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는 교통방송 사보 잡지 이외에는 모든 매체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오셨어요. 그런데 이번엔 승낙을 하셔서 놀랐어요. 문화일보의 인물 섹션을 즐겨보시기 때문인 듯 해요. 사진 찍기 싫어하시는 분인데, 옛날에 찍었던 사진까지 이렇게 준비해오셔서 깜짝 놀랐어요.”방송인 이종환(73)씨와 10여년 이상을 음악프로그램 작가로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권혜진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난 20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중구 예장동 tbs 교통방송 5층 휴게실에서 만난 방송인 이씨는 예상대로 젊어보였다. 목소리도 방송에서 듣던 대로 저음으로 깔리면서도 힘이 깃들어 있었다.그는 고희를 넘긴 나이에 매일 밤 10시부터 2시간씩 교통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이종환의 마이웨이(PD 최유선)’를 진행하고 있다. 올드팝을 주축으로 가요·재즈·국악 등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며 인기를 얻고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마이웨이’의 선장이 됐을까.“(2003년) MBC에서 술 먹고 방송한 것 때문에 스스로 나왔어요. 창피해서 못 하겠더라고요. SBS에서 국장 하던 분이 자기와 같이 방송 하자고 해요. 나야 좋다고 했지만 거기 노동조합이 가만 있나요. 결국 못 갔지요. 그때 여기(교통방송) 국장이 전화를 했더라고요. ‘지금은 라디오시대’ 같은 프로그램이라면 안 하겠다고 했어요. ‘라디오 시대’ 같은 프로는 여자 진행자가 정으로 가고 나는 코미디언이 돼야 살아요.” ‘마이웨이’ 이야기가 1990년대에 최고 인기를 누렸던 MBC의 ‘지금은 라디오시대’로 튀었다.
“당시 남녀가 진행을 하면 남자가 정이고 여자가 보조였는데, 우리는 최유라가 앞장을 서고 나는 대담이나 하며 어기적거렸어요.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지요. 이게 6개월도 되기 전에 청취율이 1위로 올랐어요.”그 이전까지 1위는 강석씨가 진행하던 ‘싱글벙글쇼’였다. 강석씨는 MBC 사장이 방송 진행자들에게 밥을 사는 자리에서 “드라마가 대박을 치면 유럽에 보내주는 포상을 하던데 우리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고, 이게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우리가 1등을 한 거예요. 최유라하고 내가 유럽 가는 상금 400만원씩을 받았지요. 강석씨는 죽 쒀서 개줬다고 하더군요.”이씨는 자신이 진행했던 방송 프로그램들의 시작과 마감 연도를 잘 기억하지 못했으나, ‘여성시대’를 임국희씨로부터 이어받은 것은 ‘지금은 라디오시대’ 이전이라며 기사에 붙일 약력에 넣어주기를 바랐다.
“임국희 여사의 진행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며 당시 라디오 국장이 나더러 들어가라고 해서 처음에 싫다고 했어요. 김동길 교수, 황산성 변호사, 또 무슨 배화여전 교수인가 하는 분이 게스트로 나왔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소리들만 하는 게 못마땅했어요. 그랬더니 그분들 못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더군요. PD(우종범)에게 방송위원회 불려갈 각오하고 세 번만 사고치자고 했지요. 얌전하게 해서는 승산이 없어요. 예를 들자면, ‘어떤 주부 청취자가 둘째 아이를 낳으니 첫째 아이가 질투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질문을 하면 배화여전 교수 같은 사람은 사랑으로 품어라 하지만, 청취자에게 답을 제시하라고 하니 어떤 엄마들은 ‘패주라’ ‘밥을 굶겨라’ 이렇게 나왔어요. 남편이 노름하느라 밤에 안 들어왔다고 하면, 또 그에 맞는 과격한 답들이 나왔지요. 그런 것에 방송위 경고가 떨어지는 거예요. 세 번 경고 맞은 후에 청취율 올라가는 게 보이더니 순식간에 1위로 올라섰지요.”그는 ‘여성시대’ 이전에 진행했던 ‘한밤의 음악편지’ ‘별이 빛나는 밤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도 당시 방송 관행에서는 파격적이었던 시도들을 했다. 송창식 등 실력있는 가수를 불러놓고 청취자의 요청대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방송 콘서트를 1시간 내내 펼친 것이 한 예다.중앙대 법대에 다녔던 그가 어떻게 음악 방송의 DJ로 이름을 날리게 됐을까.
“고교(경복고) 때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극단 신협을 쫓아다녔거든요. 그때 최무룡씨가 중앙대로 오라고 꼬여서 갔어요. 성우 오승룡씨가 1년 선배로 대학 방송국장이었어요. 1, 2학년 때 선배들 따라서 연극, 라디오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집안에서 ‘딴따라’ 되는 것을 엄청 싫어해 군에 자원입대했어요. 군대 다녀온 후엔 법학 공부가 싫어서 그만뒀어요. (평소 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동국대 서정주 선생을 찾아갔더니 다른 대학으로 간다고 해서 제자되는 것을 포기했지요.”그가 DJ의 재능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미우만 백화점(미도파 전신) 꼭대기 홀의 음악감상실에 가서 음악을 들었어요. 지배인에게 DJ의 발음도 좋지 않고 해설도 엉터리라고 했더니 나더러 해보라고 해요. 대학방송국 경험을 살려 내가 아는 만큼 음악을 틀고 해설을 해줬지요. 그랬더니 업주가 조선호텔에 가서 양복 한 벌을 해주더군요.”그는 1964년에 MBC 간부의 권유로 MBC에 PD로 입사를 하게 된다. 당시 최동욱씨가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탑튠 쇼’가 인기를 끌자, MBC에서는 PD로서 DJ 재능이 뛰어난 이씨를 내세워 ‘탑튠 퍼레이드’를 만들고 이에 대응했다. 두 프로그램이 맞대결을 벌이며 인기를 끌자 팝 뮤직이 국내에서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라디오는 2등이 필요없어요. 오로지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행을 해왔어요. 지금까지 만지는 것마다 1등을 해왔는데, 여기(교통방송)서는 모르죠.”그는 인터뷰 도중에 가방에서 음악 CD를 20여장 꺼냈다. 오늘 방송할 것을 직접 선곡해왔다는 것이다. 파일로 음악을 틀면 짝퉁이 나오기 때문에 직접 CD로 들어보고 가져온다고 했다.
“사람들이 익숙해서 좋아할 만한 곡을 세 번쯤 준 다음에 한 번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청취자들은 앞에 들었던 관성으로 받아먹습니다. 내가 선곡할 자유가 있으니까 여기가 좋아요. 다른 방송국들이 계속 손짓하지만,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여기에 뼈를 묻으려고 해요. 정이 들었어요.”그는 지난 30여년간 살아온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여전히 살고 있다. 1남3녀가 모두 결혼해 나갔기 때문에 부인과 둘이서만 지낸다. 이씨는 인터뷰 내내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여전히 흡연과 음주를 즐긴다고 했다.
“밤 12시에 방송 끝나기 전에 친구들이 문자를 해 와요. 그 친구들과 새벽까지 마시지요. 그러지 않을 때는 집에서 진로에서 나온 담금술을 한 두잔씩 해요. 그렇게 해야 잠이 들지, 그러지 않으면 새벽까지 멀쩡하게 깨어있어야 해요.”흡연과 음주를 즐겨온 그가 고희를 넘겨서도 여전히 방송을 할 수 있는 건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글쎄요, 전에 윈드서핑을 한 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요즘엔 아무 운동을 하지 않아요. 후배들이 골프하라고 해요. 조용필도, 이택림도 골프 클럽 한 세트씩 갖고 왔는데, 골프채도 잡지 않았어요. 내가 방송 중에 우리나라에서 골프하는 것은 안된다며 하도 ‘씹었기’ 때문에 골프장 가면 매맞는다고 했지요.”그는 방송에서 사회·정치적 발언을 자주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2년에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그만두게 된 것도 정치적 발언으로 설화를 입어서였다.“미국 교민들 대상의 방송도 하고 있을 때인데, 내 논조가 굉장히 보수적이었어요. 노사모(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가 태동할 때였지요. 내 이야기가 보수적이니까 불편했던 거죠. 미국 노사모들이 들쑤시고 여기 노사모들이 덧붙이고, 한 이 기사를 냈어요. 내가 볼 때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지만, 내가 사와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까 스스로 방송에서 빠졌습니다. 그때 노사모 정말 무서웠습니다.”그는 당시에 인터넷 댓글을 보면서 화를 내곤 했지만, 이제는 인터넷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는 이전과 달리 요즘 방송에서는 일절 정치·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라디오는 청소년들이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예전엔 방송에 효, 충에 관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어요. 지금은 그렇게 하면 욕먹어요. 음악이나 틀어라. 쓸데없는 소리 마라 이런 얘기죠.”이씨는 현재의 음악 방송 환경을 ‘난장판’이라고 표현했다.
“요즘 방송에서 인기를 끄는 가수나 탤런트들은 대부분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한 아이들이에요. 유명한 탤런트 한 놈은 중3 때 당구가 300이었다고 자랑을 해요. 공부 안 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거지요. 그런 놈들의 노래가 한 곡만 히트하면, 방송사에서 DJ로 써요. 제 부모와 하루 30분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요즘 청소년들이 그런 아이들을 2시간씩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수준의 아이들이 DJ를 맡아 시시덕대니….”
이렇게 방송가의 현실에 불만이 많은 그이지만, 자신의 방송 인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호강한 세월을 보냈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방송을 하며 늘 최고 대우를 받았으니까, 보통 사람들처럼 돈 걱정을 하지 않았지요. 지금도 이렇게 일을 하니, 은퇴한 친구들에게 참 미안해요. 그래서 과거에 방송했던 친구들을 매주 한 번씩 보는데, 밥값을 꼭 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