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자의 평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그 평강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를 정결케 하고 또 보호해 주시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십자가는 저의 산성이요, 또 피할 바위입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의 성령님, 오늘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본문 주해)
1~3절 : 주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난다.
이때 제자들이 괜히 가만히 있는 소경을 편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듣지도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의 소경됨이 부모의 죄냐 자신의 죄냐고 물은 것이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틀림없이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 자기들은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니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죄의 결과가 아니다.’로 답하신다.
이 소경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적인 사건에 동원된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안 뜨고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 소경에게는 눈을 뜨는 것이 일생일대의 사건이 되겠지만 성경은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6:29)
그러니 이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4~5절 :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소경이기에 알아보지도, 알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이 소경을 보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실 일이다.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4절, KJV)
예수님이 꼭 하셔야 될 일을 지금 소경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이다.
4절의 ‘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6~12절 :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도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씻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경이 눈을 떠서 본 것은 ‘보냄을 받은 곳’인 실로암에서 씻은 후 일어났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아들을 나타낸다.
곧 아들 자신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스스로 생수의 근원이 되며 눈먼 자에게 빛을 주시는 것이다.
소경이 보게 되자, 사람들의 시시비비가 이어진다.
이에 눈을 뜬 소경은 예수라는 사람이 명한대로 하여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묵상)
팬플룻을 배우고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첫 연주를 한 것이 ‘실로암’이란 곡이었다.
평소에 그냥저냥 입으로 불렀던 복음성가였는데, 팬플룻으로 연습을 하는 동안 그 가사를 더욱 깊이 음미하게 되었다.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에 뭉클해진 것은 소경인 나를 보는 자로 치유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연주는 서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불어댄 것은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의 고백이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소경이 눈을 뜬다.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스스로 본다고 생각한 유대인들....그리고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자신들은 스스로 보는 자이므로 죄인이 아니라는 그 생각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천주교 학교를 다녔기에 따로 성경공부 시간이 있었다.
꽤 공부도 잘했고, 성실했던 내가 제일 수업 태도가 안 좋았던 시간이 바로 그 성경공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입시와는 상관없어서 안 좋았던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던 것이다.
그 시절 만들었던 ‘문집’의 한 페이지에도 그런 내 생각을 기록했었다.
그때의 그 자존심이란 것이 바로 자아숭배요, ‘죄덩어리 생각’임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빛을 보게 되고, 빛을 따라 사는 삶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 된다. 그 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접착제로 붙은 듯 인간들에게 붙어 있어, 그 어떤 것으로도 떼어낼 수 없고 씻을 수도 없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절망 가운데 있는 나를 구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나를 만나주셨다.
나는 진흙덩이를 씻어 내고 보는 자가 되었다.
무엇을 보는가?
세상을 보던 자가 주님만을 보는 자가 된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마음만 무겁게 했던 십자가, 그 십자가를 환하게 보게 되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에 대한 사랑임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억지 고생, 이를 악무는 인내가 아니라, 주님을 기꺼이 따르는 기쁨의 길이란 것을 알았다.
그것은 또한 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임을, 놀라운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 십자가 은혜를 더 깊이 누리기를 원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더 잘 받기 위해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주님과 일정 거리를 두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백날을 노래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예수님께 찰싹 붙어야 한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처럼.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하고, 순간마다 십자가에 연합된 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똑똑히 보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주님,
‘이 사람이 소경이었던 그 사람 맞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기쁨으로 듣습니다.
세상만 보던 자가 주님을 보게 됨으로
다른 세상,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찬양하며 주님 따라 살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