봄에 물이나 떠놓고 혼례를 치르자’라는 말은 또 어떤가. 아들의 독행(獨行)을 부추기는 아버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편지를 읽는 대감댁 기분은 마냥 좋지만 않았을 것이다.
박세당이 혼자 걸었던 길, 그리고 계자손문(戒子孫文)
앞에 편지에서 보았듯이 김낙현은 생전에 열두 살 난 아들이 장가 드는 것을 도와주고자 했다. 이렇듯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이 있어야 빨리 성장한다. 독립한다. 독행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시고 남자 어른(할아버지, 숙부, 장남)이 부재한 경우엔 아들 장가를 보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어려웠다. 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쟁쟁한 명문가 출신은 다르긴 달랐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때 부친을, 여덟 살 때 큰형(세규)을 잃었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조모와 모친을 모시고 피란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열 일곱 살(만16세)인 1645년 의령 남씨인 남일성의 딸과 백년가약을 맺는다. 반남 박씨(家)의 힘이 작용한 것이리라.
하지만 부친이 부재했으므로 명문가라도 가세가 기울어지고 살림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빈궁한 처지였다. 그래서일까, 10년 동안 처가에 아내를 맡기고 박세당은 본가와 처가를 왕래하며 살았다 한다. 그런 와중에 처(남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태유(泰維)와 차남 태보(泰輔)를 얻었다. 온전하게 독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박세당의 출생지는 전라남도 남원이다. 아버지 박정(朴炡)이 인조반정 공신이자 남원부사로 끗발과 권세가 한창일 때에 태어났다. 이후 3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홍문관 등 요직을 이어가다가 40세(1668)에 이르러 돌연 자청하여 관직에서 물러난다. 수락산 자락인 석천에 은거하기 시작한다. 석천은 지금의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을 말한다. 서울과 가깝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종점인 장암역에서 내려 수락산 방향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박세당 은거지인 석천 고택을 구경할 수 있다.
박세당이 석천을 은거지로 삼은 데에는 대체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이 땅이 아버지 박정이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사패지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첫 부인인 조강지처 의령 남씨를 이곳 양지 바른 장자울(長子亐)에 묻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 곳을 은거지로 삼아 세상을 풍미했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을 흠모하였기 때문이다.
박세당은 38세 때 상처(喪妻)했다. 이듬해인 39세 때 광주 정씨와 재혼했다. 재혼 뒤 다음해인 40세부터 석천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조정에서 ‘관직 러브콜’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손수 책을 쓴 것이 <색경(穡經)>이다. <색경>은 일종의 농서(農書)로 숙종 2년(1676년)에 지은 저서로 석천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한지 꼭 10년만에 일구어낸 성과물인 셈이다.
남자 16세, 혼자 걷는 길(獨行)
박세당의 대표작은 <사변록(思辨錄)>이다. 이 저작물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풍파가 일어났다. 조정과 유림이 발칵 뒤집혔다. 사문난적이란 직역하면, ‘이(斯) 책(文)은 조정과 세상을 어지럽히는(亂) 도적(賊)이다’라는 그런 뜻이다. 주자와 다르게 해석한 내용이 한마디로 밉보인 거다.
다시 말해 <사변록>이 당대의 주류 세력인 우암 송시열 일파가 내세우는 성리학(주자학) 가치체계에 반하는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위기의식에 빠진 기득권층이 벌떼처럼 일어나 비주류를 향해 가혹한 ‘주홍 글씨(사문난적)’를 뒤집어 씌웠다. 좀더 정치적 색깔을 입힌다면 주류인 노론(老論)이 비주류인 소론(少論) 죽이기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아무튼 <사변록>의 저술기간은 석천에서 30년 걸렸다고 한다. 주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을 재해석한 것으로 주자(朱子)의 사서주해(四書註解) 중 불합리한 점을 지적했고 비판했다. 주자를 죽이고 박세당의 견해를 살렸다. 책이 등장한 지 30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히고 있다. 그러니 죽은 ‘고서(古書)’가 아니라 살아있는 ‘고전(古典)’이 되는 셈이다.
박세당은 68세 때, 자손들에게 경계하라는 뜻에서 ‘계자손문(戒子孫文)’이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현재도 계자손문은 따로 소책자로 만들어져 배포되고 있다고 한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서계(西溪)는 그의 호이다.
우선 자신이 눈을 감으면 장례를 간단히 치러 줄 것을 주문했으며 3년 상식(上食)을 폐지할 것, 일상 만사에 조심하여 명을 단축함이 없도록 근신할 것, 제사음식은 사치하지 않고 형편에 맞게 절약할 것, 제사음식은 사치하지 않고 형편에 맞게 절약할 것, <논어>의 말씀대로 충(忠)과 신(信)을 주장으로 매사에 정성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다운 행실을 할 것, 경서와 역사책을 독파하여 고금을 통하는 착한 선비가 될 것, 글을 소리 내어 읽되 그 뜻과 이치를 함께 익힐 것, <중용>에 있듯이 배우고 묻고 분별함과 행동함에 독실하게 할 것, 끝으로 형제간은 동기간이니 우의를 돈독히 하여 집안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어진 형제관계를 유지할 것 등. (<중부일보>, 2004년 12월 27일자 ‘서계종택과 서계문화재단의 설립’ 중에서)
기사를 읽으면서 ‘중용에 있듯이’라는 문구에 눈길이 좀 오래 머물렀다. ‘배우고 묻고~’는 중용 20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것 역시 팔자로 요약할 수 있다. ‘박학심문 신사명변(博學審問 愼思明辨)’이 그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되, 분명하게 사리를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 여덟 글자는 ‘독행(篤行)’이란 외연을 돕는 내면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이렇듯 독행(篤行)이 있어야 혼자 걷는 삶의 독행(獨行)이 성공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앞에 ‘박학심문(博學審問)’을 반으로 줄이면 ‘학문’이 되고, 뒤에 ‘신사명변(愼思明辨)’을 반으로 줄이면 ‘사변’이 된다. 그러니까 ‘학문사변(學問思辨)이 팔자(八字)를 포괄하는 사주(四柱)가 되는 셈이다.
이만하면 참 좋은 사주팔자가 아닌가. 아이가 있는 가정집 거실에, 직장 인문학 강의실 벽에도, 그 어디에도 팔자를 편액으로 걸어놓고 날마다 달마다 보고 또 볼 일이다. 자연 나의 행동이 독실해질 것이다. 박세당처럼 부지런해지고 홀로 있어도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박세당처럼 인생의 반을 학문에 매진하고, 나머지 인생의 반을 사변에 힘쓴다면 불행(不幸)은 현실에서 불행(不行)이 될 뿐이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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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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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심문 신사명변(博學審問 愼思明辨),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되,
분명하게 사리를 분별하라는 뜻.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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