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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8년, 매년 겨울이면 히말라야로 떠났다.
처음엔 반쯤 눈을 감고 설산을 보면 인간은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순례자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담쟁이 넝쿨에 걸린 허물을 벗은 뱀의 등껍질 같은 남루한 영혼,
그런 초라함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욕심도 있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 가로 품성이 구분되어지는 세상, 혈연, 지연, 학연이란 썩은 카스트가
화석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진 나라를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만족감, 그런 것 말고 히말라야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왜 히말라야를 가는가?”
수없이 들었던 질문에 한번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삼류 잡지의 표지처럼 닳아진 산이 거기에 있어 간다는 조지 리 멜러리의 우문현답도 할 수 없었다.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셀파, 텐징 노르게이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는 셀파의 고통과 못 배운 한까지 겹쳐 여섯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을 저 산에 보내지 않으려고 내가 산에 올라갔다"
하지만 아들 중 하나가 에베레스트 등반의 꿈을 버리지 못하자 1986년에 숨을 거두며 이런 말을 남긴다.
"얘야,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선다고 세상을 다 보지는 못한단다.
정상에 오르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뿐이지"
트리나 포올러스는 서양의 성자로 불린다.
그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에 애벌레의 기둥이 나온다.
정상에 오르려는 야망으로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이 만든 엄청나게 높은 기둥,
그들은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계속 기어오른다.
남들이 정상으로 기어오르기 때문에 그냥 따라서 가는 것이다.
누군가를 밟고 밀지 않으면 올라갈 수 아비규환의 지옥 같은 전쟁,
일부 애벌레들은 체력이 약해 떨어져 죽고 일부는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떨어져 죽었다.
한 무리의 애벌레가 앞선 경쟁자를 밀어 죽이며 겨우 정상에 올랐지만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뻥 뚫린 하늘과 텅 빈 공간, 갑자기 어떤 애벌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뭐야, 여기 정상엔 아무 것도 없잖아, 어떻게 된 거지.'
그 때 옆에 있던 다른 애벌레가 조심스럽고 절망스럽게 말했다.
"조용히 해 바보야, 저기 밑에서 듣잖아.
우린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에 와 있는 거라고, 중요한 것은 단지
그거란 말이야“
그들은 절망과 허무, 끔찍한 상실감에 시달리며 정상에 있다가
밑에서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에게 밀려 까마득한 기둥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만다.
아, 그 덧없는 허무함이란.
하지만 그 중에 몇 마리는 정상에 오르는 욕심을 포기하고 내려온다.
그리고 사랑을 하고 고치에 매달린 인고의 시간을 견딘 후 예쁜 나비가 된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피조물이 유한한 삶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는 사랑이라는 것,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함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어쩌면 나도 그 애벌레와 비슷한 모습으로 히말라야를 갔는지 모른다.
여행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며 먼 바깥세상을 통해 내면의 또 다른 나를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높은 산에 오르면 인간의 탐욕과 아집이 발아래 보일 줄 믿었다.
거기엔 분명 내가 알 수 없던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그곳에도 인간 세상의 질서가 가득했다.
하루 일당 7불을 받고 25킬로가 넘는 짐을 지고 하루 종일 걷는 작고 어린 포터,
히말라야를 이용해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탐심에 시달리는 나라는 인간,
..........마치 내가 살던 저 아래의 세상과 똑같이.
안나푸르나에 가면 묵티나트라는 곳이 있다.
네팔 불교와 힌두교의 성지로 고원에 위치한 성스럽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한국의 비구니스님은 묵티나트를 보면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만 보는 것이 중생들에게 너무 죄스럽다는 것이 통곡의 이유였다.
비구니 스님은 펑펑 울었지만 나는 히말라야에 갈 때마다 하얀 눈이 되고 싶었다.
연약한 날개를 달고 나풀거리다 녹아지는 눈이 아닌 히말라야의 빙하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그런 눈 말이다.
만일 눈이 된다면 극락이나 이상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탐심 때문에 누군가의 목을 비틀거나
자연에 해악을 끼치는 일도 없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몸부림치지도 않을 것이다.
어머님의 무릎 장처럼 어느 따스한 날에는 기세 좋게 녹아내려
갠지스 강으로 갈 것이다. 돈이 없어 다 타지 못한 시체들을 보듬고 흐르다가 바다로 가고,
구름이 되고, 다시 하얀 눈이 되어 히말라야로 돌아오고 싶다.
히말라야는 인간을 극도로 초라하게 만든다.
그곳엔 인간의 근본적인 그리움이 있다. 단언하건데 단 한번이라도 히말라야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평소의 자기 모습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한 것이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 뿐이다.
인생이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려다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순간
허망하게 죽는 여로인지 모른다.
인생은 양파와 같다고 한다. 한 껍질씩 벗기다 보면 결국엔 아무 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5일 동안을 걸어 해발 4200미터인 페리체에 도착했고
이곳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목이다. 히말라야의 모든 언덕, 몇 채의 집들이
모여 사는 곳마다 룽다와 타르초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룽다란 바람이란 뜻의 룽과 말이란 뜻인 다가 합쳐진 티베트 말이다.
룽다는 긴 장대에 매단 한 폭의 길다란 깃발이고 타르초는 긴 줄에 정사각형의 깃발을
줄줄이 이어달은 것으로 만국기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룽다는 말 갈퀴가 휘날리는 모습을 뜻하는데 히말라야의 산언덕이나
산간마을의 어귀에 어김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룽다의 깃발은 정말 그렇게 보인다.
룽다에는 옴마니 밧메흠 같은 만트라, 경문이 가득 씌어있다.
진리가 바람을 타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서 모든 중생들이 해탈에 이르라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그래서 룽다의 천으로 된 깃발은 형체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놓아둔다.
오랜 세월 동안 풍상에 시달려 끝이 하얗게 바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깃대만 남은 것도 있다.
페리체까지 오는 동안 나는 매일 룽다와 타르초를 보면서 걸었고
매일 밤 룽다의 소리와 함께 잠들었으며 펄럭이는 룽다의 소리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소리로 푸륵~ 푸드득~거리는 룽다들과
수없이 만나고 수없이 헤어졌다.
굵은 저음의 남성적인 소리를 가진 룽다, 엷지만 다양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한꺼번에 토해내는 타르초, 녀석들은 낡고 닳아 저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채
무엇인가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줬다.
나는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며 어머님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
먼 전생으로 떠나고 싶은 그리움에 한없이 시달렸다.
인간이 죽어 바람이 된다면 가장 먼저 히말라야로 와서 머물다가 일부는
룽다와 타르초가 될지 모른다. 어떤 바람은 눈이 되었다가 다시 강물이 되고,
서로 뿔뿔이 헤어져 다른 여러 가지의 형태로 변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나는 저마다의 소리로 펄럭이던 룽다와 타르초를 통해 바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람이 불면 깃발을 매단 긴 장대가 부르르 떨며 룽다가 울기 시작한다.
그 가슴이 오그라들 것 같은 소리는 그리움이었다.
아홉 살에 병으로 죽은 친구, 입시에 시달리다 자살한 친구, 주름진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외할머니,
나와 연을 맺었지만 먼저 떠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성황당의 돌무더기에서 펄럭이던 깃발,
긴 장대에 걸린 여러 가지 빨래들이 내는 펄럭이는 소리, 나부끼던 기저귀, 빨래를 걷던 엄마의 앞치마,
룽다엔 그 모든 추억과 그리운 과거가 있다.
만약 죽음 뒤에 바람이 되어 허공을 떠다닐 수 있다면, 눈과 비, 강이 되어 어디론가 흐를 수 있다면
살아있는 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떠나간 자들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돌아온다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아비규환처럼 살던 사바세상의 고뇌도,
믿음을 강요하고, 강요당하는 여러 종교도 없어질 것이다.
중국의 무력침공으로 수많은 티베트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이주했다. 이주자인 그들은 현지인들이 살 수 없는 히말라야의 고지대에서
돌로 집을 짓고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현세는 공덕을 쌓는 시간에 지나지 않으며 혹독한 가난 또한
다음 생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 히말라야의 산자락에서 모진 소리로 푸르륵 거리는 룽다는
그들의 슬픔과 내세에 대한 그리움을 온 몸으로 떨며 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둥글게 이어져 결국엔 제 자리로 돌아오는
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사람들에게 신과 룽다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질문을 했다. 첫 번째는 어디서 왔는가,
그 다음엔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의문을 푸는 것이라고 한다.
의미와 본질은 전혀 다르지만 그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묘한 여운이 남곤 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초입에 이런 안내문이 있다.
“당신이 히말라야에 있을 때 사진 이외는 가지려 하지 말고 발자국 이외는
남기지 말고 시간이외엔 죽이지 마시길.”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만난 한국의 비구니 스님에게 인생의 무상함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게 대답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길어야 백년 후면 모두 죽겠지요.
그 뒤에 남는 것이 바로 무상함 이랍니다“
“스님, 수많은 신들이 사는 세상을 떠돌았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어떤 신도 믿지 않습니다.”
'.........'
"스님, 비오는 날 태어난 하루살이는 세상은 늘 비가 내리는 곳이라 여기며 죽겠지요.''
".........."
"한 여름에 잠시 살다가는 매미 또한 겨울의 삭풍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고운 모습으로 후광이 드리운 것 같은 스님은 나의 우매한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은 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스님은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네팔에 들렸다고 했다.
우린 잠시 인도라는 모질고 슬픈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인도에 갈 때마다 나는 가슴에 무엇인가 맺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천형과도 같은 가난,
카스트에 가득 밴 그들의 절망을 볼 때마다 배신과 연민이 범벅이 되곤 했다.
힌두교와 카스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승에서 자신의 처지에 반발하면
다음에 더 나쁘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순응만이 내세를 위한 최고이자 최선의 선택이 된다.
인도의 가난과 절망은 반발이 없는 삶에서 시작된다.
영국인들은 명상과 신비를 이용해 인도를 지배했고 아직 일부 사람들은
명상과 신비를 팔아 치부를 하기도 한다. 인도인 중 1억 명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죽는다.
스님에게 인도를 가면 차도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인도를 가장 잘 보기 위해선 차도를 걷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치기를 부렸다.
이른 아침의 햇살 같은 미소를 가진 스님과 며칠 동안 히말라야를 보면서 지냈다.
그리고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들의 영역이라는 페리체에서 헤어졌다.
“스님은 작은 바랑 하나가 짐의 전부군요.”
“먼 길을 떠날 때 가지고 가는 짐의 무게가 그 사람이 가지는 욕심의 무게랍니다.”
"스님, 시간의 무의미함을 가장 철저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진정한 히말라야를 볼 수 있답니다. 오쇼 라즈니쉬는 카주라호라고 우겼지만
달빛 아래의 히말라야를 봤다면 세상에서 봐야할 것은 모두 본 겁니다"
그런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스님을 보낼 때도 룽다는 모진 소리로,
슬프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하얀 눈에 쌓인 이쪽에 있는 산에서 내려가
저쪽에 있는 생의 길을 따라 수많은 만남과 수많은 방황을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스님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극단을 떠난 중도의 사고가 영혼을 편하게 만듭니다.
자연은 너무 아름다운데 인간은 너무 추한 존재라며 자신을 학대하지 마시길“
지치지 않고 푸르륵거리는 룽다와 타르초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스님의 마지막 말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촛불을 켜고 앉아 밤새워 히말라야를 봤다.
작은 촛불이 밀어내는 어둠의 량은 미약했지만 손에 닿을 듯 하는 별들은
내 가슴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따금 밝아지는 별, 저 혼자 가물거리는 별, 내게로 쏜살처럼 날아오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녀석도 있었다.
나는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히말라야의 품에서 스님을 그리워했다.
스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고 작은 바랑을 지고
산을 내려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매일 밤 스님에 대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두 개의 더듬이와 작은 뿔이 달린 하늘소와 비슷한 곤충으로 변했다.
아주 조금은 날 수 있는 잠자리 같은 날개가 있지만 지구력이 떨어져 얼마 날지 못했다.
주로 돌 틈을 기어서 스님이 있는 곳에 갔다. 작은 돌과 나뭇가지,
시냇물도 곤충으로 변한 내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리고 스님의 손에 열심히 더듬이를 부비며 말했다.
“스님, 너무도 그리웠습니다. 불경스럽게도 스님을 그리워해 전 곤충으로 환생한 건가요?”
스님은 단 한 번도 말하는 곤충이 된 내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온화한 미소로 나를 집어 들고 바위틈에 있는 집에 데려다 줄 뿐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내가 가진 촉수를 포기하기로 했다. 날카로운 돌 틈에 더듬이와 날개를 잘랐다.
몇 개 남은 발을 자를 때는 통증이 심했지만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불구로 만들어
몸통만 남은 채 버둥거려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새의 먹이가 되면 끝날 것 같아 작은 바위로 올랐지만 어떤 새도 나를 먹지 않았다.
죽으려고 바위에서 떨어졌지만 죽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다시 스님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불구라 몸통으로 기어가는 나를 다른 곤충들이 동정의 눈으로 봤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스님은 놀란 얼굴로 나를 집어 들었다. 스님의 손을 부빌 더듬이도 없지만 작은 손바닥 안이
마치 어린 시절 엄마의 무릎처럼 느껴져 안온했다.
“처사님, 부질없는 짓을 하셨군요.”
“스님이 말했잖아요. 육신은 그저 바람에 날리는 헌 누더기와도 같은 거라고,
인생은 이름 모를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몸통만 남아 버둥거리는 나를 보며 스님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내 몸에 떨어질 때마다 새로운 더듬이가 생겼고 날개와 발이 돋아났다.
그리고 돌 틈에 더듬이와 날개를 자를 때 느껴지는 통증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곤 했다.
그랬다. 나는 매일 밤 곤충이 되었고 매일 바위틈에 날개와 더듬이, 발을 자르며 버둥거렸다.
그리고 물컹거리는 절망의 반죽들을 두 손에 가득 움켜쥐고서 아침을 맞곤 했다.
그런 순간에도 룽다와 타르초는 지치지 않고 울었다.
이대로 몇 번의 생을 건너 뛰어 스님의 눈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세상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 존재하고 내 그리움은 오직 깊고 푸르게 이어지니까.
룽다는 깃발이 아니라 바람이 전하는 말이었고 가깝게 지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바람이 되어 찾아와 전하는 정겨운 인사였다. 그리고 계속 푸르륵 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나를 괴롭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고."
항구에 묶어 놓은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묶어 놓으라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며
만용을 부린 적도 있다. 내가 가는 곳에 길이, 내가 머무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다.
수없이 오른 히말라야, 하얀 설원이 가득했던 시베리아, 차도를 걸으며 보았던 슬픈 인도,
썩은 아홉시 뉴스가 매일 밤 흐르는 이 땅,
별들이 쏟아져 내려 어린왕자가 불쑥 나올 것 같았던 여러 사막,
커다란 바위가 기도로 인해 갈라진 티베트의 조캉사원,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작은 달러를 내밀며
아직도 내게 신심이 남았다고 자위했던 초라한 내 영혼 속, 그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다.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죽는 것이다.
나는 단지 눈처럼 쏟아지는 슬픔 속에서 물컹거리는 절망의 덩어리들을 두 손 가득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히말라야에 가보라, 그곳엔 비단 하얀 설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을 살았을 것 같은 늙은 햇빛이 있고 담쟁이 넝쿨에 걸린 뱀의 허물과도 같은
남루한 당신의 영혼이 있을지 모른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이란 히마와 머물다의 알라야가 합쳐진 말이다.
거기에 가면 인간에겐 누구나 넘어야 할 고유한 산이 있고 저마다 짊어지고 가야할 삶의 고통스런
무게가 있음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더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육신은 바람에 날리는 헌 누더기에 불과하고 인생은 이름모를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는 것.
시간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길게 이어져 언젠가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삶의 나라와 죽음의 나라가 있는데 그것을 연결해주는 다리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을.
첫댓글 버디헌터님 !! 멋진인생을 살고 계신분이군요
언제쯤 나도 히말라야에 가볼수 있을런지 ?
얼마 남지않은 년말 마무리 잘하시길-
세라비님 안녕하세요..
언젠가 연이 되어 히말라야를 꼭 방문하길 바랍니다.
아마 잊을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찾을 고러 생각합니다.
댓글도 감사합니다.
히말리아산 중턱에 휘날린다는 룽다를 보면
어린날 우리들시골의 서낭당을 연상케합니다
룽다의휘날리는깃발은 큰염원을 서낭당 새끼줄에 꿰어 흔들리는 천은 작은 염원을~~~~
오늘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버디헌터님"
일랑님 반갑습니다.
송년회에 뵌 기억이 생생하네요. 네팔의 룽다와 몽골에 있는 성황당인 어워, 한국의 성황당은 거의 비슷합니다.
아마도 몽골리안이란 혈통이 같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남은 한 해 마무리 잘 하세요.
버디헌터칭구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칭구가 해주는 한마디 한마디에...
나자신을 돌아보며..겸손함을 배웁니다^^ 소중한것이 무엇이며..아무 쓸모도없는
내가 취하려햇던 그 헛된 욕심들을...좀더..내려놓을수 있는 깊이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델라이데 친구님,
62범들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는 모습에 늘 감동합니다.
감사해요.
친구야~정말 멋쪄부러....
세상을 넓게볼수있는 마음의 눈을 가졌군...
친구가 전하고 자 하는 메세지....
읽고 또읽고 ....
답은 나중에 직접 일러주소...
"나를 괴롭히는것은 결국 나"야망에 꿈틀거린 애벌레는 되기싫은데....
많은것을 생각케 하는글 감사하오~
62범 중의 가수 사랑한다면,
댓글도 고맙고 한 해 마무리도 잘 하길 바래요.
친구님 한참~ 머물다 갑니다.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마음에 담아두고 갑니다.
생각해보지만 그 답을 얻을 수 없네요.
그냥 무~이네요...^^
애니투 친구,
세상 어디에도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인지 모르겠네요..
좋은 댓글 감사해요.
같은남자로서 부럽기만합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글도 짜임새있게 잘쓰십니다..
가을신사선배님 칭찬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꼭 히말라야를 가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요.
재주많은 친구^^
글도 잘쓰는군~~ 경험이 많아 감성도 풍부하고 좋아좋아^^
오드리뻥 친구,
댓글 고맙고 늘 건강하세요.
골프면 골프 등산 하면 해외원정 까지 대단한 젊은 친구이먼요 대단합니다.
이번 송년모임에 방장님을 뵈어 반가웠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남은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길 바랍니다.
버디님의 배낭속에는
히말라야의 길 ,그리고 삶과 바람의 이야기 가득하시라
낮선 문화와 서슴없이 손을 잡으시며
만나적 없는 이들과 생명들에게 미소와 눈빛에으로 귀기울이시는 땨뜻한 여유로움은
하늘 바라보며 가슴 열어보이시는 아름다운 인간애라 생각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그 연결의 다리가 사랑인것을
저는, 순간 잊고 살었음을 ..
"귀하의 삶과 깊은사색의 영역" 예찬 드리고싶습니다.
이제 조금 남겨진 한해의 날들을 매만지며
아쉬움으로 마음 서성이게합니다.
아름다움 마무리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글월이 주시는 행복 저의몫이라 소중히 챙깁니다
혜정님의 길고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글로 이런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합니다.
다음 호랑이방 모임에 꼭 뵐 수 있길 기대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친구 정말대단해요 우리곁에친구란게 자랑스럽네요 정말부럽네^^친구 언제나 모든게넘치는대단한친구. 홧팅!!입니다
연우친구,
댓글 고맙고 반가워..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내가 아는 산사나이 박영석대장이 히말리아원정때 실종되기전
그분의 마지막 원정길에서 한애기가 생각나네
나는 산이있어 가는것이고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고
내가 죽는곳은 미지의 세계속이다
결국은 그곳에서 "산사나이"를 힘없이 외치며 아직도 소식이 없단다
산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지는 잘모르지만
헌터님의 글을 읽노라니 조금은 님의 인생의 멋과 가치를 읽을수 잇어
이순간 마음의 평안이 오는듯하네
즐감하고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