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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억시니 <나일전사 이야기> #1. 프롤로그 아란과 시월족의 싸움이 끝난 종전의 시대. 전사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전사의 꿈은 머나먼 지난날의 이야기. 아란과 시월족의 전쟁 보다 앞선 격변의 시간들 이었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잊으려 할수록 깊어지는 자신의 과거 속으로 전사는 점점 빠져 들고 있었다. #2.전조 부드러운 태양과 청명한 밤공기가 어우러진 북서의 가을새벽. 전사는 홀로 나일족의 군락을 거닐고 있었다. 산보를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간밤의 숙취로 머리가 아팠던 전사는 묵묵히 길을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군락을 돌았을까. 하품을 하는 전사의 곁에 뜻밖의 손님이 따라 붙었다. "큰아버지!" 허리맡을 내려보자 조카인 라야가 전사의 다리를 붙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뾰루퉁한 표정을 보건데 아침부터 뭔가 큰 싸움이 있었던 것 같았다. 전사는 쭈그려 앉아 라야에게 물었다. "아이구, 우리 꼬마 아씨, 오늘은 화가 많이 나있구나. 그래, 무슨 일이니?" "윽! 냄새!" 전사의 술 냄새에 코를 막던 라야는 곧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말했다. "적귀 그놈이 장대로 내 머리를 내리쳤어. 이거 봐 혹도 났단 말야!" 라야는 한껏 부어있는 자신의 정수리를 전사에게 내밀었다. "음, 이건 좀 심하구나. 적귀 녀석, 내 적당히 하라 일렀건만." "큰아버지, 이번만 적귀를 손봐주면 안돼? 내 부하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단 말야." 라야의 투정에 전사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지 않니. 적귀는 오로지 네 아버지인 라노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건 네가 적귀에게서 무술을 배우겠다고 우기면서 생긴 일이잖니. 적귀는 위험한 녀석이라고 큰아버지가 경고했을 텐데.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무술을 그만 두는 게 어떠냐." "그건 싫어!" 라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전사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난 큰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싶어! 아버지처럼 약한 족장은 되지 않을 거란 말이야! 이제 됐어!! 큰아버지가 손봐주지 않음 내가 할 테니까! 두고 보라구!" 라야는 약이 오른 나머지 큰소리로 악을 쓰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북서의 현자'로 불리는 라노가 약한 족장이라...라노녀석, 가족에게는 정말 무르단 말이지." 왈짜 같은 그녀를 보며 혀를 내두르는 전사였지만 그는 내심 라야의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이를 갖기 전 아내와 사별해야 했던 그에게 있어 라야는 친딸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직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총명한 나일족의 후계자. 전사는 누구보다 라야를 자랑스러워했고 그녀를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라야 역시 백전의 영웅인 전사를 동경하며 따랐기에 둘 사이의 유대는 이미 부녀에 가까운 것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필이면 적귀에게 무술을 배우겠다고 하다니, 기왕 이렇게 된 것, 내가 직접 무술을 가르쳐볼까." 다시금 적귀에게 호되게 당할 라야를 걱정하며 전사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때였다. "형님!" 군락 너머로 다급하게 전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전사의 부장이자 의제인 시호가 상기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 한참 찾았잖소!" 헐떡이는 시호에게 물을 건네며 전사는 아침부터 웬 소란 인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전사의 물음보다 앞선 시호의 말에 그의 얼굴은 굳어지고 말았다. "시월족이오! 시월족이 우리 군락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소!"
#3. 출정 텅 빈 나일족의 천막 안. 출정을 앞둔 전사는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사실 전사에게 장비란 그의 검 외에 특별한 게 없었지만 오늘은 유독 몸을 놀리는 것이 갑갑해 견딜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조바심을 내고 있는 건가?" 전사가 나서는 이번 출정은 시월족을 탐색하기 위한 단순정찰. 그럼에도 전사는 자신의 마음속에 감도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시월족이라...’ 그가 적으로서 맞닥뜨리게 될 시월족은 ‘잿빛광견’으로 통하는 북서의 과격파였다. 남동 의 강대국인 아란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나일족과는 달리 시월족은 '아란타도' 라는 명분하에 주변 부족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했고 그에 반하는 부족은 용서 없이 짓밟았다. 그 때문인지 최근 북서대륙에선 시월족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고 그 중 몇 가지는 전사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월족은 절대 지치지 않는 초인들의 집단이라느니, 시월족의 족장은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느니.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것들이었지만 확실히 이름도 없던 약소부족이 무력을 앞세워 급성장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 잠시 침묵하던 전사는 이내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노파심을 외면했다. 소문 따위, 아무렴 어떤가. 초인이든 불사신이든 이기면 그만일 뿐. 수많은 전투에서 무패를 자랑하는 나일족 제일의 전사. 그것이 자기 자신 아니었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전사가 천막을 나서는 순간 그의 왼편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전하시는 겁니까 형님?" 전사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그의 동생 라노가 있었다. "여기까지 마중을 나오다니, 나일족의 대족장란 녀석이 이렇게 가벼운 걸음을 해도 되는 거냐. 라노?" "그게...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요." "좋지 않은 예감? 뭐냐 그게. 하긴 너야 워낙 걱정이 많은 녀석이니." "형님." 라노가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자 전사의 얼굴에도 어느새 진지함이 서렸다. 전사는 고개를 끄덕여 라노에게 계속하라는 몸짓을 보냈다. 라노는 지면을 바라본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로선 원치 않았던 결과였지만 결국 나일족과 시월족의 싸움은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수 십년간, 북서대륙의 맹주가 우리 나일족 이었다 해도 시월족 역시 강력하게 떠오르는 신흥부족. 이 싸움의 결과는 신만이 알고 계시겠죠. 게다가..." "빙빙 돌려 말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 전사의 말에 라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마음을 정한 듯 그에게 말했다. "만일 이 싸움으로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부디 제 딸을 부탁합니다." "라야를 말이냐?" 어리둥절해 하는 전사를 보며 라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보다는 형님을 잘 따르는 아이니까요. 게다가 형님은 제게 남은 유일한 혈육입니다. 형님이라면 그 아이도 분명..." "바보같은 소리!" 전사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라노를 꾸짖었다. "그 나이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라야 에게도 그와 같은 상처를 안겨줄 생각이냐." "형님.." "네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지금은 나일족과 너의 안위만을 생각해라. 그리고 걱정마라. 시월족이 아무리 강한들 우리 나일족의 상대는 되지 않을 테니까. 나참, 초장부터 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까지 심란해 지잖냐." 전사의 핀잔에 라노는 기가 꺽인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괜찮다. 그리고 약속하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와 라야만은 내가 지키겠노라고. 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다." "형님..." "자세한 것은 이번 정찰을 끝낸 후 이야기 하도록 하자꾸나. 동생아. 출정 준비는 끝났나. 시호?" "네 형님." 전사의 부름에 시호가 조용히 검을 건냈다. 시호에게 받은 검의 무게 느끼며 전사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자 그럼, 오늘도 날뛰어 보자꾸나. 아개." #4. 패배 "허억-허억-" 전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전방을 주시했다. 흘러드는 핏물 탓에 전사의 시야는 상당히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맞은편 상대의 위압감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공기가 들끓는 듯한 무시무시한 투기. 눈앞에 있는 자는 마치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듯 비정상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사라칸..." 전사는 가까스로 입을 떼 상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사라칸. 시월족의 족장이자 과격파의 수괴인 그 남자는 쓰러져 있는 전사를 천천히 내려 보고 있었다. 어째서 시월족이 족장이 우리 정찰대를 급습할 수 있었을까? 저자가 나일족의 작전을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만생각에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전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패인은 적의 기습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압도적인 무력 그것이 전사와 사라칸의 차이였다. 불과 몇 개월 사이 북서의 수많은 북서부족을 무릎 꿇린 그의 악명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힘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극한의 것. 인간으로 태어난 자라면 누구도 그에게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크으윽-" 땅에 쓰러져 신음하는 전사를 말없이 바라보던 사라칸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검게 이글거리며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전장에서 태어난 화신 같았다. "저벅 저벅-" 화신의 발걸음이 들려올 때마다 전사의 몸은 더욱 더 떨려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무겁고 뜨거운 투기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의 전사에겐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새 전사의 발치까지 다가온 화신은 놀라만치 고요한 얼굴로 전사에게 물었다. "두려운가?" 그의 말에 전사는 떨려오는 몸을 부여잡았다.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강자 앞에서 전사는 온몸이 벌거벗겨진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런 전사를 바라보며 화신은 또 다시 말했다. "훌륭하다. 나의 일격을 세 번이나 막아낸 그 실력, 칭찬해 주마." 상대에 대한 경시가 깔린 오만한 찬사.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사는 그것이 너무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 앞에서 전사는 자신도 놀랄 만큼 작아져 있었다. '살고 싶다.' 오직 그 말만이 전사의 머릿속에 남아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화신은 마치 그의 속내를 꿰뚫기라도 한 듯 조용히 말했다. "네놈의 실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네놈에겐 선택할 기회를 주마." 말을 마친 화신은 거대한 검을 전사의 목 언저리에 힘껏 내리꽂았다. '쿵-' 지면을 흔드는 무거운 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화신의 위압적인 얼굴이 들이닥쳤다. 공포로 일그러진 전사와 마주한 화신은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냈다. "선택하라. 맞서서 죽을 것인지, 굴복하여 살 것인지" #5. 혼란 "-님...-님!" 눈을 뜬 전사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여긴 어디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모든 것이 몽롱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형님!"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서야 전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와 함께 출정했던 시호의 모습이었다. "시..호?" 시호를 알아본 전사의 눈은 금새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크흑!" "무리하지 마시오. 형님, 아직 상처가 다 나은게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다행이오. 그만한 상처에도 살아남다니 정말 기적이군." 전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엇이 다행이고 기적이란 말인가. 전사의 부대는 시월족의 기습에 전멸했고 전사 역시 사라칸과의 대결에서 무참히 패했다. 그 결과, 자신은 적지 안에 사로잡힌 포로신세.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경솔하게 시월족에게 맞서다니, 우리가 어리석었어요. 그들의 힘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소. 애초부터 우리가 시월족에게 이길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비관적인 시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전사는 그의 기분을 이해했다. 시월족 아니, 사라칸의 강력함은 전사 자신도 뼈저리게 경험했던 바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시호의 말은 전사로서 도저히 듣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지금이라도 빨리 라노형님이 있는 장소를 시월족에게 알려 줍시다!" 시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사는 그의 목줄기를 잡아챘다. "컥!" 놀란 시호가 전사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분노에 찬 그의 힘을 이겨낼 순 없었다. "미친녀석, 나일족의 대족장을 시월족에 팔아넘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오, 오해요! 형님. 내말을 들어보시오...크헉...제발 이 손 놓고!" 시호가 메어드는 목소리로 외치자 전사는 마지못해 그를 놓아 주었다. 한참을 쿨럭이던 시호는 여전히 화가 나있는 전사에게 말했다. "형님도 알다시피 나일족은 곧 패망하게 될 거요. 이렇게 된 이상 시월족과 거래하여 라노형님만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소!" "그게 무슨 잠꼬대냐! 내 비록 패하긴 했어도 전투는 이제 막 시작 되었을 뿐이야. 게다가 나일족의 병력은 시월족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걸 잊은 거냐? 네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소릴 지껄이는 거야!" 전사에 역정에 시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형님! 형님은 대체 지금이 언제라고 생각하는 거요! 사라칸과의 싸움 이후 형님이 정신을 잃었던 것이 꼬박 한 달이오! 그 사이 나일족은 지금 시월족에게 격파되어 함락되기 직전이라고!" "뭐?!" 전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어붙었다. 사라칸에게 당한 후 눈을 뜬 것이 불과 몇 시간 만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한 달이었다니. 정말이지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충격을 받은 전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시호의 설득은 계속 되었다. "나 역시 시월족에게 투항하며 라노형님의 선처를 사라칸에게 부탁했소. 나일족과의 싸움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은 사라칸은 라노형님의 목숨은 아무래도 좋은 듯 했소.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빨리 라노형님과 라야를 구해야 하오!" 자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전사가 갈피를 잡지 못하자 시호는 전사를 다그쳤다. "나일족이 멸족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요! 이대로 시간을 끌면 라노형님의 목숨까지 부지하기 어렵단 말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라노형님과 라야를 지킨다는 게 형님의 약속 아니었소? 그건 거짓말이었던 거요!" "큭-!" "말해주시오. 현재 라노형님의 은신처를 아는 곳은 형님뿐이오! 내가 직접 달려가 라노형님을 확보 하겠소. 그러니 어서!" "빌어먹을!!" 전사는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 것이란 말인가. 문득 출정 전에 느꼈던 꺼림직한 예감이 떠올랐다. 어렴풋이 인식은 했지만 결국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불안감. 그때의 느낌은 바로 지금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던 걸까. 그때 조금 더 신중하게 전선에 나섰어야 했던 걸까. 덧없이 피어나는 후회 속에 시호의 외침이 전사의 귓전을 울렸다. “........! ......!” 전사는 눈을 감았다. 그는 깨닫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미칠 듯이 괴롭지만 그것은 라노와 라야를 위해 그가 해야 할 일. 전사는 떨리는 입술로 말문을 열었다. #6. 파멸 저무는 태양아래, 전사는 눈앞의 광경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유라고원. 한때 '나일의 시작'으로 불리던 북서의 성지는 이제 나일족의 처형장으로 변해있었다. 나일족의 피로 얼룩진 그곳에서, 시월족은 짐승처럼 으르렁댔고 그들의 광기에 나일족은 무참히 스러져갔다. "죄인 라노를 형틀에 올려라." 형장에 울려 퍼지는 싸늘한 한마디. 전사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파멸.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타들어가는 고통을 삼키며 전사는 자신을 질책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무지했던가.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인지. 그로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과거, 공포로 눈이 멀었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크흑" 뒤늦은 통회 속에서 전사는 하염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세계에 절망했다. 전사의 고향과 형제들은 처참히 짓밟혔고 그의 신념과 맹세는 싸늘하게 퇴색해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아...아아아---!" 자신의 죄책감에서 달아나듯 전사는 처형장을 향해 내달렸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라노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무수히 솟구치는 헛된 희망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사의 발이 형장에 닿기 전에 시월족의 병사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놔! 이거 놓지 못해! 네놈들이 감히!!" "뭐냐, 무슨 소란이야!" 소란을 가로막는 냉담한 음성에 전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과 마주한 순간 전사는 놀라 외쳤다. "시호!!" 전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자 시호는 기분나쁜 웃음을 흘렸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형님이었군. 시월족의 결사 6장이 되실 분께서 여긴 어쩐 일이요?" "어떻게 된 거냐 시호, 라노를 처형한다니! 약속이 틀리잖아!! 그때는 분명!" "하-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신?" 전사의 말이 채 끝나나기도 전에 시호는 코웃음을 쳤다. "약속이라니? 난 분명 라노를 살려두겠다는 약속 따위 하지 않았다구." 흐흐흐 애당초 라노가 죽고 사는 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야." "설마...날 속인 거냐? 어째서 네가...대답해!! 시호!!" "속여?! 내가? 그렇다면 북서 전체를 속인 저 사기꾼은 뭐지?" "뭐?" 시호의 뜻밖의 모습에 전사는 혼란스러웠다. '사기꾼이라니, 비롯 뜻은 달라도 누구보다 라노를 따르던 시호가 아니었나. 그 때문에 나일족이 함락 되어도 라노만은 보호해달라 사라칸에게 선처를 구한 게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난 나일족을 시월족에게...' 흔들리는 그의 생각을 비웃듯 시호는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도 눈이 있다면 보라고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상황을 말이야! 아란의 침공은 이미 시작 되었고 놈들의 공격에 북서대륙은 엉망이 되어 버렸어. 아란과의 화친?! 하!! 북서의 대족장이라는 작자가 그따위 한심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런 꼴을 겪고 있는 것 아닌가!" 전사는 말문이 막혔다. 진정 이것이 녀석의 본심이었단 말인가. 과거 북서대륙을 누비며 동고동락 하던 시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분노에 취해 격정을 내뿜는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었다. "우린 속은 거라고. 저 바보같은 놈이 읊어댄 얄팍한 평화에 말이야. 그래, 아란과의 전쟁은 처음부터 피할 수 없는 거였어. 놈들과는 피를 봐야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지옥 같은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은 단하나, 아란을 힘으로 무너뜨리는 것뿐이야!" 전사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경멸에 찬 표정으로 시호를 노려보았다. "부족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뼛속까지 시월족인 것처럼 지껄이고 있구나. 시호. 그래...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월족이 어떻게 나일족의 행동을 꿰뚫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빨리 나일족을 격파 할 수 있었는지를 말야. 다...네놈 짓 인거냐? 네가 말하는 그 북서의 힘이란 게 시월족인 것 같아서? 그래서 나일족을 버리고 시월족에 붙은 거냐? 그런 거냐. 시호!" "‘같아서’ 라니, 당신도 알고 있잖아. 북서는 지금 시월족의 깃발아래 하나가 되려하고 있어. 막강한 사라칸의 무력으로 모인 북서부족의 연합. 그 세력은 이미 전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 하지만 그걸론 부족해. 아란을 짓밟기 위해서 북서는 더욱 더 강해져야해. 그렇다면 우선, 북서에 나약함을 전염시킨 나일족을 이 땅에서 지우는 게 순서 아니겠나! 특히 그들의 지도자였던 라노와 그 핏줄을 말야!" "뭐라고?!" 전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라노의 핏줄. 그 한마디는 전사를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뜨렸다. "네..네 녀석 설마 라야 마저?!" "라야..그 약은 년, 운 좋게 적귀와 함께 도주 한 듯 하다만.. 뭐, 상관없어 나일족이 없어진 이상 놈들이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니까. 이제 곧 그 년도 제 아비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겠지." "시호!!!!" 분노하는 전사를 뒤로한 채 시호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허물을 벗어던진 뱀의 홀가분한 울음소리 같았다.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에 거역하지 말라고. 그래도 형님이나 나는 줄을 잘선 쪽이잖나. 괜히 멍청하게 화를 자초하진 말라고 어차피 맞설 힘도, 용기도 없는 주제에." 할 말을 잃은 전사를 비웃으며 시호는 큰소리로 외쳤다. "뭐하고 있나. 어서 라노의 목을 베어라." "안돼----!!" 전사의 간절한 절규 너머로 형 집행인의 칼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하늘마저 가를 듯 높이 치솟은 칼. 섬뜩한 한줄기 섬광은 이내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7. 에필로그 메마른 바람이 휘몰아치는 갈대밭. 이름없는 무덤이 늘어선 벌판에서 전사는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살을 에는 겨울녘의 바람에도 그의 두 눈은 말없이 손에 든 물건을 바라 볼 뿐이었다. ‘펄럭-’ 전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노란나비가 피로 물든 작은 옷 이였다. 이제는 체온마저 식어버린 물건이지만 그것이 자아내는 기억은 얄궂을 정도로 선명했다. '큰아버지!' '응?' '조심해야 돼!' '후후 우리 꼬마아씨, 이 큰아버지가 전장에 나서면 뭐라고?' '백전백승!' '큰아버지를 가로막는 적들은 뭐라고?' '추풍낙엽!' '잘 알고 있네! 그럼 다녀오마. 적귀에게 창술 잘 배우고 있거라. 다음엔 이 큰아버지가 직접 대련 해 줄 테니.' '정말? 말 바꾸기 없기야!' '그럼. 이 큰아버지가 약속 어긴 적 있니?' '아니! 없어!' 기쁨과 기대에 찬 표정으로 전사에게 손을 흔들던 라야의 모습. 그때 분명 그녀는 노란나비가 수놓인 옷을 입고 있었다. '잘 다녀와- 큰아버지.' 출정 전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인사. 전사는 아려오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크흑.." 전사는 옷가지에 얼굴을 묻은 채 무릎을 꿇었다 바람 때문인지, 복받치는 감정 때문인지 그의 어깨는 흔들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스산한 바람을 타고 온 라야의 청명한 목소리가 전사의 몸을 마비시켰다. '난 큰아버지 처럼 강한 전사가 되고 싶어!' "흐흑-" 출정 전 라노와 했던 약속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약속하마. 동생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와 라야만은 내가 지키겠노라고. 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다.' "흐흐흑-" 그리고 사라칸의 발밑에서 한없이 비굴했던 자신의 마지막 모습. '살려...주시오. 제발 목숨만은...' "으아아아아--!" 절망과 회환, 그리고 솟구치는 울분이 오열 속에 들끓었다. 전사가 토해낸 뜨거운 감정은 이내 갈 곳을 찾지 못한 망념이 되어 공허하게 벌판을 맴돌았다. 위로받지 못할 자들과 길을 잃은 자가 남은 황량한 그 곳에서 바람은 차갑게 울었다. ------------------------------ 안녕하세요. 해와 달입니다. 인소닷에는 글을 처음 올려 보네요 이번에 올린글은 제가 계획하고 있는 소설의 사이드 스토리 입니다. 본래는 본편 챕터마다 부분부분 삽입될 이야기지만 이렇게 늘어 놓고 보니 어느정도 진승전결이 되는 것같아 평가나 감상을 겸하여 이렇게 올려 봅니다. 글을 써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문맥이 어색하거나 완급조절이 별로 일 수도 있으니 양해 바라며 많은 조언과 의견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록> 부족한 내용으로 글을 내밀기가 조금 눈치가 보여서 주요 설정으로 부록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다들 그림실력은 너무 따지지 말아 주시고 ㅎㅎㅎ 그냥 세계관 설명의 일부라 생각해주시고 부담없이 봐주세요. 1. 세계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한대륙은 동방에 위치한 대륙입니다. 한대륙은 청하라는 큰강을 기점으로 남동과 북서 대륙으로 나뉘어 있죠. 각 대륙은 서로에대해 그다지 우호적이 않은 상황이구요. 남동에는 아란이라는 강대국이있었고, 북서에는 나일족과 기타 북서 유목부족들이 있었습니다. 본래 북서의 맹주부족인 나일족은 아란과의 친화 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시월족의 등장이죠. 나일족과는 달리 아란과 무력 투쟁을 원하는 시월족은 나일족의 정책에 반발하여 다른 부족을 규합하였고 이로인해 북서 내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나일전사이야기'는 바로 이시점 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다룬 것이죠. 뭐 ,결국 나일족은 시월족에게 패하게 되고 나일족을 무너뜨린 시월족은 북서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부족이 됩니다. 이로써 아란과 시월족이 맞붙는 남북서전쟁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죠. 이후의 이야기들은 모두 본편에서 다룰 내용으로 이번 작은 그 기반을 닦는 시험적인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등장인물 나일전사 나일전사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일 전사입니다. 이 녀석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채 그냥 '전사' 라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본편을 보게 되면 금새 알수 있는 내용이라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네요.ㅎㅎ 나일족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압도적이 패배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리고 끝내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되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전사이지만 아직 그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일전사가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지 본편을 기대해 주세요!! -------------------------------------------------------------------------- 라노 북서대륙의 맹주라 불리는 나일족 대족장이며 나일전사의 친동생입니다. '북서의 현자'로 불리던 그는 남동의 강국인 아란과의 전쟁을 피하기위해 평화적인 외교를 표방하였으나 강경파인 시월족과의 충돌로 인해 결국 북서 내란이 발생하게 되죠 그 와중에 시호의 배신으로 전략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뒤이은 전사의 실책으로 인해 그의 위치가 발각되어 그로인해 시월족에게 붙잡혀 전사의 눈앞에서 처형당하고 맙니다. -------------------------------------------------------------------------- 라야 나일족장인 라노의 딸이자 전사의 조카입니다. 사실 그녀로서는 아란과의 평화정책을 고수하는 아버지보다 전장에서 활약하는 전사를 더 동경하고 따르는 아이였는데요. 결론적으로 그런 전사에게 배신당한것과 다름없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에필로그에서 라야의 결말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긴했지만 지금 고민중입니다. 이 아이를 죽일지 살릴지. 양자의 경우 모든 이야기를 짜두었는데 이제 선택만이 남았군요. ㅎㅎㅎ ㅠㅠ -------------------------------------------------------------------------- 시호 나왔군요. 이 작은 야야기에서 그나마 가장 큰 악역이었던 시호. 그는 전사의 부장이자 전사와 라노의 의형제이기도 했는데요. 아란에 대한 반감이 컸던 그에게는 나일족보다는 시월족의 길을 가길 원했고 그러한 그의 행동은 결론적으로 나일족의 멸족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시호는 앞으로도 많은 등장을 하게 될테니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 ㅎㅎ |
첫댓글 ㅋㅋㅋ잠깐 이거 캐릭터 그런거여? 만화보는줄. 좋내요 재밌어요
네 ㅎㅎ 부족하게 나마 캐릭터 소개차원에서 얼굴들을 그려 봤어요 ㅎㅎㅎ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