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學審問 愼思明辨( 박학심문 신사명변) -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되, 분명하게 사리를 분별하라
[한자풀이] 博 넓을 박, 學 배울 학, 審 자세할 심, 問 질의할 문, 愼 신중할 신, 思 생각 사, 明 분명할 명, 辯
분별할 변
정치인은 ‘명분’에 살고, 경제인은 ‘실용’에 산다. 정치인은 직선적이라
빠르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한다. 경제인은 곡선적이라서 느리기는 하지만 상처를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 조선시대 중기 학자이자 정치인인
우암 송시열은 출세가 빨랐다. 하지만 박세당이 이겼다. 박세당 가문은 지금도 명문가로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 산다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명분’인지, 아니면 ‘실용’이든지.
나에게도 사숙(私淑)이 몇 분이 계시다. 그 가운데 한학자 청명 임창순(任昌淳, 1914~1999)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있다. 내가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자주 가는 이유는 그 곳에는 망북루(望北樓)라는 정자가 있기 때문이다. 정자의 편액 글씨는 청명의 작품이다. 청명은 말년에
한림대학교 도서관에 <중용> 20장의 내용을 붓글씨로 써 기증한 바 있다.
청명은 서예작품에 항상 ‘放浪煙雲(방랑연운)’이란 글자로 낙관을 찍었다고 한다. ‘연기처럼 구름처럼 거스름 없이 사는 삶’이란 뜻이다.
이유가 있다. 직선의 삶이 아니라 곡선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학자겸 정치인인 박세당의 일생 또한 필자가 보기엔 곡선이며
‘방랑연운’ 했지 싶다.
빌 게이츠와 박세당의 팔자(八字) 인생 경영
여기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인을 소개한다. 자기 할아버지 이름은 몰라도 이 사람의 이름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바로 빌
게이츠(1955~)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로 세계 부자 1위인 빌 게이츠는 앞서 소개한 명분과 실용의 구분법으로 적용하자면 ‘철저한
실용주의자’이다. 다음은 출판평론가 표정훈 씨가 쓴 빌 게이츠에 대한 내용이다.
빌 게이츠의 가정환경은 유복했다.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금융기업과 비영리 단체의
이사였다. 부모는 게이츠가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초등학교 시절 게이츠는 못 말리는 독서광이었다. 10살이 되기 전에 백과사전을 전체를 독파한
그는 집 근처 공립도서관에서 열린 독서경진대회에서 아동부 1등과 전체 1등을 차지했다. 4~5장 분량이면 되는 리포트 숙제를 20~30페이지가
넘는 사실상의 논문으로 작성할 정도로 의욕도 넘쳤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다.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영상과
음향을 사용하지만, 문자 텍스트는 여전히 세부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최선의 방식이다. 나는 평일에는 최소한 매일 밤 1시간, 주말에는 3~4시간의
독서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이런 독서가 나의 안목을 넓혀준다.”
부모를 잘 만나서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5년 연애사 글을 읽다가 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빌 게이츠는 멜린다 프렌치에게 함께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네브래스카의 오마하 공항에 착륙했다. 1993년 4월 11일 부활절 일요일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멜린다. 그러나 게이츠의 설명을 들은
멜린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비행기에서 내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워렌 버핏이었다. 버핏의 차에 함께 타고 그들이 향한 곳은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 소유 보석상 보셰임이었다. 버핏이 유쾌하게 말했다. “난 1951년에 아내에게 줄 약혼반지를 살 때 전 재산의 6%를 썼다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그 일요일을 크게 즐기지는 못했지.”
당시 37살이던 빌 게이츠의 전 재산의 6%라면 5억 달러 정도다. 물론 게이츠는
재산의 6%를 약혼반지 사는 데 쓰지는 않았다. 이들은 1994년 1월 1일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첫 만남은 1987년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마이크로소프트의 언론홍보행사에서 사장과 직원 사이로 이루어졌다. 1988년부터 비밀 연애를 시작했고, 커피값을 내는 쪽은 빈 지갑 들고
다니기 일쑤인 게이츠가 아니라 멜린다였다.
아무리 비밀연애라지만 커피 값을 내는 쪽은 멜린다였다고 하니 놀랍고 충격적이다. ‘빈 지갑 들고’서 다녔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컨대 거의
마흔이 다 되도록 기업과 연애를 별개로 게이츠가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20년째 사장(CEO)이었는데도 말이다.
1975년 4월 4일 19살이던 게이츠는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21살의 앨런과 함께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자본금 1500달러를 갖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다.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포커를 해서 모은 돈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이름은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앞부분을 합친 것. 창업 초기에는 하이픈으로 연결한 이름(Micro-Soft)
이었으며, 1975년 11월 29일 게이츠가 앨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픈 없는 형태로(Microsoft) 처음 쓰였고, 그 형태로 1976년
11월 26일 회사를 등록했다. (1979년 앨버커키에서 워싱턴 주 벨뷰로 회사를 옮겼고 나중에 워싱턴 주 레드먼드로 옮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빌 게이츠도 박세당처럼 물러날 때를 알아 물러난다.
2008년 6월 27일, 빌 게이츠는 33년 간 이끌어오던 마이크로소프트를 떠났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은퇴계획을 밝힌 터였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제국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이날 오전 9시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컨퍼런스룸에서 게이츠는 부인 및 세 자녀들과 함께 800여 명의 임직원 앞에 섰다. 그날도 차림새는 넥타이 없는 셔츠. 스티브 발머가 빌
게이츠의 이름을 부르자 게이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MS와 MS가 하는 위대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은 날은 내 인생에서 단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은퇴에 즈음한 임직원들과의 대화에서 게이츠는 실수와 경쟁과 도전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도 이를 놓치는 경우가 있지요. 탁월한 사람들을 투입하지 않을
경우입니다. 이게 가장 위험합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비교적 괜찮았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횟수를 줄여야겠지요. 저는
사람들이 MS를 깎아 내리는 걸 좋아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했고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서 배웠고 우리의
많은 업적은 바로 그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규모 확대가 아니라 더 민첩해지는 것입니다. 회사 규모가 곧 두 배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 예측은 여러 번 틀린 적이 있지요. 저의 부재는 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물러나야 하며, 뭔가 새로운 일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게이츠의 은퇴(2008년)는 우리 나이로 따지자면, 54세 때다. 의외다. 한참이나 더 일해도 될 나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CEO로 왕성한
활동 중에도 게이츠는 꼬박꼬박 ‘생각 주간(think week)’을 챙겼다고 한다.
1년에 두 번 씩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홀로 떠났다고 한다. 이 기간에 혼자만의 휴식을 갖기 위해서였다. 하루 2번 음식을 배달하는
관리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가족과도 연락을 아예 끊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왜 그랬을까.
빌 게이츠의 독서와 사색 '철저한 독행(篤行)'
사실 게이츠는 이 기간에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모두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이러한 생각 주간 덕분에 탄생된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엑스박스’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독서와 사색’은 박세당이 강조한 ‘학문과 사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팔자(八字)로 정리하자면 ‘博學審問 愼思明辨(박학심문 신사명변)’을 하는 프로세스로 보인다. 이러한 내면의 단단함이 그를 반복적이고
정기적인 ‘사회 기부’라는 독행(篤行)을 낳았고 성실하게 외연으로 확대가 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게이츠의 인생은 되돌아보면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되, 분명하게 사리를 분별하라”는 팔자 ‘博學審問
愼思明辨’로 귀결되고 아울러 이를 철저하게 독행(篤行)한 것으로 보인다.
게이츠는 만16세부터 일했고, 만53세에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에 부인과 함께 설립한 세계최대 자선단체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변호사 출신인 아버지(빌 게이츠 시니어) 역시 지난 1998년 은퇴 후 재단에서 공동회장직을 맡아 자선사업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중용>을 읽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게이츠의 남다른 독행을 보고 박세당이 자손들에게
팔자를 준 것으로 대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니 이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첫댓글 한국의 기업인들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해 왔지만
지금도 두 세살 나이에
몇 억씩 주식을 증여하는 졸부들이
언론에 자주 오르는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어쩔 수 없네요 !
자식의 능력 유무를 떠나서 대를 이은 기업경영부터 문제가 많지요.
집착이라고 봐야겟지요. 감사합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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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인생경영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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