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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포트(Pol Pot, 1925년~1998년)
"자본주의자는 죽어주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민을 돕는 길이다."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 폴 포트 평전 517p
"숙부, 저는 숙부의 순수했던 교사 시절이 그리워요."
- 폴 포트의 형의 아들이었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한 뒤, 자살하기 전에 남긴 유서.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자 총리. 동남아시아의 독재자이자 최악의 학살자로 유명하다.
본명은 썰롯 써(សាឡុត ស). 폴 포트(Pol Pot)란 이름의 유래는 정확하게 전해져 있지 않다. 불어 Politique potentielle, 영어 Political potential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시료가 없으며, 크메르어로도 아무 의미가 없는 어구이다.
킬링필드 대학살의 주도자로 폴 포트가 집권하는 기간 동안 캄보디아의 인구는 750만 명에서 672만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당시 평균 수명은 16세까지 떨어졌다. 폴 포트는 이를 고작 3년 6개월의 집권기간 안에 이뤄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전체 인구 9명 중 1명이 죽었다니 실로 기가 막힐 뿐. 하루에 평균 630명이 죽은 것으로 2013년 기준 대한민국의 인구수로 치환하면 대략 총 540만명의 인구가 줄어들은 셈이며 하루에 4200명씩 죽어나간 것과 같다. 이는 부산광역시 인구의 1.5배보다 많은 수이며 인천광역시와 대구광역시의 인구를 더한 수에 육박한다. 이정도의 사망률을 보여주는 것은 경신대기근처럼 유례없는 기상변화가 생겨 온 국민이 기아에 빠지거나, 6.25 전쟁과 같이 전 국토가 포화에 휩싸이는 극단적인 상황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폴 포트는 1975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베일 속의 인물로서 실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폴 포트는 비밀의 유지가 혁명의 기본 원칙이라고 강조한 인물이기 때문이였다. 심지어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출생일과 본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기막히면서도 웃긴 사실은 자신이 그리도 다 죽여야 한다고 역설하던 부르주아 출신이였다는 점이다.팀킬 게다가 부농 출신이었기에 자신은 어릴 적에는 그다지 고생하지 않았다. 사실 칼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 많은 혁명가들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층에서 나왔다. 프롤레타리아 계층보다 고등교육의 기회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주의나 혁명 사상에 노출되기도 쉬웠던 것. 이 지식인들에 의해, 옛날같으면 산발적인 죽창질과 방화로 끝났을 노동자와 농민들의 분노가 말과 조직의 형태로 구체화되었고, 끝내 문화혁명이나 킬링필드처럼 거대한 규모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있다.
인간승리의 테너 폴 포츠와 헷갈리지 않도록 유의바람.
2.1. 유년 시절
폴 포트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1925년에 왕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은 썰로 써(សាឡុត ស)였다. 그는 여섯 살 때 왕립 수도원에 들어가서 약 1년 동안 교육을 받았고, 이후 6년 동안 가톨릭 계열의 학교에 다녔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프놈펜은 상인들과 베트남인 노동자들이 매우 많았던 도시였다. 그러다가 1945년에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불교 승려들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서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을 지도하는 정치 운동을 목격하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폴 포트는 전기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스탈린주의에 완전히 매료되어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는 이엥 사리, 손 센, 키우 썸펀 같은 동지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반면에 훗날 폴 포트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크메르 루즈에 의해 처형되는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는데,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폴 포트는 ‘순수 캄보디아’ 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폴 포트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이에 폴 포트는 형제인 살롯 차이를 따라 베트남인의 지도를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2.2. 공산주의 입문
공산주의에 투신한 계기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프랑스인들 때문에 망하면서 집안은 엉망이 되고 아버지가 자살했으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부유층과 외세에 대한 증오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설은 히스토리 채널에서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것으로, 폴 포트가 부유했던 집안의 후원으로 프놈펜에 유학을 가게 되고 궁중 무희였던 사촌 누이의 도움으로 왕실의 사치와 부정부패를 목격하게 되면서 이것이 공산주의와 합쳐져 부유층과 외세에 대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반외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베트남의 반불 저항 운동에 동참하며 여러가지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 동료로서 이후 크메르 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하며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수더분한 인상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이 시절은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한때 선생으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어 밀림으로 잠적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들의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인 나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인 크메르 루주(크마에 크롬-ខ្មែរក្រហម, 의미는 붉은 크메르) 창설에 기여한다. 나아가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의 크메르 루주는 듣보잡 애송이 수준으로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국왕 노로담 싸이하누 덕에 상당수 무기 지원 및 수를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미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무기 및 물자 운송로로 캄보디아가 쓰인다고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갔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 지지까지 크게 얻기 시작했다.
2.4. 쿠데타를 통한 집권
"우리는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할 것이다."
- 1975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승리연설에서 한 연설
반대로 론 놀 군부의 인기는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론 놀이 얘기하면 부하들은 졸기 시작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무능했던 상황이였고 결국 1975년 폴 포트가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을 세웠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 및 가족들은 싸그리 학살해 그냥 산가에 내다 버리게 한 다음 국가 공무원 및 군부에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시작했고 우리 식 공산주의대로 종전 소련이나 중국과 다른 강력한 사회국가를 표명했다.
이때부터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인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인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 기지가 될 것이며 인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 1984년의 폴 포트.
'모든 민중은 농경 산업에 집중할 것이며 나아가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 대중 문화 및 퇴폐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은 필요 없다' 는 원리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안경을 써도 위험 분자로 몰려 강제 수용소로 와서 종일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옥 같은 고문에 엉터리 식사, 나아가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법칙을 만들었다. 그렇게 크메르 루주는 도시인들을 모조리 농촌으로 내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들의 동료라도 죽여 버렸다.
'아무 생각하지 마라. 하는 말에 1초도 안 걸려서 무작정 답해라. 뭔가 생각하거나 답변이 늦는다면 그것은 위험한 요소이다'라면서 대답이 늦는 것만으로도 채찍질에서부터 온갖 고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아이들은 국가가 키우며 부모는 아이들과 떨어져 사회적 생산(농업)에 기여하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교육 방식을 세우면서 민중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외국어와 소수 민족의 언어 사용이 금지되고, 외국과의 무역도 단절되었다. 다만 똑같은 짓을 하고있던 오래 전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국과는 예외적으로 부분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다. 쌀과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중국으로 반출되었고, 중국에서 다량의 무기가 들어왔다. 그 무기는 잃어버린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트남과의 전쟁에 사용되었다.
2.6. 킬링필드
결국 불만이 폭발하고 시위와 반발이 이어지자 강경 방침으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방침이었다. 총알을 아끼고자 칼과 몽둥이, 그리고 그 유명한 손을 묶고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키는 방식(국가주석 키우썸펀의 아이디어)까지 동원됐다. 농민 이외에는 모두 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크메르 루주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는 이유로,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사회의 장애물로 취급해서 죽여 버렸다. 아이들을 나무에 패대기 쳐 죽이면서 나무에 스피커를 달고 혁명가를 틀어서 비명소리를 덮었다는 이야기, 유독 가시가 많은 설탕나무로 사람을 매질해서 죽였다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본주의나 외국과 관계되어 있는, 또는 관계되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개인의 사유 재산과 시장 경제는 박살이 났고 수도 프놈펜의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캄보디아의 화폐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탄으로 폭파된 후 집단 농장이 캄보디아 곳곳에 세워졌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중산층보다 잘 사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해야 할 대상이었다.
또한 손을 보고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서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학살했다. 크메르 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사람들을 생매장하거나 사람들을 우물에 넣어 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하여 죽이는 일도 있었으며 국제적인 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를 2천 명이나 학살하기도 했다.
또한 미군의 공습이 있기 때문에 2일~3일 정도만 수도에서 나가도록 도시 거주자에게 명령하여 도시인들을 지방에 있는 집단 농장에 이주시켰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환자나 나이가 많은 노인, 임산부와 노약자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으며 농장에는 링거를 꽂은 상태로 링거를 당기면서 걷는 환자와, 혼자서 출산하는 임산부들도 많았는데 그 풍경은 가히 지옥과도 같았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가족이 행방불명이 돼서 그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만 집에서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크메르 루즈는 그렇게 집에 있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집에 있으라면서 문에 쇠사슬을 묶은 채로 감금했고 물도 마시지 못해서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캄보디아 내의 기독교인 수는 약 1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9천 명 즉, 90%의 기독교도들이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에게 살해당했으며 종교적인 행동과 종교의 전파는 금지됐다. 프놈펜의 가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는 폐쇄되었으며, 수천 명의 난민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태국 국경으로 탈출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정책으로 농촌의 노동력은 어느 때보다 많았지만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아와 기근에 시달렸다. 캄보디아는 해마다 2백만 톤의 쌀을 수출하는 국가였지만, 1975~76년에는 비축한 쌀이 전혀 없었고, 1977년이 되어서야 쌀 수만 톤을 수출할 정도로 국가가 초토화되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일할 동기가 부족했으며, 집단 농장의 수확량이 예전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였다. 물론 캄보디아 국민의 삶도 무섭게 하나가 되어갔다. 모든 사람들은 검정색의 옷만을 입어야 했고 무엇을 먹고, 언제 잠을 자며, 어디에서 살고, 심지어 누구와 결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고 오직 국가만이 정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최소 10쌍을 모아서 정부 기관 주관으로 합동 결혼식 형태로 치뤄졌다. 또한 보통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생활 모임 시간엔 자아비판이 강요되었는데, 고참 지도부의 지휘하에 각자 자신이 잘못한 일과 최근에 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크메르 루주의 모든 간부들이 참여해야 했다. 이 자아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호 감시와 잘못에 대한 고발이였기 때문에 서로를 계속 경계하고 의심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폴 포트는 1978년에 크메르 루주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족끼리 개별적인 식사를 허용하고,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어도 좋다는 조치가 시행되기도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집권 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되어서 이때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엥 사리 전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은 당시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손 센 국방장관 부인 등과 함께 건물 1층에 살고 남편, 폴 포트, 이엥 사리, 키우 썸펀이 3층에 살고 있었다. 근무 장소이기도 하고 숙박 장소이기도 했다. 폴 포트는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잠자는 곳을 때때로 바꾸고는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이들에게 하루 세 번의 식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밤 이외에 반찬은 두 종류뿐이고 간부 식사도 결코 사치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식사를 나를 때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최고 간부 집단 식사뿐 아니라 외국에서 손님이 와 요리사가 요리할 때 입회하는 일도 했다. 요리사가 독을 넣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들을 노린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까지 대거 학살 및 숙청하였고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베트남 마을 두 개를 박살냈다. 이때 먼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베트남에 대한 폴 포트의 깊은 불신으로 인한 피해망상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에 분노한 베트남의 공격으로 1979년 정권이 무너지자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대며 밀림으로 들어가 산발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호랑이를 건드렸다 호랑이에게 먹힌 셈이 되어 버렸다. 미국마저 이긴 나라가 베트남인데 정권이 안 무너지는 게 이상하지 그러자 미국은 되려 베트남을 막고자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면서 이것으로 지금까지도 미국이 욕을 먹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만다.
베트남의 개입으로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잃었고 이 때 베트남의 비호 아래 괴뢰정권을 이끌고 있던 훈 센이 부각되었다. 훈 센은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수립한 캄보디아 정부에서 주요 자리들을 거친 후 1985년 32세의 나이로 총리가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폴 포트는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실제로서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부하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훈 센의 정부군과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크메르 루즈들 사이에도 내분이 심화됐다. 폴 포트는 옛날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따목 참모총장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1990년대에는 따 목이 폴 포트를 대신해서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할 정도였다.
한편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고,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 포트는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엔 사리는 1996년 숙청을 겁을 먹어서 4,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투항했는데. 폴 포트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던 중 1997년 6월 10일 밤에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 센과 은밀히 정치 교섭을 하고 있었고, 이것이 폴 포트에게 알려져 배신으로 간주되어, 폴 포트의 지시를 받고 쳐들어간 병사들이 손 센과 가족 모두를 사살한 것이다.
그러자 따목은 폴 포트가 그의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폴 포트는 모든 힘을 잃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집에 연금되었는데, 그곳은 조잡한 헛간이었다. 폴포트의 젊은 아내인 미아스와 경호원 그리고 키우 썸펀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심각한 심장병과 고혈압을 앓고 있는 데다 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고 죽기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조차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철면피 인증.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라며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어... 아직 나의 정신은 말짱하다" 고 말했으며 "75~78년의 통치 기간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게다가 폴 포트는 그밖에 정적에 대한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했고 악명 높았던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으며 아사 등을 포함한 대량 학살은 모두 베트남 측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또 지난 6월에 발생한 손 센 크메르 루주 전 국방장관 일가 살해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손 센과 그 가족만의 처단을 명령했을 뿐 어린애들까지 죽이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98년 4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머리를 검게 염색한 상태였는데, 크메르 루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중이었던 탓에 태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던 때문이라고도 하나, 따 목이 폴 포트를 태국 난민캠프를 경유해서 미국에 넘길 요량으로 위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폴 포트는 퍽 쇠약해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1998년 4월 15일 때였다고.
16일에 구금장소 이동이 예정되었었는데, 15일에는 심장마비로 자연사했다. 그러나 당시 정황이 석연치가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쥬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가 죽은 직후 미망인과 대화한 기자 네이트 테이어에 따르면, 폴 포트 본인의 부탁으로 부인이 음독 자살을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출처 링크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고, 폴 포트를 가택연금시킨 따목은 “지금은 폴 포트가 거름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시켜 버렸다.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키우 썸펀 등을 비롯한 크메루 루주들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1998년 12월 누온 찌어와 키우 썸펀은 투항했으며, 1999년 3월 따목 참모총장이 구속되고 결국 모든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체포되어 현재도 재판을 받고 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이 상반되는데 키우 썸펀 같은 여러 크메르 루주 주축들이 폴 포트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워서 희생시켰다는 설도 있고 유언도 갑자기 죽어서 유언도 못 남겼다느니,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망할 베트남 놈들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말을 하며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최근 나오는 증언들에 의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폴 포트가 연금 상태 중에 독약으로 자살한 게 거의 확실하다. 이원복의 가로세로 세계사 동남아 편에서 이런 장면을 보여주면서 옆에 있던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더 죽이고 싶어서...'라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행적을 생각하면 십분 이해되는 말이다.
3.3. 폴포트가 죽인 인구수
폴 포트의 정권 시절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정확할 수가 없다고 한다. 미국의 폭격 및 내전에서 제대로 피해자 규모도 통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교도소들은 공로를 부풀리기 위해서 위험 분자를 제거했다고 사망자를 일부러 더 많이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록으로는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베트남군이 몰려와서 해방된 수용소에서 그 순간까지 똥을 치우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처형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 죽어야 하던 죄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부자, 공무원, 승려와 목사들은 1번 처형 대상 및 정신 교육을 지옥같이 받아야 했다고 한다. 똥오줌을 먹게 하거나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지 위험 분자의 자식으로 끌려온 아이들을 맨 손으로 죽게 해야 했다고 한다. 당연히 못하면 처형. 아이들을 목 졸라 죽이고는 충격으로 미쳐 버리는 이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나아가 문화 관련자도 위험 분자로 분류되었는데 시인이나 작가들도 책을 많이 보고 별 필요도 없는 지식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게 이유였다. 심지어 위에 거론한 것처럼 안경을 썼다, 양복이 집에 있다, 불평을 한 번 했다는 신고가 들어와도 끌려갔다고 한다. 전설적인 일화로 '헤이' 라고 불러서 뒤돌아보는 이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의미이므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막판에는 심지어 글자를 안다는 이유로 죽일 정도로까지 막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이 기준대로라면 폴 포트는 0순위 사형감이지만 어째선지 폴 포트는 자진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순과 막장의 극치를 달린 인물이다.
그래도 살 사람은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지금도 나이가 든 이들도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생존왕? 그딴 것은 저리 가라 할 수준으로 열악한 식사를 먹어가며 살아남은 이들도 꽤 있다. 여행가인 이지상이 캄보디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캄보디아에서는 아직도 '수용소? 거기 간 사람이 뭐 대수야?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무덤덤하게 여길 정도로 살아나온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지상이 탄 자전거 택시기사도 '나도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을 고생하고 살아나온 사람이라오'라고 덤덤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는 자신들의 학살 및 고문을 자랑으로 여겨서 그걸 역시 끌려온 화가나 사진가들에게 생생하게 그림이나 사진을 찍어 기록하게 하는 통에 그 증거들이 생생하게 남게 되었다.
이런 수용소의 고문과 학살, 나아가 굶주림까지 겹치면서 죽은 사람은 추정될 뿐 자세한 사망자 파악은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당수 기록도 파기되었고 남은 기록도 워낙에 엉망이기 때문. 다만 현재까지 수집된 자료에 따른 추정치는 대략 70만~250만 사이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끌고가 고문하고 죽인 크메르 루주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직도 집단 행동에 나서거나 거리 시위를 벌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3.4. 남은 추종자들
캄보디아 내 소수 민족들은 폴 포트를 추앙하는 이들이 꽤 있다. 캄보디아 안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크메르 루주 시절 정치적 발언권이나 경제적 혜택을 주었기에 자발적으로 크메르 루주가 된 사례도 많았다. 그리고 축출되고도 크메르 루주가 밀림 속에서 10여 년에 이르는 내전을 벌였던 것도 이들의 지원과 지지가 컸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폴 포트가 죽어서 화장될 때 원주민들은 되려 슬피 울던 곳도 꽤 되었고 지금도 신성시하여 제사까지 지낸다고 한다.
• 프랑스에는 지금도 폴 포트의 동생 및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부터 프랑스로 망명갔다고 하는데 친척이고 형제들이라도 자신의 주장에 동참할 것에 강요하는 것을 보고 기겁하고 프랑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폴 포트가 죽을 당시 해외 언론들이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도 했었다. 다들 착잡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폴 포트의 동생은 형도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형이었던 살롯 셍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이 양반이 맨 위의 삼촌의 만행에 경악해서 자살한 조카의 아버지로, 왜 이 형이 오랫동안 알지를 못했냐면 폴 포트의 동생이 도저히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형이 충격을 받을까봐.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와 사담 후세인의 국경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후세인을 몰아 붙이는 데 성공했지만 후세인의 훼이크에 낚여 사살당하며 패배한다. 링크
• 무신론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살롯 사가 무신론에 감화되어(?)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서구권에선 아주 흔히 사용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건 히틀러나 스탈린에게도 해당되는 주장이라 서구권에서는 이뭐병 소리를 많이 듣는다. 무신론자들에게 당연히 까이는데 이 색히들은 종교를 부정해 놓곤 막상 지들을 우상화하고 군림한 것들이라 결국 유신론으로 까이는 계기가 되는 거 아니냐고 반론한다.
• 국내 체류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캄보디아인들 앞에서는 절대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를 권유한다. 실제로 어느 위키러가 캄보디아인들 앞에서 폴 포트에 대해 묻자 쌍욕을 하면서 "그 사람 캄보디아 옛날 독재자! 사람 엄청 죽였다! 조국을 파괴한 반란군 수괴!라 말하면서 캄보디아어와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온갖 비난을 했다. 한국으로 치면 광주광역시 시민들에게 전두환이야기를, 부산광역시 시민들에게 박정희이야기를, 탈북자들에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삼부자 이야기를 꺼내는 수준.
•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겠지만 되도록 폴 포츠와는 엮지 말 것. 의외로 외국에서도 간간히 행해지는 조크라는 듯. 실제로 폴 포츠를 주제로 한 영화 '원챈스'에도 폴 포트가 언급되었다.
•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밴드 데드 케네디스의 노래 Holiday In Cambodia에 '폴 포트'를 반복해서 외치는 부분이 있다. 이 노래 자체가 허세부리는 미국 대학생이나 특권 의식을 뽐내는 여피족들을, 폴 포트 정권 하의 캄보디아에서 휴일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비판하는 노래이다.